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절망적인 미래, 찬란한 미래
선택하기 전에 지식을 얻으라
많은 사람들이 회피하려는 사실: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것 또는 희망을 버리는 것
과학자들은 팽창하는 우주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점점 어두워지고 모든 생명이 종식될 것이라고, 혹은 우주가 스스로 붕괴하여 모든 생명이 종식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과학자 ‘피콕크’는 “그러므로 과학은 ‘희망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답해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에는 말살될 것이 확실한 우주 내에서의 인간 생명의 궁극적 의의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존재가 진화로 인한 것이라고 하고 하나님과 성서 및 도덕적 제한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인생에 있을 수 있는 어떤 목적과 의의도 없어지게 된다. 우리는 개미와 코끼리, 벌레들과 바랭이, 바퀴벌레와 고양이들과 형제가 되는 것이다. 개미나 바랭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또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에게서 의의를 빼앗아간 진화론자들은 우리의 인생을 의의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낀다. 많은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저서를 끝맺는 말로, 지금부터 수백만년에 걸려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눈부신 위관의 극치를 안겨 줄 진화 사다리의 한 다리가 되는데 참여하는 영광에 관해 맥없는 무의미한 말을 한다.
진화론자들의 무의미한 철학적 해석들
‘밀리컨’ 교수는 인간이 미래의 극점에 이르는 진화의 오르막 길에 참여하는 데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엄청난 감정적 매력”에 대해 허풍을 친다. 유전학자 ‘허만 물러’는 우리를 위협하는 생물학적 ‘아마겟돈’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겁을 내지만, 여전히 돌연변이가 우리를 “전혀 예상외의 극치”로 진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음식이 맛이 있는가 알아 보려면 맛을 보아야 하는데, 진화론자는 자기에게 돌연변이가 일어나게 하여 그것을 맛보려 하지 않는다. ‘도브찬스키’는 진화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희망과 품위와 인생의 의의를 부여한다고 말하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진화는 희망을 준다.”
그러한 무의미한 말로 위안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리반’은 「과학의 한계」에서 정확하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종교적인 충동은 인생에 심오한 의의가 있다는 신념보다 못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149, 150면) 우리의 결국이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라면, 참으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부터 수백만년 후의 우리의 가상 후손들에게도 결말을 의미한다면, 그들의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진화론자들은 무의미한 철학적 해석으로 신에 대한 선천적인 필요를 억누르려고 암중모색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내던진 종교적 버팀대를 대신할 새로운 버팀대를 다듬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희망을 두든지 아니면 희망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회피한다.
성서적 희망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희망을 주시는가? 그분은 땅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영원한 낙원이 되어 순종하는 인류가 영원히 거하도록 지으셨다. (전도 1:4; 이사야 45:18) 사람들은 좋은 시계, 아름다운 건물들, 정교한 정원들을 단순히 파괴하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 또한 땅과 그 위의 모든 생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도 좌절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내게는 목적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반드시 이룰 것이다”고 말씀하신다.—이사야 46:11, 「미국역」.
땅에 대한 그분의 관심을 지금 땅을 오염시키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그분의 선언에서 볼 수 있다. (계시 11:18) 그리스도 예수 하의 하나님의 왕국은 계시록 21:3, 4절에 묘사된 다음과 같은 상태를 가져다 줄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진화론의 “희망”은 절망적이다. 그 희망이란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다. 성서가 주는 희망은 지상 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찬란한 미래다. 선택은 각자가 해야 한다. 선택하기 전에, 충분한 지식을 얻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