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내려다 보는 철탑 부인
「깨어라!」 ‘프랑스’ 통신원 기
“안녕하셨읍니까, ‘피에르’! ‘파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즐겁게 머무르시길 바랍니다. 제일 먼저 무엇을 보고 싶습니까?”
“‘에펠’탑이죠!”
“그것 좋지요. ··· 저기 보십시오. 인상적이죠?”
“정말 그렇군요!”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 탑은 어느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줄 만하답니다. 저 나이 지긋한 부인은 머리 부분의 TV ‘안테나’를 포함해서, 선 키가 305‘미터’나 되지요.”
“하지만, 저렇게 거대한 철제 건축물을 도대체 무엇에 쓰지요?”
“몇 가지 세부적인 설명을 요하는 질문이군요. ‘엘리베이터’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동안, 약간의 배경을 말씀드리지요. 약 100년 전에, ‘프랑스’ 당국은 ‘프랑스 혁명’(1789년)의 일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었읍니다. ‘파리’ 시 당국은 명성있는 토목 기사인 ‘알렉상드르 구스타브 에펠’에게 자문을 구했지요. 갑작스러운 요청을 받고 ‘에펠’은 자신의 서류철을 뒤진 끝에, 문득 그때까지 자신의 주의를 거의 끌지 못했던 하나의 계획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바로 300‘미터’ 높이의 철탑을 세우는 것이었읍니다.
“박람회 위원회는 그 계획이 흥미로운 것임을 알았고, 건축 설계안들을 경쟁 모집에 붙였읍니다. 그러자,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는 거대한 단두대와 같은 별별스런 구상들이 제시되었지요. 또 다른 건의는 석조탑이었는데 견적을 빼보고 과거의 경험에 비춰보니까, 몇년 전에 미국이 악전 고투 끝에 완성시킨 169‘미터’의 ‘워싱턴’ 기념탑보다 더 높은 석조 건축물을 세우기란 매우 힘드는 일임이 밝혀졌답니다. 결국, ‘에펠’의 제안이 채택되었지요. 그러나, 묘하게도,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그 탑을 최초로 착상한 사람은 그가 아니었읍니다.”
“‘에펠’이 그 탑을 설계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탑을 ‘에펠’이 세우기는 했지만, 원래는 그의 동료 기술자인 ‘모오리스 쾨클린’과 ‘에밀 누기에’가 설계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자세히 말하자면, 2년 내에 그 탑을 완성시킨 위업은 오로지 ‘에펠’의 공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에펠’의 계획이 박람회 위원회에 의해 선정된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지요.”
“‘에펠’은 그 탑을 건축하기 전에도 유명했었읍니까?”
“그럼요. 그는 ‘포르투갈’ ‘오포르토’의 ‘두로’ 강에 있는 ‘마리아 피아’ 철교와 같은 거대한 철교를 만들어서 유명해져 있었읍니다. 그는 또한 중남부 ‘프랑스’의 ‘가라비’ 고가 철교를 완성시켰는데, 그 다리는 수면에서 122‘미터’ 높이까지 솟아 있어서 그 당시 가장 높은 ‘아아치’형 다리가 되었지요. 또한 ‘에펠’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또 다른 기념물인 ‘자유의 여신상’의 지주용(支柱用) 철제 골조를 세우는 데도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도 빼놀 수 없겠지요.
“‘에펠’이 세운 모든 건축물에 있어서, 바람이 큰 문제였지요. ‘에펠’탑을 세울 때에, 그는 평소의 공법에 의존하여 철제보를 비교적 가는 것을 사용해서 그물 같이 틀을 짜서 작업을 하였읍니다.”
“강풍이 불어도 위험이 없으리라고 확신하나요?”라고 ‘피에르’는 염려가 되는 듯이 불쑥 말하였다.
“걱정없어요. 저 거대한 격자식 철탑은 바람에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답니다. ‘파리’에서 이제까지 기록된 가장 센 바람인 시속 180‘킬로미터’ 이상의 강풍이 불 때에도, 저 탑은 겨우 12‘센티미터’밖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실상, 저 탑은 태양의 영향을 더 받는답니다. 태양열을 받는 부분이 약간 팽창하여, 꼭대기 부분이 18‘센티미터’나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저 탑은 비교적 무게가 가볍지요. 저것을 막 세웠을 때, 무게가 7,000‘톤’이 채 안나갔으니까요! 예를 들어, 30‘센티미터’의 크기로 축소한다면, 겨우 7‘그램’밖에 나가지 않을 겁니다! 사실상, 상대적으로 말해서, 네개의 기초 각각 평방 ‘인치’당 받는 압력은 보통 성인이 앉은 의자의 네 다리가 받는 압력을 상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일 내에 저 탑을 완성하기 위하여, ‘에펠’은 미리 조립된 부품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지요. ‘리벳’ 구멍들을 매우 정확한 지점에 미리 뚫어 놓았고, 또한 2,500,000개의 ‘리벳’ 중 3분의 2를 미리 박아 고정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미리 조립된 철제보 중에 3‘톤’을 넘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철제 부품들을 제 위치에 끌어 올리는 작업이 훨씬 용이하게 되었답니다. 처음에는 커다란 기중기들이 사용되었으며, 건축물이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자 ‘에펠’이 정교하게 만든 이동식 기중기가 그 일을 떠맡았지요. 그 이동식 기중기는 후에 ‘엘리베이터’에 쓰일 ‘레일’을 위로 끌어 올려 주었읍니다. 그렇게 부드럽게 움직이는 가동 장치들이 안전에 기여하였고, 그러한 점은 바로 ‘에펠’의 지대한 관심사 중의 하나였지요. 전체 공사 기간 동안에, 어떤 치명적인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에는—그리고 오늘날에조차도—참으로 괄목할 만한 위업이었읍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설치하였읍니까?”
“그럼, 하부 공사부터 시작해 볼까요! ‘세느’ 강의 인접 지역이었으므로, ‘에펠’은 교량 건설 때 자신이 도입했던 공법을 사용했지요. 16개에 달하는 각 기부(基部)에는 압축 공기를 사용하여 침수를 막은 작업실이 설치되었지요. 이렇게 하여 인부들은 침수로 전혀 방해받는 일이 없이, 잡석과 흙들을 파낼 수 있었읍니다.
“‘에펠’이나 그의 동료 기술자들은 탑의 높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위험한 작업 조건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에펠’에게 가장 어려웠던 문제들 중 하나는 첫 전망대였읍니다. 육중한 목재 비계가 네개의 경사진 교각 및 첫 전망대의 거대한 보들을 지탱하는 데 사용되었지요. 네개의 교각의 끝 부분은 모래를 채운 원통 위에 얹혀 있었읍니다. 모래를 조금씩 빼어내자, 그 교각들은 제 위치로 내려 앉을 수 있었지요. 그에 더하여, 교각 기초대 속에서는 수압식 ‘재크’가 4개의 기둥을 최종적으로 조정하여, 그 원주를 첫 전망대의 철제 구조와 맞출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일단 이 전망대가 완전한 수평을 이루자, 그것을 교각에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재크’를 제거하였읍니다. 그리고 나서야, 건축 작업이 바로 탑 위에서 재개될 수 있었읍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작업이 진행되었고, 하늘로 점점 치솟는 탑을 주시하던 ‘파리’ 시민들은 찬탄과 경악의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리하여, 굴착 공사가 시작된 지 26개월이 채 못된 1889년 3월 31일에, ‘에펠’은 자신이 ‘비공식 작업 현장 축제’라고 명명한 탑의 낙성식에, 1,710개의 계단을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체력이 강건한 소수의 고관들을 초청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피에르’, 우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테니까요!”
“아, 저기 오는군요! 우린 꼭대기까지 곧바로 올라갑니까?”라고 ‘피에르’가 흥분하여 물었다.
“아뇨, 제 2 전망대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합니다. 사실상, 두번째 ‘엘리베이터’도 꼭대기 끝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275‘미터’ 이상이나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전망은 정말 장관입니다. 맑은 날에는 시계(視界)가 65‘킬로미터’까지 미치지요. 보시다시피, 첫 ‘엘리베이터’는 철제 원주 속에서 위로 이동한답니다. 이것은 제법 골치아픈 문제를 야기시켰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엘리베이터’가 제 1 승강단과 제 2 승강단 사이의 굽은 부분을 통과하게 해주는 모종의 장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지요. 오직 하나의 회사인 ‘오티스’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였고, 그 결과 이 회사가 그 ‘엘리베이터’를 만들도록 선정되었답니다.
“최근에, 구식 수압 ‘엘리베이터’가 4개의 현대식 전기 ‘엘리베이터’로 대치되었지요. 이렇게 기술 공학은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에펠’탑을 또 다시 구해 주었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글프게도 지금쯤 이 철탑 부인의 우아한 그림자가 ‘파리’의 지평선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테니까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설명해 드리죠. ‘에펠’이 서명한 원래의 계약서에는 이 탑을 20년 후에 철거하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답니다. 그러나 1903년에 무선 전신의 개척자인 ‘페리에’ 장군이 이 탑을 자신의 실험용으로 사용하였읍니다. 그래서 이 탑은 군사적 목적으로 존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21년에, 최초의 ‘라디오’ 생방송이 ‘에펠’탑에서 송신되어 방송되었읍니다. 1922년부터는 정규 방송 ‘프로그램’이 ‘라디오 투어 에펠’로부터 방송되었지요. 이 탑은 또한 거의 30년 가까이 ‘텔레비젼’ 송신탑으로서 사용되어 왔읍니다. 그래서, 그 ‘안테나’와 함께 현재는 높이가 320.75‘미터’가 되었지요. ‘뉴우요오크’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1930년에 그것을 능가할 때까지, 40년 이상 ‘에펠’탑은 세계에서 인간이 만든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답니다.”
“‘파리’ 시민 자신들은 ‘에펠’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여러 해에 걸쳐 의견들이 사랑에서 미움까지 분분했지요. 과거 1887년에, ‘알렉상드르 뒤마’(아들) 및 ‘기이 드 모파상’과 같은 유명한 작가들과 작곡가 ‘샤를르 구노드’ 같은 일단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공장 굴뚝처럼 ‘파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아주 우스꽝스런 탑’이라고 지칭한 이 탑을 비난하는 항의 서한에 서명을 했답니다. 그들은 ‘향후 20년간, 우리는 철골과 ‘보올트’로 된 저 증오스런 기둥이 전 도시에 ‘잉크’ 얼룩처럼 보기 싫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정들이 누그러졌지요. 그리고 오늘날 ‘파리’ 시민들은 ‘에펠’탑을 ‘파리’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철탑 부인은 또한 매 7년마다 57‘톤’의 ‘페인트’를 사용해서 손질하는 덕분에, 세월의 시련을 견뎌오고 있답니다. 1989년에, 이 탑의 일백 주년을 기념하게 되겠지요.
“모든 사람들이, ‘에펠’탑을 ‘[파리의] 교량들의 양떼’ 가운데에 선 ‘목녀(牧女)’에 비한 어느 시인처럼 그 탑을 보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당신과 같은 관광객들이 그 탑을 보기 위해 전세계에서 연중 3백만 이상이나 문자 그대로 ‘떼’지어 몰려오고 있답니다! 어떤 관광객들은 전망을 내려다 보기 위하여 올라가지요.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게에서 기념품을 사는 데 관심이 있거나, 또는 단지 제 1 전망대에 있는 특별 우체국에서 엽서 한장을 보내고 싶어하지요.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제 1 또는 제 2 전망대에 있는 식당 중 하나에서 전형적인 ‘프랑스’ 식사를 즐기기 위해 서성거리고 있답니다.”
“관광시켜 주시고, 상세한 설명을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내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나는 거의 일백세나 되었지만, 아직도 굳게 서서 ‘파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웅장하고 나이 지긋한 부인을 만났노라고 반드시 말하겠읍니다.”
[9면 삽화]
격자식 철물로 만들어진 이 탑은 크기에 비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