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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20부: 19세기 이후—회복이 임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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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20부: 19세기 이후—회복이 임박하다!
  • 깨어라!—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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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9
깨89 11/1 17-21면

과거로 비추어 본 종교의 장래

제 20부: 19세기 이후—회복이 임박하다!

“하나님의 빛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 자신의 촛불을 끄는 것이다.”—토머스 풀러, 영국의 의사이자 저술가 (1654-1734년)

십구 세기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초기 몇 세기 및 종교 개혁 시대에 버금가는, 매우 활기에 넘친 시대로 불려 왔다. 종교적 자각과 활동이 그와 같이 증가한 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가 있다.

저술가인 케니스 S. 래토렛은 열 세 가지 관련 요소를 열거하는데, 그중 일부는 본지의 이전 호에서 다룬 바 있다. “인간 사회가 그처럼 짧은 시간에, 그처럼 극심하게 그리고 그와 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변한 적은 이전에 결코 없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미국에서는 종교의 부흥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세기초에는 교회 신자 수가 인구의 10퍼센트 미만이던 것이 19세기말에는 거의 40퍼센트로 증가하였다. 주일 학교—1780년에 영국에서 시작—가 더 널리 보급되었다. 그렇게 보급된 한 가지 이유는,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정책으로 공립 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특정 교파의 대학 및 여러 교파로 구성된 성서 협회가 많이 설립되었는데, 19세기 전반에 적어도 25개의 신학교가 미국에 설립되었다.

한편, 전세계적인 규모로, 프로테스탄트교가 선교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제화공이자 교사인 윌리엄 캐리는 1792년에 「이교도 개종의 수단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의무에 관한 고찰」(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책을 발행함으로써 선두에 나섰다. 캐리와 그의 동료들은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 성서의 전체 혹은 부분을 40개가 넘는, 인도어와 그 밖의 아시아 언어 및 방언으로 번역하였다. 성서를 배부하는 면에서 이러한 몇몇 초기 ‘선교사’들이 한 일은 칭찬할 만한 것이다.

비교적 새로운 과학인 성서 고고학 역시 지난 세기중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799년에 이집트(애굽) 주둔 프랑스 병사들이, 지금은 로제타 석이라고 불리는 흑색 현무암 후판을 발견하였다. 그 후판에는 동일한 비문이 세번 적혀 있었는데, 두번은 형태가 다른 두 이집트 상형 문자로 그리고 한번은 희랍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후판은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임이 증명되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아시리아(앗수르)의 설형 문자 기록물 역시 해독되었다. 그러므로 그후에 곧바로 아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출토된 인공 유물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많은 성서 기록이 매우 사소한 세부점까지 확증되었다.

자신의 촛불을 태움

종교상의 관심이 점증한 것처럼, 이른바 개혁가들의 수도 증가하였다. 하지만, 모두가 진실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였다. 앞서 언급한 저술가 케니스 S. 래토렛은 새로운 교파의 일부가 “시기, 반목 및 개인적 야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솔직하게 시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 숭배를 회복하기 위해 개인적 야망의 촛불을 태우는 개혁가들을 택하시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개개인의 촛불이 혼란스럽게 깜빡이는 가운데, 신학적 사고 방식은 혼란에 빠졌다. 주로 독일 대학교들의 산물인 고등 비평은 “진보된” 과학적 사고에 비추어 성경을 재해석하였다. 고등 비평가들은 성서를 유대인의 종교적 체험에 관한 기록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구원의 길을 결정하는 데 필수적인 성서의 권위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성서가 옹호하는 도덕 표준의 지혜로움도 의문시되었다.

고등 비평은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 가운데서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 보도에 의하면, 1897년 무렵 독일에 있는 20개 프로테스탄트 신학 대학교 교원 중 여전히 모세 오경이나 「이사야」의 필자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고수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몇해 후인 1902년에,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총회의 한 회의에서 고등 비평에 관한 논란이 일어났다. 「에든버러 이브닝 뉴스」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고등 비평가들에 의하면, ·⁠·⁠· 성서는 신화적 이야기의 수집물로서, 마치 능숙한 도덕가가 ‘이솝 우화’에서 약간의 윤리적 가르침을 이끌어 낼 수 있듯이, 전도자는 성서에서 약간의 윤리적 가르침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신문은 곧이어 이렇게 기술하였다. “노동자 계급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신부터 안개 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 위해 교회에 참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 후 두번째 기사는 훨씬 더 신랄하게, 이렇게 논평하였다. “완곡하게 말해도 소용없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위선으로 가득찬 조직이며, 그 지도자들은 터무니없는 사기꾼이다. 사실상, 만약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의 저자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조롱조로 불신자 톰 페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교역자 토머스 페인, 신학 박사, 글래스고 UF[연합 자유] 대학, 히브리어와 구약 해석 교수로 불릴 정도가 된 것이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설교단에서 설교하는 데 ·⁠·⁠· [그리고] 신학 교수로서 상당한 봉급을 받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종교적 반발

처음부터, 프로테스탄트교는 개인의 개종과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강조하고, 주로 성경에 의존하며, 성사와 전승을 경시하였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많은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및 그와 더불어 천년기의 시작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뉴욕의 농부, 윌리엄 밀러는 재림이 1843년경에 있을 것이라고 과감하게 단언하였다. 이 천년기 운동은, 근본주의로 알려지게 된 보다 두드러지고 적극적인 형태의 복음주의를 위한 기초를 놓는 데 한몫을 하였다.

근본주의는 주로 회의주의, 자유 사상, 합리주의 및 자유화된 프로테스탄트교가 조장한 도덕상의 해이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이름은 나중에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무디 성서 학원에서 발행한 「근본」(The Fundamentals)이라는 제목의 12권짜리 총서에서 따온 것이다.

근본주의는, 특히 미국에서, 효과적인 라디오 및 TV 선교 활동, 성서 학원, 널리 광고되고 감정에 호소하는 부흥 집회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근본주의의 매우 탁월한 몇몇 지도자들의 재정적, 성적 비행으로 인해 그 명성에 손상을 입었다. 특히 1979년에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가 결성된 이래로 정치 활동의 증가 때문에 비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 단체는 최근에 해체되었다.

근본주의는 또한 성서를 변호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성서의 권위를 훼손시켰다. 그렇게 해온 한 가지 방법은, 분명 문자적으로 해석할 만한 내용이 아닌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창세기 기록에 따라, 문자적인 24시간의 날로 된 육일 동안에 땅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날들은 훨씬 더 긴 기간을 망라하는 상징적 날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비교 창세 2:3, 4, 신세 참조; 베드로 후 3:8.) 근본주의가 성서를 훼손시키는 그 밖의 방법들로는, 지옥불에서의 영원한 고초 같은 비성경적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때때로 알코올 음료의 사용이나 여자들의 화장품 사용을 금하는 것과 같은, 성경에서 요구하지 않는 행실의 표준을 조장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방법을 통해 근본주의는 사람들이 성서의 소식을 융통성 없고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척하게 만들었다.

때에 적절한 일

분명히, 필요한 것은 회복, 참 숭배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전도서 3:1(공동번역)의 말대로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과거 1세기 당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형태로 참 숭배를 소생시키셨다. 하지만 그분은 배교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 그분은 참 그리스도인이 곡식같이, 그리고 사이비 그리스도인이 가라지같이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추수 때가 되면, 천사들이 “가라지는 ·⁠·⁠· 거두어 불사르”고,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모아들일 것이었다. (마태 13:24-30, 37-43) 19세기 후반에, 이러한 참 숭배의 회복을 위한 정한 때가 당도하였다.

찰스 테이즈 러셀은 1852년에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서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20대초에, 그는 집안의 사업에서 주의를 돌려, 전파하는 일에 시간을 모두 바쳤다. 64세의 나이로 사망한 1916년까지, 그는 30,000회가 넘는 설교를 하였고 도합 50,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들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셀은 다른 사람들이 성서를 권장하기 위해 한 칭찬할 만한 업적을 인정하는 한편, 단지 성서를 번역하고 인쇄하고 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1879년에, 그는 오늘날 「파수대」로 알려진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잡지의 첫 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질문에 대하여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는가를 묻기보다는, 우리 교회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묻는 경향이 너무 많다. 신학은 지나치게 많이 연구하지만, 성서는 충분히 연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지혜가 있게 한다’는 것과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함께 검토해 보기로 하자.”

꼬박 110년 동안 중단없이 발행되어 온 오늘날, 「파수대」(지금은 106개 언어로 발행되어 매호 1,300만부가 넘게 배부됨)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검토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성서가 가르치는 것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면에서 그 잡지가 베푸는 도움을 인식하게 되었다.

러셀은 개혁에 관심이 있던 동시대의 많은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별한 길을 전파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환상이나 계시를 보았다고 호언하지 않았고, 감추인 책이나 그 밖의 형태로 은밀한 소식을 발견하지 않았으며, 신체적으로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사용되는 자진적인 도구로서, 그는 “자신의 촛불”을 하나님의 빛보다 밝게 하려는 모든 유혹을 배격하였다.

“존중히 여기고 선포해야 할 것은 진리이지 그 종이 아니다.” 러셀은 1900년에 그와 같이 기술하면서, 이렇게 부언하였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잊고, 진리에 대한 영예를 그 전파자에게 돌리는 경향이 너무 많다. 그분은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서, 그분의 마음에 들게 일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종이라도 사용하신다.”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의 성원들은 물론, 워치 타워 출판물의 필자와 번역자들이 익명을 고수하려고 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왕이 즉위하셨다!

제 1세기에, 침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임명된 왕으로 나타나실 때가 임박했음을 공포하였다. 19세기에, 그 왕이 하늘의 권능으로 나타나실 때가 임박했음을 공포할 때가 도래하였다. 따라서, 1880년 3월호에서, 「시온의 파수대」는 이렇게 단언하였다. “‘이방인의 때’는 1914년까지 계속되며, 그때까지는 하늘 왕국이 전권을 장악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그룹은 1914년이 하나님의 왕국의 시작을 특징짓는 해임을 알리는 일에서 백년이 훨씬 넘게 계속해서 공개적인 기록을 쌓아 왔다. 하나님의 왕이 즉위하시는 일은, 거짓 종교의 깜빡이는 촛불을 최종적으로 꺼서, 그것이 더는 하나님의 빛을 흐리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예비 단계였다.

19세기의 끝이 다가오면서,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임을 밝힐 만한 옷이 전혀 없었다. 그 종교는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하였다. 그 종교의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본지 다음 호에서 그 점을 더 알아보기로 하자.

[18면 네모]

“늦게 태어난” 종교 개혁의 몇몇 자녀

그리스도 과학자 교회: 이 종교 운동은 흔히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알려져 있다. 이 종교는 1879년에 메리 베이커 에디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그는 건강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1866년에 위험스런 사고에서 급속히 회복되고 나서,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실 수 있었던 원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1875년에 그가 저술한 책 「과학과 건강—성경의 열쇠」(Science and Health With key to the Scriptures)에서는,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을 압도하며, 죄, 질병, 죽음 및 그 밖의 부정적인 것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뜻하는 정신과 조화되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이길 수 있는 허상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이 교회는 회복에 관심이 있는 미국 장로교인들에 의해 1832년에 설립되었다. 그들의 표어는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는 우리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우리도 침묵한다”는 것이었다. 한 참고 문헌은 그들이 “교리와 종교 문제에 있어서 매우 관용적”이라고 묘사한다. 신자들은 미국 남북 전쟁중에 정치 문제로 인해 심하게 분열되었다. 1970년에는 118개의 교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1906년에 설립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포함되었다.

구세군: 군대식으로 조직된 이 종교 그룹은 윌리엄 부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부스는 20대초에 감리교 교역자가 되었으며, 1861년에는 독자적인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전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그룹의 이름은 1878년에 그리스도교 전도회에서 구세군으로 바뀌었다. 구세군은 집 없고, 굶주리고, 학대당하며,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회 봉사를 함으로써 “영혼을 구원”하려고 한다.

제칠일 재림 교회: 이 교회는 약 200개의 재림 교회 교파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 이름은 그리스도의 두번째 오심 곧 재림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재림 교회는 1840년대초에 침례교의 평신도 교역자 윌리엄 밀러가 주창한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직도 십계명이 구속력이 있다고 가르치는 제칠일 재림 교회는 문자적으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일부 신자들은 엘런 굴드 화이트의 저술물이 거의 성서에 가까운 영감을 받았다고 믿는다. 화이트는 이 그룹의 매우 영향력있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련의 환상을 통해 계몽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17면 삽화]

로제타 석은 성서의 진실성을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료 제공]

Courtesy of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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