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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 교육에 관한 재고
  • 깨어라!—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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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1
깨71 9/8 3-7면

대학 교육에 관한 재고

지난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과 행복으로 가는 길이 대학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관하여 재고하고 있다. 태도의 변화에 대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10년이나 20년 전만 하더라도 복합적인 요인들이 명백하지 않았다. 이러한 요인들은 이제 많은 나라에서 “고등” 교육을 위기의 상태에까지 몰고 가게 되었다.

교육이 당면한 문제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가 최근 미국 ‘카네기’ 재단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편집자이며 전 대학 교수인 한 참여자 ‘찰스 실버만’은 그 연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시작하였을 때 나는 학교에 대한 격렬한 비평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러한 비평이 타당한 것같이 생각된다.”

부적당한 과정

한가지 비평의 국면은 많은 대학 공부 과정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교육자들은 종종 그 과정이 젊은이들이 종사하게 될 분야 혹은 일반적인 생활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 교육 구조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교사의 훈련이다. 그러나 이 중대한 국면에 대하여 ‘실버만’ 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교외의 중류 학교 선생 중 불충분하나마 예습을 한 선생을 만난 적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예일’의 ‘세이머사리손’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즉 ‘교사 교육의 취지와 절차는 항상 실제 가르치는 일과 명확한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 동일한 비평문은 또한 단지 교사 훈련뿐만 아니라 교육의 다른 분야도 지적하였다. 대부분의 공부 과정은 학생들이 졸업 후 종사할 일과 거리가 멀다. 많은 교육자들이 특히 교양학과 과정에 있어서 전연 사용하지 않을 것을 배우는 것보다는 배우는 방법에 더 많은 강조가 주어져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 편의 상당한 기술을 요한다. 그리고 ‘카네기’ 보고서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선생들은 예습하지 않음을 자인하고 있다.

또한 이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보통 선생들이 더욱 더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개인적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큰 대학 내에서 학생들은 동료 학생들의 미로에 정신이 빠져 있다. 선생들이 조그만 학급을 가르치고 약 12명의 학생들과 동시에 문답식 수업을 하던 시대는 복잡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변모하였다. 학급은 커졌으며 ‘캠퍼스’는 대도시의 거리처럼 가득차게 되었으며 기숙사는 비좁게 되었으며 어떤 기숙사는 공부의 목적인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다.”—「유. 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

그러므로 대학은 점점 생의 과업에 대한 준비가 안된 불확실한 졸업생을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재정적 어려움

더 많은 선생과 더 좋은 시설이 이용되고 있는 대신 상태는 역전되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트마우스’ 대학교 총장 ‘존 지. 케미니’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공사립의 고등 교육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대학의 운영비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으나 수입은 증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대학은 확장이 필요한 시기에 직원과 시설을 줄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미 500개의 미국 대학이 심한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갑절 이상의 재정난을 겪고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몇 조그만 사립 대학은 이미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으며 다른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할 위험에 처하여 있다. 거의 모든 공립 대학교는 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크고 부유하며 최고의 명성을 가진 학교도 심한 적자를 경험하고 있다.”

‘프린스톤’ 대학교는 금년에 2,000,000불의 적자를 예상하고 있으며 ‘콜럼비아’ 대학교의 1969년 가을에 시작한 1969학년도의 적자는 11,000,000불이었다. 그리고 1970학년도는 그 액수가 더 많다. ‘예일’ 대학교의 최근 학년도의 적자는 다음과 같다. 1967학년도—300,000불, 1968학년도—900,000불, 1969학년도—1,250,000불, 그리고 1970학년도는 1,750,000불로 추산된다. ‘예일’ 대학교 총장 ‘킹만 부류스터’ 2세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현재의 자금 감소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닦고 있는 질적인 것을 포기하거나 매우 통찰력 있는 활동의 영역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부나 경쟁 혹은 유산에 대한 것이 아닌 재능의 장기를 취하게 되는 노력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모든 대학이 심각한 재정난에 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대학교가 재정난에 처하고 있다. 또한 각 학생의 학비가 급증하고 있다. 어떤 부모들이 개선책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불투명한 학비가 비싼 그러한 대학에 그들의 자녀를 보내는 것이 득책인지에 관하여 자문하는 이유가 이것인 것이다.

폭력과 냉담

‘캠퍼스’의 무질서는 높은 교육을 손상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다. 전세계 대학은 월남 전쟁, 국가주의, 민족적 불평등 그리고 대학 자체의 역할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쟁점으로 인하여 폭력을 유발하였다.

대학의 젊은이들은 강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학생들은 폭력과 폭동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주저 없이 그들의 의견을 알린다. 이것은 때로 교실 내의 절차를 파괴하였다. 「뉴욕 선데이 뉴스」지는 미국에서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1969-70학년도는 ‘캠퍼스’ 폭동으로 학생 4명의 사망자와 12명의 부상자를 내고 지난 봄에 끝났다. 그리고 125개 학교가 학생들의 수업 거부로 여러 번 폐강되었으며 고등 교육은 가장 심각한 도전 즉 대학의 존립을 위한 투쟁에 봉착하였다.” 어떤 부모들과 학생들은 강의를 못받기 때문에 등록금을 반납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캠퍼스’ 내의 무질서에 대한 조사에서 정부 당국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학생들이 무기 공급을 주장하는 불길하고도 충격적인 보고를 접하였으며 다른 학생들은 항의자에 대한 법률을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 채택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젊은이들의 경우에 있어서 대학은 다른 종류의 교육 즉 폭동과 폭력의 교육을 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높은 희망으로 자녀를 대학에 보낸 많은 부모들은 이렇게 되는 것을 보고는 단지 충격을 받을 따름이다.

1970년 가을에 대학이 개교하였을 때 학교 직원들은 긴장하였다. 그러나 전년만큼 폭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학생과 친밀한 자들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심한 냉담의 기분에 빠져 있으며 정부와 연장자들 그리고 학교 당국이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데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와 같은 심한 냉담이 ‘캠퍼스’를 일시 동안 잠잠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라도 더욱 장기적인 위험임이 판명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냉담은 지금까지의 어떠한 것보다도 훨신 더 심한 행동 즉 또 하나의 위기를 자아낼지 모른다는 것이다.

도덕적 풍조는 어떠한가?

폭력과 반항만이 대학에서 계속되는 혁명적 행위가 아니다. 또 다른 종류의 혁명이 파급되고 있다. 그것은 생활의 마련과 관련되는 것이다. 같은 기숙사를 점점 더 많은 남녀들이 감시없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용납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학생들이 종종 밤낮 어느 시간에든지 서로의 방을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다.

소수의 교육자들은 이것이 성적 도덕감을 저하시키는 것으로 인도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예를 들면 당황한 부모가 그들의 딸이 사용하는 대학내의 남녀 공용 기숙사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대학의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당신의 딸의 기숙사 침실에 있는 젊은이가 당신의 딸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누이로 생각할 때도 무슨 일이 일어나겠읍니까?”

그러한 견해는 정말 어린애의 얘기와 같다. 오늘날의 젊은 남녀가 감시없이 같은 집에 함께 있도록 허용되었을 때 서로 단순히 오빠나 누이로 대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망상이다.

어떤 성인들은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옳고 그른 것을 배우지 않았을 경우 일단 입학한 후에는 너무 늦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옳은 것을 배웠다고 해도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건전한 성서의 원칙은 참되다. (고린도 전 15:33) 방탕을 하등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젊은 남녀들로 둘러싸인 환경의 압력은 이전에 높은 도덕 표준을 가지고 있었던 젊은이를 타락시킬 수 있다.

물론 어떤 학교 직원이나 부모들 그리고 학생들은 높은 성적 도덕에 대하여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고등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 아들 딸을 대학에 보낼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관심이 없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어려운 사실 즉 의심의 여지없이 대학이 성적인 도덕을 타락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학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믿을 만하다면 당신은 도덕이 개선된 학생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작가이며 ‘뉴욕’ 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엘. 티. 우드워드’ 박사는 고등학교 내의 성적 부도덕이 매우 급속히 증가하였다고 말하고 동시에 이렇게 말하였다. “대학 내에서 성은 더욱 보급되어 있다. 남녀 대학생 전부와 회견하여 보면 한번도 성관계의 경험이 없는 대학생은 단지 몇 ‘퍼센트’에 불과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많은 학생들이 동정을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지만 4년 후 “졸업할 때즈음 되면 매우 높은 비율의 학생들이 더는 동정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즉 젊고 감수성이 강한 학생들이 집을 처음으로 떠날 경우 대학은 보통 성도덕을 타락시킨다. 당신의 자녀는 예외일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환각제의 실상

성 도덕의 타락은 광적인 환각제 유행으로 더욱 그 도가 더하여졌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최소 어떤 종류의 환각제를 경험하였다.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치명적인 ‘헤로인’의 중독자가 되고 있다.

‘뉴욕’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정치학 조교수인 ‘마샬 버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관련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명이 파괴되고 있음을 관찰하고 비탄에 빠져 ‘헤로인’을 취하며, ‘헤로인’을 취함으로써 생명의 파괴를 관찰하고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 내에서의 환각제 사용이 매우 보편화되었음을 「뉴욕 타임즈」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일한 개방 상태로 학생들은 ··· 시립 대학 ‘캠퍼스’의 넓은 잔디에서 숙제를 한다. 다른 학생들은 ‘헤로인’을 사서 사용하기 위하여 그곳에 모인다. ··· 잔디나 간이 식당과 같은 어떤 장소에 사용자가 출현하는 것이 극적으로 보인다. 정오 강의가 끝난 후 15분 동안에 12명이 환각제를 사용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기대되는 일

폭력과 성과 환각제에 대한 참으로 동일한 태도가 도시 안과 국가 내에 널리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경험하기 쉽고 가출하기 쉬운 연령의 젊은이들에게 더욱 집중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소수의 부모들이 원하는 것은 행실의 완전한 변화이다. 종종 부모를 비탄에 빠지게 하는 성격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이들은 폭력, 냉담, 성병과 원하지 않는 임신을 동반하는 성적 부도덕, 환멸감 그리고 환각제에 의존하는 풍조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당신의 자녀가 갖게 되기를 당신이 원하는 풍조는 아닐 것이다.

그 밖에 당신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거의 모든 대학에는 무신론적 철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동물적인 견해를 갖게 하는 진화론적 사상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 거기에는 억제력 혹은 생활에 대한 지침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 증명된 성서의 높은 원칙을 포기하도록 인도한다. 유익하다는 것은 그러한 높은 표준을 믿고 실행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

그런데 또한 사람들이 대학에 다니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 즉 더 좋은 직업을 위하여 준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현재 그 점에 있어서도 공공연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대학 졸업자에게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지금 같이 적은 때는 결코 없었다.

대학의 직업 소개 고문은 회사가 졸업생을 채용하는 면에 있어서의 뚜렷한 감소를 보고하였다. ‘미시간’ 주의 직업 소개소 이사는 그것을 “25년간의 직업 소개소 역사상 가장 심한 불경기”라고 말하였다. 대학은 더욱 적은 취직 자리를 위하여 경쟁하는 기록적인 많은 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높은 학위를 가진 자들까지도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동차용 기름 회사의 대학생 모집 노력책인 ‘로버트 브록스뱅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래의 보수를 생각하고 실업학교에 다닌 많은 아이들이 금년에는 실망할 것같다. 많은 회사는 연초 MBA(경영학 석사) 학위를 가진 자의 채용을 줄이고 있다.”

과학, 교육, 공학 그리고 경영학 분야의 석사 박사 학위를 가진 수천명의 사람들이 현 경제 불황기에 실직하였다.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지난 해 전문직과 공업 기술직 직업인의 실직률은 67‘퍼센트’로 급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연봉이 40,000불인 한 화학기사는 봉급 삭감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600통 이상의 편지를 보냈으나 확실한 직장을 제의하는 회답은 한 통도 받지 못하였다.”

회사가 사람 채용을 주저하는 또 한가지 문제는 직장을 위한 자격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사 학위를 가진 어떤 사람이 자포자기한 나머지 봉급이 적은 직업를 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회사는 그러한 사람을 신중을 기하여 채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쉽게 불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또한 그는 더 좋은 직업을 위한 기회가 있으면 즉시 그만둘 것이다.

어떤 자는 봉급이 많은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았으나 자신이 사표를 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회사를 박차고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으며 허탈감도 없다고 말한다. 구식 생활 방식과 근무 방식에 대한 환멸감이 너무 컷기 때문에 어떠한 생각도 그들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게 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실히 모르는 자들과 해결책을 강구하느라고 분투하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참되다.”

그렇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 ‘경쟁’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단히 높은 희망을 가지고 입사한 회사 간부들은 간부직 혹은 전문직 ‘경쟁’을 그만두고 있다. 대학 교육이 약속하는 생활 방식에 관한 논평은 비관적임이 증명되었다.

사실 대학의 목적과 결과에 대한 환멸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한 약 삼분의 일의 학생만이 완전한 4년 과정을 끝낸다. 1971년 3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출판한 「고등 교육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다수가 학교를 중퇴한다는 것은 대학에 대한 불만과 개인적 목표와 관심사를 재고하겠다는 욕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학교를 그만두는 주된 이유인 것이다. ··· 대학은 많은 학생들의 주의를 이끌지 못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열심을 이끌어 들이지 못하고 있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명백히 부정적 체험인 것이다.”

다른 직업

과거에 대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위치를 구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시간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오늘날 많은 직업은 높은 봉급의 대학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많은 면으로 사용될 수 있는 손일을 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최근까지 손일하는 사람의 직업을 고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성공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소위 말하는 “고상한” 대학 졸업자들과 전문가들은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반면 목수, 연관공, 전기 기사, 기타 손일을 하는 사람들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어떤 고물 수집인들은 현재 연 10,000불을 벌고 있다.

상업과 손일을 배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그것은 오늘날 실용적인 일을 배우는 것이다. 현재 어떤 부모들이 대학 교육 문제를 재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것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 배울 수 있는 고등 학교에서 그들의 아들 딸들이 더욱 유용한 손일을 익히는 과정을 거치기를 원한다. 고등 학교를 졸업한 후 자녀들은 실업 학교에서 잠간 더 배우거나 가치있는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손일에 대한 자격을 구비하게 되며 종종 간부 사원과 같은 위치가 초래하는 고통을 피할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유용한 손일을 익히도록 해야 할 또 다른 건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취된 성서 예언을 통하여 오늘날의 공업적 사회가 종말에 가까워졌음을 알고 있다. 곧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잠언 2:20, 21; 요한 1서 2:17) 그후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에서의 재건 사업은 이 온 땅을 낙원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누가 23:43) 그때 많은 형태의 손일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리고 농업과 집을 짓는 기술도 마찬가지로 유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소위 말하는 “높은” 교육을 자녀들에게 시키지 않음으로써 부모들은 증가 일로에 있는 부도덕한 환경에 자녀들을 내놓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제도에서의 생활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4면 삽화]

대학 교육은 얼마나 유익한가?

대학은 실제로 더 나은 직업을 위한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인가?

‘캠퍼스’의 교제가 당신을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향상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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