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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74 2/22 17-20면
  •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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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가?
  • 깨어라!—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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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4
깨74 2/22 17-20면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가?

당신이 기부한 돈의 단지 1내지 5‘퍼센트’만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고 나머지는 자선 기금을 모으는 비용에 충당된다면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일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자선 단체의 회장이 봉급과 수당으로 매년 75,000‘달라’를 받는 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달갑게 혹은 기쁘게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고 더구나 흔히 있는 일이다!

매년 미국에서 자선 단체에 들어오는 돈은 이백억 ‘달라’가 넘는다. 이 가운데 41‘퍼센트’ 가량은 종교적인 목적을 위한 기부금이고, 건강과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기부금이 각각 16‘퍼센트’이고, 7‘퍼센트’는 복지를 위한 기부금이고, 나머지는 문화를 비롯한 기타 목적을 위한 기부금이다.

기금을 호소하는 자선 단체는 참으로 많다.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는 자선 단체도 있고 지방에 국한된 자선 단체도 있다. 또한 사람들이 기부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다.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부하는 사람도 있고, 세금이 줄기 때문에 기부하는 사람도 있다. 죄책감이 있어서 자기의 죄를 보상하려는 희망으로 기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동정심 혹은 측은한 마음에서 종교적 혹은 인도주의적인 이유에서 기부하는 사람도 있다.

주는 것이 축복을 초래할 수 있다는 데는 부인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다. (사도 20:35) 그러나 그 분은 또한 그릇된 동기로 주는 것은 헛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 6:1-4 참조.

올바른 동기로 줄 때 축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합당한 일을 위하여 기부한다는 것을 확인하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자선 단체에 기부되는 억대의 기금이 어느 정도나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되며 소위 자선 단체는 상업적인 이득을 바라는 사람들에 의하여 어느 정도로 운영 혹은 이용되고 있는가?

종교의 명목으로

이러한 기부와 사용 방법에 대하여 ‘캘리포니아’ 주(미국)의 한 신문은 “너무 많은 총경비, 지나친 모금 비용으로 비난받는 직업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동 신문은 그 곳 도시의 “자선 호소 중역회” 회장이 “자선 사업에서 가장 야비한 수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행위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 벌이는 직업적인 자선 모금 운동에 대하여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모금 운동을 하는 종교 단체와 종교인들이 최악의 범죄자들이다.”

이러한 비난을 지지하는 것으로 몇해 전 ‘로마 가톨릭’의 평신도 잡지 「성벽」지의 기사가 있었다. 그 잡지는 미국의 저명한 ‘로마 가톨릭’ 주교 한 사람이 “신앙 보급 총회”로 알려진 자기의 모금 단체를 통하여 미국의 ‘가톨릭’ 교도들에게서 “자선 기금을 착취”하는데 힘쓰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세계의 여러 미개발 지역에 있는 설흔 다섯 명의 주교와 회견한 필자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교회는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구실로 매년 수백만 ‘달라’를 모으고 있다 ···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자선 사기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비난을 주교에게 제시하였을 때, 주교는 그러한 주장을 토론하는 회견을 거부하였고 측근자들은 그가 “할 말이 없다”고 말하였다.

개인적 이득을 생각지 않고 봉사하는가?

자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비이기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의 견해인데 반드시 그러한가? 예를 들면 여러 해 동안 한 자선 단체는 동양의 고아들의 양육비 보조금으로 모금 운동을 하여 왔는 데 그 단체는 고아 한 사람당 매달 12‘달라’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단체의 회장은 그러한 고아들에게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는 자기가 ‘버지니아’ 주 상업 회의소 중역으로 있을 때에 받은 금액과 같은 20,000‘달라’의 봉급을 받았다.

또 다른 예는 고 ‘바실 오코너’이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함께 소아 마비 구제 모금 운동 전국 재단을 창설하였으며 1938년 동 재단의 창립 이후 1972년까지 총재로 있었다. 처음에 그는 수당만 받았으나 마지막 13년간은 연봉 54,000‘달라’와 21,405‘달라’ 정도의 수당을 받았다. 소아 마비 구제 모금 운동에 기부한 사람들 중에 동 단체의 총재가 매년 75,000‘달라’를 받았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가? 당신은 이러한 것을 알고도 생각이 같겠는가?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개인적으로 주는 것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겠는가?

엄청난 모금 비용

적십자사와 같은 유명하고 전국적인 자선 단체는 10내지 15‘퍼센트’의 모금 비용은 이치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자선 기부금의 85 내지 90‘퍼센트’는 자선 사업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자선 단체는 이 점에 있어서 기대에 대단히 어긋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 신장 환자 구제 재단은 첫해(1971-1972)에 779,000 ‘달라’ 이상을 모았다. 그러나 단지 5‘퍼센트’에 불과한 39,000‘달라’만이 환자의 치료에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업무 비용”으로 충당되었다고 1973년 6월 8일자 「뉴욕 포스트」지가 보도하였다.

자선 운동의 이러한 약점을 폭로하는 ‘와싱턴’ 주 ‘시애틀’의 한 신문은 제 1면에서 “자선 운동의 가소로운 거액의 비용”이라는 전단 표제를 게재하였다. 그 기사는 자선 사업에 사용한다는 명목으로 모은 500,000‘달라’ 중에서 단지 25,000‘달라’ 즉 단지 5‘퍼센트’ 만이 자선 사업에 사용된 경우를 지적하였다. 여러 가지 예가 열거 되었는데 그 중 한 경우는 직접적인 ‘프로모우터’들은 131,288.92‘달라’를 받았고 후원을 한다고 이름을 제공해준 사회 단체는 7,893‘달라’를 받았으며 실무 자선 단체인 “심장 협회”와 “사회 및 청소년 활동”은 단지 1,000‘달라’를 받았다. 그러므로 필요한 즉 합당한 사람들은 1‘퍼센트’ 이하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얼마 전에 ‘캐나다’의 한 신문은 “자선 도적: 순진한 사람들을 농락”이라는 제하에 직업적 자선가들이 자선 단체를 운영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먼저 그들은 그 운동을 후원할 종교 단체 혹은 자매 단체를 이끌어 들이되 기부금의 일부를 주기로 약속한다. 맨먼저 경험있는 사람을 고용하여 전화로 기부금을 요청하게 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힘써 모금한 돈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 다음에 수금원—대개 여자—이 전화로 약속받은 기부금을 받기 위하여 찾아간다. 수금원은 자기가 수금한 돈의 15‘퍼센트’를 차지한다. ‘프로모우터’는 40‘퍼센트’를 차지하며 나머지 20‘퍼센트’가 자선 사업에 그리고 운동을 후원하는 단체에 들어간다.

자선 모금 운동의 이기적인 착취의 위험성을 인정하여 미국 모금 상담 협회 회장은 이렇게 충고하였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선 사업에 기부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곁들여 말한다면 이 모금 운동에 참여하던 “사기군”은 단순히 그러한 운동을 후원하는 종교 단체 혹은 자매 단체 혹은 정치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전화를 거는 사람과 수금원에게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불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기꺼이 나서서 일한다면 모금한 돈의 85내지 90‘퍼센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걸인에게 주는 것은 어떠한가?

전세계 대도시에서는 흔히 구걸이 수입 좋은 생활 수단이 되어 왔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활하는 뚜렷한 예는 ‘히피’ 청년들이다. 이제는 걸인이 소경이나 절름발이 혹은 가난을 이유로 내세울 필요가 없다. 어떠한 이유를 둘러대도 무방할 것같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는 그 도시의 ‘히피’ 영역을 찾아오는 관광객들로부터 매주 400‘달라’나 수금한다고 자랑하는 걸인이 있다.

극장가를 수시로 찾아가는 ‘뉴욕’의 ‘바이올린’ 연주자는 그 이상이다. 그의 연주가 매우 훌륭하고 특히 그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더 공부하기 위하여 돈을 필요로 함”이라는 간판 때문에 그는 참으로 행인들의 마음을 끌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매 시간 평균 35‘달라’를 모금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수표, 저축 채권, ‘카메라’, 시계도 많이 받았고 저녁 식사 초대, ‘카리브’ 해 유람 여행에도 초대를 받았다.

물론 구걸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궁핍한 상태에 있으며 일을 하기를 원하지만 불구이거나 직장을 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재해, 기근 혹은 심각한 경제 붕괴가 있을 때에는 딱한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 그 때에는 필요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것으로 베풀 수 있는 도움을 베풀면 된다.

또한 분별하여 주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뉴욕’ 시에서 어느 토요일 이른 아침에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접근하여 “여보시오, 선생님, 나는 어제 형무소에서 석방되었읍니다. 한 ‘달라’만 도와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분명히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었고 그 걸인은 매우 끈질겼다. 특히 위험 지역에서라면 환경상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일지는 각자가 판단해야 한다.

균형잡힌 견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분명히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다. (마태 26:11) 그리고 그 분은 주는 것, 비이기적이 되는 것, 친절을 베푸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다면 탐욕적인 사람 혹은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을 부채질하는 셈이 된다.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있고 합당한 일이 있으므로 분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물건을 사는 사람은 조심하라”는 옛말은 이제 “주는 사람은 조심하라”라는 말로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리스도인 전도인들은 은이나 금보다 훨씬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다. 그것은 위안과 희망과 정신의 평화를 가져 오며 심지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무료로 받았으므로 그들도 무료로 주기를 원한다. (마태 10:8; 사도 3:1-8 비교) 그리고 사실 사도 ‘바울’이 주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 더 크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였을 때 바로 이 영적인 것을 주는 것과 관련시켰다.—사도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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