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 ‘구아테말라’를 황폐시키다—현지 보고
‘구아테말라’ 주재 「깨어라!」 통신원 기
‘구아테말라’의 땅—실제적으로는 중앙 ‘아메리카’의 많은 지역의 땅—은 가끔 진동한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서 재빨리 거리로 뛰어나가 마지막 진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초조히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때로는 단순한 진동 이상의 재난이 발생하곤 한다.
1917년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수도 ‘구아테말라’ 시에 혹심한 피해를 입힌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재건되었으며, 지금은 약 백만명의 인구를 포용하고 있는 중앙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나의 아내와 나는 이곳 ‘구아테말라’ 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번번히 일어나는 진동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2월 4일, 수요일, 이른 새벽의 어두움 속에서 우리는 ‘구아테말라’ 주민 거의 모두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난폭한 지진을 경험하였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사망하였다.
일부의 추산에 의하면, 50,000명이 죽었다고 하나, 공식 집계는 현재 사망자 수가 23,000을 약간 넘는다고 한다. 74,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백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생겼다. 인구가 대략 585만명인 이 나라로써, 이것은 5명 중에 한 명이 이재민인 셈이다!
본 지진은 중앙 ‘아메리카’ 유사 이래 최악의 지진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1972년에 ‘니카라구아’, ‘마나구아’를 황폐시킨 지진 보다도 더욱 심한 피해를 입힌 것으로 나타났다. ‘아르헨티나’에서 파견한 원조단의 단장인 ‘레안드로 살라토’ 박사는 “1970년에 있었던 ‘페루’의 지진 보다 더 파괴적”이라고까지 말하였는데 실상 70,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루’의 지진은 그처럼 더욱 심한 인명 피해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한밤에 닥친 공포
화요일 저녁 성서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와 나는 잠자리에 들어 곤히 잠자고 있었다. 그러므로 난폭한 진동이 시작된지 한참 만에야 나는 잠에서 깨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지진이 닥쳐오는 소리를 듣고 잠을 깨었다고 한다.
한 미국인 방문자는 자기가 들은 그 소리가 멀리서 천둥치는 소리인줄로 생각했었노라고 말하였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계속 커져서 마침내 포효(咆哮)—지구 내부에서 울려오는 포효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암층들이 갈라지고 부서지는 결과였다. 그 소리는 증폭되고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지표에서 울려퍼진 그 소리의 효과는 “두대의 ‘제트’ 비행기 엔진들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또는 다른 사람이 묘사한 바와 같이, “지구 내부에서 수많은 돌들이 덜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난폭한 진동이 시작되었을 때야 겨우 잠을 깨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유리가 깨어지고 주변에서 물건들이 서로 부딛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인가? 거리로 나가기 위하여 문으로 달려 나갈 것인가? 몇초가 지나고 충격파가 그 강도를 더해가자 나는 이것이 결코 보통 진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천정이 우리들 위로 내려앉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 나는 내 몸으로 아내의 몸을 덮고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하였다.
마침내 지진이 멈추었으며, 집의 흔들림이 그쳤다. 이것은 불과 39초간 계속되었는데도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마침내 정적이 찾아들었다. 한 순간 모든 것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이제 나는 두발로 일어설 수 있었다. 즉각적으로 나는 우리가 겪은 것은 참으로 끔찍스러운 지진이었음을 깨달았다.
전기는 두절되었고, 주위는 온통 캄캄하였다. 완전한 어두움속에서 손전등을 더듬어 찾으면서 나는 잠시 후에 나의 시야에 들어올 무질서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손전등을 찾아서 비추어 보니 모든 것은 내가 추측한 바로 그대로였다. 어떻게 나는 벽에서 떨어져서 박살난 거울 조각을 밟지 않고 피하였던가? 꽃병과 ‘램프’들이 마루 위에 딩굴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조각이 나 있었다. 접시들은 찬장에서 떨어져 있었으며, 책꽂이도 넘어져 있었다. 나는 각 방을 조사해 보고 우리가 튼튼히 지어진 철근 ‘콘크리이트’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진이 발생한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우리의 전기 시계가 가리키는 바에 의하면, 오전 3시 3분이었다.
생존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 날 밤 그들이 경험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오와’ 주, ‘세다 래피드스’(미국)에서 온 한 관광객은 자기 딸과 함께 ‘리츠 컨티넨탈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도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저는 처음에는 분노를 느꼈는데 왜냐 하면 누군가가 나의 침대를 뒤집어 엎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것이 바로 ‘아마겟돈’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우리가 머물던 ‘호텔’은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지어져 있었으며, 그래서 나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느꼈읍니다. 왜냐 하면 그 건물은 굉장히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건물은 문자 그대로 거리 위로 달랑 매어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읍니다. 벽의 벽토는 벗겨져 나갔고 창문은 깨어졌읍니다. 마침내 땅이 사나운 말 처럼 그 건물을 솟구쳐 오르게 하였읍니다.
“땅의 반류(反流)가 정지되었을 때, 그 정막함이란 소름이 끼칠 정도였읍니다. 사람들은 아직 망연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읍니다. 이를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전율, 계속적인 공포의 전율 뿐이었읍니다. 옆방의 투숙객이 양초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계단을 걸어내려 간 것이 아니라 뛰어 내려갔읍니다. 시계를 보니 우리가 거리로 나온 시각은 아직 오전 3시 15분이 못되었을 때였읍니다.
“‘구아테말라’ 시는 해발 약 5,000‘피이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쌀쌀하였읍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김이 서리는 것을 볼 수 있었읍니다. 한 시간 후에 우리는 ‘호텔’로 되돌아가서 옷가지를 좀더 가져오기로 결정하였읍니다. 손에 양초를 들고 어두운 ‘호텔’로 다시 들어가서 8층까지 오르는 동안 내내 또 다시 진동이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읍니다. 희미하게 어두운 방에서 우리는 물건들을 챙겨서 재빨리 다시 거리로 나왔읍니다. 집을 떠날 때에는 짐을 꾸리는 데 이틀이 걸렸지만, ‘호텔’을 떠날 때는 10분 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면도기와 치솔들은 화장실 바닥의 부스러기들 속에 잃어버린 채로 나오고 말았읍니다.”
한편,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은 충격으로부터 차차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간이 차고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옮겨가기 위하여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놀란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것들 속으로 들여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집에서 부서진 조각들을 치우며 통로를 만들고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한 가족이 우리가 무사한지 여부를 알아보러 와 주었다. 우리는 뜨거운 ‘초콜렛’차를 준비하고,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안부가 걱정스러웠다. 이 도시에는 약 2,500명의 증인이, 그리고 ‘구아테말라’ 전국에 걸쳐서는 약 5,000명의 증인이 흩어져 있는 것이다.
그 여파—얼마나 참혹하였나?
우선 우리는 보통 차로 10분 가량 걸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로 향하였다. 그러나 1‘마일’쯤 가자 주변의 도로들이 사태(沙汰)로 인하여 군데군데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구 주택 지구를 통하여 달려갔다. 우리가 사는 신 주택 지구는 크게 손상된 건물이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는 길가에 서 있는 집들의 정면이 무너졌거나 벽돌이 헐어진 것이 많았다.
이미 교통은 대낮처럼 혼잡하였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친척, 친구들의 집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잠옷, ‘가운’ 또는 담요를 둘러친 사람들이 거리에 즐비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집, 즉 무너지다 남은 집속으로 들어가길 두려워하였다. 무너진 붉은 벽돌과 ‘어도우비’ 벽돌의 먼지들이 밤의 어두움 속에서 괴기한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광선 만이 거리를 밝혀 주고 있었다.
우리는 지부에 있는 모두가 무사한 것을 발견하고 마음을 놓았다. 또한 건물에도 아무런 피해의 자죽이 보이질 않았다. 지부 조정 위원은 이미 다른 지역의 증인들의 형편을 조사하기 위하여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회중의 성원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른 아침 시간 내내 여호와의 증인의 감독자들과 봉사의 종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의 형편을 조사하였다. 그들은 일부가 가옥을 잃고, 어떤 사람들은 타박상을 입기도 했지만, 아무도 인명의 손실은 입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명과 함께 그 지진의 강도에 대한 더욱 정확한 증거들이 차차 밝혀졌다. 우리는 동 지진이 ‘릭터’ 지진계에 7.5의 진도를 기록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내 거리에는 얇은 천이나 합성 수지로 덮은 수백 구의 시체가 나란히 뉘어졌다. ‘라디오’에서는 “시체 공시소는 가득찼읍니다. 더 이상 시체를 옮겨오지 마십시오”라는 방송이 들려왔다. 후에 알게된 바에 의하면 이 도시에서 약 800명이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빈민 지구에서는 수천 동의 가옥이 붕궤되어, 수만명의 사람들이 집없는 신세가 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남은 것이라고는 단지 파손물 무더기 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지역에 있는 중산층이나 상류층의 잘 지은 가옥들은 비교적 덜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심한 피해를 입었다. 나의 집 가까이 있는 벽돌로 지은 한 현대식 ‘가돌릭’ 교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공식 추계에 따르면 본 수도의 모든 건물의 20‘퍼센트’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40‘퍼센트’는 사용 불능일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국적인 손실액은 5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구아테말라’ 시는 천막 도시가 되었다. 심지어는 부유층까지도 더 심한 지진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차속에서 잠을 자거나 집밖의 잔디밭이나 임시적으로 처마밑에 기대어 지은 집에서 잠을 잤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반 주민들은 훌륭한 정신을 나타내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함께 단합되어 서로 도왔다. 우리는 한 임시 거리 대피소에서 그들 35명이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밖에는 무너져내린 ‘어도우비’ 벽돌로 만든 화덕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들 명랑하였고 방문자들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이 맴돌고 있었다. 그 뒤 얼마 동안 매일같이 느낄 수 있었던 수십 차례에 걸친 여진(餘震)이 그러한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2월 6일 금요일에 있었던 진동은 ‘릭터’ 지진계에 5.5의 진도를 기록하였다. 이 진동은 이미 금이 가 있던 건물의 벽돌을 무너뜨려 많은 사태를 일으켰다. ‘아이오와’ 출신 관광객은 그 주 지진 후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어떠한 생활이었는지를 이렇게 잘 묘사하였다.
“우리의 집단에 속한 한 의사도 사상자들을 처리하는 데 조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이 의사는 말하기를 자기가 한 젊은 여성의 경우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녀는 아무런 눈에 띄는 상처도 없이 죽었는데 이는 놀라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읍니다.
“아침 8시에 우리의 관광 안내인은 우리에게 서남 쪽 약 35‘마일’ 지점에 있는 도시인 ‘안티구아 구아테말라’로 옮길 것을 제안하였읍니다. 도로들은 여기 저기 사태로 막혀 있었고, 또 놀라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로 메워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는 데 5시간이나 걸렸읍니다. 서로 친척들의 형편을 살펴보기 위하여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시골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동이 여전히 계속되어 골짜기에 울려퍼졌읍니다. 이것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느낌을 주었읍니다. 발에 닫는 땅의 감각이 좋지 않았읍니다. 마치 진흙을 밟는 기분이었지만, 발이 빠져 들어가지는 않았읍니다. 바꾸어 말하면 ‘테라 휘르마’(단단한 땅이라는 뜻)가 단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투숙한 ‘안티구아’의 ‘호텔’에서 우리 모두는 수영장 주위의 정원에서 머물렀읍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식사하였고, ‘호텔’ 종업원들은 그곳에서 식사를 준비하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잠을 잤읍니다. 아니,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고 해야 옳겠지요. 모든 사람은 또 다시 큰 지진이 있을 경우를 생각하여 건물 안에 들기를 두려워하였읍니다.
“참으로 계속적인 전율, 공포의 독기가 풍기는 전율의 연속이었읍니다. 우리는 2월 8일 일요일 공항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병사들이 시체 더미를 태우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아직 서있는 건물벽이라고는 거의 없는 마을들도 보았읍니다.”
처음엔, ‘구아테말라’ 시의 우리들 대부분은 그 파괴의 정도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수요일 아침 미군 ‘라디오’ 방송이 보도하기를 그 지진의 진원지(震源地)가 ‘구아테말라’ 시 동북 약 105‘마일’(170‘킬로미터’)에 위치한 ‘구알란’ 근처라고 밝혔다. 곧 다른 곳의 파괴상은 더 참혹하지 않을까 하는 우리의 의혹은 외곽 지대로부터 보고들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함에 따라 점점 사실로 확증되어 갔다.
우리의 상상보다 더 참담함
첫 소식으로 이 도시의 동북방에 위치한 ‘엘 프로그레소’가 초토화되었으며, 2,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후 북부로부터 ‘산 후안 스카테뻬께즈’ 마을과 ‘산 페드로 스카테뻬께즈’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수천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중남부의 ‘치말테낭고’ 주의 여러 ‘인디안’ 마을의 완전한 황폐화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13,000명 이상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악의 강타를 당한 지역은 ‘구아테말라’ 시 북쪽 약 12‘마일’(20‘킬로미터’)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서로 약 150‘마일’(241‘킬로미터’)쯤 뻗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들어온 보고처럼 참혹할 수 있는가 의심을 금할 수 없었다.
진상을 알아내는 데는 거의 100‘퍼센트’가 ‘어도우비’ 벽돌 건물로 된 그러한 도시 하나를 방문해 보는 것으로 족하였다. 2월 6일 금요일 나는 ‘구아테말라’ 시 북쪽 12‘마일’(20‘킬로미터’)이 약간 못되는 지점에 있는 ‘산 페드로 스카테뻬께즈’를 방문하였다. 서있는 건물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며, 그야말로 온통 수라장이었다. 그 도시의 거리들은 무너진 집들의 토담 부스러기들로 막혀 있었다. ‘가톨릭’ 교회도 대파되었으며, 사람들은 아직도 충격받은 상태를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매장되었지만, 무더기 속에서 시체들을 아직도 발굴해 내고 있었다.
한 남자가 작은 흙손을 사용하여 한때 자기 집이었던 자리의 무더기에서 몇가지 물건들을 파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값싼 송판 탁자의 꼭대기 부분 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든 약간이라도 이용해 보려고 무너져내린 서까래들 속에서 금속 지붕 재료를 끄집어 내고 있었다.
토요일에 나는 몇 군데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고원 지대의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에게로 음식물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사태로 말미암아 도로들이 막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치시아’, ‘자라고자’, ‘텍판’ 및 ‘코말라파’에 당도할 수 있었다. ‘코말라파’에서는 시장과 치안 판사가 다 사망하였다. 지나치게 많은 사망자 수와 전염병의 두려움 때문에 여러 구의 시체가 커다란 구덩이에 한꺼번에 매장되었다.
차를 타고 고원 지대의 도시들을 통과해 보면 모든 것이 궤멸되었음을 보게 된다. 일반 가옥과 교회의 차이점은 교회들은 그 황폐화된 더미가 더 크다는 것 뿐이다. 이 도시들은 지금 ‘인디안’ 도시이거나 과거에 ‘인디안’ 도시였었다. ‘인디안’들이 ‘구아테말라’ 인구의 약 4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농촌 마을들이 가장 혹심한 타격을 입었다.
우리가 방문한 지방의 생존자들에게는 물이 거의 없었고 소량의 음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은 바람과 야간에는 섭시 5-6도로 내려가는 산악지대의 냉기를 막아줄 은신처가 없었다. 바람에 의하여 무너진 마른 ‘어도우비’ 벽돌에서 일어나는 먼지는 질식할 정도였으며, 그 먼지는 종종 6‘인치’(17‘센티미터’ 정도) 가량이 되곤 하였다.
화요일 밤에 잠자리에 든 수천명의 사람들은 결코 깨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집의 ‘어도우비’ 벽돌 벽들이 무너져서, 그들 위로 무거운 기와 지붕이 떨어져 내리게 되었다. 한 원주민 생존자는 ‘어도우비’ 벽돌에 대하여,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관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부상을 당한 많은 생존자들도 무서운 고통들을 당하였다. 도로들은 사태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의료 구호가 며칠씩 희생자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곤 하였다. 한 의사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들은 아픔을 참으며 며칠 씩 누워 있었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하게 부어올랐읍니다. 여러 군데의 뼈들, 특히 다리의 뼈가 부러져 피부 밖으로 삐져나온 사람도 있었읍니다. 또 어떤 경우는 상처가 노출되어 있어서, 곧 염증이 생기곤 하였읍니다.”
우리는 ‘텍판’의 한 증인의 어린 딸이 다리가 부러져서 고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른 증인들도 상해를 당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죽음을 당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전국적으로 어디에서도 지진으로 인하여 증인이 사망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더러 가족 성원들을 잃은 예는 있었다.
한 증인은 자기 친척 25명이 ‘텍판’ 근처에서 몰살당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가 목요일에 그들이 살던 마을에 당도해 보니 그 가족의 식구 15명이 이미 매장되었다. 충분한 수의 관도, 나머지 사람들을 매장하기 위하여, 더 만들 나무도 없었다. 그는 시체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죽은 자는 어째든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전염병을 막기 위하여 시체들을 빨리 매장하라고 그들을 촉구하였다.
이 증인은 거리에서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메고 내려오는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멈추어 서서 몇분간 대화를 나눈 후, 이렇게 물었다. “이 자루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시겠우?”
“모르겠는데요.”라고 그 증인은 대답하였다.
“제 아내와 두 자녀가 들어있다오. 나는 지금 공동 묘지로 가는 길이랍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한 여행하는 대표자는 그 지진의 진원지 근처인 ‘구알란’의 한 회중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고하였다. “시체들 사이를 걸으면서 느끼는 전율과 돌무더기 속에 갇혀 있는 부상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느끼게 되는 무서움은 묘사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무너진 집 밑에서 기어 나왔읍니다. 어떤 증인들은 촛불 속에서 의료 구호를 받았읍니다. 왕국회관은 손상을 입었지만 보수할 수 있었읍니다. 저의 방문 관계로 외곽 지대에 사는 많은 증인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지진이 일어나던 날 밤에 왕국회관에서 잠을 잤읍니다. 그렇게 한 것이 아마 그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우리들까지도 그 참상의 정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지진이 발생한지, 1주일 가량이 지난 다음에 ‘라우헤루드 가르시아’ 대통령은 약 300여 도시와 촌락이 40‘퍼센트’ 이상 파괴되었다고 발표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시체의 냄새가 그 지진 후 며칠 동안이나 가시질 않았다. ‘트럭’과 ‘헬리콥터’들이 급히 판 얕은 매장지에 뿌릴 석회석을 운반하였다.
지구의 난폭한 움직임의 증거로서, ‘구아테말라’ 시와 ‘온두라스’ 만 사이의 농촌 지대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어떤 곳에서는 그 균열의 넓이가 8‘피이트’, 길이가 10‘피이트’나 되었다! ‘판 아메리칸’ 공로(公路)에 많은 사태가 생겨서 통행이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파괴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복 상태에 있다. 도처에서 제공된 굉장한 분량의 원조 물자가 이를 가능케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방에서 원조를 보내다
100여 나라에서 원조를 보내 주었다. 수주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사들, 구호대원들, 의약품, 이동식 병원시설, 천막, 식량, 의복 및 담요 등을 실은 비행기들이 하늘을 메웠다. 그러나, 외곽 지대의 도시들 및 촌락으로 이러한 원조 물자를 보내주는 것이 어려웠다. 도로 운행이 어려울 때에는 ‘헬리콥터’가 이용되어 물자를 운반하였지만, 그래도 그러한 곤란을 당하고 있는 지역에 도움의 손길이 미치기까지는 며칠씩 걸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원조 물자가 도착하였을 때, ‘인디안’ 촌민들은 식량과 의료 구호를 받기 위하여 질서있게 줄을 서는 등, 그 역경 속에서도 훌륭하게 처신하였다. 미국에서 온 한 구호대원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만일 미국에서의 일이었다면, 지금 쯤은 폭동이 일어났을 겁니다. 이곳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여기에서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병사 한 사람도 서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앙 ‘아메리카’ 전역과 다른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재빨리 원조를 보내왔다. 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날 ‘엘살바도르’의 증인들은 식량과 의복을 가져왔다. 그 다음 날 ‘니카라구아’에서 보낸 물자가 들어왔다. ‘온두라스’로부터는 천막과 지붕 재료가 들어왔다. 중앙 ‘아메리카’의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조직들 및 ‘뉴우요오크’의 ‘왙취 타워 협회’ 본부, 그리고 관심있는 개인들로부터 수천 ‘달러’의 헌금이 기탁되었다. 그리고 ‘구아테말라’ 자체내에서도 덜 영향을 받은 지역의 회중들이 식량, 물자 및 헌금의 형태로 관대한 원조 물자를 공급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여러 ‘톤’의 식량과 의복 등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외곽 지대의 도시와 촌락으로 물자를 전달하는 데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특권이었다. 여러 곳에서는 우리가 구호 물자들을 가지고 그러한 지역에 최초로 도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예를 들면, ‘구아테말라’ 시 북쪽 30‘마일’ (5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심한 타격을 입은 도시인 ‘라비날’에 물자를 가지고 도착한 것으로 보고된 최초의 ‘트럭’은 지부에서 보낸 것이었다.
목재와 지붕 재료의 부족을 예상하고 우리가 최초로 한 일들 중의 하나는 소나무 재목과 지붕 재료를 사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건축 기술이 있는 증인들이 발전기와 전기톱을 ‘트럭’에 싣고 ‘치말테낭고’ 주의 페허화한 도시들과 촌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집을 잃은 증인들을 위하여 가로, 세로 각각 3‘미터’ 쯤 되는 방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보통 그러한 구조물은 한 시간 내에 세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기관에서 이러한 지역으로 천막들을 들여올 수 있기도 전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구아테말라’ 시에는 두 동의 왕국회관이 심한 손상을 입어서 재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도시의 회중들 역시 그들의 집회 장소가 파괴되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그러나 증인들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쁘게 재건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장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확신을 갖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그들의 영적 견해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날의 대 지진들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진들이 종종 일으키는 황폐와 슬픔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것들 가운데서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이유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의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인들은 전혀 다른 견해 즉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그 지진 후 금요일에 ‘산 페드로 스카테뻬께즈’를 방문하는 중이었는데, 자기 집의 잔재를 손으로 파 헤치던 한사람은 낙담하여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매우 악한 사람들이었던 때문입죠”
그와 및 이들 겸손하고 부지런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그러한 사상을 주입받았는가 하고 당신은 생각할지 모른다. 그 다음 날 그 대답이 명백히 나타났다. 이 나라의 한 주요 신문에 인용 보도된 바에 의하면 ‘구아테말라’의 ‘가톨릭’ 추기경, ‘마리오 카사리에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민중이 큰 참상을 격고있는 이 순간,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며 그분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정하시고 바로잡고 깨우쳐 주십니다. ··· 우리가 그간 너무나 저항해 왔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으로 행동하시게 한 것이 아닙니까?” 그 다음, 그는 대성당과 다른 파괴된 ‘가톨릭’ 교회를 재건하는 데 조력하는 것이 “하나님께로의 확실하고도 개인적인 복귀의 상징”일 것이라고 부언하였다.—「엘 임파르시알」 1976년 2월 7일자 6면.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이 지진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음을 여호와의 증인들은 알고 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는 현 악한 사물의 제도의 임박한 끝과 왕국 권능으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징조”는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을 포함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징조”를 말씀하신 후 위대하신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격려의 말씀으로 이렇게 부언하셨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높이 들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왔기 때문이다”—누가 21:7-28; 마태 24:3-14, 새번역.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지진과 같은 성서 예언 성취의 강력한 증거를 볼 때 하나님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가 매우 가깝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들의 머리를 높이 든다. 우리는 난국에 처해 있는 이곳 ‘구아테말라’의 사람들이 현재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있는 이러한 위안의 소식에 특별히 호응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베드로 후 3:13; 계시 21:3, 4) 심지어 이 지진이 일어나기 전,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한 성원인 ‘엔, 에이치, 노워’가 1975년 12월에 ‘구아테말라’ 시를 방문하였을 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부 경기장 내의 야구장에서 연설을 듣기 위하여 모인 일이 있다. 그것은 ‘구아테말라’ 시에 사는 증인들의 수의 두배가 넘는 수였다!
이곳에서는 1976년이 중요한 해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구아테말라’ 시의 시청 건물에 장식된 표시판에는 ‘1776년 이백년 1976년’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1월 6일에 시 당국에서는 동 시의 200년제를 시작하였다. 전 수도가 지진으로 황폐케 되고 1776년 1월 6일에 새로운 수도가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1976년 1월에는 본 현대적이고 번영 일로에 있는 ‘구아테말라’ 시의 시민들은 그 도시의 장래에 대하여 낙관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 함께 재건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참 예언에 믿음을 두는 사람을 보게 되면, 확실히 그러한 사람들에게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더 큰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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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사나운 말처럼 그 건물을 솟구쳐 오르게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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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닿는 땅의 감각이 좋지 않았읍니다. 마치 진흙을 밟는 기분이었지만, 발이 빠져들어 가지는 않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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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수의 관도, 더 만들 나무도 없었다.”
[5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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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아테말라’
‘치말테낭고’ 주
‘텍판’
‘코말라파’
‘파치시아’
태평양
‘라비날’
‘산 후안’
‘산 페드로’
‘구아테말라’ 시
‘안티구아 구아테말라’
‘구알란’
‘엘 프로그레소’
‘온두라스’
‘엘살바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