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으로 인도하는 시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10.
1. 세상의 번창이 불확실하고 요동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없이 번창하는 일은 없다. 만일 참다운 번영이라면 따라서 확고한 기반이 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번창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번영에 있어도 동일하다. 이 세상의 물질을 얻는 일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오래 계속될 물질적 번영을 위하여 기반을 세우느라고 오래동안 노력하여 왔으며 그 목적을 위하여 이 세상의 제일 뛰어난 두뇌를 사용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번영은 매우 불확정적이며 요동할뿐아니라 더욱 공포에 잠겨 신경이 예민하며 불행이 닦칠 것을 예기하고 있다. 이것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이 즐기는 번영은 이기적인 것이며 한편으로 치우쳐 이 세상의 지혜로서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참되고 오래 계속되는 번영의 원천과 기반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2. 참다운 물질적 번영의 기초는 무엇인가 또 어떤 진리 위에 이 확증된 사실은 놓여 있는가?
2 우리가 지금 말한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들의 경제적 폭락과 현제의 넘처 흐르는 상태의 불안전성은 모두가 물질 주의자로 하여금 사실을 부정하거나 부인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참다운 물질적 번영의 기초가 되는 것은 영적인 번영이다. 이 확증있는 진리는 실패할줄 모르는 번창의 유일한 근원이 가장 부한 우주의 최고 행복자에게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 분은 말씀하신바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이사야 42:5, 8) 그는 비록 영이시나 모든 물질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물질 전부를 계속적으로 독점하신다. 또 물질적인 소산 전부를 조절하신다. 그런고로 영구하며 참된 물질적인 번영은 전부 영적이라야 할것이다. 영적 번영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번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영적 원천이 되시는 위대한 자께서는 어느 쪽의 번영을 첫째로 두는가 또 그 이유는?
3 위대하신 영적 원천은 영적인 번영을 물질적 번영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앞세우신다. 전자는 후자의 기초가 되는 까닭이다. 유명한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이 사실을 위대하신 번영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로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 6:31-33) 물질적 번영을 구하는 것은 장기간 혹은 단기간의 이기적인 이 지상의 여러 가지의 것을 즐기는데로 이끈다 그러나 영적 번영을 구하는 것은 모든 것의 불멸의 원천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조화되는 끝없이 번영하는 세상에서 영생을 얻도록 인도한다.
4. 이것을 확증하는 어떤 과거와 현재의 실예가 있는가?
4 이것을 확증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뿐이 아니다. 과거의 국가적 실예가 있으며 오늘날의 국가적 예가 있다. 오래 전의 실예란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던 이스라엘 나라이다. 오늘날의 실예는 여호와의 기름 부은 증인들의 『거룩한 나라』이다. (이사야 66:8; 베드로 전 2:9) 여호와의 증인들은 번영의 한 실예인가? 그렇다 영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대한 전세계적 증오심과 광범위한 박해에 관하여는 어떠한가? 이것도 영적인 번영의 일부가 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오는 제도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 10:29, 30, 신세.
5. 여호와의 증인들이 오늘날 제공하고 있는 실예에 관하여 어떤 예언이 미리 이야기 하였으며 그 성취는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5 여호와의 증인들이 오늘날 제공하고 있는 실예는 이미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중에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참된 번영을 얻는 법위을 기록하였다. 이 법칙은 이 세상의 규칙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용기와 믿음과 인내를 필요로 하며 시험을 가저온다. 그러나 이 법칙을 시련하는 것은 바로 이 시험이며 만족스러운 축복으로 인도한다. 그 예언은 이 법칙을 24세기 전에 히브리인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10.
시험하는 이유
6. 어찌하여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번영치 못하였는가?
6 만군의 주 여호와를 시험하도록 호소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말라기의 예언은 그것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시대 5세기전의 이스라엘 나라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적들의 나라가 영적으로 건강할수 있는가?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도적하는 자들의 나라가 그럴수 있는가? 그와 맺은 엄숙한 계약 혹은 언약을 파하는 자가 그럴수 있는가? 아니다. 그들은 모든 번영의 원천을 바로 대적하여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건전치 않았기 때문에 물질적으로도 번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룩한 번영의 큰 원천께서는 그들이 그의 언약에 따라 물질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이 언약의 맡은 바 임무를 지켜야 되었다. 살아 계신 유일의 참 하나님께서 그들을 왜 도적의 나라라 칭하였으며 그곳에서 돌아서라고 하였는지 주의하라.
7. 어떤 악한 행실로부터 돌아오도록 여호와는 그들에게 호소하셨는가?
7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그들의 다른 이름 하나는 이스라엘이다]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혹 저주로서 저주하였느니라, 로더함역]』—말라기 3:6-9.
8.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하고 있었음을 어떻게 말할수 있는가 또 하나님의 제단과 이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어떤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는가?
8 한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고 어떤 제물을 드리라는 명령하에 처하였으나 요구된 제물 바치기를 이기적으로 거절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그 나라는 속이는 것이되며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속한 것을 도적하며 언약을 파하는 것이다. 그 언약의 조건은 다만 건강하고 흠없는 동물들을 드려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수락(受諾)할 것이 요구되었었다. (레위기 22:21, 신세) 그러나 말라기의 예언은 그들이 눈이 멀거나 저는 동물들 혹은 산산 조각으로 찍힌 것 병든 것 또 말른 등물들을 바쳤으며 그 제사장들은 그런 것을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받아 드렸다고 지적하여 놓았다. 하나님의 제단은 식탁과 같아 그 위에 드린 제물은 하나님께 음식이 되는 것이다. (에스겔 41:22; 민수기 28:2) 이것을 보면 그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식탁을 모욕하였었다. 그들은 그 위에 더러운 음식을 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단히 여기지도 않었으며 오히려 그것을 경멸하였고 영광는 돌리지 않었으며 참으로 『의로운 제물』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처음 성전을 짓고 낙헌한 『옛날과 고대와 같이 … 여호와께 기쁨이』 되지 아니하였다. (말라기 1:6-8, 12-14; 3:3, 4; 역대하 3:1-3; 5:1-14; 7:1-3)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며 부주의한 제사장들은 아무렇든 자기는 관계없다는 태도를 보이며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스럽고 감사할줄 아는 경배자들에게만 언약안에 약속된 축복을 바랄수 있었는가?
9. 그들은 무엇 아래 놓이게 되었는가 무엇이 이것을 명시하는가?
9 축복 대신에 그들은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저주는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그들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그들의 들의 곡식은 충실한 소산을 내지 못하였으며 메뚜기와 기타의 해충(害蟲)이 샅샅히 먹어 치웠다 그들의 포도나무의 포도 송이는 시들거나 포도나무 수확기가 되기도 전에 떨어졌다 주위에 있는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행복한 백성이며 그들의 땅이 환희에 찬 곳이라고 칭할만한 아무런 이유도 보지못 하였다. 그들은 영적 번영을 먼저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질적 번영도 즐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10. 유대인의 남은 자들을 고향으로 복구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또 고레스의 행동은 이것을 어떻게 표시하였는가?
10 이스라엘은 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자기들의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주전 537년에 복구되게 된 주요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였거나 혹은 잊었던 것이다. 70년간 거민이 없던 예루살렘과 유다 땅을 다시 사람으로 살게하고 밀림(密林)과 황무지로부터 지상 낙원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승리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놓아 고향에 둘아오게 한 중요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에게 영적 특권과 의무를 복구하여 주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고 그곳에서 경배하게 하신 곳에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하게 하기 위하여서였다. 바벨론의 정복자인 바사의 고레스왕은 자기통치 원년에 조서(詔書)를 내려 그 속에 유대인들을 놓아주는 이유를 가리켰던 것이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오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에스라 1:1-8) 돌아가지 않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재건될 전과 그것을 재건하러 가는 유대인 남은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크게 기부하였던 것이다. 또 고레스 왕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 처음 성전을 멸하고 거기에서 취하여 온 거룩한 대접을 이 남은 자에게 주어 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복구는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물질적 복구를 보게하였다. 그것에 대하여는 물어볼 여지도 없다!
11. 복구된 유대인들은 스스로 무엇을 행하기 시작하였는가 그 일을 성취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였을 때 무엇이 뒤를 이었는가 또 그들이 다 건축을 맞춘 후에는 어떤 질문이 일어났는가?
11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마자 그들은 자기들의 주요 목적을 성취하기 시작하였다. 여호와께 바친 제단 즉 그의 성전의 상은 재건되었으며 하나님의 두번째 성전의 기반이 처음 것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외부의 적들이 방해하였을 때에 성전 건축자들은 그 일을 중지하였다. 여호와의 전을 불충실하게 게을리하는 일에는 어떤 상대가 뒤를 이었는가? 성전이 겨우 시작되기만 하고 완성되지 못하고 있던 16년간 그들은 물질적으로 번영하지 못하였으며 영적 번영에 관하여는 말할 필요도 없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는 이것을 지적하여 말하였다. 그런고로 그들은 적들을 무시하고 성전 건축을 다시 진행시켰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지켜 물질적으로 그들을 다시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주전 516년에 성전은 완성되고 낙헌되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성전과 거기에서 일하는 제사장의 직분 레위인들 제사장들이 보조역과 느디님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 아닌 성전의 노비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먼저 오며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옳게 인식하고 영적인 일을 먼저 구하기를 계속할것이 었는가? 유대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 제사장 예수아 때에는 그러하였다
12. 스룹바벨과 예수아 시대 이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또 그들의 이런 상태는 무엇을 말살하였는가?
12 그러나 이 충실하고 영적인 것을 마음에 둔 사람들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데서 오는 순결한 축복을 감사하는 마음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물질적인 것에 두었으며 물질 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들의 물질주의는 그들의 영적인 것을 말살하여 버렸다 그들은 영적인 것을 희생하고 물질주의를 구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을 증가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 반대이다! 그들의 물질주의는 그들의 물질적 번영까지 없이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의는 번영의 근원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물질주의를 축복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저주하신다.
13. 고대의 본을 오늘날 우리는 왜 조사하여 볼것인가?
13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고린도 전 10:6, 11; 로마 15:4) 그런고로 우리는 이런 고대의 실예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조사하여 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1914년 이래 이 제도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제일차 세계대전을 위시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한 것 전부가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증명한다
14. 말라기는 누가 임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였는가 또 이것은 모든 종교에게 부디치는 날카로운 심판의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14 또 한가지는—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기적이며 경건치 못한 물질주의를 좇은 일로 인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연히 그의 축복의 언약의 사자 혹은 천사와 더불어 성전에 임하시고 재판관과 신속한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칭하는 자들 중에서 충성이 없는 물질주의자들은 형벌하시리라고 선지자 말라기는 경고하였다. (말라기 3:1) 예수께서는 자기의 선구자 침예 요한이 사망한 후에 자기의 날에 말라기 3:1이 성취하였음을 말하였으며 더 크고 최종의 성취를 이루는 이날의 우리에게 경고의 본이 되게 하셨다. (마태 11:10-15; 17:10-13) 작년 6월에 발표된 책 당신은 아마겟돈에서 하나님의 신세계로 살아 남을수 있다와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다』라는 영문 파수대 11월 15일호는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의 천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1918년 봄에 영적인 성전에 임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허탄한 철학들과 인간이 지은 전설과 이 낡은 조직 제도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모든 종교의 악마의 가르침을 폭로시키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행하여 지는 날카로운 심판의 과정을 이것은 설명한다.
15. 성전에서의 심판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왜 그런가?
15 그러나 말라기가 경고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신 이들이었음을 기억하라. (이사야 43:10, 12) 따라서 심판은 처음에 그가 영적 성전에 1918년에 임하셨을 때 여호와의 증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 그들은 부디치는 박해로 인하여 큰 시험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박해는 제일차 세계대전에 휩쓸린 나라에서 특히 심한 것이었다. 그때야말로 특히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이 이교국 바벨론에게 사로잡혔던 것같이 포로되어 사로잡힌 상태가 되었다. 올무에 걸리고 속박을 초래하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이 존재하였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증인들로 구성된 여호와의 영적 성전을 계을리하게 되었으며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그들 자신의 영적인 이익을 훼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 반열의 이익을 훼손한 것이며 그들에게 임명된 하나님의 일이나 성전 사업을 실천하지 아니하였다. 성경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 전 3:16, 17) 그러나 지상에 있는 성전 반열의 남은 자들은 그들을 멸하고저 하는 인간이나 인간의 정부들에 대한 이기적인 공포로 말미암아 옳게 성전 봉사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적 성전에서의 심판은 이 기름부음을 받은 그의 증인들의 남은자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6. 1919년에 바벨론의 실체로부터 해방된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은 어떤 질문에 직면하였는가? 또 어떤 초청에 의하여 그들은 행하였는가?
16 1919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더 크신 고래스 즉 통치하는 왕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자기의 증인들을 세상사람들에게는 현대의 바벨론과 같은 상태로부터 구출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믿음을 위하여 구속되었던 실제 감옥으로 부터 나왔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할것인가? 그 새로운 국제 연맹의 산하(傘下)에서 이 낡고 전쟁으로 파괴된 세상을 재건하며 가공적 번영을 주려고 하는 기회와 더불어 전쟁후의 세상이 그들 앞에 놓여있었다. 그들은 이제 이세상과 그의 물질적 욕망이나 일에 가담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에 그들이 기도하고 놓이기를 갈망한 것이었는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더 크신 고레스께서 그들을 자유케한 이유였는가? 물질적 입장에서 보면 세상적인 기회는 매우 마음을 혹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유와 명령은 이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성전에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초청에 의하에 행하였다. 어떻게?
영적 『온전한 십일조』
17.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가 언약하신 것보다 더 이상을 요구치 않으셨는가? 하나님의 율법중의 이것을 순종한 어떤 가치있는 본이 있는가?
17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가 언약하시고 계약하신 것 이상을 요구하신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속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그들의 소산의 십일조(十一條) 혹은 십분지 일을 바치도록 명하셨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라. (신명기 14:22) 예루살렘에 재건된 성전에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두셨다. 그런고로 십일조나 십분지 일은 그곳으로 가져와서 거기 창고 혹은 재물고(財物庫)에 쌓아 두어야 되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의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신명기 12:5-7, 11, 12, 17-19; 14:23) 하나님은 제일 좋은 것을 받으실만한 가치가 있으시다. 『너희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 (출애굽 23:19; 신명기 26:2-4, 10, 12) 히스기야(왕 주전 745-716)은 이스라엘로 여호와의 율법중의 이것을 순종케 한 예루살렘의 통치자의 하나의 가치있는 본이다.—역대하 31:2-16.
18. 왜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어야 되었는가 또 레위인의 물질적 상태는 바치는 것에 의하여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
18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레위 족속을 부양(扶養)하기 위하여 십일조 또는 십분의 일을 바치도록 요구되었었다. 그들의 레위 족속의 남자들은 레위인과 제사장들로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직접 섬겼던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민수기 18:21-24) 이와같이 소산의 10분의 9는 각 12지파가 차지하고 레위인은 전부해서 10분지 1의 열둘을 취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번영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그들에게 바칠 때에는 레위인도 넘치게 번영하였던 것이다.
19. 십일조의 요구는 어떻게 제사장이 아닌 레위인에게도 적용되는가 또 십일조는 그것을 받는 자로 무엇을 할수 있도록 하였는가?
19 제사장이 아닌 레위인들도 레위인 아론의 가족의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낼 필요가 있었다.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너희의 받은 모든 예물중에서 너희는 그 가장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의 거제로 드릴찌니라.』 (민수기 18:25-32, 신세)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리라. (느헤미야 10:38, 39) 이같이 온전한 십일조를 지불하는 것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들의 시간과 힘 전부를 여호와의 성전에서 그들의 직분을 수행하는데 사용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성전의 봉사를 충분하게 진행되도록 하였다.
20. 사실 온전한 십일조 지불하기를 계을리 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무엇인가? 느혜미야는 그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성전의 종들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어떻게 표시하였는가?
20 온전한 십일조 지불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계을리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하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그가 언약한 것 혹은 하나님이 받으실만 한 것을 드리기를 주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 27:30) 또 성전에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양육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며 이것은 성전에서 일하는 일군들과 그들의 활동을 감소하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집과 그들의 영적인 복지는 돌보아지지 아니하였으며 유다의 총독 느혜미야가 기록한 것과 같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일하는 종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참된]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성전의] 그 처소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디야로 고지기를 삼고 …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느헤미야 13:10-13, 신세) 하나님의 십일조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복지(福地)와 봉사를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1. 1918년 이래로 왜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증인들은 고대의 율법에 의한 십일조를 지불할수 없는가 왜 제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바칠수 없었는가?
21 말라기 3:10은 영적 이스라엘 즉 성전 반열의 남은 자들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1918년에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의 성전에 임하신 이래로 여호와의 이 기름 부은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문자 그대로의 십일조를 가져오는가? 아니다. 예루살렘에 문자 그대로의 전과 그러한 문자 그대로의 십일조를 갖다 줄 아론의 가족의 제사장들과 문자 그대로의 레위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라기 3:10은 먼저 주후 33년 오순절(五旬節)로 부터의 제1세기의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 증인들에게 적용된다. 그런고로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본이 된다. 오순절 날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롬부음을 받은 이후로는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의 성전에 더 이상 문자 그대로의 십일조를 갖다 바칠수 없게 되었다. 문자대로의 십일조를 갖다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물질적 성전을 지지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가증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하고 그리스도교와 대적하며 투옥과 사형하고저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반대한 제사장의 직분을 지지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마태 23:37, 38; 27:20; 사도 4:1-10, 5:17-27, 40; 12:1-5.
22. 제1세기의 이 그리스도인들이 문자대로의 십일조를 바치지 않었다는 것을 기록은 어떻게 표시하고 있는가?
22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남은 자들도 12사도나 예루살렘에 있는 회중의 통치체의 남어지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내지는 않었다. 만일 그들이 말라기 3:10을 따라 문자그대로 십일조 흑은 십분지 일을 바쳤다면 어떻게 기록한 바와 같이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겠는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 2:44, 45; 4:32-37; 6:1-6) 실질상 이것은 온전한 십일조보다 더 과한 것이었으며 사도들이나 감독이나 일하는 종들에게만 분배된 것이 아니었다.
23, 24. 십일조의 실체는 무엇인가 또 제사장이 제단에서 태운 한줌의 곡식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23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창고에 드려 놓아야할 십일조란 무엇인가? 고대 이스라엘의 십일조나 십분지 일 바치는 일은 오늘날의 무엇을 표상 또는 전영(前影)하였는가?
24 성경에서 10이라는 수가 지적 완전수 혹은 전체 전부를 표시하는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나 십분지 일은 그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전부를 표상하지는 않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바친 것은 우리가 여호와께 온전히 자신을 헌신하고 물의 침예로서 그것을 표상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지 않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그들의 소산 전부가 아니라 다만 십분지 일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헌신한 것 전부의 일부분만을 대표한다 우리가 여호와의 성전의 창고에 십일조의 실체를 가져온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우리의 전부를 헌신하였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표상 혹은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헌신의 기념이 되며 제사장들이 제단에서 하나님께 직접 드린 기념물과 같다. 『어떤 영혼이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레위기 2:1-3, 7-10, 14-16; 6:14-18; 민수기 5:25, 26) 제사장이 직접 제단에서 태운 한 줌의 예물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 전부의 기념물에 지나지 않었던 것이다. 남은 것은 제사장이 사용할 수 있었다.
25. 이스라엘이 드린 십일조의 목적을 보아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실체는 간단하게 말하여 무엇인가?
25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전부를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할 것이며 이 증명은 매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과 가진 것 전부를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이 정규적 기부는 즉 이것은 우리의 십일조의 실체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낸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드리는 성전 봉사와 여호와의 성전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런고로 우리 십일조의 실체는 여호와의 성전 봉사에 직접 드리는 지지(支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십일조의 실체를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창고에 두가지 방법으로 드려 놓을 수 있다.
26. 부분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십일조의 실체를 바칠수 있는가?
26 부분적으로 우리는 돈이나 물질의 예물을 드려 하나님의 영적 성전에서 행하는 여호와께 대한 경배를 향상시키는 것으로 영적 십일조 혹은 십일조의 실체를 바칠수 있다. 이 성전의 기초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에베소 2:20-22; 베드로 전 2:4-6) 이런 물질의 기부가 십분지 일이상이나 이하면 안된다는 법은 없다. 이 기부는 십분지 일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부는 즐겁게 바친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고린도 후 9:7) 하나님의 증인의 봉사 대행기관인 펜실베니아의 왙취타워 성서 책자협회에 돈을 기부함으로써 이런 기부로 여호와의 경배가 발전 지지되도록 할수 있다. 또는 우리 지방 회중의 비용이나 더 큰 대회의 비용 혹은 성전 봉사의 어떤 부분에 종사하고 있는 개인이나 여호와께 속하는 빈곤한 이들에게 기부할수 있다. 이들에게 주는 우리의 선물로서 우리는 여호와께 빌려드리는 것이 된다. (잠언 19:17) 물질적으로 바치는 것은 드리는 십일조의 다만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27. 집회에 관하여는 어떻게 우리가 십일조의 실체를 바칠수 있는가?
27 우리는 또한 각기 성전에서 직접 드리는 경배에 참예하거나 그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십일조의 실체 또는 영적인 십일조를 드릴수 있다. 고대에는 성전 경배를 하려면 십일조를 가지고 성전에 가서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그외의 하나님의 전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접촉하여야 되었다. 즉 집에서 혼자 경배드리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경배자들이 집회장소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영적 십일조를 바칠수 있다. 그런 집회에 자기가 참석할뿐 아니라 허용된 부분은 무엇이든지 참예하고 그곳에 출석한 다른이들을 영적인 말이나 보조로 세워주며 그 후에 새로 온 이나 처음으로 흥미 가진 이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남을 도와 집회에 참석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성전 경배의 기회를 위하여 스스로 어떤 개인적인 준비 하는 것을 필요로 할것이다. 집회를 경시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한 이 때에 성전 경배를 경시하는 것이 된다.—히브리 10:24, 25.
28. 야외활동에 관하여는 어떻게 십일조의 실체를 바치는가?
28 또 우리 스스로를 준비하여 야외에 혼자 혹은 집단적으로 나가 명하여진바 왕국복음을 전도하는 것으로 영적인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것을 남에게 나타내며 따라서 그들도 경배하도록 격려하게 된다. 이렇게 하도록 스스로 준비하는 일에 회중의 『봉사회』나 『신권 전도학교』에 참석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고대의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양육하였다. 이같이 우리는 『레위 자손』의 실체인 현대의 여호와의 『왕같은 제사장들』의 남은 자들이 설립된 왕국을 전하여 하나님의 경배를 제일 먼저 두며 이 조직 제도의 모든 정치나 종교적 『산들』 위에 높이 두는 일을 지지하여야 한다 (베드로 전 2:5, 9) 이 야외 할동은 구두(口頭)나 광고지로 공개 집회를 광고하고 스스로 참석하며 헌신한 형제든지 처음으로 흥미를 가진 이든지 막론하고 다른 이들도 참석하도록 도움으로써 이 집회를 선전 할것까지 의미한다. 영적 십일조나 십분지 일 드리는 일은 『만방』과 『만민』을 높이 뛰어난 여호와의 전의 산에 올라 그의 성전 마당에서 함께 여호와를 경배하도록 하는 세계적 운동에 협조할 것을 내포한다.—이사야 2:2-4.
29. 어찌하여 영적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물질적으로 풍부한 이들에게와 동일하게 빈곤한 이들에게도 적용되는가?
29 기도로써 함께 드리는 이 영적인 기부는 물질적인 기부보다 훨신 중요하다.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한 이들은 부하든 빈곤하든 전부 이런 종류의 영적 십일조를 그의 창고에 드려 놓을수 있다. 어떤이는 「과부의 동전」 밖에 낼수 없는 처지에서라도 (누가 21:1-4) 기회 있는대로 증거 사업을 직접 함으로써 또는 자기 집을 성전 경배를 위한 집회 장소로 제공함으로써 또는 여호와의 사업에 기타의 가치있는 조력을 함으로써 더 중요한 영적인 십일조를 성전 사업에 바칠 수 있는 것이다. 돈이나 물건을 낼수 있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이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 말라 돈을 기부하는 것을 핑계삼아 전도하는 것이나 집회 장소 또는 호별방문에서 공중앞에 증거하는 일을 피하지는 못한다. 『이 천국복음』은 성전 경배자들 전부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거되기 위하여 모든 나라에 전파되어야 하며 우리는 전도 사업을 후원하고 스스로 그 일에 참가함으로써 온전한 영적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마태 2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