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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피에 흐르는 ‘컨트리 뮤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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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피에 흐르는 ‘컨트리 뮤우직’”
  • 깨어라!—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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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4 2/1 11-14면

“내 피에 흐르는 ‘컨트리 뮤우직’”

산에 눈이 내렸다. 폭설이다. 길이 막혔다. 양식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우리 식구용 공급품을 짐말 네 마리에 잔뜩 실어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다. 아버지는 울퉁불퉁한 그 지대의 길을 알았으므로, 강과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힘들여 더듬어 올라가,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날라다 줄 수 있었다.

이것은 50년도 넘는 지난 날의 이야기다. 우리 가족은 머지않아 ‘웨스트 버어지니아’ 주를 떠났지만, 사람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 있다. 아버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외에도, 다른 것—내가 “마음의 고향”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 곧 자연의 아름다움과 건전한 가족 생활 및 적극적 가치관을 찬양하는 ‘컨트리 뮤우직’에 대한 사랑—을 내게 심어 주었다.

아버지가 ‘밴조우’를 연주하면 어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콸콸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골짜기에 메아리치는 산간 지방의 ‘포우크 송’을 연주하고 노래하며 저녁에 산길을 걸어 내려오던 일을 나는 얼마나 자주 회상하였던가! 생애 내내 나는 세상이 “마음의 고향” 음악을 훨씬 더 많이 필요로 한다고 느껴왔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음악을 세상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함

‘웨스트 버어지니아’ 주에서 ‘펜실베이니아’ 주로 이사한 직후 나는 ‘기타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첫 음악 ‘그루우프’를 만들었다. 우리는 젊은 성인들을 위해 학교 행사와 모금 ‘파아티’에서 연주했다. 곧 음악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힘이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터로 가서 살인을 하는 것은 아버지가 내게 심어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걸맞지 않는 일이었다.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연기되었다. 나중에 보병에 징집되었다. 기동 훈련중이던 어느날 밤 나는 흔들리는 다리에서 9‘미터’ 아래로 떨어져, 한쪽 다리가 일곱 군데나 부러졌다. 다리가 나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군인들로 된 작은 ‘그루우프’와 함께 연주를 하였다.

제대한 다음, 나는 일류 ‘컨트리 및 웨스턴 뮤우직’ ‘그루우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빌보오드 매거진」에 광고를 하자, 전국에서 음악가들이 모여들었고, ‘파인 홀로우 잼버리’를 구성하게 되었다. 우리는 ‘라디오’ 방송으로 출발했다. 곧 우리는 미국 동부와 ‘캐나다’에서 직접 출연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여행 지역에 있는 17개의 ‘라디오’국이 한 방송망으로 연결되었다.

나의 다음 공연 장소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힐빌리’ 공원이었다. 거기서는 ‘컨트리 뮤우직’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주가들 가운데 많은 수가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였다. 나는 그 ‘쇼우’의 사회를 보았고, 35명이나 되는 ‘파인 홀로우 잼버리’ 단원이 그 ‘쇼우’를 지원해 주었다. 사업이긴 했지만, 수천명이 매주 공원에 소풍와서, “마음의 고향” 음악인 ‘컨트리 뮤우직’을 현장에서 즐기는 광경을 보는 것은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로큰로울’

‘컨트리 뮤우직’에게 만사가 순조로와 보이던 그때 ‘로큰로울’이 등장했다. 내가 처음 ‘록’ 음악을 접한 것은, ‘클리이블랜드’의 ‘서어클’ 극장에서 한 ‘쇼우’의 사회를 보던 때였다. 제작자는 무대 후면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격노해 있었다. 청중도 화가 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사람에 대해 너무나도 지루해 했다. 그의 신체 동작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혐오하면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사회자인 나로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이름의 그 새파란 신인 연주가를 무대에서 내보내고 다음 ‘프로’를 소개하는 것이 임무였고, 재빨리 그렇게 해야 했다.

“그 애송이는 도저히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할거야”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내가 잘못 생각했다. 목소리 교습을 받은 후에 그는 ‘로큰로울’의 흥행을 촉진하는 데 아마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했다. 그가 또한 ‘컨트리 뮤우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현대 ‘컨트리 뮤우직’이 전통적인 ‘컨트리’형에서 ‘록’형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컨트리’ 쪽과 ‘록’ 쪽의 인기를 한꺼번에 얻었지만, 인기의 대가는 비싼 것이었다.

‘록’ 음악이 폭풍처럼 전국을 휩쓰는 동안에도, 나는 ‘컨트리 뮤우직’의 흥행을 촉진하느라고 계속 분주했다. ‘내시빌’의 어느 출연 계약 업자가 나에게 ‘컨트리 및 웨스턴 뮤우직’ ‘스타아’인 ‘지미 웨이클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요청했다. 우리는 미국 동부의 많은 곳을 순회한 후 ‘홀리웃’에 정착했고, 거기서 나는 몇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무엇인가 허전했다

‘홀리웃’에서 나에게는 만사가 순조로왔다. 나는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가야 할 곳에 가며, 활동적인 ‘스타아’가 해야 하는 일은 모두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허전했다. 생산 활동인 것처럼 보이는 정말 화려한 그 일에는—내가 늘 자신을 묘사하는 식을 빌자면—산길을 걸어내려 오던 맨발의 소년 시절에 품었던 그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 나는 ‘펜실베이니아’의 집으로 돌아갔다.

한 음반 회사가 나에게 “요정 ‘엘피이’”라는 축일 노래를 취입하도록 요청했다. 그 일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일곱 군데의 음반 제작 회사들이 판매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나의 첫 음반이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연이은 취입물은 쉽게 높은 매상고에 달할 수 있었다.

음반으로 명성을 얻게 되자 더욱 잦은 지방 공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연주한 노래들은 나에게 내 헌신적인 아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사는 아내가 생각나게 하였다.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심금을 울렸다. 연주가들은 마음을 달래느라고 종종 술이나 마약을 사용한다. 나는 집으로 갔다.

채울 것을 발견함

1969년에 우리는 ‘플로리다’ 주로 이사했다. 중부 ‘플로리다’ 주의 평지에 살던 나는 사람들과 산과 음악에 대한 나의 본능적인 사랑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발견하게 되었다.

1970년의 ‘크리스마스’날이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막 돌아온 때였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내가 결코 잊을 수 없을, 정직한 얼굴을 하고 솔직히 말하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고, 그는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성서에서 보여주었지만, 그가 말한 어떤 것보다도 내게 감명을 준 것은 나에 대한 그의 명백한 관심이었다.

그는 우리 집을 나서기 전에 나를 가까운 왕국회관으로 초대했다. 그 날 몇 시간 후에 집회가 있었다. 나는 갔다. 성서 연설은 흥미있었지만, 내 주의를 사로잡은 것은 뒤따른 성서 제목의 공개 토론이었다.

전국을 재앙처럼 뒤덮고 있던 인종 문제가 여기는 없었다. 흑인, 백인,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마음에 있는 무엇인가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래야 한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집회 후에 나는 환영하는 인파에 둘러싸였다. 나를 초대한 사람이 내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나의 집에서 나와 성경을 기쁘게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빨리 시작할 수 있을까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다음 날 밤부터 시작했다.

두 주일이 지나자 그는 다른 사람들을 방문하는데 함께 가자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더 좋은 상태에 관한 성서의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다.

타협하라는 압력

내가 ‘플로리다’ 주로 이사한 의도는 결국 음악에 대한 나의 관심을 배출할 시간제 일을 찾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여러 ‘나이트 클럽’에서 일주일에 두세 저녁 연주하는 연예 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대 음악에 일고 있던 변화는 내가 배우고 있는 성서 원칙과 정면 충돌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을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트 클럽’ ‘쇼우’에서 사회를 보려면 종종 선정적이고 성 지향적인 농담과 말을 해야만 한다. 손님들이 술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그들의 생각은 더욱 둔감해지고, 자연히 더욱 뻔뻔스러운 대화를 요구하게 된다. 나는 결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표준을 타협시키기 거부하는 나의 태도는 일자리를 얻는 데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컨트리 뮤우직’이 ‘록 멜로디’화하는 현상은 나에게 그다지 큰 문제를 초래하지 않았다. ‘컨트리’ 음악가는 그 ‘멜로디’를 편곡하여 자기의 순수한 ‘컨트리’식으로 맞춰 연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던 한 가지는 가사를 바꾸는 일이었다.

전통적인 ‘컨트리 뮤우직’에 붙인 가사는 때때로 낭만적인 삼각 관계 같은 것들로 흐르곤 했다. ‘멜로디’가 ‘록’ 쪽으로 옮겨지자, 현대 ‘컨트리 뮤우직’의 가사는 점점 더 저속해져, 음탕한 행위를 더욱 생생히 묘사하게 되었다. 흔히 대중이, 특히 ‘나이트 클럽’에서 그렇게 요구한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전체 생활 방식은 음악을 통한 나 자신의 표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음악은 내가 윤리적이고 품위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과 상치되었다!

내가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나이트 클럽’에서 ‘쇼우’를 하고 있을 때, 그 모든 일이 막바지에 다달았다. 우리가 연주를 하자, 손님들은 춤을 추거나,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면서 탁자를 끼고 앉아 있었다. 그때 너무나 술을 많이 마신 것이 분명한 한 여자가 허리 위 옷을 다 벗더니, 부도덕한 가사로 된 현대 ‘컨트리 뮤우직’ 노래를 연주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드디어 결판이 나고야 말았다! 그때 나는 자문해 보았다. ‘이같은 곳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새로 만난 나의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의 도덕 표준과 성서 원칙을 타협시키려는 이 마지막 압력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날 밤에 직업적인 ‘컨트리 뮤우직’을 끝맺게 되었다.

건전한 음악을 함께 즐김

음악은 내게 있어 좋은 생활 수단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피에 흐르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전적으로 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우리 회중 성원들이 소풍을 갈 때 한 사람은 ‘바이올린’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은 ‘기타아’를 가져오곤 하였다. 나도 한 몫을 했고,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우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식이나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사교 모임에서 연주한다. 금전적 대가야 없지만, 건전한 즐거움과 음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기회는 나에게 충분한 보상이 됨을 느낀다.

나에게 그렇게도 중요하던 ‘컨트리 및 웨스턴 뮤우직’의 일부는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근본적인 것들—자연 환경에 대한 사랑, 가족 마련에 대한 헌신, 이런 것들이 줄 수 있는 정신의 평화—을 다루어 왔다. 어느 가을날 나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눈부시게 물든 언덕을 지나 차를 몰다가, ‘소경 눈뜨듯’ 새로이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내가 지녀온 “마음의 고향”에 대한 느낌은 새로 배운 성서 진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사랑하고 보살피도록 땅을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골짜기 하나만 평화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온 지구를 아름다운 낙원으로 회복시킬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결혼에 충실할 것을 언제나 원하셨으며, 그분이 만드실 새로운 제도에서도 그렇게 요구하실 것이다. 모든 것이 참으로 합리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고향”이 뜻하는 바였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건전한 음악을 함께 나누는 것이, 전쟁과 경제적 고난과 가족 파탄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원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지 보아 왔다. 하지만 음악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위안이 될 뿐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웃에게 성서 원칙과 희망을 나눠주는 것은 훨씬 더 많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사는 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간절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노래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영원히 북돋을 수 있는 정신의 평화를 베풀어 준다.—‘우디 웃델’의 체험담.

[12면 우디 웃델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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