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69 11/15 509-515면
  • 하나님께서는 열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열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더 높은 차원
  • 세 가지 기본적 요구 조건
  • 여호와를 열렬히 찾음
  • 하나님의 도시를 열렬히 찾음
  • 상호관계가 좋으면 의사소통이 좋아진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4
  • “마음을 굳건하게 하십시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9
  • 믿음이 우리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9
  •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길러 나가려면
    지속적인 평화와 행복—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11/15 509-515면

하나님께서는 열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열렬히 찾는 자들, 신세]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브리 11:6.

1. 무엇이 행복한 가정 생활에 필수적이며 어떻게 이것이 명백합니까?

당신은 부모입니까, 혹은 부모와 함께 사는 가족 성원입니까? 어느 쪽이건 간에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나, 욕망을 느끼는 대로 기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느냐에 행복한 가정 생활의 관건이 있음에 당신은 동의하십니까? 그러한 필요와 욕구를 정상적이고 합당하게 충족시키지 못하고 억압을 당하기가 쉬운 것이 현 실정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욕구는 여전히 있어서 쉽게 억압을 당하지 않고 해로운 통로를 통해서라도 배출구를 찾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이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어린 아이는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하여서도 동정심과 관심을 끌기 위해서 울어제낍니다. 흥미있는 것이 있으면 이해심을 가지고 반응을 보일 어떤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어린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좀 다치면 슬픔을 참으면서 뛰어 들어와 엄마 앞에 와서야 ‘으아’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읍니다.

2. 어떠한 능력과 품성이 의사 전달의 강한 욕망을 일으킵니까?

2 그렇습니다. 인간은 의사 전달을 하고 관심과 흥미가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능력과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읍니다. 인간은 순수하게 즐기기 위하여, 혹은 궁할 때 도움을 받기 위하여 혹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을 기쁨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을 표현하려고 열렬히 노력합니다. 우리는 이 강한 욕망의 원인을 캘 수 있읍니까? 물론입니다. 인간은 추리하고 탐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읍니다. 인간은 탐색할 수 있고 창안할 수 있고 조직할 수 있읍니다. 인간은 옳고 그름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인간은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읍니다. 인간은 사물을 파고 들어가 이해할 수 있으며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세워 갈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이해하고 인식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논리적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랑을 교환하기를 열망합니다. 사랑을 주고 받을 때 최대의 만족과 격려가 있게 마련입니다. 당신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과 품성은 발휘되어야 하며 자연히 표현을 요하며 이것은 의사전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3. (ㄱ) 어떤 다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읍니까? (ㄴ) 어떻게 두 가지 요소가 유년 시대부터 중요합니까?

3 그러나 이 욕망과 함께 다른 중요한 요소 즉 상호 관계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는 밀접히 연결되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읍니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자유자재로 의사 전달을 할 수 없읍니다. 반면에 의사 전달 방법을 배우지 않고는 원만한 대인 관계를 세워 나갈 수 없읍니다. 두 가지 다 신중히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 필요성을 다시 어린이들을 예로 들어 증명하겠읍니다. 자녀들은 그들에게 돌리는 사랑에 찬 관심 혹은 원만한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표현하려는 선천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거침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아주 어려서부터 적절히 훈련받는다면 그들은 아무 때나 울기만 하면 즉시 어머니가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얌전히 있어야 할 때가 있음을 배웁니다. 그들은 부당한 행실을 할 때 선한 관계가 깨어질 수 있음을 인식하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학교에서나 친구와, 특히 이성과 교제할 때나 사업을 할 때나 오락을 할 때 의사 전달과 대인 관계가 극히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요인은 생활의 행복과 성공에 크게 기여합니다. 우리는 결코 이 두 가지 요소에 있어서 진보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하며 그리하여 생활의 최대의 관심사를 촉진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더 높은 차원

4. 이러한 요소들을 인간 관계에만 국한시켜 발휘하는 것이 현명합니까?

4 우리는 이 토론을 더 높은 차원으로 올릴 수 있읍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인간 관계에만 국한시켜 고려하고 만족해 하고 있지만 그것이 옳고 이치적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영속적이고 확실한 유익이 있는 더욱 깊은 만족감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전술한 바와 같이 그러한 훌륭한 품성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인간이 어떤 의식이 없고 비인격적인 힘의 소산이 아니라 최고의 지도자이시며 그와 같은 특성을 최상급으로 소유하신 지성적 설계자인 창조주의 작품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 더구나 인간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로보트’가 아니고 이러한 재능을 선택 여하에 따라 선용 혹은 오용할 자유가 있읍니다. 오늘날 개인이나 국가나 그들 자신의 생활과 그들 자신의 운명이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읍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땅과 인간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하지만 사물을 이렇게 보고 그러한 행로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르며 이치적입니까?

5. 훌륭한 품성을 소유하였으므로 무슨 질문들이 생깁니까?

5 우리는 이미 세상의 길을 따르거나 세상의 영의 영향을 받지 않음으로 지혜를 보일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였읍니다. 여기에 동의하고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분께서 인간에게 자신과 자신의 목적을 계시하셨는지 탐구해 보는 것이 이치적인 다음 단계가 아닙니까? 인간은 추리하고 탐구하는 능력과 아울러 믿음과 사랑과 헌신을 나타낼 능력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런 훌륭한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수여자께서 이런 품성들을 인간에게 최고의 형태로 표현하실 수 있으시며 그 분을 열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실 것임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 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 보았으므로 우리가 토론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려서 이러한 점들이 동일하게 적용되는지 알아 봅시다. 그것은 휠씬 더 큰 보상을 가져올 것입니다.

6. 우리의 필요와 욕망은 어떻게 해서만이 진정으로 충족될 수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읍니까?

6 의사 전달과 대인 관계가 우리 인간들 사이에도 극히 중요하다면 틀림없이 창조주와 우리 사이에는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필요를 알고 있다면 우리가 그의 후손이며 그의 자손으로서 창조주와 선한 관계를 유지하고 의사 전달을 해야 할 필요성과 욕망을 느껴야 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이러한 욕망의 만족은 물론 전적으로 창조주께 달려 있읍니다. 그 분만이 그것을 가능케 하시며 그분께서 바로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그분은 자신을 계시하셨고 기도로써 우리가 그분과 접촉할 길을 열어 놓으셨읍니다. 어떻게요? 주로 그의 기록된 말씀인 성서와 성서 자체에서 설명하듯이 살아 있는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란 칭호를 받으신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렇게 하셨읍니다.—계시 19:13; 요한 1:1.

7.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떤 격려가 있읍니까?

7 그의 기록된 말씀에서 우리는 이상의 논증에 대한 훌륭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읍니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아덴’ 사람들—그들의 “성에 우상이 가득”하였다—에게 연설할 때 ‘바울’은 창조주에 관하여 설명할 기회를 만들었읍니다. 그는 창조주께서 우주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는 것을 창조주께서는 기뻐하시며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느니라]”고 확증하였읍니다.—사도 17:16, 22-28.

8.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지식이 필요합니까?

8 이러한 격려를 받는 우리는 더 나아가 우리가 마침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께서 받아 주시는 기도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하여, 성서가 의사 전달과 상호 관계에 대하여 특별한 지식으로써 우리를 안내하는지 알아 봅시다. 아이들과 같이 우리는 대화의 길을 여는 것의 필요성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은 상호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므로 그것부터 고려하겠읍니다.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총애를 얻고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필요한 기본적 단계를 알려 줍니까?

세 가지 기본적 요구 조건

9. (ㄱ)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첫째 요구 조건을 강조합니까? (ㄴ) 인격적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 것이 왜 이치적이며, 어떤 질문이 생깁니까?

9 첫째 요구 조건은 믿음입니다.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말할 때 이것을 분명히 밝혔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열렬히 찾는 자들, 신세]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브리 11:6) 정직하고 탐구심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그 분과 그의 품성은 인간에게 보이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왜냐 하면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증명했듯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 . . 보임이라 . .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진리를 은폐하려는]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추적인 근원과 통제를 지적하는 법칙 아래 우주로 침투하여 작용하는 ‘에너지’에 관한 증가된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여기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보증이 어디 있으며, 어떻게 이것이 우리가 상호 관계를 이해하도록 도와 줍니까?—로마 1:18-20.

10. 무엇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기초였으며, 무슨 다른 요구 조건을 지적해 줍니까?

10 성서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를 도와 줍니다. 소급하여 창세기 15장은 하나님을 열렬히 찾고 그분을 믿었으며 보상을 약속받은 한 사람에 관하여 알려 줍니다. (창세 15:1, 6) 그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으며 후에 ‘아브라함’으로 고쳐졌읍니다. 그는 어떻게 우선적으로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읍니까? 이것은 둘째 요구 조건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상 ‘노아’와 ‘셈’으로부터 내려오는 기록을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것은 후에 ‘모세’ 오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현재 「창세기」의 첫 부분을 이루고 있읍니다. 이 믿을 수 있는 지식은 ‘아브라함’에게 정확한 지식을 줄 수 있었으며 이것이 참된 믿음의 필수적인 기초가 되었읍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아브라함’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로부터 훌륭한 본을 받기 위하여 초기 기록의 얼마를 알아봅시다.

11. 인간 창조의 기록은 어떻게 가치 있는 지식을 제공해 줍니까?

11 앞서 말한 논증을 지지하여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땅과 땅의 모든 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품성과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읍니다. 그는 창조주와 밀접히 교제하였으며 그의 축복을 받았고 그분과 원만한 관계를 즐겼읍니다. 그는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의 많은 자애로운 마련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으뜸되는 선물은 그의 행복을 완성시키며 즐거운 친교관계의 길을 더욱 열어 주는 이상적인 배우자인 조력자였읍니다.—창세 1:26-31; 2:18-23.

12.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는 무엇이며, 따라서 어떻게 세째 요구 조건이 강조됩니까?

12 하지만 ‘로보트’가 아닌 최초의 여자 그리고 그 다음에 남자는 선택의 자유를 사용하여 여호와의 명령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길을 택하였읍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으며 그들의 운명을 자기들이 개척하고자 하였읍니다. 그 결과는? 한 가지 결과는 그들 상호 관계와 그들의 창조주와의 친교 관계가 망쳐졌읍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 . . 숨”었으며 심문을 받을 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함으로 하나님과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하였읍니다. (창세 3:8, 12)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대한 교훈을 받을 수 있읍니다. ‘아브라함’도 틀림없이 그 교훈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께 대하여 생명과 그가 즐긴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하여 은혜를 입었읍니다. 그가 이것을 인식하고 헌신의 정신으로 창조주께 순종하는 동안은 그 분과 원만한 친교 관계의 축복을 누렸읍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정신을 상실하고 그들 멋대로 행동하였을 때는 즉시 그러한 축복을 박탈당하였읍니다. 이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째이며 극히 중요한 요구 조건을 인식할 수 있읍니다. 즉 그 요구 조건은 믿음과 정확한 지식을 수반해야 하며 그 요구 조건이란 여호와께 대한 온 영혼을 다한 헌신입니다.

13. 상기 요구 조건들이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13 이러한 세 가지 요구 조건들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읍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단순한 심적 동의 혹은 신념이 아니며 맹신과 같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보증된 확신이며 그 사물이 보이지는 않으나 진실과 실제의 표적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것은 그러한 믿음의 기초로써 정확한 지식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믿음을, 실체가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실체의 명백한 증거”라고 정의하였읍니다. 보이지 않는 가장 크신 실체는 여호와이십니다.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그분이 만드신 만물에 의해서 분명히 보이고 증명됩니다. 그의 말씀이신 성서는 진리의 표적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한 믿음 즉 보증된 확신은 강력하고 살아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정확한 지식과 이해의 기초와 일치하게 열매를 맺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는 사람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확신합니다. 헌신이란 여호와를 계속 찾고 그의 기록된 말씀에 있는 그의 뜻을 기쁘게 행하기 위한 욕망과 결심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태도였으며 그에 관하여 예언적으로 이렇게 기록되었읍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주의 말씀]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히브리 11:1, 신세, 6; 로마 1:20; 요한 17:17; 시 40:8.

14. 어떻게 여호와께서는 ‘에덴’에서 믿음과 희망에 대한 강한 기초를 주셨읍니까?

14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초기 기록으로부터 배운 것이 또 있읍니다. 그것은 보상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과 그 약속을 하신 분에 대한 사랑에 찬 헌신을 증가시켜 주었읍니다. 당신의 믿음과 헌신도 증가될 수 있읍니다. 고의적인 불순종의 사건이 돌발한 후 ‘에덴’에서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선언하심과 동시에 놀라운 예언을 하셨읍니다. 은밀한 말 속에 보상에 대하여 확실한 희망을 주는 약속이 들어 있었읍니다. 거기에는 뱀의 씨와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여자의 씨 사이에 적의가 있을 것이 예언되었읍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여자의 씨]는 네[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이것은 뱀을 사용하는 자 즉 ‘사단’ 마귀가 패배와 죽음으로 머리를 상할 것을 의미합니다.—창세 3:15, 신세; 또한 요한 8:44 참조.

15. 여호와께 대한 믿음과 헌신은 어떤 축복과 보상으로 인도합니까?

15 이것은 여자의 충성스러운 씨에 대한 큰 보상으로 이해할 것이었읍니다. 또한 그것은 여호와께 대하여 믿음과 헌신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최초의 반역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될 희망을 줄 것이었읍니다. 그 중의 첫 사람이 히브리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남녀들 중 첫 사람인 ‘아벨’입니다. 거기에 ‘아브라함’도 언급되었는데 완전 가운데 온전히 회복된 하나님과의 친교 관계의 축복을 즐기는 하나님의 도시같은 마련에서 영구적인 곳을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이 보상으로 받을 것으로 묘사하였읍니다. 사실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남녀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아직 불완전하면서도 그러한 축복들을 상당히 즐겼읍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바울’은 같은 편지에서 오늘날의 남녀들이 같은 축복을 더욱 더 즐길 수 있음을 밝혔읍니다.—히브리 11:8-10, 16.

16. 믿음과 헌신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어떤 특별한 보상을 받았읍니까?

16 ‘아브라함’에 관하여 창세기 22:1-18의 기록은 여호와께서 기쁘게 그에게 매우 특별한 보상을 주셨음을 알려 줍니다. 필요하다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으로 기꺼이 바쳐야 할 정도로 믿음과 헌신을 맹렬히 시험한 후에 여호와께서는 ‘에덴’에서 약속된 씨가 그의 계통에서 나올 것을 계시하셨고, “네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에 앞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 . . 상급”이 지극히 크다고 말씀하신바 있읍니다.—창세 22:18; 15:1.

여호와를 열렬히 찾음

17. 누구나 딱한 처지에서는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는 증거가 있읍니까?

17 우리는 여호와와의 선한 관계로 인도하는 예비적인 단계를 조사하였지만 아직도 그 분과 어떻게 의사 전달의 길을 열고 유지하느냐 하는 질문이 남아 있읍니다. 이 욕망은 거의 누구에게나 있지만 이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고집이 세고 무신론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도 사정이 딱할 때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첫 살인자 ‘가인’도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읍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그의 말과 같이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읍니다. 마찬가지로 ‘하와’도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자녀가 출생할 때 여호와를 개입시키기를 원하여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였고 후에 다시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하였읍니다.—창세 4:1, 13, 14, 25.

18. 대부분의 종교 예배에서의 기도의 역할에는 어떤 특징이 있읍니까?

18 보편적으로 이러한 욕망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로서 거의 모든 종교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기도가 그들의 예배에서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또한 자칭 그리스도인이건 다른 종교인이건 ‘크리스마스’나 부활제 등 특별한 경우나 종교적 축제일을 제외하고는 틀에 박힌 절차와 형식만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기도서에서 판에 박은 듯이 되풀이 하거나 암송합니다. 어려서부터 꼭 같은 종교 예배만 보아 온 그리스도교국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예사로 넘겨 버릴지 모릅니다. 그것이 몸에 밴 사람은 거기에서 감정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건물이며 음악이며 의상들, 이 모든 것들이 때때로 신비감을 가미하여 그러한 목적으로 고안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황홀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성스러운 사물 혹은 딴 세상과 접하는 줄 생각합니다.

19, 20. 이것이 개인적 기도에도 마찬가지입니까? 따라서 어떤 질문이 생깁니까?

19 개인적인 기도를 할 때 흔히들 어려서부터 배운 같은 식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들은 식사 때의 기도나 잠잘 때의 기도 등 짜여진 기도의 틀을 배웁니다. 어른들도 기도서에서 읽거나 염주 혹은 묵주를 세어가며 혹은 기도 바퀴를 사용하여 외우는 등 같은 방식을 따릅니다.

20 특히 개인의 기도에서 보통 성심 성의를 다하여 기도를 하지만 이것이 참다운 의미로 진정한 기도입니까? 그것이 개인의 마음을 흐뭇하게는 할지언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심 성의로 기도하기만 하면 어떠한 기도도 들어주시고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분께서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마음대로 무엇이 그분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지 결정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집단적으로 말하여, 아무리 크고 오래된 조직이라도 종종 그러하듯이, 주로 전통에 의거하여 조직의 권위로 그러한 문제를 결정지을 권리가 있읍니까?

21. 젊은 세대는 흔히 전통과 관습을 어떻게 보며, 어떤 결론에 이를 수 있읍니까?

21 우리는 앞에서 숭배의 형식과 표현이 흔히 문제시되지 않는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비판적인 태도가 아니라 무엇이든지 무조건 눈감아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뚜렷한 풍조가 아닙니까? 젊은 세대일수록 반발을 하고 있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업적에 있어서의 진보와 같은 물질적인 것이나 어떤 정치적 혹은 군사적 영웅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종교인이건 아니건 형식에 사로잡혀 묵주나 성가를 사용하면서 그것이 기도인줄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법을 잊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읍니다.

22, 23. (ㄱ) 우리는 기도에 관하여 어디에서 안심하고 인도를 구할 수 있읍니까? (ㄴ)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어떤 질문이 생깁니까?

22 그러나 우리는 올바로 도움만 받으면 위대하신 창조주께 상달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법을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수 없이 많음을 인정합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것은 인간의 권위를 기초로 결정될 일이 아니며 인간의 감정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말을 배우는 것과 다릅니다. 이제까지의 길로 가는 대신 틀림없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로 갑니다. 우리는 성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단계를 알려 준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특히 우리는 「히브리서」가 이 문제에 관한 실용적 조언과 충고를 준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당신은 그 책 11장에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의 긴 명단이 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열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읍니다.—히브리 11:6.

23 그러나 ‘바울’은 같은 편지에서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과 또한 하나님께 헌신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우리가 또 다른 것을 열렬히 찾아야 한다고 밝혔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성공적으로 구하고자 한다면 참으로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그것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시를 열렬히 찾음

24. ‘바울’은 우리가 열렬히 찾아야 할 도시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그 도시를 밝히고 있읍니까?

24 히브리 13:14에서 ‘바울’은 그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상기시켰읍니다. 왜 이 도시를 우리가 열렬히 찾아야 합니까? 우선, ‘아브라함’에 관하여 ‘바울’은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 . .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말하였읍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 관하여 ‘바울’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은 . . .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말하였읍니다. 즉 그들은 ‘갈대아’인의 땅에서 낡은 사물의 제도에서의 그들의 지위를 버렸고 ‘가나안’ 땅에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읍니다. 그 대신 ‘바울’의 말처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속한 것이라, 신세]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후에 ‘바울’은 이 도시를 분명히 밝히고 있읍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어떻게 ‘모세’의 인도 아래 ‘시내’ 산에 접근하였는가를 말하고 나서 대조적으로 그는 영적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니라]”—히브리 11:9, 10, 13-16; 12:18-22.

25. 도시는 무엇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도시는 어떻게 더욱 밝혀집니까?

25 성경에는 도시가 중앙 지배권하에 치밀하게 짜여진 조직으로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적절히 사용되어 있읍니다. ‘요한’은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환상으로 보았으며 그 구성원이 「계시록」에 명시되어 있읍니다. ‘요한’은 그것을 보고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묘사합니다. 그 후에 그는 천사가 구성원들이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라고 밝히는 말을 듣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와 참 교회이며 그리스도인 회중인 그의 신부 반열을 지적합니다.—계시 21:2, 9; 또한 계시 14:1, 4 참조.

26, 27. (ㄱ) 하나님의 도시의 그림은 오늘날 어떻게 성취됩니까? (ㄴ) 천적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과 누가 밀접히 연합되어 있읍니까? (ㄷ)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기대합니까?

26 당신은 하나님의 도시의 이 상징의 진의를 이해합니까? 모형적 그림에서 문자적인 ‘시온’ 산에 위치한 지적 도시 ‘예루살렘’은 고대 육적 ‘이스라엘’ 온 땅을 지배하는 귀중한 수도였읍니다. 실제로 단지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만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읍니다. 마찬가지로 그 성취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예수와 하늘에서 그와 연합하는 참 교회만이 하나님의 지적 영역 전체를 다스리는 수도 조직을 형성합니다. 이 마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기게 됩니다. (베드로 후 3:13) 낡은 사물의 제도의 결말인 오늘날 천적 소망과 시민권을 가진 참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면밀히 결합된 연합으로 회복되었읍니다. (빌립보 3:20) 하나님의 왕국의 신민으로서 지상에서의 생명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헌신한 남녀들의 “큰 무리”는 이들과 밀접히 연합되어 있읍니다. 그들은 “그의 성전에서” 즉 하나님의 영적 집 혹은 성전을 이루는 사람들의 남은 자들과 연합하여 “밤낮 하나님을 섬기”고 있읍니다. (계시 7:15; 에베소 2:19-22)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정신으로 오늘날 이들 헌신한 남녀들은 낡은 사물의 제도를 버려야 합니다. 특히 그들은 저 악한 상징적 도시 큰 ‘바벨론’ 즉 거짓 종교 세계 제국에서 도망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그들은 하나님의 도시 즉 그분의 도시 같은 마련을 열렬히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서 분명히 볼 수 있읍니다.

27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도시를 찾는 것이 어떻게 기도에 도움이 되느냐고 질문할지 모르겠읍니다. 다음 기사에서 이 문제를 논하겠읍니다.

[513면 삽화]

‘아브라함’은 기꺼이 아들을 바침으로 믿음을 표시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고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아주 특별한 보상을 주셨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