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73 9/22 6-9면
  • 대다수가 굶주리는 이유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대다수가 굶주리는 이유
  • 깨어라!—1973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예측할 수 없는 일기가 식량 부족을 더욱 악화시키다
  • 공학이 식량 부족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다
  • 정치와 굶주림
  • 종교와 굶주림
  • 영양 실조의 영향
  • 현대의 식량 부족—성서 예언의 성취인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4
  • 사람들은 묻는다: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
    깨어라!—1973
  • 대풍작, 하지만 식량은 부족하다—그 이유는?
    깨어라!—1974
  • 풍요 속의 굶주림—그 이유는?
    깨어라!—1985
더 보기
깨어라!—1973
깨73 9/22 6-9면

대다수가 굶주리는 이유

“매일 거의 이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눈을 뜨면 유일한 욕망 ··· 먹을 것이라는 욕망이 판을 칠 세상을 대하게 된다”라고 해외 개발회의의 ‘엘. 알. 브라운’은 말하였다. 무수한 사람들은 더 많은 식량 혹은 더 좋은 식량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결핍에 대하여 우리는 지구를 탓할 것인가?

아니다, 지구는 현재 그 위에 살고 있는 37억명보다도 수십억명을 더 지탱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권위자들은 최근 수십년간 사용되어온 것보다 두배나 되는 땅을 개간하여 경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측할 수 없는 일기가 식량 부족을 더욱 악화시키다

그러나 훌륭한 토지에서 올 수 있는 수확량을 격감시킬 수 있는 한 가지 주요 요인은 일기이다. 「뉴스위크」 기사는 “아직도 변덕스러운 일기에 대한 답을 발견치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기근 상태는 한발 때문에 생겼다. 1972년도의 장마비는 인도의 여름 곡식에 유익하기에는 너무 제한되었거나 너무 늦었었다. 「방글라데쉬」의 강우량은 성장기에 평년의 40‘퍼센트’였던 것이다. 일기의 불순은 또한 ‘필리핀’의 생산량에 위험스런 영향을 끼쳤다. 북부에서는 쌀이 세기 최악의 홍수로 인하여 망쳐졌는가 하면 남부에서는 곡식 수확이 한발로 인하여 줄어들었던 것이다.

또 한편 ‘러시아’에서는 겨울에 약간의 눈밖에 내리지 않아 과거 2년간 많은 곡식 손실을 당하였고, 그래서 남은 곡식은 서리로 타격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비단 한발과 홍수와 서리뿐이 아니고 폭풍과 우박과 곤충이 그들의 많은 곡식을 짓밟았다고 신화사 통신은 말한다. 세계의 현 식량 위기는 자연의 요소 앞에서의 인간의 연약함을 실제로 깨우쳐 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일기의 불확실성은 “녹색 혁명”의 효율성을 크게 삭감시켰다. 하지만 “녹색 혁명”의 제한된 성공마저도 위축되지 않을까하고 염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넓은 지역에다 단일 곡식을 심을 때 단일 식물은 황폐시키는 질병에 공격을 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흡사하게, 한 가지 곡식만을 잘 먹는 해충이 모든 곡식을 일소할 수도 있다. 사실 ‘파키스탄’의 한 지방에는 “새로운 기적의 밀은 새로운 기적의 며뚜기를 일으켰다!”는 농담이 생겼다.

공학이 식량 부족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다

자연의 요소를 조절한다는 것이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공학은 어떠한가? 공학이 가치있는 기술과 기구들을 발전시켜 오기는 하였지만, 또한 현 식량 부족을 많이 조장하였다. ‘도시 확장’은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많은 좋은 농토를 게걸스럽게 삼켜버린다. 산업의 오염과 상업적 비료들은 무한한 농토의 생산력을 크게 감소시켜 왔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많은 농업 연구는 “현금 곡식”에 중점을 두고 있지, 보다 가난한 국가들의 실제 식량에 대하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바이오 싸이언스」지의 한 기사는 세계의 식량 문제가 주로 지속적인 곳은 열대 지방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는 열대 지방의 곡물이 아니라 온대 지방의 곡물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공학은 전체적 식량 부족을 해결치 못하고 있다. 사실상 어떤 면으로는 그것이 현 위기를 부채질 해 왔다. 사람이 만드는 다른 요인들도 마찬가지로 식량 부족을 심각하게 일층 더 악화시켜 온 것이다.

정치와 굶주림

인간의 정치적 전쟁—‘자연의 원인’이 아닌—탓으로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쉬’와 같은 곳에서 지금 당장 식량 부족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업 제도와 곡물 및 물의 공급 뿐만 아니고 견인용 동물들도 전쟁으로 파멸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처럼 식량 폭동과 약탈이 자행되는 일이 있었다. 다리를 지키는 군인들은 그 도시로 곡물을 반입하는 ‘트럭’에 “암 세금”(闇税金)을 부가하여 식량 가격을 배나 오르게 하였으며, ‘캄보디아’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삼배나 뛰어 올랐다.

‘방글라데쉬’에서는 지뢰라든가 침몰된 선박들로 봉쇄된 지역으로 식량이 들어갈 수 없으며, 그 나라의 많은 다리들은 아직도 사용 불능이다. 지난 10월 중 대 ‘방글라데쉬’ 구호 기금 1,000,000,000‘달라’ 중 삼분지 일만이 식량을 위해 사용되었다. 잔액은 국가 교통과 통신 제도를 회복시키는 데 필요하였다.

정치 제도 자체가 왕왕 기근과의 투쟁의 효과를 좌절시킨다. 「뉴스위크」지의 기사에 유의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관료주의가 문제이다. 압스 아살 아살 바팍 쎄낭(아버지만 행복하시다면)이라고 불리우는 전형적 ‘인도네시아’ 제도 하에서, 농업 관리들은 비단 ‘수하르트’ 대통령에게 생산량의 차질에 대한 좋지않은 소식을 전달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부 보유미를 증가시키지도 못하였다.”

유사하게도, 인도 ‘봄베이’의 「주간 정치 경제」지는 이렇게 시인한다.

“지금까지의 체제는 그렇구 그런 것이다; 즉 고분고분한 관리들은 하급 상관들이 듣고싶어하는 말을 해주고 하급 상관들은 고관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는 그런 식으로 해서 그 연쇄 고리는 수상에게 가서 끝난다.”

종교와 굶주림

종교도 왕왕 식량 문제를 부채질한다. 예를 들어 보자.

인도 ‘비하’ 주의 ‘나즈리차우크’ 마을에는 일흔 세 사람이 살고 있다. 그곳 토지는 “좋다”고 묘사되어 있다. 한거름 나아가서 1967년의 마지막 한발이 있은 후 효과적인 관개 계통이 이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관개 계통을 움직이는 ‘디젤 폼푸’는 흠뻑 녹이 쓸었으며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폼푸’를 고칠 수 있다. 그러면 왜 그것을 고치지 않은 채 방치하는가? 「자연 역사」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문제는 이렇다. 필요한 공사를 하는데는 집단적 노력이 요구된다. 황소가 끄는 수차가 물의 배당과 재정과 노동과 같은 문제에 의견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처럼 빈틈없는 계획을 발전시키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통적인 필요성도 종교와 계급 및 정치로 나뉜 공동 사회를 거의 통일하지 못한다. ··· 작고도 계급 의식으로 굳은 수 많은 정당들이 온 주(州)에 걸쳐서 활동적이며, 그들의 활동은 더 나아가서 마을을 세분하는 것이다. 공동 사회가 되기는커녕 왕왕 한 마을이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계급 계열에 따라 갈기갈기 찢겨진, 적의를 품은 여러 파로 붕괴한다.”—1973년 1월호 34, 35면.

그렇다, 사람은 종교와 기타 사회적 이유 때문에 굶주린다. 그러나 어떤 종교들이 식량 문제를 불리하게 하는 영향을 끼치는 다른 면이 있다.

어떤 종교들은 작은 식구를 이루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더 많은 출산은 먹어야 할 입들이 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만 하더라도 인구가 이미 5억 5천만명이나 된다. 해마다 그 나라는 1천 2백만 내지 1천 3백만명이 증가한다. 그것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전 인구에 맞먹는다! 인도 정부가 작은 식구를 갖도록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는 하나 그 성공은 제한을 받아 왔다.—바로 종교에 의해서.

초점이 된 한 경우에서 처럼, 최근의 수자는 지난 십년간에 ‘힌두’교인들은 단지 24‘퍼센트’ 증가한 데 반해, ‘모슬렘’ 성원 수는 31‘퍼센트’ 올라갔다. 이것을 알게 되자 ‘힌두’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봄베이’의 기자 ‘에이. 에스. 에이브라함’은 말한다. 그들은 “시간을 놓치지 않고 그들의 나라에서 소수파가 될까 두려워 ‘힌두’교인들에게 가족 계획을 하지 말 것을 되푸리 호소하는데 이 통계 수자를 버팀벽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힌두’교인들이 인구의 82‘퍼센트’를 구성하며, 한편 ‘모슬렘’ 교도들은 대충 12‘퍼센트’를 헤아린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종교 지도자들은 인구 통제에 대한 정부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데 크게 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기꺼이 종교 지도자들의 소망에 응해 준다. 왜 그런가? 그들에게 자녀란 부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부들은 ‘염소를 돌보는 데’ 자녀들을 사용한다. 부모들은 또한 그들의 노후에 자기들을 돌볼 자녀들을 원한다. 많은 ‘아시아’의 자녀들은 어려서 죽는다. 그래서 부모들은, 후손을 많이 가질수록 부모의 노후까지 그들 중의 얼마가 살아 남을 심산이 더 클 것이라는 궁리를 한다.

정부의 산아 제한 계획에 대한 반대는 ‘동양의 종교들’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국도 팽팽한 반대의 근원이 되어 있다.

1930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의 회칙 ‘카스티콘 누비’에서 산아 제한에 대한 공식 ‘가톨릭’ 입장을 요약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산아 제한법이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법에 반대되는 반칙이며, 그런 일에 빠진 사람들은 중대한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교황들은 그 이후로는 이 믿음을 재확인해 왔다.

현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10월 국제 연합 청중에게 “인공적 산아 제한은 불합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1968년 7월에 그는 그 문제에 관한 ‘휴마네 뷔테’라는 자신의 회칙을 발표했다. 1970년 중반까지 꼭 2년후에 남미의 ‘가톨릭’ 인구는 다른 1천만명이 증가되었는데 ‘볼리비아’ 전 국가에 사는 사람의 수의 거의 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944년 이래로 1인당 식량 생산량은 세계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더 감소해 왔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이 말한 진리를 알아 차려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 전 5:8) 가족 성원을 얼마나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개인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이 너무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도록 격려를 받아 그들을 “돌아 보지” 못해서 굶주리게 해야 할 것인가? 분명히 그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몇몇 세계 최대의 종교들은 지구 팽창 일로에 있는 인구와 식량 위기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한다.

기근 상태를 조장하는 그 외의 요인들, ‘부한 나라’의 사람들로서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는 요인들이 더 있다.

영양 실조의 영향

이것들 중의 한가지가 육체에 미치는 영양 실조의 악한 영향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서는 식량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들은 질병에 걸리기 일쑤이다. 빈약한 식사로는 자연적 면역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양 실조로 다리가 여위어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논밭에서 얼마나 힘든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정신적으로도 사람들은 영양 실조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어떤 나라를 방문한 사람에게 그곳이 ‘조용’한 것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빈약한 식사에서 오는 피곤함과 목적없음과 자기 만족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작가 ‘흡크라프트’는 「굶주림으로의 탄생」이라는 그의 책에서 한 나라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린애들에게 장난기가 거의 없음을 봤다. 어떤 장난도 거의 하지 않았다. 자녀들의 전반적인 연약함과 활발치 못함은 일상 생활 중 한가지의 가장 애처로운 면이다.” 기가 꺾였으며 풀이 죽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의 충분한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도전에 활기있는 도전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을 받게 마련인 것이다.

전혀 다른 문명 중에서 뒤진 사람들은 보다 부한 나라 사람들과는 일반적으로 달리 생각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뒤졌다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불행히도 그 부한 나라 사람들은 혹 깨닫지 못하는 수가 있다. 하지만 세계 식량 문제 해결에 나섰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외국의 토착민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들의 효율성을 제한한다. 이것은 세계가 아직도 식량 위기를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코넬 대학교’의 ‘에이취. 디. 더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동등한 사람들로 그리고 동역자들로 대우하는 능력은 때때로 그 사람의 과학 지식보다 더 중요한 수가 있다. ··· 가장 가난한 농부와 노동자에게도 때때로 큰 자부심과 인간의 존엄성이 있는 법이다. 극히 조금이라도 못났다는 암시는 원망을 받을 것이며 그 사람은 모든 장래 사업을 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의 국제적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겸허가 용이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식량 부족은 단순한 토지와 기후의 올바른 결합보다 훨씬 더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치, 공학 및 종교 활동들과 사회적 태도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고려의 결핍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그 문제를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이 복잡하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역설적인 세계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잠간 생각해 보라. 인간은 이제 광대한 관개와 저장법을 사용하여 풍부한 곡식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빈틈없는 농업 기술을 가르칠 학교들이 있다. 광대한 지역을 경작할 수 있는 인상적인 농기구들이 있다. 어떤 국제 식량 농업 기구는 도처의 식량 상태를 사람들에게 계속 알려주며, 빠른 통신은 보급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통지하여 준다. 신속한 운송 체제는 필요한 곳으로 식량을 급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림 때문에 매일 무수한 사람들이 여전히 죽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이 역설적 상태가 존재하는가?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꼭같이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 식량 위기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이 있는가?

[7면 삽화]

일기 불순과 여타의 문제들이 “녹색 혁명”의 효율성을 크게 삭감시켜 왔다

[8면 삽화]

뛰어난 종교의 지도자들은 심지어 빈곤한 나라에서도 대식구를 격려한다!

‘힌두교인들은 소수파가 되어서는 안된다.’—인도의 힌두교 지도자들

‘산아 제한은 합리적이 아니다’—교황 ‘바오로 6세’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사나?’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