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라
리스트라
소아시아 중남부에 있는 지역인 리카오니아의 한 도시. 리스트라는 코니아(이코니움) 남남서쪽 약 32킬로미터 지점의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지역에 위치한 하툰사라이 북쪽의 한 구릉으로 확인되었다.
사도 바울과 바르나바가 그들을 돌로 치려는 시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코니움을 떠난 후에 가게 된 곳은 바로 로마 속주인 갈라디아의 리스트라였다. 이 도시는 당시 로마의 속주였는데, 일찍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계속 리카오니아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다리가 불구였던 한 남자를 고쳐 주자, 무리는 그와 바르나바가 헤르메스와 제우스 신의 화신이라고 결론 내렸다. 가까스로 그들은 자기들에게 희생을 바치지 못하도록 무리를 제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코니움과 피시디아 안티오크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도록 리스트라 주민들을 선동하자 그들은 그를 돌로 쳤으며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냈다. 후에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바울은 일어나서, 리스트라로 들어간 다음, 바르나바를 동반하고 다음날 데르베로 떠났다.—사도 14:1, 5-20.
데르베에서 활동하고 나서, 바울과 바르나바는 리스트라와 이코니움과 안티오크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 도시들에 새로 세워진 그리스도인 회중들과 연합하고 있던 제자들을 강하게 하고 격려하였으며 연로자들을 임명하였다.—사도 14:21-23.
나중에, 할례 문제가 예루살렘 회중의 사도들과 연로자들에 의해 (기원 49년경에) 해결된 후, 바울은 다시 데르베와 리스트라를 방문하였다. 사도 16:1에 나오는 이에 대한 언급은, 디모데라는 젊은이가 리스트라나, 가까운 데르베에 거주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증거에 의하면 리스트라가 유력한 것 같다. 데르베는 디모데와 관련하여 다시 언급되지 않지만, 사도 16:2은 디모데가 “리스트라와 이코니움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때문이다. (또한 디모데 둘째 3:10, 11 참조) 디모데가 그토록 잘 진보했기에 바울은 그를 여행하는 동료로 택하였다.—사도 16:3.
사도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에서 “갈라디아 ··· 지방”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리스트라에도 들렀을지 모른다.—사도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