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방법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상당한 압력을 느꼈읍니다”라고 아버지의 죽음을 회고하면서 ‘마이크’는 말한다. 그 일은 그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마이크’의 친구가 할아버지를 여의게 되었을 때 ‘마이크’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이삼년 전이었더라면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용기를 내’ 하고 말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의 팔을 잡고 ‘감정을 억누르지 마. 그것이 도움이 될 거야. 내가 가길 원한다면 가겠어. 함께 있길 원하면 함께 있고. 아무튼 감정을 두려워 말어’ 하고 말했읍니다.”
‘메어리앤’도 남편이 죽었을 때 감정을 억제하려는 압력을 느꼈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이 되려고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까 내 자신의 정상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되려고 하는 것이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됐읍니다. 나는 자신의 상태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하였지요. ‘자 이제 기운을 내자. 너무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구나. 울고 싶다면 울자. 너무 강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자. 속에 있는 것을 털어 놓아야지.’”
이와 같이 ‘마이크’와 ‘메어리앤’은 모두 슬픔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라 고 권한다. 정신 건강 전문가들도 그 말에 동의한다. 「가족의 사망과 슬픔」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와 같다. “슬플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슬퍼하는 것 즉 치유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해소 방안이다. 감정을 풀어주는 것은 압박감을 덜어 줄 수 있다”고 한 심리학자는 본지(「깰 때이다」)에 말했다. 또 다른 의사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이해와 정확한 지식이 함께 하면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때, 그 사람은 올바른 견지에서 자신의 감정을 보게 된다.”
물론,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망한 경우나 오랜 병 끝에 죽게 된 경우와 같은 요인들도 유족들이 나타내는 감정적 반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을 해소하는 것을 망설이지 말라. 그러나 어떻게?
슬픔의 해소—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은 해소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맥베드」에서 이렇게 쓴 바와 같다. “슬픔에 젖은 말들을 해보시오, 말하지 않는 탄식은 포만된 심장에 속삭이며 그것을 터뜨리도록 명할 것이니.” 그러므로 참을성 있고 동정심 깊게 귀기울여 줄 진정한 “친구”에게 당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잠언 17:17) 그리고 들어 주는 사람 자신이 가족을 잃은 일을 효과적으로 극복해 온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에게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얼마의 실용적인 제안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감정에 대해 의사 소통을 하는 것은 오해를 푸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테레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자녀를 잃은 후에 이혼한 부부들에 관해 들었으며 우리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지요.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나서 서로 책임을 묻고 싶을 때는 언제나 기탄없는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더 가까와졌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신의 감정을 기탄없이 나누는 것은 서로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디’는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것이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내 친구는 늘 나와 함께 있어 주었지요. 그는 나와 함께 울었어요. 나와 대화를 나누고요. 나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털어 놓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내게 도움이 됐어요. 나는 우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었읍니다.”
‘신디’는 손쉽게 슬픔을 해소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것 즉 우는 일을 언급한다. 대개의 경우 눈물은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일부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이 귀중한 배출구를 억제한다. 왜 그러한가? 「슬픔과 격분」(The sorrow and the Fury)이라는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는 고통이나 분노 또는 외로움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누구든 열등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칭송은, 비록 속으로는 고통스러울 망정, 금욕주의자들에게 돌아간다.”
특히 남자들은 종종 눈물을 억제할 필요를 느낀다. 요컨대 그들은 “진짜” 남자는 울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건전한 태도인가? 「자녀를 잃는 일로부터 회복하는 일」(Recovering From the Loss of a Child)이라는 책은 이렇게 대답한다. “슬픔의 눈물로 영혼의 정직한 내부 감정을 씻어내는 것은 전염을 막기 위해 상처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 남자나 여자에게는 슬픔을 표현해서 없앨 권리가 있다.”
성서도 그러한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그의 아내]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였으며 ‘다윗’이 ‘사울’왕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몹시 “슬퍼하여 울”었다는 기록을 읽게 된다. (창세 23:2; 사무엘 하 1:11,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하셨는가? 확실히 그분은 비할 바 없는 “진짜” 남자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직후에 그분은 “눈물을 흘리”셨다. (요한 11:33, 35) 그러므로 우는 것이 참으로 남자답지 못한 것인가?
죄책감에 대처하는 일
앞의 기사에서 지적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망으로 잃은 후에 죄책감을 갖는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그러한 느낌을 혼자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느끼는 죄책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필요한 해소책이 될 수 있다.
아마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이 당신이 소홀히 한 어떤 점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든지 우리는 그 사람의 생명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기와 우연”이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전도 9:11) 게다가, 틀림없이 당신의 동기는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의사에게 보다 일찍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병에 걸려 죽도록 의도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은 과연 그 사람이 죽게 한 죄를 범한 것인가?
‘테레사’는 그의 딸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후에 그러한 죄책감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딸을 내보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아빠와 함께 심부름 보낸 것이 잘못일 수는 없으니까요. 단지 끔찍한 사고가 그때 일어난 것이었지요.”
‘하지만 내가 말했더라면 혹은 해주었더라면 하는 것들이 참 많다’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완전한 아버지, 완전한 어머니 또는 완전한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성서는 이렇게 상기시켜 준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야고보 3:2; 로마 5:12) 그러므로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온갖 종류의 “하기만 했어도” 하고 자꾸 생각한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오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당신의 회복을 더디게 할 수 있다.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느낀다면, 죄책감을 경감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할 것이다. 성서는 이렇게 보증해 준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우리의 죄의 기록, 신 영어 성서]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시 130:3, 4) 당신은 과거로 돌아가서 어느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실수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간청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과거의 기록들을 깨끗하게 해줄 것을 약속하셨다면,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잠언 28:13; 요한 1서 1:9.
분노에 대처하는 일
또한 아마 의사나 간호원, 친구 혹은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어느 정도 분노를 느끼는가? 그것 역시 가족을 잃을 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임을 인정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통과 분노는 병행한다. 예로서, 누군가가 당신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때 당신은 화를 내는 경향이 있다. 분노는 보호 즉 방어적인 감정이다.”
따라서 ‘내가 화난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자문해 보라. 만족할 만한 답변을 찾을 수 없다면, 당신의 분노는 아마 당신이 느낀 고통에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일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슬픔과 격분」이라는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분노를 의식하게 됨으로써만—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고 있음을 아는 것—당신은 그것의 유해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물론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어서는 안 된다. 성서는 분노가 계속될 때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잠언 14:29, 3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글로 옮겨 놓는다. 한 미망인은 자신의 감정을 글로 적어 놓고는 며칠 후에 다시 그것을 읽어본다고 한다. 그는 이것이 도움이 되는 해소 방안임을 알게 됐다. 다른 사람들은 화가 날 때 활기찬 운동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됨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해심있는 친구와 그 점에 관해 대화를 나누므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감정을 툭 터놓고 정직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상실」(The Ultimate Loss)이라는 책은 이렇게 지적한다. “[분노나 욕구불만]을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것과 그것을 서로 퍼붓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서로의 잘 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님을 우리 각자는 알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위협적인 기세로 감정을 토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잠언 18:21.
이러한 제안들 외에도, 슬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당신은 질문할 것이다.a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
성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보증의 말을 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그렇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첫째로, 그것은 당신이 현재의 슬픔을 대처하도록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제공된 실용적인 제안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한 원칙들을 적용시킬 때 당신은 극복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에 더해서, 기도의 가치를 과소 평가하지 않도록 하라. 성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강권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리라.]” (시 55:22)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감정을 동정심을 나타내는 친구에게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털어 놓는 것은 실로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고린도 후 1:3, 4.
기도가 주는 유익은 단지 심적인 위안이 아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께서는 성령을 진실하게 구하는 그분의 종들에게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시 65:2; 누가 11:13) 그리고 그 성령 즉 활동력은 하루하루를 이어가도록 “정상적인 것을 초월한 능력”으로 당신을 구비시켜 줄 것이다. (고린도 후 4:7, 신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실한 종이 견디지 못할 문제를 직면하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라.—비교 고린도 전 10:13.
하나님과의 관계가 슬픔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돕는 두번째 방법은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라. 가까운 장래에 의로운 상태 아래서의 이 땅에서 죽었던 사랑하는 사람과 재연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의 느낌은 어떠할 것인가? 참으로 가슴 설레이는 전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때가 올 터인데 그때에는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소리를 듣고 나올 것이[다.”]—요한 5:28, 29, 새번역; 계시 20:13; 21:3, 4.
우리는 그러한 약속을 참으로 믿을 수 있는가? 최초로 생명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이미 살았던 사람을 생명으로 회복시키실 능력이 없겠는가? 더우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음으로, 그분이 자신의 말씀을 이행하실 것을 믿을 수 없겠는가?—디도 1:2, 신세; 이사야 55:10, 11.
‘마이크’는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는다. 그 부활의 희망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나의 아버지가 부활로 돌아올 때 만나게 될 테니까요.”
‘여호와의 증인’은 그 가슴뭉클한 희망에 관해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기꺼이 도움을 베풀 것이다. 그러한 희망은 차이를 가져온다. 물론 그 희망이 고통을 없애 주지는 않지만, 고통을 견디기 더 쉽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 더는 울지 않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잊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회복될 수 있다. 그렇게 함에 따라, 당신은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비슷한 일을 극복하도록 돕는 일에서 이해심있고 동정심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각주]
a 어떤 경우에는, 특히 유족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거나, 자살 증세를 보인 사람이라면,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지침을 얻기 위해, 「깰 때이다」 1982년 2월 1일호 20, 21면을 참조하라.
[11면 네모]
몇 가지 실용적인 제안
친구들을 의지하라: 다른 사람들이 돕겠다고 제안한다면, 그렇게 하게 하라. 그것이 그들의 느낌을 나타내는 방법일 수 있음을 이해하라. 아마 그들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라: 당신의 몸은 충분한 휴식, 건전한 운동 및 이전 만큼의 적절한 영양 공급을 필요로 한다. 건강을 소홀히 해왔다면,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중요한 결정들은 연기해 두라: 가능하다면, 집을 팔거나 직장을 옮길 것인지와 같은 결정을 하기 전에 당신이 좀더 명료하게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잠언 21:5.
남을 고려하라: 참으려고 노력하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겐 어색해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하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재치없이 잘못 말할 수 있다.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이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염려할지 모른다. 성서는 그 날 하루만 생각하라고 교훈한다. “하루 단위로 더욱 살려고 한 것이 내겐 참으로 도움이 되었읍니다”라고 한 미망인은 설명한다.—마태 6:2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