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이후의 세계
제 1부: 1920-1928 광란의 20년대—폭풍 전야의 정적
본지는 1983년 12월 15일호부터 1984년 1월 15일호까지, 제 1차 세계 대전을 다룬 세번의 연속 기사를 발행했다. 이번에는 그 전쟁 이후로 발생한 얼마의 주요 사건을 여덟 번의 연속 기사로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왔으며,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의미 심장한 일이다. ‘1914년 이후의 세계’ 기사를 독자도 즐기게 되리라 확신하며, 다음에 그 제 1부를 싣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들이 현대 역사의 전환점을 목격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고 역사가 한스 콘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면 전쟁인 제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에 관하여 말한다. 심지어 그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전세계 사람의 정신에 일어난 극심한 변혁을 의식하거나, 국가 및 국제 사회가 재구성되면서 이러한 변혁이 하루아침에 나타날 것을 의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처럼 의식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찌되었건, 1910년대는 그처럼 인상적인 특징을 남기고 막을 고한 듯했다.
그 전쟁은 1919년에 열린 ‘파리 평화 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정식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이 회의 결과로 세계를 평화로 연합시키기 위한 ‘국제 연맹’이 창설되지 않았는가? ‘국제 연맹’이 1920년 1월 16일에 정식으로 출범함에 따라, 이제는 또 하나의 세계 대전을 면할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게 되지 않았는가?
광란의 20년대—적합한 명칭
바람난 90년대(1890년대를 일컬은 명칭)라고 불린 태평스러운 세상은 1914년에 시작된 세계적인 악몽으로 마침내 끝이 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악몽을 잊으려 했다. 특히 유럽은 정치적 혼란 상태와 경제 파국으로 얼룩졌다. 역사가 R. B. 그루버의 말대로 “많은 젊은이는 연장자들에게서 강요받은, 무의미한 전쟁에서 살아 남았음을 자각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젊은이들은 구세대의 가치관을 몹시 미심쩍게 여기기 시작했다. ··· 그들은 물질적 성공과 신체적 안락에 몰입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어떠했는가? “대다수의 미국인은, 상품과 재산의 가치가 한없이 늘어날 것이며 오늘 무언가를 사 놓으면 내일은 이득을 남기고 팔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이발사나 속기사 및 승강기 조종원까지도 호황기에 주식 투자로 한몫 잡을 정도였다.”
그 시대의 희희낙락하는 물질주의적인 영은 유럽과 미국의 도덕과 생활 태도 및 음악에 반영되었는데, 이 점에 관하여 그루버의 말을 빌면, “1920년대의 대중 음악 역시 전통의 거부를 표출하고 자발적 행위와 개인주의 및 호색을 새로이 강조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20세기 음악에 기여한, 재즈가 유행하게 되었다. 재즈는 “제한이나,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멸시하는 세대를 표방한 음악”이었다. 오래도록 인정된 행동 규범과 가치 기준이 배척되는 것을 보고서, 저술가 F.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1920년대를 재즈 시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재즈가 세계적으로 신속히 받아들여지면서, 그 음악이 표방한 쾌락주의적인 태도 역시 신속히 받아들여졌다.
전후의 이 시기를 ‘광란의 20년대’라고 제일 먼저 칭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명칭이 적합하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광란”(roaring)이라는 말의 한 가지 정의는 “특히 일시적으로 ··· 현저히 번창하는 것”이다. 이 말은 1920년대에 꼭 들어맞는다. 이 기간의 특징은 눈에 띄게 번창하는 것과 무절제한 쾌락, 부, 만족의 추구였다. 그러나 1920년대가 저물기 오래 전에 이 “좋은 시절”이 일시적인 성격을 띤 것임을 알리는 위험스런 조짐이 있었다.
정치적 긴장의 암운이 감돌다
1920년대 전체에 걸쳐 ‘국제 연맹’은 평화 수호라는 달성하기 어려운 일을 위해 힘썼다. 이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현대사 교수인 게르하르트 슐츠는 이렇게 설명한다. “평화를 위한 시초의 정치적, 도덕적, 경제적 부담은 1차 대전 이후에도 국가주의가 살아남고 실상 다시 불붙여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더욱 힘겨운 것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 지도 아래 파시즘의 형태로 국가주의가 불붙은 한편, 일본에서는 증가된 군부 영향력의 형태로 국가주의가 불붙었다. 공산주의는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에 있은 혁명으로 그 세력을 규합한 이후, 중국에도 침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국가주의는 ‘국제 연맹’의 취지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본래 조롱조의 별명인 “나치스”로 후에 알려진 국가 사회당이 득세하고 있었다. 1928년에 그들의 뽐내기 좋아하는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국가주의의 불을 붙이겠다고 서슴없이 말하면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 국민은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국제주의의 혼란 속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신중하고도 체계적으로 열렬한 국가주의를 배워야 한다. ··· 세상에서 권리란 하나밖에 없는데, 이 권리는 자신의 힘에 달려 있다.”
미국의 경우 국가주의는 고립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은 유럽이 자업 자득으로 괴로와하도록 내버려 두기를 원했다. 또한 그들은 혹자가 “허울 좋은 흉물”이라 일컬은 ‘국제 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 윌슨 대통령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시대적으로 팽만한 영에 부응하여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않기로 1920년에 투표로 가결하였다.
이같은 정치적 긴장의 암운이 감도는 가운데 숨겨진 본질적인 위험성은, 그 대부분이 주목되지 않거나 단순히 무시됨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그렇지만, 그 위험성은 이전에 겪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무시무시하고 파멸적인 폭풍의 발원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변화의 거센 바람
위협적인 정치적 암운은 사회적 변화의 거센 바람을 몰고 왔다. 생활 태도와 표준이 변하면서 사람들은 그때까지 몰랐던 소비 시장 속에 말려들어 갔다. 처음으로, 자동차나 라디오 및 냉장고와 같은 현대식 이기를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히 생산할 수 있었다. 판매를 촉진시키고자 광고 산업은 억대의 사업으로 급성장했다. 이러한 광고는 편리한 신용 카드와 할부 구매를 낳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는데도, 어쩌면 원하지 않는데도, 또 그것을 살 만한 돈이 없는데도 물건을 사도록 강하게 설득당했다.a 라디오는 광고의 목적을 달성하는 강력한 매체였으므로, 따라서 최대한 이용되었다.
이용할 수 있게 된 최신 개발품 덕분에 시간과 에너지가 절약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이 다 고맙게 여겨지진 않았다. 이러한 것 때문에 생겨난 게으르고 나태하며 버릇없는 성향을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로서, 한 연로한 부인은 식품점에 썰어진 빵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고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 부인은, “자기가 먹을 빵을 썰 수 없을 만큼 게으르다니, 도대체 세상이 어찌되고 있는게야”하고 투덜거렸다. 그 부인이 오늘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상황은 실제로 이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광고업계가 그토록 눈길을 끌게 만든 물품들을 신속히 구입하게 되자, 사람들은 서서히 영적인 필요와 가치 기준에서 눈을 돌려 물질적인 것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기성 종교는 필요한 영적인 지침을 오랫동안 공급하지 못해 왔고, 하나님을 등지는 이러한 추세를 막는 데 무기력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인간의 이론과 철학을 장려하였다. 이를테면, 그루버의 말대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새로운 정신 분석학은 자신과 자신의 경험에 극도로 관심을 가진 세대를 매료시켰다.”
다윈의 진화론 역시 하나님과 성서에 대한 믿음을 침식시키는 일을 거들었다. 진화론이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은, 「세계 대전들 사이의 유럽」(Europa Zwischen den Kriegen)이라는 책이 지적하듯, 결코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책은 히틀러를 가리켜, 적자 생존을 자연의 법칙으로 굳게 신봉한 “순수 사회적 다윈주의자”라고 했다. 그 책의 저자인 헤르만 그라믈은 설명하기를, “히틀러는 전쟁이란 것을 자국민을 강화시키는 데 필수적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 교류 형태로 보았고, 참다운 정치가라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재삼 재사 노력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회적 변화의 거센 바람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라디오와 같은 신과학 기술을 활용하여 창조주를 옹호하고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점은 라디오를 오로지 이기적으로 상업적 이득을 추구하는 데만 사용한 사람들과 뚜렷하게 대조가 되는 점이다. 1924년에 ‘워치 타워 협회’와 연합한 일단의 그리스도인은 뉴욕시 최초의 비상업 라디오 방송국인 WBBR을 개설했다. 그들은 이 방송국을 그 목적한 바 대로 하나님의 왕국의 권익을 위해 30여 년간 사용한 뒤 1957년에 매각하였다.
광란의 20년대와 “울부짖는 사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과장하고 ···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광란의 20년대를 묘사하는 말인가? 그렇다.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이 그 말을 거의 2,000년 전에 쓰기는 했지만 그러하다. 여기에 언급된 인간의 약함이, 돈 지향적이고 쾌락에 몰두하면서 영적으로 약해 빠진 사회인 ‘광란의 20년대’에 더욱 뚜렷해진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세계는 바울이 말한 기간인 “마지막 날”에 접어들었음이 명명 백백하다. 그리고 또한 ‘울부짖는 사자같은 마귀’가, 사람들이 창조주를 등지도록 가일층 활개를 치고 있음이 분명하다.—II 디모데 3:1-5, 새번역; 베드로 전 5:8, 현대인의 성경 참조.
이와 맞서서, ‘워치 타워 협회’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참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 활동을 증가시켰다. 1922년에 그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왕국을 공표하고자 광고 운동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1927년에는 성서 출판물을 인쇄하려고 브루클린에 자체 공장을 건축하였다. “광고자”의 수가 적기는 하였지만, ‘광란의 20년대’가 끝나갈 무렵인 1928년에 그들 44,080명은 전세계 32개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고 있었다. “울부짖는 사자”는 이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소식은 어디서나 똑같았다. 즉 물질주의나 인간 이론, 혹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국제 연맹’과 같은 정치 구상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파수대」(영문)1926년 7월 15일호에서는 ‘국제 연맹’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임을 담대히 선포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교직자들은 ‘국제 연맹’을 메시야 왕국의 대용물로 승인함으로써, 세계 만민을 엄청난 무지 가운데 있게 하였다. ··· 주님은 ‘국제 연맹’의 출범과 그 짧은 존속 및 영원한 종말을 예언하셨다.—계시 17:10, 11; 이사야 8:9, 10.”
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날이 급속히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먼저 ‘광란의 20년대’는 또 다른 폭풍 곧 예기치 않게 갑자기 몰아닥친 경제적 폭풍이 시작되면서 종막을 고해야 했다. 한편 이 폭풍은 “전쟁”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준 정치적 폭풍의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다음 호 「깰 때이다」에서 이어지는 제 2부, “세계 대공황 그리고 다시 감도는 전운”을 읽어 보도록 하자.
[각주]
a 반세기가 지난 후에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학자인 대니얼 벨은 그 점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가장 영악스런 발명품 중 하나는 할부 구매였다. ··· 열심히 일한 뒤에 물건을 사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제는 신용 카드를 사용하여 순식간에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4면 네모]
그외의 뉴스 거리
1919년—네덜란드, 스웨덴, 스페인,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프랑스가 1일 여덟 시간 근무 채택
1920년—인도의 모한다스 간디가 비폭력 저항 운동의 지지를 얻음
미국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음(1893년에 시행한 뉴질랜드를 포함하여 적어도 13개국은 이미 시행했음)
1921년—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 발견
아일랜드가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로 분할
1922년—‘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정식 결성
1923년—동경 지진으로 십만여명 사망
1924년—포드 자동차, 디트로이트 일관 작업에서 천만대째 생산; T형 포드 자동차 미화 300달러 미만으로 판매
1925년—영국, 독일, 미국에서 최초로 텔레비전 시도
1926년—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발사 성공, 로켓이 2.5초 동안 56미터 비행
1927년—찰스 린드버그가 뉴욕에서 파리까지 최초로 무착륙 단독 비행
벨기에 천문학자 조르주 르메트르가 팽창하는 우주의 대폭발설 발표
할리우드에서 최초로 발성 영화 제작
1928년—페니실린 발견
월트 디즈니의 최초의 미키 마우스 영화
킹즈포드 스미스가 동료들과 함께 최초로 태평양 횡단 비행
[13면 삽화]
‘광란의 20년대’의 특징이 된 들뜬 분위기와 자유 분방한 놀이
[자료 제공]
The Bettmann Archive
[15면 삽화]
‘워치 타워 협회’ 회장 J. F. 러더퍼드는 1922년부터 라디오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