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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틀러의 군대에서 스페인 선교 봉사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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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틀러의 군대에서 스페인 선교 봉사에 이르기까지
  • 깨어라!—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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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군대에서 스페인 선교 봉사에 이르기까지

게오르크 로이터의 체험담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부분 누구에게나, 살다 보면, 그와 같은 중대한 질문을 하는 때가 있다. 가족의 사망, 심한 사고 혹은 단순한 노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원인을 숙고하게 될 수 있다.

나의 경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1930년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여섯 살에 불과하였다. 나는 부모와 함께 독일 에센 시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귀여워한 카나리아가 새장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본 그날 근심 걱정 없이 살던 나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진 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자문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새는 언제나 매우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는데.’

죽은 새를 빈 깡통에 넣고 정원에 고이 묻었다. 그러나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여러 주 여러 달이 지났지만, 호기심이 말끔히 가실 때까지 그 새의 운명을 계속 곰곰이 생각했다. 굳게 결심을 하고 정원으로 가서 그 깡통을 파냈다. 깡통을 열었을 때, 참으로 놀랐다! 새가 더는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남은 것이라곤 고작 몇 개의 뼈와 깃털뿐이었다. 이것이 새의 삶의 전부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당시에, 나의 질문들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평선상에 어렴풋이 끔찍한 사건 곧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에 끊임없이 괴롭혀 온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더욱 열렬히 찾게 한 사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나치 세뇌 공작과 폭력

여러 해가 신속히 지나갔고, 나는 건축업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고, 그의 선전 장치는 국민을 세뇌시키기 위해 최고 속도로 가동되었다. 사람들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 대신 “하일 히틀러!”라고 말하곤 하였다. 어디에서나 제복을 입은 사람들 곧 융폴크(소년단), 히틀러유겐트(히틀러 청년단), 분트 도이처 메트헨(독일 여자 청년 동맹), SA(Sturmabteilungen 즉 돌격대), 및 SS(Schutzstaffel, 히틀러 친위대)가 있었다. 그리고 거리의 무수한 행렬, 음악 및 팡파르—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에게는 흥미 진진한 시기였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얼마 안 있어 나는 전체적인 열광에 휩쓸려 참여하게 되었다. 공중에는 “오늘은, 독일이 우리의 것; 내일은, 전세계가 우리의 것” 그리고 “국기는 죽음 이상을 의미한다”와 같은 국가주의적 표어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속기 쉬운 십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치 정권에는 초창기에도 추악한 면이 있었다. 1938년 11월 어느 날 아침, 한 유대인 회당이 불타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주위에 소방관들이 서 있었지만, 불을 끄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다. 같은 날 주요 상점가는 깨진 유리로 덮여 있었다. 유대인 상점들은 후에 크리스탈나흐트(유리 조각 밤)라고 불려지게 된 날에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에 대한 대중 항의중 발생한 “자발적인 시위 운동”으로서 SS에 의해 조직되었다. 어디서나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설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나의 역할

16세였을 때인 1939년 9월 1일에 중대한 라디오 발표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독일 군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었고, 폴란드 침입이 시작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는 것이었다.

건축 견습 기간이 끝나자, 독일 군대에 입대하였다. 초기 훈련을 마친 다음, 폴란드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바르샤바의 유대인 거리가 불타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불쌍한 사람들을 잔뜩 싣고 무서운 강제 수용소로 가는 기차들을 보았다. 무엇인가 무섭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의심을 떨쳐버렸다. 나는 여전히 히틀러 총통의 무류한 지혜를 신뢰하였다.

독일인의 소련 침입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나는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아름다운 지역이 전쟁의 피로 흠뻑 젖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42-43년의 지독한 겨울이 닥쳤다. 독일 군대는 그런 겨울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죽은 전우들을 언 땅에 묻을 수조차 없었다. 그런 겨울로 인해 우리의 전진에 종지부가 찍혔다. 다시 말해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에서 패하였으며, 대군이 전멸되었다. 히틀러의 선전은 우리의 철수를 “안전한 전선”의 확립으로 묘사하였지만, 우리 군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전쟁의 가혹한 현실들로 인해 마침내 히틀러의 웅대한 꿈이 천박한 겉꾸미기에 지나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소련에서 철수하다가, 나는 폭탄의 파편에 맞았다. 그로 인해 가슴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전쟁의 무서운 결과 즉 팔 다리가 절단된 군인들, 좌절한 사람 및 그 모든 일의 무모하기 짝없는 상태를 대면하게 되었다. 죽은 카나리아가 다시 생각났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사실상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행운아였다. 부상에서 회복되었고 또한 전쟁을 살아 남았다. 전쟁이 끝나자, 나는 프랑스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하지만 마침내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족 모두는 이 무서운 시대를 살아 남았다.

견해가 영원히 바뀌다

내가 장기간 없는 동안, 부모와 남동생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곧 종교에 관한 긴 대화에 몰두하였다. 나는 그렇게 많은 악과 고통을 허락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리 독일 군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글을 새긴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죽을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는가?’하고 질문하였다. 교직자는, 히틀러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시켜 주었다. 하지만 히틀러 때문에 이 나라는 황폐된 것이다.

아버지는 설명의 근거로 성서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런 때에 살고 있는 이유를 참을성 있게 알려 주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전쟁에서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으시며 얼마 안 있어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실 것임을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 (시 46:9) 아버지는 성경을 펴서 죽음에 관한 한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을 보여주었다.—전도 3:19.

그 다음 일요일에, 부모는 여호와의 증인이 후원하는 공개 강연을 들으러 같이 가자고 나를 초대하였다. 나는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집회는 한 학교에서 열렸는데, 작은 벤치들을 좌석으로 사용하였다. 학교에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곳에서 긴 다리를 작은 벤치 밑에 넣은 채 앉아 있었다. 그러나 강연 내용이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에 불편함을 잊었다. 둘째 시간에는 성서의 한 가지 제목을 고려하는 도중 청중 모두가, 집회 사회자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주목하였다.

집회가 끝나자, 참석한 많은 사람이 나에게 와서 환영하였다. 나는 그들이 나타낸 매우 진실하고 우호적인 태도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상당한 골초였으므로, 흡연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즉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날부터, 증인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직접 해설도 하였다. 마침내, 궁금했던 것들이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모든 유혈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 전역을 낙원으로 만드시고 순종하는 인류에게 영원한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배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서 나를 위한 자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전할 가치가 있는 소식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천년 제국”을 자랑하였지만, 불과 12년—그것도 참으로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은 채—을 다스렸을 뿐이다! 현재 인류를 괴롭히는 온갖 형태의 악을 제거한 후, 땅에 천년 통치를 확립하실 수 있고 또 하실 분은 히틀러나 사실상, 그외 어떤 인간 통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시다.—계시 20:4.

그러한 놀라운 희망은 나를 매혹시켰고, 이러한 일에 관해 친구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먼저 담배를 끊어야 하였다.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한 날을 정하고, 그날부터 담배로 나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벗어날 것이 요구됨을 깨달았다.—고린도 후 7:1.

전 시간 벧엘 봉사

헌신하고 침례를 받은 후, 곧 동생과 함께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정오에 세속 일을 마치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전파해야 할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다. 이 전후 초기 몇 년 동안 우리에게는 서적이 거의 없었지만,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소식으로부터 유익을 받을 수 있도록 임시 기초로 잡지, 서적 혹은 팜플렛을 전하면서 우리가 발견한 관심자를 최선을 다해 돌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상황은 바뀌었다.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 네이선 H. 노어 형제가 그 무렵 독일을 방문하여 더 많은 서적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브루클린으로부터 첫 번째 선적물이 도착하였다. 이로 인해 이 서적을 모든 회중에 분배하기 위해 독일 지부에서는 가외의 일을 해야 하였다. 어느 날 동생과 나는 “즉시 성서관[벧엘]으로 오시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나는 동생에게 이러한 임명은 분명히 우리에게 성서를 거의 하루 종일 연구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한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벧엘에 대한 그와 같은 잘못된 생각은 도착하자마자 이러한 말을 들었을 때 금방 사라져 버렸다. “한 사람은 인쇄 공장에서, 다른 사람은 발송부에서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해 본 다음 누가 어느 일을 자원할 것인지 결정하기 바랍니다.” 결국 나는 발송부에서 일하고 동생은 인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바쁘게 일하는 동안, 우리에게 성서를 읽을 시간은 분명히 제한되어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회중들에게 모든 서적을 제때에 보내기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하였다. 그렇지만, 에리히 프로스트, 콘라트 프랑케 및 아우구스트 페테르스 같은 충실한 형제들과의 교제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여러 해 동안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가진 형제들이었다.

내가 일하던 발송부에는 마그달레나 쿠세로브라는 젊은 자매가 있었다. 그 자매는 “하일 히틀러!” 인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4년 동안 강제 수용소에서 인내해야 하였다. 그에 반해 나는 잘못 인도되어 그 인물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프랑스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우리를 함께 맺어 주었다. 우리는 목표가 같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하였다.a

증기 기관차를 이용한 주방

결혼한 후, 우리는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기를 열망하였다. 할 일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재미있는 임명을 받는 축복을 누렸다. 예를 들어, 1951년에, 나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3일 간의 대회 동안 식당부를 감독하도록 임명받았다. 거기서 우리는 약 3만 5000명의 참석자들에게 급식을 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앞에는 엄청난 일 곧 매우 빈약한 장비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공급하는 일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증기 기관차로 열을 가할 수 있는 51개의 큰 증기솥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어디에서 기관차를 구할 것인가? 우리는 마침내 철도 회사를 납득시켜 기관차 한 대를 빌렸고,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한 회사가 우리를 위해 몇 개의 저압 밸브를 제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증기 기관차로 요리에 필요한 증기를 꼭 알맞은 압력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대회 전날 시운전이 대단히 성공적임이 증명되었을 때 우리 모두는 참으로 안심하였다! 우리의 주방과 기관차의 사진을 실어 대량 급식을 위한 이 “신 발명”을 묘사하는 광범한 신문 보도가 있었다. 그 결과 “깨끗한 숭배” 대회에 대해 호의적인 광고가 많이 되었고, 그 대회 참석수는 마침내 4만 7000명 이상에 달했다.

그 대회에 참석해 있는 동안, 나는 워치 타워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아내와 함께, 나는 먼저 매주 다른 회중을 방문하면서 순회 활동을 하였고, 그 후 대회에서 전체 순회구를 방문하는 지역 활동을 하였다. (후에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이 된) 마르틴 포에칭거, H. 디크만 및 R. 켈제이와 같은 형제들과 함께 봉사한 것은 참으로 특권이었다. 우리는 이 장성한 형제들을 통해 매우 많은 것을 배워 알게 되었다. 매일 그들과 함께 보낸 것은 축복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각각 나누어 줄 다른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의 선교 봉사

1961년에, 나는 뉴욕 브루클린의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할 특권을 받았다. 그 학급은 주로 형제들로 이루어졌고 열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 기간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아내는 독일에 남아있었다.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는 자주 편지를 통해 경험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우리의 선교 임명지는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인 토고였다. 거기서 우리는 그 나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새로운 언어 곧 에웨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노력을 기울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후대하기를 좋아하는 토고 사람들에게 있어, 외국인은 누구나 친구다. 그러나 외국인이 그들의 언어로 말하면, 그들은 그 사람을 형제로 여긴다.

토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젊은 아프리카인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기 시작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나와 함께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에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성서의 소식을 설명하도록 나를 돕는 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조자임이 증명되었다.

우리는 많은 그림이 들어 있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데 이상적인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잘 사용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부 개념은 이 소박한 시골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기껏해야 25, 50, 혹은 많아야 100프랑 정도의 동전에나 익숙해 있는 그들이, 어떻게 계시록 7장에 언급된 14만 4000이란 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동반자는 이 문제를 극복하는 데 있어 손가락을 아주 잘 사용하였고, 필요한 경우 발가락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우리는 모래에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우리는 건강 문제로 유럽 곧 먼저 룩셈부르크로 갔다가 후에 독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 것을 매우 슬퍼했다. 그러나 선교의 영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었고, 얼마 후, 우리는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스페인으로—이사할 생각을 하였다.

또 다른 언어를 배운 후, 우리는 다시 순회 활동에서 우리의 영적 형제들을 섬기고 마드리드 근처의 새로운 벧엘 숙소 건축 현장에서 1년을 보낼 특권을 가졌다. 아내와 내가 이곳 스페인에서 섬기는 일은 매우 큰 만족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은 의미가 깊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계속 배우고 배운 것을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에 큰 상이 따랐음을 말할 수 있다. 나는 히틀러와 같은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고, 일단 성서의 진리를 알게 되자,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만족을 주었다! 이제, 나의 미래가 죽은 카나리아와 같이 될 필요가 없음을 안다. 내게는 결코 짧게 끝나지 않을 의미 깊은 삶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계시 21:1-4.

[각주]

a 마그달레나 쿠세로브 로이터의 체험기는 「파수대」 1985년 10월 15일 호에 나옴.

[17면 게오르크 로이터의 사진]

(위, 기를 들고 있음)

[18면 삽화]

게오르크와 마그달레나 로이터, 스페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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