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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의 정치참여—그것은 무엇으로 인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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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의 정치참여—그것은 무엇으로 인도하는가?
  • 깨어라!—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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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4 3/8 14-17면

종교의 정치참여—그것은 무엇으로 인도하는가?

당신은 아마 근년에 교회가 사회 및 정치 문제를 강조해 오고 있다는 것에 유의하였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많은 교직자들이 “참여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성실한 사람들은 이것이 종교의 합당한 역할인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지역 사회 사업과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표면상으로는 동기가 좋아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신문 표제들을 보면 교직자들이 투옥을 당하고 때로는 사회를 위한 투쟁을 하다가 생명을 상실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의 증가 배후에는 사실 무엇이 있는가? 그 동기는 그리스도교의 이념, 하나님에 대한 신앙 및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욕망에 있는가? 그것은 마침내 무엇으로 인도할 것인가? 종교의 최근 정치 참여 경향을 재검토하면 대답을 명백히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의 태도의 변화

「교회와 권력」이라는 소책자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연맹’에 의하여 발행되었는데 그 책은 종교와 정치의 역사적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해설하였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정치 면으로, 조직된 교회는 매우 빈번히 자의에 의하여 혹은 타의에 의하여 두가지 극단으로 인도되었다. 즉 때로는 힘에 의하여 정치적 세력에 대한 권위를 요구했거나 ··· (혹은) 교회는 불공평한 사회 질서의 주요 대행자 혹은 공범자 혹은 말없는 증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파나마’의 ‘가톨릭’ 대주교인 ‘마르코스 지. 맥그래드’는 이것이 더는 보편 타당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교회가 세속 세력과 평행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혹은 때로 세속적 세력과 동일하다는 이전의 개념은 급변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돕는다”, “관련성” 및 “사회 정의”라는 ‘슬로우건’을 내걸고 새로운 활동 방향을 추진하는 교직자들이 증가 일로에 있다. 과격한 사회 및 정치 비평이 정부를 옹호하는 전통적인 태도를 대신하고 있다. 그들은 평신도들도 정치에 적극 참여하라고 권고하며 심지어 “좌익” 사회주의 요소와 함께 그렇게 하라고 격려하기까지 한다.

정치 활동을 조장하는 교회 지도자들

1971년 5월에 교황 ‘바오로’ 6세는 70면에 달하는 공개 “사도 서한”을 ‘퀴벡’ 주의 대주교 추기경 ‘로이’에게 보냈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다.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사회에 달려 있다. ··· 그 방침과 사회적 참여는 필요하고 때로 긴급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초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의 방침과 사회 참여가 적절히 행해져야 할 것이다. ··· 이러한 연구와 정치 사회의 조직과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 이다”.

교황은 신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바오로’ 6세,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제목의 제1면 사설에서 ‘파리’의 일간지 「르몽드」지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것은 ‘사회 및 정치 생활 속으로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제목을 가질 수 있는 주의깊이 준비된 교황의 문서이다”.

성실한 ‘가톨릭’ 교도들은 ‘긴급한 정치적 변화’를 초래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행동할 수 있는가? 이전에 비난을 받던 “좌익”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들이 “사회적, 정치적 및 경제적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들이다. 서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 경향으로 인도되었다. ··· [예리하게 분별해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길을 따르기 위하여 어느 정도로 전념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사람은 여러가지 합법적인 [정치적] 대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르 몽드」지 1971년 5월 15일자.

좌익계 ‘이탈리아’ 신문 「스탐파」지와 「아반티」지는 이것을 보고 ‘바오로’ 교황은 이제 ‘가톨릭’ 교도들이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프랑스’의 ‘그레노블’의 주교 ‘가브리엘 마타 그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서한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이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그 공산주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아넥시 가톨릭」지 1971년 10월호.

1972년 10월 ‘루우데’에 모인 136명의 ‘프랑스’ 주교들은 이구 동성으로 동의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정치 활동을 위하여”라는 긴 보고서가 나왔다. ‘가톨릭’의 정기 간행물 「아메리카」지는 이것을 인용하여 이들 주교들이 신자들에게 정치 참여의 범위를 추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존경심, 약한 자에 대한 보호, ··· 전체주의 세력의 전복’ 등 어떤 명령은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분명하다. 복음은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중립이 아니며 복음의 증인들은 ‘일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치 문제에 대한 개입으로 인도될 수’ 있다.”—1972년 11월 18일호.

세계 여러 곳에 있는 교직자들은 “복음”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열렬히 받아들였다. ‘유 피 아이’의 이 보고는 당신을 “놀라”게 하는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체에 놀라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점에서 과격한 ‘가톨릭’교와 ‘카스트로’식 공산주의는 ‘그리스도 만세. ‘마르크스’ 만세’라는 ‘슬로건’ 아래 서로 손을 잡고 있다. ··· 그들은 전통적인 ‘가톨릭’의 신앙의 석고 성인이 아니라 최근의 분노한 인간상—‘어네스토 ‘체’ 구에바라’와 ‘콜롬비아’의 ‘게릴라’ 사제인 ‘카밀로 토레스’ 신부를 받들고 있다.”—1973년 4월 20일호 「저지 저널」지.

「라틴 아메리카」지의 보고는 또 고위층의 정치 활동을 지적한다. 동지에 의하면 “좌익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북동부의 ‘브라질’의 세명의 대주교와 열명의 주교들은 최근에 “정부와 정부의 모든 사업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동 보고서는 이렇게 계속한다.

“많은 관측자들은 그러한 사태가 ‘바티칸’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더우기, 5월 6일의 선언은 이전의 방침과 달리 교회가 이제는 정계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1973년 5월 25일.

당신은 그러한 활동을 “복음”과 관련시키기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많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도 정치에 대하여 동일한 입장을 취하여 왔다.

‘가톨릭’ 주교들이 ‘루르데’에서 회의를 가진 직후에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연맹’은 3년마다 개최하는 회의를 열었다. 「르 몽드」지는 이 모임에 대하여 긴 보고의 표제를 “정치, 토론의 요점.”이라고 하였다. 앞서 인용한 소책자 「교회와 권력」이 기초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에 관한 견해에 대하여 소책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교도, 특히 젊은이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많은 신학적 경향은 인정된 사회적 불공평을 직면할 때 이웃 사랑은 세상에 뚜렷이 개입할 것. ···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같이 “개인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적 반항”에까지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와 동일하게 세계 교회 회의 사무총장 ‘필립 파터’는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미국)의 신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학의 역할은 현 상태에 사로잡히지 말고 변화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 혁명과 폭력은 분명히 위험하다. 그러나 부활절은 혁명을 약속하지 않았는가?”—1973년 6월 11일호 「샌프란시스코 익재미너」지.

세계 회의와 기타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은 최근 혁명운동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고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강력한 비난을 받아왔다.—「뉴욕 타임즈」지 1973년 8월 29일자.

물론 모든 교직자와 모든 평신도들이 이상과 같은 활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종교가 급진적 정치에 참여하는 경향이 증대하고 있고 그 사실은 유의할 가치가 있다.

달라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살핀 바와 같이 역사상 어느 때에나 정치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직자들의 전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수백년이 지난 지금 왜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는가?

‘가톨릭’ 간행물 「아메리카」지가 이유를 제시하는 바를 유의해 보라. 최근의 한 기사는 “기본적인 신학적 교리에 대하여 심각한 의심을 가지고 있는 교역자들이 신도들에게 사회적 활동에 가담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강풍이 일’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1973년 9월 1일호; ‘고딕’체는 우리가 바꾼 것임) ‘가톨릭’의 정치 활동에도 비슷한 이유가 지적되어 있다. “많은 사제들과 수녀들은 (‘복음’이라고 불리우는) 의미있는 제도의 전도자로서의 역할을 버리고 급진적 정치 활동에 대한 ··· ‘관련’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의 결과일 (결과가 아닐) 수 있지만 확실히 믿음의 대용물은 아니다.”—1972년 10월 28일호.

그것이 문제의 요점이다. 그렇지 않은가? “심각한 의심”과 복음의 “관련”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교직자들은 다른 곳 에서 “의미”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즉 인류를 축복할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에 대한 믿음이 없이 그들은 인간의 정치적 수단에 의하여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크리스찬 센추리」지에서 ‘리처드 제이. 마우’가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와 같다.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임하게 할 수단으로 한 백성을 따로 부르셨다. ··· 세상의 구원은 여러가지 면이 있지만 한가지는 정치적 구원이다. ··· 정치적 면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증인이 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복음의 구출력을 선포해야하는 영역이다.”—1972년 12월 27일호.

그러나 성서에 언급된 “복음”은 인간이 세운 지적 정치적 정부가 아니라 땅을 다스릴 하나님의 천적 왕국에 대한 복음이다. (마태 9:35; 10:7)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그분을 참으로 섬기는 자들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18:36; 15:19) 예수의 이 말씀은 ‘다니엘’이 오래 전에 한 말과 일치한다.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왕국을 다스릴 자들이 사람들일 것인가에 관하여 ‘다니엘’의 영감받은 예언은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할 것이라고 말한다.—다니엘 2:44.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천국이 전혀 분리된 것임을 믿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와 권력」이라는 소책자는 “[그리스도와 국가와의] 이러한 관계는 두 영역을 분리시키는 성경의 편협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성서의 명백한 입장을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소위 “성경의 편협한 이해” 대신에 성실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꾀하는 또 하나의 정치와 혁명이 아닌가? 그들은 “불공평한 사회적 질서의 주요한 대행자, 공범자 혹은 말없는 증인”으로서의 믿음없는 이전의 행로가 무익함을 깨달을지라도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 있는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성실한 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있는가? 그것이 그들의 최대 책임이지만 증거는 명백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정치 참여는 무엇으로 인도하는가?

당신은 정치 지도자들이 종교가 정치의 영역에 호전적으로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 본다고 생각하는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자처하기 때문에 무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점점 그들은 정치적인 간섭자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러한 대우를 받고 있다. ‘가톨릭’ 정기 간행물 「메리크놀」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간섭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라틴 아메리카’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다 ··· 그들은 우익 정부의 세력을 전복시키려고 위협하는 ‘게릴라’와 동류로 그리고 공산주의자로 취급되고 있다. 그들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영적 이유라기 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1973년 2월호 47면. (‘고딕’체는 우리가 바꾼 것.)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상실하기까지 하였으며 그들의 동조자들도 다수가 생명을 상실하였다. 예를 들면 ‘볼리비아’에서 ‘네스터 파즈’는 “마침내 무장한 70명의 학생들과 함께 언덕으로 갔다.” 그들은 “정부군에 의하여 추적을 받았고 살해당하였다.”—「샌프런시스코 익재미너」지 1973년 1월 11일

당신은 이러한 종류의 고통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사도 ‘베드로’가 말한 원칙에 유의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베드로 전 4:14, 15.

이것을 염두에 두고 최근의 원자탄 실험 논쟁에 대한 「뉴욕 타임즈」지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유의하여 보라.

“군인들은 교직자들에게 국정에서 손을 떼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며 자비를 보이고 믿음을 전파하는 데 진력하라고 말하고 있다. ··· 군인들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교인들을 책망하고 있다. 교인들은 군인들이 교직자의 달라지는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군인들을 꾸짖고 있다.”—1973년 7월 18일호

교직자들의 정치 참여는 마침내 무엇으로 인도할 것인가?

종교의 정치 참여 앞에는 무엇이 있는가?

성서는 하나님께서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그 두가지의 친밀한 관계는 불의의 성관계로 비유되어 있으며 “간음”으로 불리운다. (야고보 4:4) 그러므로 적절하게도 역사에 나타난 세상 종교의 역할은 「계시록」에 “큰 음녀”와 같으며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다고 묘사되어 있다.—계시 17:2.

그러나 성서는 이 음녀에게 사태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권력을 세계적인 정치 기구인 ‘유엔’(짐승으로 상징된)에 맡긴 정치 지도자들 모두는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준 “열 뿔”로 묘사되어 있다. 이어서 「계시록」은 멀지 않아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고 알려 준다. 이전에 이 음녀와 사이가 좋았던 자들이 음녀를 “미워할”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며 음녀의 정체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폭로하고 음녀를 멸망시킬 것이다.—계시 17:12, 13, 16.

현재 세상의 종교는 경건이라는 가면을 쓰고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다. 성서에서 지적하듯이 세상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황으로 않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성서는 또한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계시 18:7, 8.

그러므로 종교의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단죄와 정치적 통치자들로부터의 의외의 멸망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예언된 멸망은 놀랍게 갑자기 올 것이다.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종말을 피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계시록」은 명백히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준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시 18:4.

만일 당신이 숭배면으로 성실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원한다면 당신은 세상 정치로 불순하게 된 종교에서 ‘나올’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종교와 연합할 것이다. 그 종교를 실천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러한 목표에 이르도록 당신을 돕는 것을 기뻐한다.—야고보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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