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74 2/8 19-22면
  • ‘카이제르’의 군사로부터 그리스도의 군사로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카이제르’의 군사로부터 그리스도의 군사로
  • 깨어라!—1974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나의 어린 시절의 종교 교육
  • 제1차 세계 대전
  •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추구함
  • 군인으로서의 경력이 중단되다
  • 다시 병사가 되다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다
  • 성서 진리를 배움
  • 다른 종류의 군사가 됨
  • 물러서지 말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 군인
    성경 통찰, 제1권
  • 전쟁 영웅이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다
    깨어라!—1998
  • 행복한 가정 생활—우리가 그것을 달성한 방법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6
더 보기
깨어라!—1974
깨74 2/8 19-22면

‘카이제르’의 군사로부터 그리스도의 군사로

금세기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서남 ‘러시아’에 위치한 어떤 독일인 거류지에서 매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두 줄로 인내심 깊게 서 있었다. 한 수염난 연로한 신사와 그의 아내가 사람들이 늘어선 두줄 사이를 지나 교회로 들어간 후에야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들어가곤 하였다.

그 연로한 부부는 나의 조부모였다. 그분들은 이처럼 매주 회중의 존경을 받았는데 이는 그분들이 사재를 털어서 교회를 건축할 만큼 종교에 대한 성심이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그 두분의 장남이었는데, 그 분도 조부모님 못지 않게, 할 수 있는 한 자기의 일곱명의 자녀들에게 동일한 신앙심을 심어주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종교 교육

매일 아침 농장의 일이 시작되기 전, 아버지는 전 가족과 농장의 머슴들을 모두 불러들여 큰 탁자에 둘러앉아 성서 낭독을 하게 하곤 하셨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고, 새 날과 창조주의 사랑에 찬 돌보심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였다.

이것이 내가 어린 시절에 성장하던 분위기이다.—아마 자기의 생애의 거의 전부를 군인으로서 보낸 사람에게서 생각하기 힘든 환경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독일로 이주하였으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배움은 내게 있어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종교 교육만은 예외였다. 종교 교육에 관한 한, 나는 초보도 미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를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은 하나님과 그의 목적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 방법이었다. 심지어는 「루터」 교회의 회원으로 견신례를 받기위한 교육 마저도 내게 실증을 안겨주었다. 목사는 단순히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 어린이들이 이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지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거리도 아닌 것 처럼 보였다. 비록 내가 교회 회원으로 견신례를 치루었으나 나는 예배 의식에는 결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주신 것은 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그 평화롭던 기간 중에, 병사로서의 나의 경력이 시작된 어떤 변화가 도래하였다. 내가 11세 되던 해, 독일은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꽃으로 장식된 총을 메고 행진하는 최초의 군인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우리 소년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였던가!

곧 아버지도 군인이 되었으며, 어머니에게 일곱명의 어린 자녀들을 돌보게하고 떠났다. 어머니의 건강은 튼튼한 편이 아니었으므로, 여러가지 힘든 일이 맏아들인 나의 어깨에 지워지게 되었다.

일년이 흐르고 또 한해가 지나갔다. 그래도 아버지는 군대로부터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가족을 돕기 위하여 자주 학교를 빠지곤 하였다. 나는 끊임없이 이렇게 자문하곤 하였다. 우리의 고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군관구 고문관을 찾아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인으로 복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고문관은 내가 불과 15세 밖에 안되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복무하고자하는 갈망이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독일의 ‘카이제르 빌헤름’ 2세에게 편지를 써서, 나의 요청을 밝혔다. 마침내 나의 요청이 수락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던가! 그리하여, 1918년 봄, 나는 독일 육군에서 가장 어린 병사가 되었다.

그 해 11월에 전쟁이 끝났을 때까지도 아직 나는 수많은 가족들에게 전쟁이 준 피해와 상처를 분명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나에게 있어서, 군인으로서 보낸 그 수개월은 어린이를 어른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그것은 니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의 시발점이었다.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추구함

전쟁은 패배로서 끝나고 군대는 해산 되었다. 나는 기계 기술의 대가가 되리라는 결심을 품고 기계공으로서의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후의 어려운 환경으로 인하여 그것은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차 독일에서도 100,000명의 군인의 재무장이 허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기술의 연마를 완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나의 기술 훈련을 계속하며 동시에 병사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나는 보병에 입대하였다. 질서와 규율은 내게 매력을 끌었지만, 반면 강제적인 일요일 교회 참석은 그렇지 않았다. 병사들로서 우리들은 일요일까지는 연합되어 있다가, 그 때가 되면 ‘가톨릭’ 교인들은 이리로,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저리로 각각 흩어지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이었던가!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이 있을 뿐이 아닌가? 우리는 같은 성서를 읽지 않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라는 이름으로 이 시간은 갈라지지 않으면 안되는가? 심지어는 예배 의식까지도 내게는 유치하게 보였고, 설교에도 가치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처럼 보였다.

군인으로서의 경력이 중단되다

그러던 중 나는 무릎에 부상을 입게 되어 군인으로서의 나의 경력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로 돌아가는 대신, 나는 그 동안 교회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 두가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대단히 슬픈 일을 당하였다. 아내와 나는 6개월된 우리의 첫 아이를 잃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사는 20‘마르크’짜리의 설교를 할 것인지 25‘마르크’짜리의 설교를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는 5‘마르크’를 더 내면 종을 울려주고 더 나은 설교를 하게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은 돈이로군”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러한 생각은 나의 이웃 사람과 관련된 두번째 경험에 의하여 확증되었다. 그는 전국적으로 만연하던 극심한 실업사태 때문에 대단히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여도 교회세를 지불 할 수 없었다. 이해해달라고 아무리 목사에게 탄원해도 그의 가구들은 세금을 충당하도록 몰수되고 말았다. 그것은 내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즉시 나는 법정에 가서 교회와의 모든 유대를 합법적으로 말소시켰다.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독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한 조치였던 것이다. 때는 1931년이었다.

다시 병사가 되다

1934년 나는 다시 한번 군대에 입대하여 나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계속하게 되었다. 잠시 후 나는 장교가 되었다. 1936년이 되어, 나는 내란이 터진 ‘스페인’으로 전속되었으며, 그곳에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스페인’의 수도원들은 요새와 무기 저장고가 되었던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나에게 독일 공군을 위하여 만든 비행기들을 검열하는 책임이 부여되었다. 전쟁 초기의 어느 날 한 군용 비행장에 장식을 꾸민 커다란 단상이 설치되었다. 깃발들이 펄럭이고, 비행기들과 무기들이 전시되었고, 한 대대 병력 전체가 열병하였다. 한 대의 ‘리무진’이 귀빈들을 태우고 도착하였다—그들은 한명의 ‘가톨릭’ 사제와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였다!

그들의 연설은 얼마나 감동을 주는 것이었던가! 그들은 우리가 의로운 대의 명분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 의식 끝에 그들은 모든 무기를 축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이들 교직자들이 기도를 드린 신은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음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또다시 패전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동료들과 함께 나는 전쟁 포로가 되었다.

나는 석방된 다음, 내가 가장 즐거운 생활을 누리던 고향을 찾아갔다. 비록 나는 군인으로서 소령의 계급에 도달하였지만, 직업을 구할 때 고령자로서 밀려나곤 하였다. 나의 소유물은 모두 없어졌고, 결혼 배우자 마저도 사망으로 인하여 잃고 말았다. 살 곳이 없는 나는 직업을 구하여 ‘프랑스’로 이주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나는 독일인 포로들과 도서관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개방된 한 도서관이 있는 시청에서 일하였다. 어느 날 한 서가에서 다른 서가로 옮겨지던 나의 눈은 몇권의 성서가 꽂혀있는 한 구석에 멈추었다. 나는 한 권을 빼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비웃지 않도록 작업복 상의 속에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일 동안 나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근무 시간 동안에도 나는 순간 순간 기도하고 맹세하고 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결코 상실치 않았으나, 이제 나는 내가 발견할 수 없었던 진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성서 진리를 배움

3년간의 외로운 삶을 보낸 후, 나는 재혼하여 독일로 돌아왔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아침 나의 아내와 나는 소수의 남녀들이 자전거를 타고 이웃 읍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우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우리는 한 젊은이를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였다.

그는 성서를 가지고 왔는데, 충실한 교인이던 나의 아내 마져도, 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들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우리들은 많은 질문을 하였으며, 그 젊은이는 그것들에 대하여 모두 성서로부터 대답해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한 권의 책을 제공하면서 그 책이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 제공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들로 말미암아 깊은 감명을 받게되었으므로 그의 방문을 결코 잊지 않았다.

한 겨울이 지나갔다. 어느 날 나는 지난 여름 우리를 방문한 그 젊은이가 살고있는 그 읍에 볼일이 있었다. 정오가 거의 다되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가 두권의 잡지를 잘 보이게 들고 길가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치 누가 나를 조종하는 것 처럼, 자전거를 돌려 세웠다.

그 잡지들은 「파수대」와 「깨어라!」였다. 나는 그것들을 전에 본적이 없었다. 그 가격은 마침 내가 가지고있는 돈의 액수인 25‘페니’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그 두 잡지를 받았는데, 나의 서슴없는 태도에 놀란 그는 나를 방문하겠노라고 제의하였다. 2시간 후 그는 우리 집에 도착하였다.

그가 오기 전, 나의 아내와 나는 겨우 간단한 식사를 하고 우리의 작은 방을 정돈할 시간 밖에 없었다. 나의 아내는 한 잡지의 제목—“「파수대」 여호와의 천국선포”—밖에는 읽을 수 없었는데, 그때에 그 남자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나의 아내는 그에게 마치 물을 쏟아붓듯이 질문들을 퍼부었다 “여호와는 누구인가? 그는 ‘유대’인의 신이 아닌가?”

긴 설명을 하는 대신, 우리의 방문자는 자기의 가방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그 책은 바로 지난 여름 우리가 받기를 거절한 동일한 책—‘왙취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발행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였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여호와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장을 함께 읽었다. 우리는 그분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심을 배우게 되었다.

매주 그 사람은 우리의 지침서로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책을 사용하여, 우리와 성서를 연구하기 위하여 계속 방문하였다. 우리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우리는 마치 눈에서 보이지않게 가리고있던 비늘이 벗어질 때의 사도 ‘바울’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사도 9:17-19) 영적 안맹의 비늘이 우리의 눈에서도 벗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종류의 군사가 됨

우리의 선생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였다. 아마 우리보다 더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훌륭한 것들로써 영적으로는 부하였으며, 그것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는 부분 시간 직업을 가지고 자신을 부양하면서, 일차 세계 대전의 종전이래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전파자로서 봉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하였을 때 그는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10‘마르크’를 주어서 우리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회에까지 여행을 하여 그곳에서 침례로써 우리의 헌신을 상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나는 한 군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디모데 후서 2:3에 묘사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 것이다. 그 때 이래, 나는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영적 암흑에 대항하여 ‘선한 싸움’을 싸웠고 여호와를 찾고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도와왔다. 내가 은퇴한 후, 우리는 ‘캐나다’로 이사하였으며, 이곳에서 나의 아내와 딸은 ‘파이오니아’를 계속하여, 가까운 장래에 땅을 낙원으로 만드실 여호와의 놀라운 목적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는 데 그들의 전 시간을 바치고 있다.

비록 나의 건강이 전과 같이 좋지는 않지만 나는 여호와를 섬기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내가 ‘카이제르’와 그의 계승자들을 위한 군사였을 때에,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복무하였고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이제 그와 달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나는 군인으로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내가 참된 지혜를 찾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연구하게 된 후이다. 이제 나는 참된 보상,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상을 바라보고 섬기고 있는 것이다.—기고.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