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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0 12/22 12-14면

만(卍)자 사용의 기원

‘오스트리아’ 주재 「깨어라!」 통신원 기

인도 ‘뉴우델리’에 있는 ‘레이크쉬미 마라얀’ 전 입구 위에는 하나의 상징물이 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라이’ 전에 들어가는 길 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아프리카’의 ‘아산티’인에게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같다. 그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마술의 쇠사슬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상징은 석가모니의 발자취를 묘사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그것을 문장 박힌 겉옷에다 사용하였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그것을 제 3독일 연방 공화국의 상징으로 제정하였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만자(卍)이다.

그 만자를 ‘스와스티카’(swastika)라 하는데 이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인도 불교에서는 오른쪽으로 각을 이룬 상징물을 “만”자라고 부른다. 이것의 범어(梵語)는 “스와스티”로서 “안녕의 대상”이란 의미에 기원을 두고 있다.

‘히틀러’가 그것을 처음 본 장소

‘히틀러’가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 기술한 바와 같이 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만자 기를 소개한 것은 1920년 여름이었다. 그와 그의 측근자들은 고대의 특색을 지닌 새로운 이 기에 대한 열성이 대단하였다. ‘히틀러’는 “그 기의 효과는 횃불과 같았었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어디에서 처음으로 만자를 보았는가?

‘히틀러’는 어린 시절에 이 표시를 처음으로 보았다. 당시로 소급하여 보면, 그는 상부 ‘오스트리아’의 ‘람바크’에 있는 ‘베네딕티네’ 수도원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한 동안 그는 그곳에서 성가대 소년 가수로 있었으며 1897-1898년의 겨울에는 수도원에서 살았다. 만자가 안뜰에 있는 샘이 흐르는 작은 동굴 위 벽에 조각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만자와 함께 1860년이란 일자가 있었다. 그 표시는 수도원 정문에도 있었다.

더우기, ‘람바크’ 수도원 원장 ‘데오데리히 하근’의 문장(紋章)은 “청색 바탕 위에 뾰죽 나온 끝이 구부러진 황금색 만자”였다.a

만자가 당시에 젊은 ‘히틀러’에게 감명을 주었는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Aus Adolf Hitlers Jugendland und Jugendzeit」(「‘아돌프 히틀러’의 젊은 시절과 고향」)이라는 책에서는, ‘람바크’의 ‘베네딕티네’ 수도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으로 만자와 접하게 된 곳은 이곳이었다. ··· ‘아돌프 히틀러’가 후일에 이 표시를 채택한 동기가 전혀 달랐다 하더라도, 그가 그러한 상징 아래서 소년기의 일부를 보내었던 것을 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14-16면.

‘로버트 렌크’는 그의 저서 「Oberdonau, die Heimat des Fuehrers」(「‘다뉴브’ 강의 상류지대인 총통의 고향」)에서 “성가대 소년 가수 ‘아돌프 히틀러’는 ‘람바크’의 ‘아아치’ 통로에서 처음으로 모난 표시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102면) 같은 책에서, 필자는 상부 ‘오스트리아’의 ‘무엘피르텔’의 영향력이 강한 6개의 ‘가톨릭’ 교회에 만자 상징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42면.

많은 독자들에게는 ‘히틀러’의 정치적 상징이 또한 종교적 배경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세계를 통하여 만자 사용의 부가적인 경우를 고찰함으로써, 만자의 일반적인 의미가 정치적이기 보다는 종교적임을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

처음으로 우리는 ‘베들레헴’ 안에 있는 그리스도 탄생 교회의 ‘모자이크’ 마루판에서 만자를 보게 된다. ‘조에르그 레흐레르’는 그의 저서 「Vom Hakenkreuz」(「만자에 대하여」)에서 그리스도교국에서 채택한 허다한 만자 표상을 보여 준다. 방대한 그림 재료 가운데, 하나는 독일 ‘하일리겐그라베’의 소위 “굶주린 자의 옷”(금식 혹은 사순절 옷)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그 위에서 그리스도의 겉옷이 만자들로 덮여 있다. 만자는 독일 ‘소에스트’의 ‘마리아 주르 비이제’ 교회의 제단 상보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류베크’에 있는 주교 ‘복홀트’의 청동 기념비와 ‘마인즈’와 ‘할베르쉬타트’와 ‘에르푸르트’ 주교 ‘하인리히’(기원 1140-1150)의 ‘가톨릭’ 교구의 중세적인 주화에서도 볼 수 있다.

‘달비’(‘스웨덴’ 남부)에 있는 교회에 걸려 있는 한 그림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양이 단순한 십자가가 아니라 만자를 지니고 있다. 또한 ‘덴마아크’, ‘우터슬레브’ 교회의 종 주조물에도 만자가 들어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국의 이러한 교회와 교직자들은 어디에서 이 표시를 빌려왔는가? 다른 많은 상징물의 경우와 같이 만자도 이교에서 채택하였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표시의 사용을 배척하였다. 이것이 한 때 이러한 말로 표시되었다. “더우기 우리는 십자가들을 숭배하지도 않으며 그것에게 소원을 빌지도 않는다. 참으로 목신들을 신성하게 한 당신들은 당신들의 신들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들을 숭배한다. 당신들의 영내에서 기치와 기는 물론이지만 또한 군기로서 금박을 입히고 장식한 것은 어떠한가? 당신들의 전승기념비는 단순한 십자가의 외모를 모방한 것만이 아니라 또 그것에다 한 사람의 남자를 첨부하였다.”—「The Octavius of Minucius Felix」, Chap. 29, 「The Ante Nicene Fathers」, 제4권 191면.

그러므로 만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교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고대의 상징물은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다산과 생명의 상징

‘다뉴브’ 강 하류 지역에서 (‘루마니아 시벤부에르겐’) 만자의 표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만자는 소‘아시아’의 고대 도시 ‘트로이’에서도 발굴되었다.

‘트로이’와 ‘루마니아’에서 만자가 나타난 같은 문화기에 다산의 제식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우상이 두각을 나타낸다. 이 우상들은 근동과 중동에서 발견된 것들과 흔히 거의 동일하다. ‘트로이’에서 발견된 여자 상에 만자를 넣은 양식은 다산과 생명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더우기, 희랍 ‘마세네’의 해자 무덤에서 값진 황금 보석에서 만자기 발견된다. 또한 그것이 주화에도 나타난다. ‘아덴’ 사람의 항아리에 그린 장례식 장면에는, 세개의 만자들이 영구마차를 끄는 말 위에 표시되어 있다. 무덤에서 발견된 다산의 여신들은 목과 가슴에 만자의 상징을 달고 있다. 정교한 장식을 한 석관 위에, 후일에 ‘아테미’ 여신으로 알려진 “생명의 여신”이 있는데 그 여신이 만자로 에워싸여 있다. 또한 그 여신은 연꽃과 관련되어 있는 것같이 보이며, 고대 희랍의 사랑의 여신, ‘로마’인들은 ‘비너스’라고 부른 여신 ‘아프로디테’의 옷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므로, ‘트로이’와 ‘에에게’ 지역에서의 상징물에서는 만자는 다산과 생명의 사상을 전달하여 주는 것이었다.

만자의 발상지

1931년에 남‘아시아’의 ‘인더스’ 강 유역 문명과 관련을 가진 발굴물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에서 고등하게 발달하였던 문명의 유물을 발굴하였는데, 이 문명의 전성기는 서력 기원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다. 분명히 종교적인 상징을 특징지은 도장들이 발견되었는데 어떤 것은 만자의 묘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발굴된 도장들은 기원전 제 3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고학자 ‘브이. 고르돈 차일드’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굴한 만자에 대하여 말한 것은 흥미있다. “일반적으로 도장과 장식판에 있는 만자와 십자가는 선사시대 초기의 ‘바벨론’과 ‘엘람’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종교적이거나 마술적 상징이었다.”—‘브이. 고르든 차일드’ 저 「New Light on the Most Ancient East」 184, 185면.

그래서 이 만자의 기원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다. ‘티그리스’ 강이 있는 ‘바그다드’의 북쪽, ‘사마라’와 ‘수사’ 혹은 ‘수산’의 초기 정착지에서의 만자 발견물은 (느헤미야 1:1; 에스더 1:2)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 전에 상징의 기원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렇다. 만자는 ‘바벨론’의 고대 종교의 중심지까지 소급한다.

그러므로, 만자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만자가 종교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20세기에 와서 그것이 또한 정치적 상징물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적 상징으로 그것을 처음 채택한 사람이 한 성원으로 있던 교회를 통하여 그는 이 표시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치적 권력을 잡았을 때에, 동일한 교회는 그와 정교조약을 체결하였으며 그의 군대가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 교회의 교직자들은 그의 군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각주]

a ‘게오르게 그루엘’ 저 Die Wappen des Benediktiner-Klosters Lambach und seiner Aebte, 20, 23면.

[12면 삽화]

‘람바크’ 수도원장 ‘하근’의 문장에서

[13면 삽화]

‘수사’에서 출토된 토기에 있는 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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