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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0 07월호 44-46면
  •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나의 꿈—어떻게 실현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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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나의 꿈—어떻게 실현되었는가?
  • 깨어라!—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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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0
깨80 07월호 44-46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나의 꿈—어떻게 실현되었는가?

1962년 11월 14일에, 내가 간절히 바라던 하나의 꿈이 실현되었다. 나는 ‘포르투갈’의 ‘산토 티르소’에 있는, ‘칼레’의 ‘프란체스코’ 제 3수도회의 수녀원에 수녀가 되기 위해 들어가게 되었다. 나의 전 생애가 이 순간을 위해 준비돼 온 것같이 보였다. 내가 아버지와 작별을 고하며 수녀원의 현관 계단에 올라 섰을 때 아버지와 나는 정말로 행복하였다.

우리 가족은 열렬한 ‘로마 가톨릭’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묵주를 주머니에 넣고, 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일터로 나가곤 하였다. 밤마다 우리의 전 가족은 다 함께 묵주 세는 일을 반복하였다.

신심 깊은 모든 ‘가톨릭’ 가정은 교회에 한 자녀를 바칠 것이 기대되었다. 우리 가족에서는 내가 선택되었다. 이것은 큰 특권으로 여겨졌다. 나는 교리 문답책을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나는 ‘빌라리얼’의 주교와 회견하였다. 가까운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은 이미 수녀나 사제가 되어 있었다.

수녀원 생활

놀랍게도 수녀원 생활에 적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설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기숙사는 칸막이가 되어 있었고, 각 방에는 침대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의자가 있었다. 내가 정말로 고투해야 했던 점은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요컨대 나는 일상적인 잡담과 세 명의 형제들 및 세 명의 자매들이 있는 가족 생활의 생기에 넘치는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오전 6시 반에 기상하여 처음 30분을 예배실에서 기도하면서 보내었다. 사실상 1주일에 단 1시간만 교회 서적을 사용하여 신앙에 관한 공부를 하는 데 바쳤다. 조반은 다른 식사 때처럼 엄숙한 침묵 속에서 들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각기 다른 부서로 일하러 나갔다.

매일 점심 식사가 끝나면 1시간 동안 오락 시간을 가졌다. 이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고향의 이름을 나타내는 어떠한 직접적인 표현도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어떤 곳에서는 ·⁠·⁠·”과 같은 모호한 용어를 사용해야 하였다. 우리에게 오가는 우편은 검열을 받았다.

1개월 후, 나는 이러한 판에 박힌 생활에 익숙하게 되었고 수녀원 생활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내가 말하고 싶을 때는 하나님과 이야기하곤 하였다. 매일 같이 검은 ‘베일’을 둘러 쓰고, 검은 긴 옷을 입고 십자가 상을 걸치는 것이 특권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교회 의식에 따라 헌신적인 생활을 양심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실망

6개월의 필수 기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하나의 반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약혼”하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수년 후, 나는 훈련을 끝마치고 수녀로서 영원한 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세탁실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수녀원장에게 가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러나 친절하게, 원장은 내가 건강 때문에 수녀원에서 생활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나의 기관지염 때문이라고 한다. 단지 건강 상태가 좋은 사람들만이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나의 ‘쇼크’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나의 인생의 꿈이 산산 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 곳에 머무를 수 있는 어떤 방도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원장의 말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나는 떠나야 하였다.

몹시 울고 난 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집에 데려가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녀원장은 내가 인도주의적인 면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격려하고자 애썼다. 원장은 ‘포르토’에 있는 성 ‘마리아’ 병원에서 내가 일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아버지는 노하였다. “만일 내 딸이 수녀가 될 수 없다면 어떤 병원에도 갈 수 없오. 집으로 가서 우리와 다시 살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교회의 전통에 대한 나의 열심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생각하였고, 성일을 지킨다든지, 단식, 기도의 암송과 같은 모든 의식을 계속하였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십자가상에 ‘키스’를 하였다. 내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십자가가 내 방의 벽에 걸려 있다면, 나는 의자 위에 서서, 심지어 화장대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그것에 ‘키스’를 하였다. 내 생애에서 최대의 희망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다.

사촌 언니의 영향

드디어 나는 ‘포르투갈’의 제일 큰 도시인 ‘리스본’으로 일하러 가게 되었다. 1973년 ‘크리스마스 시이즌’ 동안 나는 그 도시 가까이에 살고 있는 한 사촌 언니를 방문하였다. 그 언니는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매우 좋아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갔다. 바로 이 때 언니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고 있다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를 겸손하게 하였다. 나는 돌아오는 5월에 언니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자 계획했지만, 이제 나의 반응은 다시는 이 언니의 집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여호와의 증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종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나는 재고해 보았으며 계획한 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에 하나의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즉 그 언니를 도와서 다시 선량하고, 활동적인 ‘가톨릭’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사촌 언니는 나만큼 확고부동하였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의 어떤 출판물도 고려하기를 거절하자, 언니는 ‘가톨릭’ 성서 번역판에 있는 몇 개의 성귀를 나에게 보여 주고자 하였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올바른” 성서인가 의심하였다. 그러자 언니는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성서 하나를 택하라고 권하였다. 내가 성서를 개인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간절히 권하는 것이 명백하였다.

휴가 기간의 마지막 주간 중 어느 날, 언니는 자기가 회중 집회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나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비록 내가 논의되는 모든 종교상의 문제점에 계속적으로 이견을 나타내었지만, 이 집회에 참석하고 싶은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놀랍게도, 나는 언니를 따라 「파수대」연구에 참석하였고 그 ‘프로그램’이 매우 흥미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휴가 기간 중 나의 언니 집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친절한 사람들이며 그들 가운데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진 성서

휴가가 끝난 후 나는 ‘리스본’에 있는 서점들을 여러 군데 찾아 다니며 ‘가톨릭’ 성서를 구하고자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결국 종교적인 통로를 통해 하나를 구입하게 되었다. 집으로 곧장 돌아와, 나는 사촌 언니가 나에게 보여 준 성귀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으며, 다음 날 아침 4시까지 이에 몰두하였다. 성서가 우상, 죽은 자의 상태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관해 가르쳐 준 바는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나는 자문해 보았다. “왜 우리는 수녀원에서 성서를 공부하지 않았는가? 왜 교회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가? 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원래의 위치로 회복되지 않았는가?”

나는 나의 숭배에서 우상의 사용을 즉시 중지하였다. 히브리서 10:10을 고려해 본 후,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1974년 7월부터 12월까지 나는 성서를 혼자서 공부하였으며, 이제는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을 기꺼이 사용하였다.

‘리스본’에 있는 ‘가톨릭’ 대학교의 신학부 학장이며 유명한 사제인 사촌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성서에서 배운 바를 그와 함께 논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숭배에서 우상의 사용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우상의 사용을 합리화하였다. “인간은 약하며 눈에 보이는 보조물을 필요로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잊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점에 기꺼이 동의하였으나,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반감을 덜 일으키게 된다고 설득력 없이 주장하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성서에 있는 많은 귀절들이 상호 모순된다고 말함으로 성서의 가치를 훼손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믿음은 강하지 못한게 분명하였다.

현명한 결정

1974년 12월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가정 성서 연구를 의뢰하였다. 며칠이 지난 12월 22일, 나는 ‘리스본’에서 열린 특별 집회에 참석한 39,000명 이상의 사람들 가운데 끼이게 되었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인 ‘N. H. 노워’와 ‘F. W. 프랜즈’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였다. 이 모임은 나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여기서 나는 모두가 성서의 연구생들이고 그 가르침에 익숙해 있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영과 진리로 숭배”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류의 숭배라고 생각하였다.—요한 4:24, 신세.

나는 모든 회중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2월 나는 집집으로 방문하여 마태 복음 24:14에 있는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나는 진실로 성서의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나의 인생을 헌신하게 되었다. 나의 헌신을 상징하기 위해, 나는 그 해 여름 “하나님의 주권” 지역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1월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인 ‘파이오니아’로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장로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든지 원하시는대로 저를 보내 주세요. 저는 정규 ‘파이오니아’가 될 수도 있고, 특별 ‘파이오니아’ 또는 선교인이 될 수도 있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지 알려 주세요.”

1977년 11월 나는 결혼하였다. 이제, 남편과 함께 나는 이 곳 ‘포르투갈’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을 정말 기쁘게 여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인내심있게 대해 주었고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아직도 거짓 종교의 전통에 매여있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명상과 금욕의 생활”을 택하기보다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본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 것이다. (사도 20:35)—기고.

[44면 삽화]

성취되지 못한 그 꿈이

성취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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