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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대변자—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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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대변자—그는 누구인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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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5
파75 7/1 304-307면

위대한 대변자—그는 누구인가?

이 우주 가운데 위대한 대변자가 한분 존재하신다. 그는 막대한 권력과 권위를 갖고 계신다. 그분의 지위를 인정하면 당신은 영원한 장래를 즐기게 될 수 있다. 이 대변자는 누구인가?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서두에서 그를 소개하였다. ‘요한’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던 이분을 “말씀”(희랍어, ‘로고스’)이라고 불렀다. 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썼다. “태초에 말씀(‘호 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톤데온’, ‘호 데오스’의 대격)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데오스’)이시니라.”—요한 1:1.

이것은 “말씀”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그리스도교국의 삼위일체의 “제 이위”라는 뜻인가?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당신도 그렇게 배웠는가? 당신은 그 교리의 근거가 무엇인지 아는가?

「브리타니카 백과 사전」(1974년판, 소사전 제 6권 302면)에 설명된 바를 고려하라. “신약의 여러 곳에서 함축적으로 언급되었고 네째 복음서에서 명확히 언급된 예수와 ‘로고스’의 동일성 사상은 초기 교회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사상보다는 희랍 철학의 사상에 더 많은 기초를 두었다.” (고딕체로 본 잡지에서 바꿈)

희랍 철학이 ‘로고스’ 즉 “말씀”에 대한 사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데 유의하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반적인 믿음의 정확성에 관해 의문을 일으키지 않는가?—골로새 2:8.

우리가 “말씀”에 대한 진상을 알고자하는 것은 단순히 학구적 관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장래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봐도 분명하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 17:3) 여기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들을 인격체로서 알고 그분들과 좋은 관계를 즐긴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신분과 지위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가에 관해 의곡된 견해를 가진 사람은, 분명히, 아버지도 아들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관심을 기울여, 희랍 철학이 아니라, 성서가 “말씀”의 신분에 관해 나타내는 바를 고려해 보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인가?

요한 복음 1:1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말씀’과 하나님 두 인격이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God)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란 단어가 성서에서 사용된 방법을 고려하면 명백해진다.

시편 8: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저[사람]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나이다].” (난외주) 이 경우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엘로힘’을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문맥에 따르면 “신들” 혹은 “하나님”을 뜻한다. 여기서 “신들”이라고 불리운 것들은 천사들이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2:7에서 시편 8:5을 인용할 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라고 했기 때문이다. “신”(god)이란 단어는 심지어 인간에게도 적용했다. 예를 들면, 시편 82:1-6에서는 공의를 행사하지 않은 인간 재판장들을 “신들”(gods)이라고 하였다. 천사들이나 인간을 “신들”이라고 한 이러한 언급은 그들이 (혹은,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를) “능한 자들”임을 지적했다. 또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대표한 자들이었으며, 그러므로 인간들이 그들에게나 또한 그들에 관해 말할 때 “하나님”이라고 했다.—사사 13:21, 22.

“하나님”이라는 말이 이렇게 사용된 것으로 볼 때 그 단어를 하나님의 맏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않겠는가? 정당하다. 이 아들은 “능한 자”이며 하나님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요한 17:8) 그러므로 요한 1:1에서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때 거기에는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이위”라는 결론을 내릴 근거가 전혀 없다. 그 귀절은 그러한 것을 전연 말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이란 말을 “말씀”에게 적용한 것은 단순히 그가 인간 이전의 존재 기간에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으며, 능한 자였음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희랍어 원문에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는 귀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을 봐도 분명하다. 희랍어 학자인 ‘웨스트코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말씀’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지 그분의 위(位)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관사가 없다. (‘호 데오스’가 아니라 ‘데오스’임)”—‘시이. 에프. 디. 뮬’ 교수 저 「신약 희랍어 숙어집」 중 116면에서 인용.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다

만약 “말씀”이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이위”라면 우리는 성서에 이 점이 분명한 말로 나타나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약”의 예수가 “구약”의 여호와라면 분명히 예수가 여호와라는 적어도 단 한번의 성경적 언급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말은 한 번도 없다. 예수 자신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사실상 그의 아버지가 자기의 하나님임을 인정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한 20:17.

그러므로 아버지만 홀로 정관사가 붙은 하나님[THE God]이시며 지존자시다. 모두는 그분에게만 숭배를 드려야 하고, 아들을 포함하여 모두는 당연히 그분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다. 사도 ‘바울’이 동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와 같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 전 8:6)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지위나 능력이나 권위에 있어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지 않는가?

삼위일체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인 것이다. (고린도 전 11:3)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소유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소유되어 있다. 영감받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 전 3:23)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지상에 계셨을 때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닌가? 신학자 ‘시이. 에프. 클링’은 자신은 삼위일체론자이지만 사도의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예수께 속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 ···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중보로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11:3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종속 관계를 단지 그의 인성(人性)에만 국한된 것으로 본다면 전체 주제의 정확한 견해와 맞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 전체이며 그것도 단순히 그의 굴욕의 상태뿐 아니라 그의 영광의 상태까지도 말하는 것이다.”—‘제이. 피. 랜지’ 저, 「성서 주석」.

사실상, 아들이 가진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받은 것이다. 예수 자신의 말씀에 유의하라.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한 5:19-2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느니라].” (마태 28:18) 그것은 다니엘 7:13, 14로 봐서도 분명한 것처럼 왕의 권위도 포함한다. 그 귀절은 다음과 같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됨에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느니라].”

인류의 왕으로서 천년간의 사업을 완수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이다.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었다. 그는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린도 전 15:24-28) 그러므로 분명히 아들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빚지고 있으며, 또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분은 그의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으시다.

“태초에”

언어상으로 볼 때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 시작이 있음을 뜻한다. 아들이란 항상 그의 아버지 보다 젊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는 항상 존재해 오셨다. 그분에 관해서 영감받은 시편 필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90:2)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다른 뜻을 알려주는데 아들에게 위와 같이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들”이란 말이 “맏아들”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실제로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어떤 시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증거가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와 반대로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를 분명히 지적하는 성경적 진술이 있는가?

계시록 3:14에서, 아들을 “하느님의 창조의 시작”(공동번역) 혹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개역 한글판)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이것은 아들이 창조의 원조 혹은 창시자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귀절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얼마의 삼위일체론자들도 그러한 설명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학자 ‘알버트 바아네스’는 “시작”(beginning) 혹은 “근본”(origin)이라고 번역한 희랍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단어는 어떤 사물의 제작이 아니라 시작을 말하며, 시간과 지위에 있어 우위를 말하는 것이지 무엇인가를 존재케 했다는 의미에서의 우위가 아니다. ··· 그러므로 그 단어에는 어떤 사물의 제작자가 그 사물을 존재케 했다는 의미에서의 시작이라는 의미는 없다.”—「신약에 관한 바아네스의 주석」(영문), 1569면.

그 다음에 이 신학자는 계시록 3:14은 그리스도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음을 인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최초로 만드신 분임이 증명된다면, 이 문구가 그 사실을 표현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삼위일체론자로서 그는 다른 성귀에서는 예수 자신이 창조주이며, 창조되지 않았으며 영원한 자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신학자는 계시록 3:14의 뜻을, 그리스도는 창조의 군왕 혹은 머리이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 그들이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성서에 비추어 이 견해를 조사해 보자. 예수는 참으로 창조주인가?

‘가톨릭’에서도 사용하는 「공동번역」에 의하면 요한 1:1-3은 다음과 같다.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었다. 이 말씀은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귀절은 “말씀”이 창조주임을 증명하는가? 아니다. 왜 그런가? 왜냐 하면 창조는 그를 통하여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창조 사업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똑같은 사상이 골로새 1:15, 16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히브리 1:2에 기록된 내용이 양상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여기서도 아들은 창조에 사용된 도구 혹은 대행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표현은 이러하다.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소유하게 하셨읍니다.”

그리하여 「요한 복음」과 「골로새서」, 「히브리서」의 이 귀절들은 실제로 아들이 창조주가 아니며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문맥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인용문들은 아들이 시작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그의 중요한 위치를 지적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 귀절들은 아들이 시작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지 않는가? 아들은 그의 지위를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 받았으므로 분명히 그가 받은 것을 가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가 준 것을 소유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그는 존재하지 않고 아버지만 홀로 계시던 때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요한 1:1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말에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말씀은 항상 존재하셨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태초(beginning)라는 말 자체에 과거의 어디에선가 시작이 있다는 사상이 들어 있다. 성서의 본들은 이것을 예시한다. 그의 존재가 태초와 연결되어 있는 ‘말씀’과는 달리 하나님은 태초에 창조하는 일과 관련되어 언급되었다. 창세기 1:1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나 요한 1서 3:8에는 다른 태초도 언급되어 있다. “마귀는 처음부터(즉, 태초부터) 범죄함이더라.”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반역의 시작을 말한다.

“태초”라는 말의 그러한 용법으로 볼 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표현에 관해서 정당하게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이와 같다. 즉, 말씀은 창조 사업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기 전에 한동안 그의 아버지와 함께 계셨었다. 창조가 시작된 후에 그는 모든 지성있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대변인 혹은 “말씀”이 되셨다.

그의 아버지의 아들이며 그분께 종속된 자로서 “말씀”은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유일한 아들이라는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모든 창조물 중에 “말씀”은 과연 위대한 대변자이시다. 그는 지성있는 피조물들을 만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구 역할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이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대변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의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징조에 관해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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