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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깨어라!—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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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6
깨76 1/22 5-7면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다른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이 내생에서 어떤 존재가 되는가는 그가 현재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와는 달리, 죽으면 그만이고 다시 살 가능성은 전연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죽음에 대해 그토록 상충되는 견해들이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알 길이 있는가? 만일, 인간의 창조자로부터 그 점에 관하여 계시를 받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바로 그러한 계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한 성서의 설명은 이 문제에 관한 의문을 완전히 제거해 줄 것이다.

성서의 첫째 책인 「창세기」는 우리에게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끝없는 생명의 전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들이 계속 사는 것은 그들의 창조자이며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완전히 순종하는 점에 달려 있었다. 그들의 순종심을 시험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이런 식으로 시험을 받은 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그들이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표준을 세울 하나님의 권리에 대해 합당한 존경심을 가져야만 후손들에게도 똑같은 존경심을 심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시던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창세 2:17) 그러므로 ‘아담’이 금지된 과실을 먹었을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죽음의 선고가 내려졌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 3:19) 따라서 ‘아담’의 죽음은 그의 삶의 마침이며, 결국 그가 지음을 받은 흙, 곧 생명 없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영혼은 어떠한가?

그러나 ‘아담’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일부분 즉 영혼이 있어서 그가 죽은 후에도 그것이 계속 살아 남았는가? 만일 ‘아담’이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가? 성서는 ‘아담’ 창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이 된지라.”—창세 2:7.

‘아담’이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는 점에 유의하라. 그의 생명없는 육체에 “생기[생명의 호흡, 신세]”를 넣자, 그는 ‘산 영혼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 자신이 살아있는 영혼이었으며, 바로 그 영혼이 죽은 것이다. 에스겔 18:4에서는 이러한 이해를 확증하여 영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하나님께]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영혼이 사람에게서 분리되는 부분이며 육신이 죽을 때에 살아남는다는 신앙을 주의깊이 조사한 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성서적인 가르침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개념이 희랍 철학에서 기원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1972년 11월 8일자 「르 몽드」지(13면)는 ‘프랑스’의 저술가이며 철학자인 ‘로제르 가라우디’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하기를, 희랍 철학은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를 타락시켰다”고 한 후, 계속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영혼과 육신의 이원론, 및 그로 인한 영혼불멸의 신화는 ··· 그리스도교나 성서와는 무관한 ‘플라톤’의 이론이다.”

‘클라우드 트레스몽땅’ 교수는 그의 저서 「영혼에 관한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모든 ‘플라톤’ 및 ‘데카르트’의 전통처럼, 사람이 ···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 ‘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그렇게 말하면 영혼을 가진 소유자와 그가 가진 영혼이 다르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있는 영혼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180, 181면.

선교 지침으로 사용되는 한 출판물에서 ‘에른스트 부쉬’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죽음이 육신과 영혼의 분리라는 교리는 희랍 철학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영혼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육체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전체 사람이 죄인이며, 육체와 영혼을 가진 사람 전체가 고린도 전서 15장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죽음에 이른다.”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성서의 설명은, 영혼이 육신의 죽음을 살아남아 의식을 가진 존재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부가적인 증거를 제시해 준다. 충성스러운 ‘욥’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탄식하며 이렇게 외쳤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라].” (욥 3:11, 13) 전도서 9:5, 6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라].”

성경에서는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를 잠자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깊이 잠든 사람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르듯이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 심장 마비를 일으켜 사경을 헤매다 깨난 사람들의 말은 이점을 지지해 준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런드’에서 몇년 전에 이같은 체험을 한 어느 의사는 죽은 상태를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읍니다.”

심장 고동이 멈추었었던 또 다른 사람들은 행복한 기분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그 의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그들은 틀림없이 혼동하고 있다. 그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즉 혼수 상태에 빠져있던 동안에 그들이 느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의 신체 기관이 정지되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고초받는 장소는 없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어떠한 육체적 고통도 경험할 수 없다. 의식있는 존재가 육신의 죽음을 살아남아 고통을 당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아담’도 고초의 장소에 관하여 이야기들은 일이 없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가 받은 형벌은 고초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만일 그가 받은 형벌이 실제 불타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초를 당하는 것이었는데, 첫 인간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께 공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죽음은 ‘아담’의 범과에 대해 내려지는, 그리고 사망을 초래하는 약점과 불완전성을 유전받은 그의 모든 후손에게 내려지는 형벌의 전부였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의 삯은 [고초가 아니라] 사망이[니라].” (로마 6:23) 또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음이니라].” (로마 6:7) 그러나, 만일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 고초를 받는다면, 그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계속해서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악인의 영혼을 영원한 고초에 처한다는 사상은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공의라는 내적 감각과 모순된다. 예를 들면, 만일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벌주기 위해 그에게 끊는 물을 퍼부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당신은 이것이 정당한 벌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식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러한 아버지에 대하여 쉽사리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아버지의 처사에 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실상 남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극악한 사람뿐이지 않는가?

사람은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짐승들의 경우라 할찌라도,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건간에,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한다. (창세 1:27)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특성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잔인한 고초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증오심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특성으로서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인간 가족 모두가 물려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고초에 대하여 보편적인 반감을 품도록 하신 그분이 인간에게 극도의 고초를 영원히 받도록 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 중 아무도 불행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점을 알려 준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벌주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 후 3: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찌니라.” (에스겔 18:32) 만일 악행으로 벌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느끼신다면, 그분께서 어떻게 영원한 고초의 장소에 감금된 자들의 처참한 고통을 승인하시는 태도로 바라보실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분은 그런 일을 하실 수 없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서 4:8.

모든 사람이 죽는데, 그렇다면, 악하고 가증한 인간들은 어떻게 벌을 받는가? 「히브리서」 필자는 그들의 운명을 가시덩쿨과 엉겅퀴가 무성하게 자란 비생산적인 밭에 비유하여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하였다. (히브리 6:8) 불사름을 당하면, 그 밭은 가시덩쿨과 엉겅퀴가 뒤덮인 비생산적인 지역으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길을 거역하고 고의적으로 계속 고집을 부리는 자들이 받는 형벌은 영원한 멸망이다. 그들은 영원히 죽은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를 행하기를 구하는 자들은 어떠한가? 「히브리서」 필자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브리 6:9, 10.

그러므로 분명히, 악한 길에 너무 젖어 도움을 받아도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반드시 희망이 있다.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그들에게 만사가 끝났음을 의미할 수 없다. 그들의 입장은, 동료 인간의 권리와 복지에 대하여 냉담하고 무관심한 자들의 입장과는 다를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일으킨다. 현재 죽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희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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