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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찰, 제2권
통-2 “예리코”

예리코

(Jericho) [‘달의 도시’라는 의미인 듯함]

요르단 강 서쪽의 가나안 도시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초로 정복한 도시. (민 22:1; 수 6:1, 24, 25) 예리코는 예루살렘에서 동북동쪽으로 2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텔에스술탄(텔예리호)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근처의 툴룰아부엘알라이크는 1세기에 예리코가 있던 장소로 여겨진다. 해수면보다 250미터쯤 낮은 요르단 골짜기에 놓여 있는 예리코는 아열대 기후이다. 오늘날 이 지역에서 오렌지, 바나나, 무화과가 재배되고 있으며, 고대처럼 야자나무도 여전히 이곳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384면 삽화]

발굴된 고대 예리코의 성벽

이스라엘의 정복의 첫 열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랑한 뒤에, 모압 평원으로 왔다. 모세는 예리코가 마주 보이는 그곳에서 느보 산으로 올라가 “야자나무 도시”인 예리코와 그 평야를 포함하여 약속의 땅을 보았다.—민 36:13; 신 32:49; 34:1-3.

모세가 죽은 뒤에 여호수아는 정탐꾼 두 명을 예리코로 보냈다. 그들은 라합이 숨겨 주어 들키지 않았으며, 후에 예리코 성벽 위에 있던 라합의 집의 창문을 통해 밧줄을 사용하여 그 도시에서 도망쳤다. 그 두 사람은 근처 산간 지방에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그 후에 요르단의 여울목을 건너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갔다.—수 2:1-23.

예리코 왕과 그 주민들은 넘실거리던 요르단 강물이 멈춰 둑처럼 쌓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른땅 위로 건널 수 있었던 기적을 듣거나 목격하고 몹시 두려워했음에 틀림없다. 그 후에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그 영향에서 회복되기까지는 충분한 방어력을 갖춘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아무도 감히 길갈에 있는 그들을 공격할 용기가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예리코 사막 평원에서 유월절도 지켰다.—수 5:1-10.

후에 예리코 근처에서, 천사 군왕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나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굳게 닫혀 있던 그 도시를 함락시킬 절차를 약술해 주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그에 순종하여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번씩 행진했는데, 그 뒤에는 일곱 제사장이 계속 나팔을 불며 따라갔고, 그 뒤에는 궤를 멘 제사장들과 끝으로 후위대가 뒤따랐다. 이렇게 모두가 예리코 주위를 행진하였다. 하지만 일곱째 날에는 그 도시 주위를 일곱 번 행진하였다. 예리코 주위를 마지막으로 행진하고 나팔을 불었을 때, 백성이 큰 전쟁 함성을 지르자 그 도시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수 5:13–6:20.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리코로 몰려 들어가서 그 주민과 모든 가축을 멸망에 바쳤다. 하지만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 주는 친절을 나타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은 성벽 부분 위에 있는 라합의 집 안에 안전히 들어가 있던 라합과 그의 친족들은 살아남았다. 도시 전체가 불탔지만, 금과 은은 여호와의 신성한 곳에 바쳐졌다. (수 6:20-25) 하지만 한 이스라엘 사람 즉 아간은 금괴 하나와 얼마의 은과 좋은 옷 한 벌을 훔친 다음 그 물품들을 자기 천막 밑에 숨겨 두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과 가족 전체에게 죽음을 초래하였다.—수 7:20-26.

후기 역사에서 언급된 경우들 멸망된 예리코 시는 그 후에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영토에 닿아 있는 베냐민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수 16:1, 7; 18:12, 21) 그 후 오래지 않아 그 자리에 모종의 정착지가 생긴 듯하다. 그것이 모압 왕 에글론에게 함락되어 18년 동안 그의 지배 아래 있었다. (판 3:12-30) 다윗 왕 시대에 하나의 정착지가 예리코에 계속 존재하였다. (삼둘 10:5; 대첫 19:5) 하지만 아합의 통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베델 사람 히엘이 실제로 예리코를 재건하였다. 여호수아가 500여 년 전에 예언한 저주가 그때 성취되어, 히엘은 그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들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다.—수 6:26; 왕첫 16:34.

이와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예언자의 아들들” 가운데 일부가 예리코에 거주하였다. (왕둘 2:4, 5) 여호와께서 폭풍 속에서 예언자 엘리야를 데려가신 뒤에, 엘리사는 얼마 동안 예리코에 남아 있었고 그 도시의 물 근원을 고쳤다. (왕둘 2:11-15, 19-22) 아인에스술탄(전승에 의하면, 엘리사가 고친 샘이라고 함)의 물은 달고 상쾌한 것으로 묘사되어 왔으며, 오늘날의 예리코의 정원들의 관개용수로 사용된다.

유다의 악한 왕 아하스 시대에, 여호와께서는 베가 왕 휘하의 이스라엘 군대가 불충실한 유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고 12만 명을 죽이고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일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여호와의 예언자 오뎃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포로들을 노예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은 포로들에게 옷을 입히고 음식을 준 다음 예리코로 데려가서 풀어 주었다.—대둘 28:6-15.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된 뒤에, 시드기야 왕은 예리코 쪽으로 도망했지만,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예리코 사막 평원에서 그를 따라잡아 생포하였다. (왕둘 25:5; 렘 39:5; 52:8)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예리코 자손” 345명도 기원전 537년에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으며, 예리코에 정착한 듯하다. (라 2:1, 2, 34; 느 7:36) 후에 예리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도왔다.—느 3:2.

예리코는 기원 33년에 예수께서 수행하신 봉사의 직무에 관한 기록 가운데 등장한다. 그분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이었다. 이 도시 근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먼 바디매오와 그의 동료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다. (막 10:46; 마 20:29; 누 18:35. 바디매오 참조) 예리코에서 예수께서는 또한 삭개오를 만나셨으며, 그 후에 그의 집에 손님으로 가셨다. (누 19:1-7) 그보다 전에 유대에서 이웃다운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을 언급하셨다. (누 10:30) 고대의 역사적인 증언에 의하면 이 길에는 강도의 출몰이 잦았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예리코가 멸망된 증거를 발견하였는가?

1929년에서 1936년 사이에 텔에스술탄을 탐사한 영국 탐사대의 대장인 존 가스탱 교수는, 그가 그 유적에 세워진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했던 곳이 심한 화재를 겪었고 그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도시가 여호수아 시대의 예리코라고 생각했고 그 멸망 시기를 기원전 1400년경으로 잡았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가스탱의 결론을 지지하지만, 그 증거를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고학자 G. 어니스트 라이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옛 도시에서 제일 높은 곳을 둘러싼 두 개의 성벽은, 가스탱이 ··· 여호수아 시대에 지진과 화재로 멸망된 성벽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세 번째 천년기로 소급해 올라가며 그 기간에 연이어 세워진 약 14개의 서로 다른 성벽 또는 성벽 구성 부분들 가운데 단지 두 개일 뿐임이 드러났다.” (「성서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 1962년, 79, 80면) 많은 학자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존재했던 예리코의 잔해는 설령 있다 해도 극히 소량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그 멸망 시기부터 남아 있었을지 모르는 잔해가 그 유적에서 더 이전에 행해진 발굴로 제거되었다고 생각한다. 잭 피니건 교수가 이렇게 지적하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함락시켰을 가능성이 있는 연대를 산정할 수단이 되는 증거는 사실상 유적에 없다.”—「고대로부터의 빛」(Light From the Ancient Past), 1959년, 159면.

이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은 예리코의 멸망 연대를 정황 증거에 근거하여 산정하며, 제안된 연대들은 약 200년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불확실성을 염두에 두고, 메릴 F. 웅거 교수는 적절하게도 이렇게 논평한다. “학자들은 또한 고고학자들의 연대 산정과 정보 분석에 부당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도록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문제들에 관한 역량 있는 권위자들의 의견 차이가 심한 것을 보면 고고학 발견물들로부터 이끌어 낸 연대 산정과 결론이 흔히 주관적인 요인들에 근거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고고학과 구약」(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1964년, 164면.

그러므로, 고고학자들의 해석이 기원전 1473년을 예리코의 멸망 연대로 지적하는 성서 연대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염려할 이유는 없다. 가스탱과 다른 고고학자들이 예리코에 관해 가지고 있는 견해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고고학적 증거가 성서 기록 및 그 연대기와 일치한 것처럼 보이든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든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면에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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