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다”면 온전히 선해야 되지 않는가?
살아있는 사람 모두가 진실로 선하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훌륭하겠는가!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강도, 강간, 및 학대를 당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감옥이 없고 경찰이나 군인도 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참으로 훌륭한 세상일 것이다!
물론, 현 상태하에서 그러한 세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칭송받을 만하다. 그들의 노력은 세상을 개선하는 데는 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같을지라도, 적어도 그들은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위 “선하다”는 것은 온전히 선하다는 뜻인가? 그러한 “선”은 우리의 친구나 이웃을 기쁘게 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창조주까지도 기쁘시게 할만큼 선한가? 하나님의 승인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알고 싶어할 것이다.
“선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사람은 아이처럼 선한 사람”이라는 말은 그 사람이 나쁘지 않다는 것, 말하자면 그는 나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정도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쓰일 때 선하다는 말에는 보다 많은 것이 내포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인할 여지없이, 많은 무신론자들, 불가지론자들, 및 비종교인들도 도덕적으로 선하다. 그들도 악행을 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로 그들이 선하다는 것은 창조주를 기쁘시게 할만큼 선한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로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며, 무시하려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 10:1-3)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은 과오를 빚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의에 대한 인간의 표준—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표준에 심히 못미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선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셨다. 한 부자 청년이 그분께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들의 대화 기록은 그 점을 잘 밝혀 준다. 기록은 이러하다.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태 19:16-22.
특히 오늘날 도덕 및 사회적인 행실이 문란해진 점을 고려할 때 그 사람은 선했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그 사람은 결코 살인이나,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를 한적이 없었고 부모를 공경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선함은 온전히 선한 것이 아니었음을 지적하셨다.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한 것 즉 그의 선함이 결함이 없이 온전하게 되는 데에는 결여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 이것이 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려는 동기를 가졌을 것이다. 또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는 일, 즉 예수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이 해야 할 일로 훈련시키고 계셨던 그 사업에 활동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성경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았다고 지적된 점으로 보아, 재물에 관한 일이 그의 시간을 대부분 차지했을 것이다. 그가 예수의 실용적인 충고에 따라 물질적 소유물들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는 물질에 대한 관심을 영적인 것보다 덜 중요한 위치로 내려 놓게 될 것이었다. 이렇게 하므로 그는 마음이 흐뜨러지는 일이 거의 없이 “먼저 그의 나라”를 계속 구하게 될 것이었다.—마태 6:33.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하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어 활동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이름을 나타’내며,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그릇된 비난이나 거짓말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열렬히 변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17:4, 6; 18:37) 또한 이것은 “서로 나눠 주”는 일을 하는 것도 의미한다.—히브리 13:15, 16.
단순히 선한 것보다 더욱 선하게 되는 법
소위 선하다는 것은 온전히 선하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선해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가 복음 10:38-42에서는 지침을 알려 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예수를]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니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대화에선 무엇을 밝혀 주는가? 물질적인 면으로 예수께 시중드는 일도 칭찬받을 만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영적인 일들에 올바른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마르다가 한 것은 선한 일이었지만 특정한 그 상황에서는 온전히 선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한 일이 더 선하였다.
이처럼 육체적 즉 물질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적인 일들에 역점을 둘 것을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 가운데서도 강조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 신세]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마태 5:3.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선하게 살기는 하지만 특별히 “영적 필요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 자신이 그런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영적인 것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선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배우고자 힘쓰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가 멀지 않아 온 땅에 설립되는 것을 살아서 보게 될 전망을 가질 수 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강도를 만나거나 강간 또는 학대를 당할 위험이 결코 없을 것이다. 더는 감옥이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경찰이나 군인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 더욱 보람있는 일자리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