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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도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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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1
깨81 12/1 12-14면

‘가도의 여왕’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한 역사적 근원을 찾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고대 역사가들은 종종 사실을 과장하거나 명백한 신화들과 믿기 어려운 전설들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서는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라는 것이다. 성서는 고대 역사서지만, 흥미로운 사건들과 장소들에 대해 성서가 알려주는 세부점들은 믿을 만하고 정확함이 재삼 재사 증명되었다. 남으로부터 ‘로마’로 이어지는 고대 도로가 그 예이다. 그것은 ‘아피안’ 도로라고 불리운다.

기원전 300년 경에 건설된 ‘아피안’ 도로는 사도 ‘바울’이 기원 59년 경에 그 단단한 용암석들을 밟고 갔을 때에 이미 잘 이용되고 있었다. ‘로마’ 시인들이 “장거리 가도(街道, ‘하이웨이’)의 여왕”이라고 부른 이 도로 상당 부분을 사도 ‘바울’은 여행하였다. 당신은 그의 여행 길을 더듬어 밟아보고 싶지 않은가?

‘보디올’에 도착

‘바울’과 그의 동행인들은 파선당하였던 ‘몰타’를 떠나 한 군대 장교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였다. ‘바울’은 수인(囚人)이었고 ‘네로’ 황제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보디올’(‘나폴리’ 부근의 오늘날의 ‘포주올리’)에 도착하였다. 기록은 이러하다.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였더라.]”—사도 28:14.

그 군대 장교가 반대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놀랠 일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고대 ‘보디올’은 휴양지로서 “그곳의 많은 온천들이 여러 가지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생각되어 ‘로마’인들의 인기있는 온천장”이었기 때문이다.—「맥클린톡과 스트롱 백과사전」

‘바울’이 ‘보디올’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그에게 ‘로마’로 가는 길이 유명하긴 하였지만 쉬운 길이 아님을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지도를 보면 (삽화 참조) ‘바울’이 해안선을 따라 ‘로마’까지 곧장 여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한 세대 후인 ‘도미티안’ 황제 때에는 해안 도로가 건설되었지만 ‘바울’ 당시에는 내륙으로 돌아서 가야 하였다. 내륙으로 ‘카푸아’까지 간 다음 ‘바울’은 ‘로마’까지 212‘킬로미터’에 달하는 그 ‘가도의 여왕’ 길을 갔을 것이다.

‘카푸아’에서 ‘타라시나’까지

‘카푸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아피안’ 도로의 원래 종점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 시대 보다 오래 전에 그 도로는 동쪽으로 ‘베네벤툼’까지 연장되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 도로는 오늘날 이용되고 있는 현대식 고속도로의 기초가 된다. ‘아피안’ 도로는 ‘베네벤툼’(현대의 ‘베네벤토’)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베누시아’(‘베노사’)를 경유하여 370‘킬로미터’나 떨어진,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의 “뒤축”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 ‘타렌툼’(‘타란토’)과 ‘브런디시움’(‘브린디시’)까지 곧장 계속 이어져 있었다.

참으로, ‘아피안’ 도로가 ‘로마’인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이 항구들이었다. ‘그리이스’로 여행하는 ‘로마’인들은 누구나 먼저 ‘아피안’ 도로를 거쳐야 하였다. ‘로마’ 제국이 동쪽으로 뻗어남에 따라, ‘가도의 여왕’의 교통량은 대단해 지게 되었다.

물론, ‘바울’은 동쪽으로 ‘베네벤툼’으로 해서 ‘브런디시움’ 및 ‘그리이스’까지 여행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로마’를 향해 서쪽으로, 그 다음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의 여행은 어떠하였는가?

‘바울’이 ‘카푸아’를 떠나 ‘이탈리아’ 해안 쪽을 향하여 ‘캄파냐’ 구릉지를 통과함에 따라, 아마 그 절경은 울퉁 불퉁한 도로를 벌충해 주었을 것이다. 그 도로가 울퉁 불퉁했던 것은 그 길이 다소 커다란 조약돌 비슷하고 단단한, 다각형의 용암석 덩어리들로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돌들이 전모를 다 보여준 것은 아니다. ‘로마’인들은 단단한 기초가 나올 때까지 그 돌들 밑의 표토를 파내었다. 그 다음 그 기초 위에 여러 켜의 자재, 즉 큰 돌들, 부스러뜨린 돌들 및 ‘모르타르’와 섞은 자갈 등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그 도로의 표면을 포장하고 가운데를 약간 높게 하여 물이 빠지게 하곤 하였다. ‘로마’의 도로들은 오래가도록 만들어졌다.

‘바울’이 ‘타라시나’(현재는 ‘테라시나’)에 다가감에 따라 그 도로는 해안을 따라가기 시작하였고 아름다운 초목으로 에워싸여 바다로 내리 꽂은 듯한 암벽의 절경이 펼쳐졌다. ‘카푸아’에서 ‘타라시나’까지 109‘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데는 틀림 없이 여러 날이 걸렸겠지만, 숙박은 할 수 있었다. ‘로마’의 주요 가도들은 24‘킬로미터’ 정도되는 곳마다 ‘마시오네스’라고 불리우는 휴게소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곳에서 피로한 여행자들은 식사를 하거나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고, 심지어 말을 바꾸거나 수레를 수선하기까지 하였다.

‘타베르내’라고 불리운 대중 주막들도 도로 선상에서 발견되었지만, 그것들의 손님들은 불량하기로 유명하였다. ‘타베르내’에는 “소매치기가 들끓었고, 일용품은 부족하였으며 단골 손님들이란 그 제국의 인간 쓰레기들이었다”고 「세계의 위대한 로마 도로들」이라는 책은 말한다.

‘보디올’처럼 ‘타라시나’도 ‘바울’ 시대에 하나의 휴양 도시였다. 아마 누군가가 ‘바울’에게 ‘티베리우스’(‘디베료’) 황제를 위해 그곳에 지은 호화스러운 별장을 가리켜 주었을 것이다. 한 때 호화로왔던 사원들, 온천들 및 극장들과 함께 그 별장의 폐허를 오늘날에도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분명, 그 도시를 내려다 보던 ‘주피터 앙그주르’의 거대한 사원을 모르고 지나쳤을리 없다.

‘타라시나’에서 ‘드리 타번즈’까지

‘카푸아’와 ‘타라시나’ 사이의 구릉지에서는 ‘아피안’ 도로가 약간 구불 구불하였지만 ‘타라시나’에서 ‘로마’까지는 도로가 마치 자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물론, 구릉지의 곧게 뻗은 길들은 흔히 경사가 져 있었고, ‘타라시나’ 부근의 ‘아피안’ 도로는, 특히 ‘바울’ 시대에, 정말로 경사가 심했다. 나중에 ‘트라얀’ 황제 시대에는 ‘타라시나’가 자리잡고 있던 산을 넘어 가는 가파른 오르막 길을 면하기 위해 벼랑을 37‘미터’ 깊이까지 깎아냈다.

‘바울’이 ‘타라시나’로부터 경사가 심한 길을 내려왔을 때, ‘폰타인’ 늪지대라는 습한 저지대가 나왔다. 그것은 그의 여행의 대단히 불쾌한 부분이었다. ‘바울’보다 약 한 세기 전에 그 길을 여행한 바 있는 ‘로마’ 시인 ‘호레이스’는 “물에서 나는 악취”와 “늪 개구리들 및 성난 모기들”이 “내 식욕을 공격하였다”고 웅변적으로 불평하였다.

아마 ‘로마’에 살던 ‘바울’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그가 수인으로서 이러한 불쾌한 구간을 거쳐서 ‘로마’에 오는 길이라 피로하고 몸이 불편하였을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 기록이 알려 주듯이, 형제들은 자기들 집에서 안일하게 ‘바울’을 기다리지 않고 그가 오고 있는 도로로 마중나왔다. 이러한 기록이 있다.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드리 타번즈’, 신세)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사도 28:15.

‘압비오’ 저자는 ‘로마’에서 약 63‘킬로미터’ 떨어진 ‘폰타인’ 늪지대의 입구에 있었다. 그 길을 ‘로마’ 쪽으로 15‘킬로미터’쯤 따라 가면 ‘드리 타번즈’가 있었다. 실로, 이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형제 ‘바울’을 격려하기 위해 애써 그 먼 길을 마중 나왔던 것이다.

‘로마’를 향하여!

‘아피안’ 도로에는 ‘로마’ 식으로 1‘마일’(1,480‘미터’, 즉 현대 ‘마일’의 약 0.9) 되는 곳마다 거대한 돌들이 있었으므로 ‘로마’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로마’에서 온 형제들이 ‘바울’에게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돌들은 주요 도시들까지의 거리, 방향 및 기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사실인즉, ‘압비오’ 저자의 그 이정표는 아직도 존재한다. 그 불쾌한 늪지로부터 ‘로마’로 향하는 그 도로는 ‘알바니’ 구릉지를 따라 오르막 길이 그 도시에 가까이 감에 따라, 다시 내리막 길이 된다. 고대 ‘아피안’ 도로의 이 최종 부분은 하나의 공공 공원으로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바울’의 발자취를 더듬어 밟다 보니 당시로 돌아 가는 것만 같다.

이 구간에서는 원래의 포장 돌들이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닳았지만 원래대로 깔려 있는 부분들을 이따금씩 볼 수 있다. 가로변에는 약간의 삼나무들과 많은 소나무들이 서 있어 모든 것에 엄숙한 정온의 분위기를 주고 있다. 붉은 벽돌담들의 폐허, 아직도 해독할 수 있는 몇자의 ‘라틴’어가 새겨진 대리석 ‘슬라브’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따금씩 닳아 빠지고 깨어진 조상(彫像)들도 보인다. 아직도 그 도시에 좀 더 가까운 곳에는 그 유명한 지하 무덤 중 두개가 남아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숨었던 곳들이다. 무덤들은 ‘로마’법이 요구했던 대로 그 성벽 밖에 있지만, 이제 ‘로마’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관광객으로 ‘로마’에 온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그에게 몇몇 명소들과 기념비들을 가리켜 주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페허가 된 것을 볼 수 있는 기념비들 중 많은 것은 ‘바울’ 시대 얼마 후에 세워졌다. 그러나 요새 역할을 할 만큼 큰(중세기에는 실지 그렇게 사용되었음) ‘세실리아 메텔라’의 커다란 원형 무덤은,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듯, 틀림없이 ‘바울’의 눈길도 사로잡았을 것이다.

곧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포르타 캄페나’를 통과하여 그 도시로 들어 갔다. 거기 왼편 바로 옆에는 25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 즉 그 거대한 ‘써어커스 맥시머스’가 있었다. ‘브런디시움’ 항구로부터 약 583‘킬로미터’에 달하는 ‘아피안’ 도로는 여기서 끝났다. (혹은 시작하였다.) 만약 당신이 ‘로마’를 방문하여 직접 ‘바울’의 발자취를 더듬어 밟아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구 ‘아피안’ 도로를 찾아가 보도록 하라. 새 ‘아피안’ 도로는 번잡한 차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세부점들은 그 자체로서만 흥미 진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성서를 신뢰해야 할 좋은 이유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성서는 과거에 대해서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말해 주는 책이다. 성서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면, 그것이 장래에 대해 약속하는 바를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떠한가? 성경이 말해 주는 것은 믿을 만할 뿐 아니라 위안과 감동을 준다.

[13면 아피안 도로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로마

드리 타버언즈

‘압비오’ 저자

테라시나

보디올

카푸아

나폴리

베네벤토

베노사

타란토

브린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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