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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아’의 방주를 탐색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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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아’의 방주를 탐색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 깨어라!—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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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주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 실제적인 증거는 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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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6
깨76 2/22 15-18면

‘노아’의 방주를 탐색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4천년 전에 ‘노아’와 그 가족은 나무로 만든 거대한 방주를 타고 세계적인 홍수를 살아남았다. 성서는 홍수 후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창세 8:4) 그 후에 방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성서에는 언급이 없다.

1974년 봄에는 적어도 여덟 개의 미국인 단체가 방주를 찾기 위해 5,100‘미터’되는 그 산을 등반하고자 등반 허가를 신청하였다고 보도되어 큰 화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현대의 ‘아라랏’ 산은 ‘터어키’, ‘이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등의 접경지역으로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이기 때문에 등반 허가를 얻기가 어렵다. 재작년에 네 개의 단체만이 실제로 ‘아라랏’ 산에 갔던 것으로 보인다.

‘노아’의 방주를 탐색하는 일에 그처럼 관심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아라랏’ 탐험대들은 그곳에 아직도 방주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였는가?

방주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방주가 지금도 ‘아라랏’ 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예로서 여름철에 ‘아라랏’ 산의 저지대에서 양을 치는 ‘쿠르드’족의 민간 설화를 들 수 있다. 외국인 탐험가들은 원주민 짐군들이 그 산을 어느 지점 이상은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위쪽은 “마법 지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방주가 그곳에 있는 동안은 어떠한 사람도 거기에 접근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다.

‘바이올렛 커밍’은 그의 저서 「‘노아’의 방주: 사실 혹은 신화」라는 책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수목이 없는 ‘아라랏’ 산에서 방주 같이 생긴 것이나 연장으로 다듬어진 목재를 발견하였다는 보고”를 10여건이나 열거하고 있다.

그 책은 방주에 가보았다고 하는 몇 가지 주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연로한 ‘아르메니아’인은 1856년에 자기 아버지와 함께 방주에 가보았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 때 그 두 ‘아르메니아’인은 그곳에 온 세명의 과학자를 안내하였다. 이야기인즉, 그들은 방주를 발견하였고 그 안으로 들어가보니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학자들은 ‘노아’의 방주에 관한 기록이 거짓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관심이 있어서 그 발견에 관한 비밀이 누설되면 안내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한다.

그 ‘아르메니아’인은 자기를 위협하던 사람들이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된 후에야 자기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그 친구가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후 그 친구는, 짧은 신문 기사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런던’의 한 과학자가 임종시에 자기가 방주를 보았다고 고백한 내용이 실려 있더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려놓은 신문 기사와 기록으로 남겨놓은 그 ‘아르메니아’인의 이야기는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1883년 8월 10일 「시카고 트리뷴」지는 ‘아라랏’ 산에 발생된 눈 사태를 조사하도록 ‘터어키’ 정부가 파견한 조사단에 관하여 보도하였다. 그 신문은 그들이 “빙하에서 돌출한 매우 검고 거대한 목재 건축물을 발견하였다”고 말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6년 전부터 그것을 보았으나 “무섭게 생긴 한 영이 위 쪽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조사단이 그 건물로 들어가 보니 그 내부가 높이 4.5‘미터’의 방들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트리뷴」지는 보도하였다.

또 다른 ‘아르메니아’인은 1905년경 자기 할아버지와 함께 방주에 가본 일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방주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뱃머리와 바닥이 평평하며 폭이 좁으면서도 길쭉하게 생긴 “화물선 모양”이라고 하였다. 지붕 바로 아래는 창문으로 보이는 구멍이 약 50개 있었다. 그것들은 길이가 75‘센티’, 높이 45‘센티’ 정도되는 구멍들로서 그 건축물의 옆면에 나란히 나 있었다. 그 배는 석화(石化)되어 바위처럼 단단하였지만 나무로 되어 있음이 분명하였다고 한다.

실제적인 증거는 막연

많은 사람들은 목격 증인이라는 그 사람들의 말을 참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꾸며내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공정하게 조사해보면, 방주가 현대의 ‘아라랏’ 산에 지금도 존재한다는 실제적인 증거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항공기에서 방주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를 고려해 보자. 1917년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러시아’ 황제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2개 중대의 군인을 파견하여 산을 조사해 보도록 하였다. 그들이 방주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서 황제에게 자세한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덧붙여 있다. “그 탐험대가 황제에게 보고를 올린지 며칠 뒤 그 정부가 전복되고 무신론적인 ‘볼세비즘’이 세력을 잡게 되어 그 기록이 공개되지 않고 아마 파괴되어버린 것 같다.”

더 최근인 1953년 여름에 석유 및 송유관 관리를 맡은 기사 한 사람은 거대한 배의 뱃머리로 보이는 것이 어떤 산 중턱에 얹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에 대한 명확한 사진 몇 장과 그곳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사진들은 몇 년 뒤 그의 사망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항공 사진은 설사 그것을 입수할 수 있다 해도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1960년에 분명히 방주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라랏’ 산을 찍은 사진에 나타났다. 그러나 단지 지형이 그러하였음이 밝혀졌다. 최근으로 1974년 2월에 미국의 한 상원 의원은 인공 위성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 “산에 있는 다른 것들과는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 모양과 크기가 꼭 방주만한 것”이 있음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국 항공 우주국의 한 관리는 신문을 통해 방주 만한 물체가 인공 위성 사진에서 탐지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방주에서 나온 나무 조각?

탐험대들은 나무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방주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1876년 ‘제임스 브라이스’는 3,900‘미터’ 높이에서 연장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는 길이 1.2‘미터’, 두께 13‘센티’의 목재를 발견하였다. 1955년에 ‘페르난드 나바라’는 24‘미터’ 깊이의 바위 틈에서 연장으로 다듬은 나무 조각을 끌어내었다. 그는 1969년에도 비슷한 발견을 하였다. 그러나 나무의 역사에 대한 실험실의 조사 결과는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나무가 지금으로부터 4,300여년 전의 ‘노아’ 시대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나무가 방주에서 나왔다는 증명이 되겠는가? ‘노아’ 시대에 방주 말고도 다른 목조 건조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누가 17:26-28) 그러한 건축물의 파편들이 홍수에 의해 아주 멀리 옮겨올 수 있었으며, ‘아라랏’ 산까지 옮겨왔을 수도 있다. ‘아라랏’ 산에서 발견된 나무 조각들이 ‘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다.

탐색이 계속되다

난관과 실망을 당하면서도 ‘노아’의 방주를 발견하고자 하는 관심은 높다. 현대 탐험가의 한 사람인 ‘뉴멕시코’ 주 ‘파밍톤’의 ‘에릴 커밍스’는 여섯번의 탐험을 통해 ‘아라랏’ 산을 16회나 등반하였다. 그와 그의 아내는 30년 동안 방주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는 방주의 발견이 앞으로 “2, 3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텍사스’ 주 ‘팔레스타인’ 성지 연구단이라는 한 단체는 자기들이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어마어마한 주장을 발표하였다. 그 단체의 대변인 ‘톰 크로처’는 자기들이 “약 840‘미터’” 거리에서 방주를 보았고 사진을 찍었는 데 적절한 등반 장비가 부족하여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단체는 가로 25‘센티 미터’, 세로가 20‘센티 미터’의 흑백 사진을 「깨어라!」지에 보내면서 그것이 방주의 사진을 확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신빙성이 있는가? 7명의 사진 전문가들이 그 사진을 검사하였다. 그 중의 다섯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에는 그 흐릿한 사진이 직접 원판에서 뺀 것이 아니고 사진을 재차 복사한 것 같으며, 특히 피사체의 옆면에 편편하게 보이도록 수정을 가한 증거가 있다고 하였다. 다른 두 사람의 사진가들은 사진이 너무 불명확하여 “거의 아무렇게나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활동이 「타임」, 「라이프」, 「뉴우스위크」지에 실린바 있는 ‘딕 켄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암석인데 누군가가 벽면처럼 보이도록 선을 추가한 것 같다.”

1974년 여름에 방주 탐색에 대한 기록 영화를 제작하려고 두 집단이 ‘아라랏’ 산을 찾아갔다. 그 두 집단은 자기들의 ‘페르난드 나바라’가 나무를 발견하였다는 곳에 가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구나르 스마스’라는 또 다른 사람은 재작년 8월에 방주가 있을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아라랏’ 산에 올라가서 “약 열 군데의 특정한 지점”을 조사하였다고 말하였다. ‘스마스’는 다시 가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재작년 여름에 ‘아라랏’ 산을 방문한 단체 중 하나도 ‘노아’의 방주가 지금도 그곳에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동기의 문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위험한 ‘아라랏’ 산을 탐험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열성을 엿볼 수 있다. 그곳에 방주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 조사가는 방주가 발견되면 그것은 “모든 고고학적 발견의 웅대한 절정이 될 것이며, 성서 역사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온전히 지지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방주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지면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동기는 칭찬받을 만한 것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다른 점들이 있다. 많은 탐험가들이 “모든 고고학적 발견의 웅대한 절정”에 의해 개인적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재정적인 이득은 어떤가? 어떤 사람들은 방주에 관한 서적을 발행하여 이미 자기들의 활동을 근거로 돈을 모았다.

그와 관련하여 탐색에 참가하고 있는 단체들 사이에 신뢰와 협조의 부족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흥미있다. ‘나바라’는 자기 집단이 방주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나무를 가지고 ‘아라랏’ 산에서 돌아올 때 산으로 가고 있는 다른 두 단체를 만났다고 보고하였다. ‘나바라’는 자기 집단이 그 발견에 대해서 다른 단체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단체들 상호간에 “비밀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1974년 여름에도 동일한 경쟁 의식이 역력히 나타났다. 모든 단체들이 다른 단체와 협조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일을 하였다. 탐험대들이 어떤 경우에는 같은 ‘호텔’에 투숙해 있으면서도 다른 탐험대가 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수집된 정보의 교환이 없었다.

그와 같은 “비밀을 지키려는 경향”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일을 반복하게 하고 불필요한 경비 지출을 초래하지 않는가? ‘노아’의 방주를 발견하는 것이 유일한 동기라면 그처럼 협조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점도 있다. 이전에 ‘아라랏’ 산을 여러 차례 여행한 바 있는 ‘탐색’이라는 단체의 ‘존 브래들리’는 1974년에 등반 허가를 받은 단체가 하나도 없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도 네개의 단체는 등반을 하였다. ‘바트라루’라는 사람은 자기들이 허가 없이 갔었으나 “모두에게 뇌물을 주어서” 등반할 수 있었다고 시인하였다. 「워싱턴 스타」지에 의하면 뇌물을 받은 사람들 중에 ‘터어키’ 군인 중대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만과 뇌물에 의지한다면 진리도 구부릴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주장이 발표되면 그것을 온전히 받아 들이기 전에 이상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불확실한 증거를 사실로 받아 들이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점을 명심하라. (고린도 후 5:7) 히브리서 11:1 [신세]에 의하면, 믿음은 “보지 못한 실체의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영감받은 말씀을 믿기 위해서 옛날 물건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디모데 후 3:16.

반면에,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면 대부분의 회의론자들이 성서를 믿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비유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많은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누가 16:31) 사실 그러한 것은 방주의 발견보다 훨씬 더 인상적일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셨을 때 종교적 반대자들이 예수와 ‘나사로’ 두 사람을 죽이려고 획책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요한 11:45-53; 12:9, 11.

‘노아’의 방주를 찾는 일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살고 있든 간에 성서 역사와 관계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갖는 데는 어떠한 선풍적인 고고학적 발견물이나 직접적인 기적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 20:30, 31.

[1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흑해

소련

‘아라랏’ 산

‘터어키’

‘이란’

‘반’ 호수

[16면 삽화]

방주를 찾았다는 증거(?)로서 어떤 단체가 제시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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