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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태가 그 해결책인가?
  • 깨어라!—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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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5
깨75 12/8 3-6면

낙태가 그 해결책인가?

아마 당신은 전에 이러한 질문을 들어보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러 문제와 관련되어 그러한 질문이 자주 일어난다. 이제 당신은 이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이 세계의 인구 폭발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가? 합법적인 낙태는 많은 여성의 생명을 앗아가는 불법적인 낙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합법적인 낙태가 원치 않는 임신과 관계된 개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일 것인가?

낙태에 대한 태도와 법은 지방에 따라 크게 다르다. 회교를 믿는 ‘아랍’ 제국에서는 대부분 낙태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나이제리아’에서는 의사가 여인의 생명이 위독하다고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다. 1975년 2월 25일 서부 독일 헌법 재판소는 낙태 행위에 대하여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와는 반대로, 1973년 1월 22일 미합중국 대심원은 임신 초기에 낙태할 수 있는 권리가 여자에게 있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임신 7개월까지는 요청만 하면 거의 즉시로 합법적인 낙태를 할 수 있다. 물론 낙태를 허용하는 나라에 있어서도 그 시행 세칙은 나라마다 다르다.

인구 문제에 대한 해결책?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수백만 명이 합법 혹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낙태를 하고 있다. 국제 연합 인구 분과는 “낙태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일 산하제한 방법일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낙태가 인구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책이라는 의미인가?

아주 자유로운 낙태법이 1948년에 일본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어떠한가? 물론 인구는 억제되었다. 그러나 손쉬운 낙태를 허용한지 사반세기가 지난 후 ‘토오쿄오’ ‘니혼’ 대학의 ‘티이. 에스. 우에노’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낙태가 일종의 생활 방식이 되어버렸다. 도덕 생활은 무질서하게 되었다. 성의 자유를 표방하는 시대가 되었고 태아의 생명은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 않다.”

낙태가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도덕적으로 해를 주었다. 낙태가 인간 생명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길러 주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낙태가 사실상 인구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책인가? 이성과 논리에 비추어 볼 때, ‘아니다’라는 대답이 당연하지 않은가?

불법 낙태에 대한 해결책?

특히 불법적인 낙태로 해를 받게 된 사람을 당신이 알고 있다면, 어떤 나라에서 낙태를 합법화한 결과 위험한 불법적인 낙태가 없어졌지 않은가 궁금할 것이다. 예를 들어 불법적인 낙태를 합법화한 1973년의 미국 대심원의 판결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인구 협의회 고문인 ‘크리스토퍼 티이제’ 박사에 의하면 그 판결의 결과로 낙태로 인한 여자들의 사망자 수가 1960년대에는 매년 300명이던 것이 1973년에는 47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법원 판결로 말미암아 낙태로 인한 사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티이제’ 박사는 그 해에 여러 건의 불법적 낙태가 계속 시행되었으며 47명의 사망자 중 25명이 그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말하였다.

다른 예로서 인도를 들어보자. 그 나라에서는 매년 5,000,000명으로 추산되는 여인들이 합법 혹은 불법적으로 낙태를 하고 있다. 1971년에 인도 여자들은 요청만 하면 즉시 병원에서 낙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약 8할 이상의 여자들이 그러한 의료 시설을 갖추고 있는 도시 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의사들이 없이 위험하게 낙태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낙태를 합법화할 때 불법적인 낙태가 없어지는가? 아니다. 수백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아직도 커다란 위험성이 존재하고 있다.

개인 문제들에 대한 안전한 해결책?

그러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인에게는 세계 인구 문제라든가 불법적인 낙태의 위험성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미혼녀로서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도저히 낳아서 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낙태가 그 해결책인가?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합법적인 낙태에 있어서도 자신의 건강과 생명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물론 전문가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티이. 에스. 우에노’ 교수에 의하면 합법적인 낙태가 모든 면에서 불법적 낙태보다 “특별히 더 안전한 것”은 아니다. 그 교수는, 임신 상태로부터 급격한 변화가 있게 되면 교감신경 계통에 균형을 잃는다고 한다. 또한 그 교수는 다른 좋지 않은 영향으로서 극도의 피로감, 불면증, 두통, 현기증, 경련, 신경통, 정신 질환, 자궁 외 임신, 습관성 자연 유산, 불임 등을 들고 있다.

낙태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간다 할지라도 위험성이 있다는 설명을 들을 것이다. 병균 감염과 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 낙태를 한 결과로 사망하게 된 여인들도 있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낙태도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안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괴로운 반응들

낙태하는 여인들이 자주 겪게 되는 고통스러운 감정적 반응도 무시할 수 없다. 미혼인 22세의 한 여대생의 경우는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예이다. 그 여대생은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을 때 좋지 않은 감정적 반응이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는 동안 불안감이 생겼다. 그리고 나서 실제 낙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여대생은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의사가 불쑥 들어왔는데 그는 무표정하고 말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다. 그는 인사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나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수술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였다. 결국 수술이 끝났다.

“그러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매우 침착한 성격인데도 그랬다.”라고 그 젊은 여인은 말했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게 된지 세시간이 지난 후 마치 속죄나 하려는듯이 ‘버스’ 창으로 몸을 내밀고 구토를 하였다.”

그러나 어떤 여성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 낙태로 인하여 오랫 동안, 깊은 감정적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사실상 간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생각해 보자: 한 의사는 모태 속의 태아를 질식시키는 액체를 주입하여, 임신 18주 되는 21세 여인에게 낙태를 실시하였다. 8시간 후 근육이 움직이고 심장이 뛰고 있는 태아를 배출시켰다. 27분 후 그 태아는 숨이 끊어졌다. “간호원들은 그것을 보고 몹시 기분이 상하였다.”고 그 의사는 말하였다.

영국 ‘사우댐튼’에서는 낙태 수가 증가되자 얼마의 젊은 간호원들이 그 직업을 버렸다. 그들은 태아에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을 때 특히 기분을 상하였다. 한 간호원 간부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들은 이상에 부풀고 생명을 건지고자 하는 열망에서 그 직업에 뛰어드는데 실상은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돕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것은 타격적인 경험이 된다.”

생명이 시작되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실제로 생명을 파괴시키는 행동인가? 고민을 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미혼모는 낙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전에 낙태 수술의 강력 옹호자였던 ‘비이. 엔. 네이던슨’ 박사는 자신이 “한없이 괴롭히는 진리”라고 부른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가? “우리가 생명을 죽인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질문은 ‘생명이 시작되는 것은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네이던슨’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임신한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덴버 포우스트’지에 보낸 편지에서 의학박사 ‘프랭크 피이. 보울즈’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사람을 우리 식탁에 초대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보다는 구호 사무소로 보내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며, 곤궁에 처한 여자를 돌보아 주는 것보다는 문제된 임신에 대해 낙태를 권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 낙태는 법적인, 생물학적인 혹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 대 하나님의 문제인 것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웃(태어났든지, 태어나지 않았든지, 원하였든지 원치 않았든지, 정상적이든지 불구이든지간에)과 여러분 자신의 생명의 가치를 결정할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각을 고려해 보도록 권고하는 바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서는 바로 인간 생명의 시초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주 귀중하게 보심을 알려 주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분의 법은 이러하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아이가 나왔으나, 신세]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 갚을찌니라.”—출애굽 21:22-25.

이곳에서나 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태아의 나이가 낙태 결정의 한 가지 요소라고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러한 한계를 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생명이 전달되는 것은 태어날 때가 아니라 임신을 했을 때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된 생물학적 존재로서 개인의 생활사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그 때라고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은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태어나기 전의 인간 생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심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시편 필자 ‘다윗’은 그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6.

흥미롭게도 ‘다윗’은 이렇게 계속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139:17) 그렇다. ‘다윗’은 인간 생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응하고자 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신의 생각도 그와 같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낙태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죄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 행위라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자 아닌 사람과의 사이에 임신하였을 때 낙태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경건한 방법이 아니다. 해결책은 그러한 임신을 야기할 만한 행동을 피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승인하시지 않는 “육체의 일” 가운데에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 들어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 중에는 “절제”가 들어 있다. “육체의 일”을 피하거나 멀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 못박았느니라.”—갈라디아 5:19-24.

그러나 미혼인 여자로서 이미 그런 행동을 하여 임신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낙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며, 그 여자가 이제 성서와 일치하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다. 어떤 여자들은 사회적인 수치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고 여러 면으로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을 멀리 하는 것이 정말 더 나을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양자로 주는 것은 어떨 것인가? 그렇게 하면 후에 크게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본능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무정”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디모데 후 3:1-3, 새번역) 그렇지만 미혼모가 자기의 모성애를 짓밟지 않는 것이 잘하는 일이다. 사실상 그 여자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돌보지 않음으로 인하여 두고 두고 죄책감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시키고 아이에게 진리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그러면 결혼한 사람들 사이의 계획하지 않은 임신은 어떠한가? 낙태를 생각하는 대신 영감받은 시편 필자가 표현한 견해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더 좋겠는가?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시편 127:3) 그렇다, 자녀 출생과 어버이가 되는 일에는 그와 관련된 문제가 따른다. 그러나 낙태했을 때 뒤따르는 심적인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연하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한 16:21.

그렇다, 낙태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성적인 친교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결혼의 마련이 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이란 결혼한 사람들이 인간 생명과 사랑과 결혼의 창시자인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생활을 틀잡을 때 얻을 수 있다.

[5면 도해]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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