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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가 말하게 하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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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파77 3/1 101-103면

성서가 말하게 하라

참 숭배가 성실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 숭배에 고착하는 사람들이 풍기는 강한 인상, 달변 또는 학식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참 숭배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종들이 그들에게 전한 소식이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전 2:13)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말하게 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 회중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에 훌륭한 본을 보이셨다. 그분은 자기의 말을 듣던 청중의 관심을 자기로부터 하나님께 돌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노라].” (요한 8:28) 하나님의 아들은 가르침을 베푸실 때 기록된 말씀인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 부활되신 후, 두명의 제자들과 이야기하신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누가 24:27.

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말하게 하는 점에 있어서 예수의 본을 따랐다. 이러한 면에서 두드러진 예가 사도 ‘바울’이다. 그가 ‘고린도’인들에게 전도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 전 2:1-5) ‘바울’은 인상적인 말과 강력한 성품과 세상적인 지혜가 설득력이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참 숭배를 발전시키는 데, 그러한 것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그분의 영과 능력—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그의 말을 청종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위해 견고한 기초를 갖도록 하였다.

오늘날 성서가 말하게 함

오늘날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의 본을 따르는 것이 좋다. 사실 자기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사도 ‘바울’의 말은 그들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니라].”—고린도 전 1:26, 27.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학식, 능력, 또는 성공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것은 매우 현명치 못한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적 탁월성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인간 지혜에 근거해서 인상을 심어 주려고 한다면, 정직한 사람들이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말 가운데는 온정, 겸손 및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공개적으로 선포할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의를 이끄는 대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알려 주시는 바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기들의 믿음을 세우도록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서를 직접 읽어줄 기회가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는 영적으로 도와 주려고 사람들을 방문할 때, 사람들에게 성경적 사상을 남겨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성경이 말하게 하는 것이 좋다. 성경을 사용함으로써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쾌락에 대한 세상적 견해가 흔히 뒤틀리고 타락한 것임을 명백히 설명해 줄 수 있다. 동시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안전한 지침이며, 해로운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부모들이 성서 자체의 말을 들려줄 때, 자녀들은 보통 자기들이 받은 교훈이 단순히 불완전한 부모들의 생각이 아님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교훈은 사실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서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함

성서가 말하게 하는 일은 단순히 성서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성서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특정한 성경 귀절의 전후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앞뒤의 귀절을 읽어본 후에, 이것은 누구에게 말한 내용인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등을 자문해 보는 것이 좋다.

문맥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로 고린도 후서 10:3, 4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귀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말이다. ‘바울’의 말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라들의 육체적 전쟁에 상관하지 말라는 내용인가? ‘고린도’인들은 그의 말을 그렇게 이해하였는가? 전후 귀절에서 ‘바울’은 칼, 창, 활, 화살과 같은 문자적인 무기에 관하여 말하였는가? 아니다. 문자적인, 육체적인 무기에 관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예로서 5절과 6절을 보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문자적인 칼이나 창 등등의 무기들은,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거짓 이론과 기타 장애거리들을 제거하는 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회중 밖의 일을 판단할 권한을 받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자기와 자기 동료들이 전체적으로 세상의 불순종한 자들 위에 형벌을 줄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보낸 편지에서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리라].” (고린도 전 5:12, 13) 따라서, ‘바울’은 파괴적이고 거짓된 이론과 가르침으로부터 회중을 보호하기 위해 회중 내에서 영적 전쟁을 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한 영적 싸움에서 ‘바울’은 “간계”, ‘공교함’, “궤계”, 떠드는 말 및 세상 철학 등의 ‘육체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고린도 후 11:3; 12:16) 그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여 의의 병기만을 사용하였다.—고린도 후 6:3-7; 에베소 6:17.

이것은, ‘바울’의 그 말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싸움에 개입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인가? 문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세상의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기본적인 진리 또는 원칙을 표현하고 있다. 회중 내에서 거짓 가르침을 타파하는 데 육체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나쁘다면 다른 족속이나 민족, 인종, 정치 이념 등등을 대항하는 전쟁에서 문자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역시 나쁠 것이다. (에베소 6:11, 12 비교)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세상의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육체의 무기에 관한 이 성귀를 사용한다고 해도 문맥의 정신에 위배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에 들어 있는 원칙을 단순히 적용, 혹은 그 적용을 확대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문맥을 무시하고 그 성귀를 세속적인 싸움에 직접 적용하고 그 점에만 국한시킨다면, 그것은 사도 ‘바울’의 논점을 납득하지 못한 처사일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사실상 성서가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전후의 문맥 외에 관련된 시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릇된 결론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가 아모스 9:2이다. 그 귀절은 다음과 같다. “저희가 ···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라].”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이 ‘로케트’를 타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도망하려는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모스’ 시대에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이 귀절을 산으로 올라가는 것, 종종 구름에 가리워지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간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성서를 올바로 사용하는 점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또 다른 요인은 지리적인 요인이다. 예를 들어 「전도서」는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으며, 그 도시는 건기(乾期)와 우기(雨期)가 있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있으면 전도서 12:1, 2을 이해할 수 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여기서 청년의 때는, 해와 달과 별들이 구름없는 맑은 하늘에서 빛나는 여름철의 건기에 비유되었다. 그 반면, 곤고한 날인 늙은 시절은 춥고 비가 오는 계절인 가을과 겨울로 비유되었다.

그뿐 아니라, 성서를 사용할 때, 사실과 부합되는 이치적인 방법을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다윗’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 일에 관한 ‘다윗’의 글을 살펴보자.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니라].” (사무엘 하 22:10-14) 어떤 사람이 이 시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면, 그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강림하지 않으신다. ‘다윗’은 분명히 자기를 위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결과를 무서운 폭풍에 비유한 것이다. 폭풍우 때에는 낮게 깔린 구름으로 ‘하늘을 두리우’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성서 필자들이 의도한 사상을 터득하려고 노력한다면, 성서의 내용을 잘못 전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사용하면 진실한 사람들이 공감하여, 하나님의 말씀 위에 믿음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성서가 그 자체의 강력한 소식을 말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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