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83 4/1 8-11면
  • 좌절감에 빠졌을 때—내가 갈 곳은 어디였는가?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좌절감에 빠졌을 때—내가 갈 곳은 어디였는가?
  • 깨어라!—1983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좌절감에 빠져 성장하다
  • 공산당에 입당하다
  • 희망이 보이다
  • 탈당하다
  • 그리스도인이 되다
  •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17 여호와의 증인 연감
  • 제7부: 유토피아를 찾으려는 정치적 노력
    깨어라!—1990
  • 우리는 참다운 의의 근원으로 전향하였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8
  • 비좁은 길을 찾고자 한 사람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3
더 보기
깨어라!—1983
깨83 4/1 8-11면

좌절감에 빠졌을 때—내가 갈 곳은 어디였는가?

「깨어라!」 일본 통신원 기

감정이 격해지고 목이 메어서 나는 열광적으로 박수 갈채를 보냈다. 무엇에 대해서인가? 나는 방금 ‘천리마’라는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그 영화는 북한 노동자들이 그들을 말과 소처럼 대하는 소위 미 제국주의자들 및 다른 사람들과 싸워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한 혁명 영화였다. 마침내 나는 내 생애를 바칠 그 어떤 것을 발견하였다. 즉 자유, 평등, 평화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 말이다. 이것은 나의 좌절감을 없애주었는가?

좌절감에 빠져 성장하다

나는 왜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는가? 그것은 내가 소년 시절에 겪었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일본 ‘나가노’ 현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 때문에 동방의 ‘스위스’라고 불리었다. 즐거운 자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정 생활은 다소 슬프고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나의 부모는 모두 병환중이었고 벌어들이는 거의 모든 돈이 치료에 들어갔다.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직전에 어머니는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시에는 부모가 없는 아이는 깡패가 되기 쉽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부모 없는 아이는 형편없단 말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사회의 냉대는 나를 분노하게 하였고 좌절감에 빠지게 하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 아버지도 사망하였다. 내가 고아에 대한 이러한 냉대를 온전히 느낀 때가 바로 이 때였다. 단지 고아라는 이유 때문에 한 회사에 제출한 취업 신청서가 거절당했다. 아, 나는 차별 대우를 받지 않는 생활을 얼마나 바랐던가! 마침내 나는 ‘토오쿄오’로 이사하여 인쇄소에서 일했다.

어느 날 직장 동료가 나에게 젊은 사람들만 모이는 모임에 가고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초대를 받아들였으며, 매우 놀랐다! 모든 젊은 남녀가 나를 따뜻하게 환영하였으며 매우 친절하였다. 그 모임은 일본 공산당 예하 조직인 ‘민주 청년 연맹’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는데, 그 당을 위해 장래성 있는 당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모두는 “노동가”를 부르고 ‘포크 댄스’를 즐긴 다음,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져서 “미래 노동자들의 위치”나 “공평하고 평화로운 국가”와 같은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느 날 토론이 끝난 후 어떤 청년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평화로운 생활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 차별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말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열의를 가지고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계급 차별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즉석에서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러시아’, 중국 및 북한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혁명이 필수적이죠. 하지만 여기 일본에서는 무력 혁명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이념 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이죠.” 바로 그 때에 나는 ‘천리마’라는 영화를 보러 갔으며, 그것을 본 다음에 결정을 내렸다!

공산당에 입당하다

1960년에 나는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좌절감에 빠진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나는 낮은 임금과 가혹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여러 기업체 내에 조합을 조직하였다. 또한, 나는 정치적인 활동과 그들의 투쟁에서도 활동적이 되었다. 예를 들면, 나는 미군 기지 앞에서 ‘요코스카’에 핵 잠수함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강력한 시위를 벌인 집단에 함께 하였다. 우리는 또한 ‘미-일 안보 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행진에도 참여하였다.

1963년 7월에 나는 건강 문제로 인해 ‘나가노’ 현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계속 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1966년 4월에 결혼했지만, 나의 아내는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련을 맺지 않았다.

공산당의 여러 가지 활동을 수행하면서, 나는 당이 실제로 갖추어야 할 상태와 당시의 당 상태 사이에 얼마의 모순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당 수뇌부에서 내려오는 명령은 무조건 순종해야 하였다. 활발한 토론들이 열렸지만, 조직은 교환된 의견들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건설적인 생각들은 무산되어 버렸다. 자유와 평화에 대한 우리의 토론은 단순히 말뿐이었다. 단순한 강압적인 복종은 내가 어렸을 때에 경험했던 위압감을 다시 느끼게 했다.

나는 ‘현재와 같은 식으로 한다면, 내가 원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참으로 설립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질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으며, 당에 대한 나의 온전한 신뢰감은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어느 것에도 희망을 둘 수 없었다. 오래된 실망감이 자라기 시작하였으며, 내 활동도 식어 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좌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희망이 보이다

1969년 1월 굉장히 추운 어느 날에 있었던 일이다. 아내와 내가 집에서 기계로 편물을 하고 있을 때 20세가 채 못되어 보이는 ‘여호와의 증인’ 아가씨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아내는 방문객을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해 집안으로 초대하였다. 나는 아내의 이러한 행동이 나의 인생 행로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인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 젊은 ‘여호와의 증인’은 시편 37편 10절과 11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에 관해 설명하였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라.] ·⁠·⁠·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그러나 그 말은 나에게 감명을 주지 못했다. 나는 ‘칼 마르크스’의 견해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아내는 관심을 보였으며 이 사람이 다시 방문하게 하고 싶어했다. 실제로 나는 ‘이 젊은이는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엾은가!’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의 어리석은 생각을 단념하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전혀 다른 동기로 아내에게 동의하여 이 처녀가 다시 방문하게 하였다.

그가 다시 찾아 왔을 때에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는 소책자를 사용하였으며, 참다운 평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 평화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라는 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그 아가씨의 재방문은 계속되었다. 한번은 그 증인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공평과 평화로 다스릴 수 없읍니다.” 그는 예레미야 10:23을 인용했다. 내가 그를 다음과 같이 강력히 비판했을 때 내가 느꼈던 분노를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아가씨는 무슨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든지 불완전함에 전가하는군요—얼마나 비겁한 일이요!”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 완전했다는 어떤 사례도 보여줄 수 없었다.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그 ‘증인’은 항상 성서를 사용해서 우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증인은 또한 도표와 그림들을 사용해서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머리로는 그가 이야기한 것과 출판물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으로는 거절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란 단어가 계속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성서에 기록된 것에 이치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토론을 계속했다.

탈당하다

공산당 내에서 나는 단지 “인류는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또는 “평화는 저와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이상적인 이론만 전개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어떠한 해결 방법도 볼 수가 없었다.

공산당이 단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를 꿈만 꾸는 생활 방식을 되뇌일 뿐인 것 같아 보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공산당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탈당서를 냈다.

즉시 당 수뇌부에서 3명이 와서 밤새껏 “요점 반복” 모임을 가졌다. 신체적인 학대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3일 밤이 지난 후에 그들은 내가 기회주의자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탈당하는 일은 정신적인 고통을 초래하였지만, 간부들은 탈당하려는 내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나를 돌이키기 위해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1969년에 공산당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사회주의 사상은 계속 나의 사고를 지배하였다. 그래서 성서 연구를 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계속 나를 쫓아다녔다. “이것도 역시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믿고자 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내가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내가 「보라!」 소책자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a 책을 연구하였을 때에 나는 이러한 가르침들을 반대하는 것이 비이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언젠가 내가 성서를 읽고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이 알려 주는 성귀에 내 눈이 멈추었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느니라.]” (전도 1:5-7) 이 말씀을 묵상해 보고 나서 나는 성서가 단순한 종교적인 책이 아니라 과학적인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성서가 참되며, 평화가 성서에서 알려 주는 방법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얼마 후 나는 또 다른 책인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를 읽었으며, 그로 인해 또다시 놀라게 되었다. 인간의 몸과 그 섬세한 구조 그리고 출산의 신비한 면들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무지의 소치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 책의 7장인 “유전에 의하여 기본 종류의 구분이 유지된다”에서 과학 물질인 DNA(‘디옥시리보’ 핵산)에 대해 알게 되었고 창조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과 연결지을 수 있었고 이제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게 됨에 따라 모호했던 것이 참으로 매우 가깝고 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로마 1:20; 히브리 3:4) 나는 평화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다른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나는 직업상 산속으로 들어가 숙박소 관리인이 되었다. 이곳은 내가 이전에 살던 집에서 약 한시간 반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가정 성서 연구 사회자를 이렇게 먼 거리까지 오게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요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내에게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그리스도인이 되다

그러나, 여행하는 감독자가 회중을 방문하여 회중이 도움의 손길을 베풀기 위해 노력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차를 가진 한 형제가 사회자를 매주 우리 집까지 차에 태워다 주는 마련을 하였고, 우리는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친절은 우리가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참석한 집회에서 우리는 환영받았을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관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를 볼 수 있었다.—마태 5:9.

이제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과 앞으로 우리를 위해 해 주실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나타내기를 열망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침례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나타내고 싶었다. 우리는 1970년 5월 27일에 침례를 받았다.

내가 공산당원에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으로 변화한 것은 이전에 나와 교제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변화는 매우 기적적인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어린아이였을 때에 나는 가족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이제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해 주는 매우 커다란 그리스도인 가족을 가지고 있다. (마태 12:48-50) 한 때 나에게는 편견으로 점철된 괴롭고 불만족스러운 날들이 있었다. 이제 나는 참다운 평화와 많은 즐거움으로 가득찬 영적으로 만족을 주는 생활을 발견하였다. 나는 인간의 능력과 한계가 베풀 수 있는 것을 초월한,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희망을 추구하고, 발견하고 확신하게 될 수 있었다. 나는 행복과 넘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께 의뢰함으로써 나는 좌절감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각주]

a 세권 모두 ‘뉴우요오크’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9면 삽입]

나는 ‘내가 원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참으로 설립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10면 삽입]

나는 ‘칼 마르크스’의 견해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10면 삽입]

이 말씀을 묵상해 보고 나서 나는 성서가 단순한 종교적인 책이 아니라 과학적인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였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