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를 맺음
1. (ㄱ) 육체의 일이 어떠한 것들인가를 말해 보십시요. (ㄴ) 그와 같은 일로 가득차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읍니까? 어떻게?
이 세상의 정신은 『육체의 일』을 하게 합니다. 『육체의 일』들은 현저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하였읍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 5:19-21) 우리가 만일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이러한 것들을 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말은 마치 「바울」이 살고 있던 고대 「로마」 사회와 똑 같이 오늘날 이 세상에도 잘 적용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변화를 받을 수 있읍니까? 그렇습니다.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들로 둘러 쌓여 있는 이 사회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읍니다. 「바울」과 기타 영감에 의한 필자들은 우리가 여호와의 성령을 통하여 그렇게 행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천적인 사랑
2.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첫째로 필요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둘째는?
2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인용하신 큰 계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또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마태 22:37, 39, 신세) 이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당신에게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냈읍니까?
3 갈라디아 5:2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지 않으면 안될 첫째 열매는 사랑이라고 말하였읍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크나큰 사랑을 가지고 있던 이 사람은 기독교를 위하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웠읍니다. (에베소 6:17) 「바울」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였읍니다. 그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기 원하였읍니다.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할 말이 많았읍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고린도 전서 십삼장에서 그는 「그가 사람의 방언과 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바울」은 얼마나 여행을 하며 큰 일을 한 사람이었읍니까! 그는 봉사를 위하여 얼마나 그의 정력을 바친 사람입니까! 그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읍니다. 그는 그의 생명을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바쳤읍니다. 희랍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희랍 사람과 같이되었고 「유대」인들에게는 그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사람 즉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의 그리스도인 형제에 대한 사랑을 갖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 하였읍니다. 사랑은 온유한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읍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보수를 바라지 않았읍니다. 한 형제가 매우 성공적인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를 투기하지 않았읍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5. (ㄱ) 그리스도인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ㄴ) 그러므로 그가 따라야 할 길은 어떠한 것입니까?
4 그리스도인은 다만 한 가지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숭배인 것입니다. 그러한 숭배를 올리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자만하지 않읍니다. 사랑은 결코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으쓱하는 일이 없읍니다. 사랑은 또한 결코 무례히 행하지 않읍니다. 사랑은 선한 행실로서 나타납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생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로 올바른 길을 따르게 하도록 그의 생활방식을 변화하게 해 줍니다.
5 이 성령의 첫째 열매인 사랑을 맺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고 자기 자신만을 첫째로 또 우월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조그만 일에 대하여 일일히 성 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성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잘못을 행하였다 하드라도 아니 그것이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라 할찌라도 이 성령의 첫째 열매인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상함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옳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되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기뻐하게 하는 다만 한 가지는 진리인 것입니다.
6. 하나님의 회중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6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완전한 인간 「아담」에게 주셨던 하나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왜 그 속성을 다시 갖지 않을 것입니까? 더욱이 우리가 숭배하는 분인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성품입니다. 사랑의 성품을 갖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 할 수 없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끔 한번씩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저울대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 13:35.
7. (ㄱ) 우리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기를 두려워 한다면 무엇이 부족한 증거입니까? (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을을 의미하는것입니까?
7 당신은 성경에서 당신이 믿는 바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아직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행한 바와 같이 호별 방문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읍니까? 당신은 심지어 회중 집회에서 당신의 형제들 앞에서까지 의견을 발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읍니까? 당신은 『네 나는 두려워 합니다.』라고 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아직 완전한 사랑이 없으며 당신은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주를 참으로 사랑하였던 「요한」은 이렇게 편지에서 말하였읍니다. 『사랑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한 1서 4:18) 당신으로 기독교 신앙을 말하는 것을 제지시키는 것이 있읍니까? 만일 두려움이 있다면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깨끗이 하여야 할 가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하게,』한다고 말씀하시고 또 그는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요한 15:2) 당신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 가지를 완전히 끊어 버림으로 건축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8. 사랑은 왜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8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고린도 전 8:1)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나타내고 세워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은 다만 난잡하게 말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참으로 표현력 있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사랑은 생기있고 활동적입니다. 사랑이라는 이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매일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나타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교훈하였읍니다. (로마 12:10)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에 다만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랑은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다른 모든 성명의 열매는 여러가지 다른 면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활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품들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는 더욱 사랑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희락과 평화
9. (ㄱ) 희락이란 무엇입니까? (ㄴ) 그리스도인의 희락은 어떠한 것입니까?
9 희락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든지, 또는 얻지 않으면 안될 성품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 중에서 둘째로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락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희락이라는 것은 『현재나 혹은 기대하는 좋은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예민한 혹은 생기있는 즐거움의 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대학 사전)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희락은 그가 전도하는데서 또는 기쁜 소식이나 그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을 듣는데서 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하였읍니다. 사도 15:3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볼 수 있읍니다.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크게 기뻐하게 하였다고 하였읍니까?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함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였읍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 할만한 야외 봉사에서의 놀라운 경험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이것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 큰 즐거움을 갖게 하였읍니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나중에 진리를 받아 드렸다는 것을 듣는 것은 즐거움을 갖다 줍니다. 사랑은 제자들로 전도를 하게하였고 희락은 그 결과였읍니다.—사도 13:45-52; 고린도 후 7:13.
10. (ㄱ) 평화란 무엇입니까? (ㄴ)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어떻게 좇을 수 있읍니까?
10 평화도 하나의 성령의 열매입니다. 평화스러운 사람은 싸우거나 동요하는 일이 없읍니다. 그는 항상 평온하고 침착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좇으라,』고 충고하였읍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좇으라고 한 이 훌륭한 생활 방식은 이러한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베드로 전 3:10, 11) 사람이 그의 동료들과 평화를 즐기기 위하여는 그의 혀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은 크나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해로운 말은 더 그러합니다. 좋은 말은 좋은 관계를 갖게 해 줍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무례한 말을 하고 해로운 말을 한다면 평화는 곧 다라나 버립니다. 평화스러운 사람이 평화스러운 소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땅 위에는 선의자들 가운데 평화』가 있게하실 것인지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읍니다. (누가2:14, 신세) 그리스도인은 그의 혀를 축복을 위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평안 할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하였읍니다.—고린도 후 13:11; 마태 10:12-14.
오래 참음
11, 12. (ㄱ) 당신은 오래참음의 정의를 어떻게 내립니까? (ㄴ) 나중에 사도 「바울」이된 「사울」에 대한 예수의 오래 참음에 대하여 말해 보십시요. (ㄷ)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내신 오래 참음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11 『해로운 것 혹은 노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오래 인내하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성령의 열매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기껏 오래 참는다는 것이 30초 또 어떠한 사람들은 일 이분 동안일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들은 해로운 것이나 노하게 하는 말에 대하여 오랫동안 참는 사람이 있읍니다. 「바울」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요. (고린도 전 13:4) 그리고 그는 「로마」로 보내는 편지에서 인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데 대하여 언급하였읍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로마 2:4) 예수께서는 확실히 「사울」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읍니다. 그는 마침내 개종한 후에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 전 1:16) 「바울」은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그의 지위와 기독교 조직의 파멸을 즐거워하던 것을 자랑하던 때를 가끔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 당시에 그는 건축자가 아니라 파괴자였읍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묻는 소리를 들었읍니다. 모든 사실은 「바울」이 그로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오래 참음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읍니다.
12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그들을 지금까지 살리심으로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그와 같이 감사함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와 동의하지 않는다 하드라도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신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읍니다. 당신의 형제들에 대하여도 오래 참음을 보이십시요.—데살로니가 전 5:14.
친절
13. (ㄱ) 친절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말해 보십시요. (ㄴ) 「멜리데」 사람들은 어떻게 「바울」과 그와 함께 파선당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성품을 나타냈읍니까?
13 성령의 다섯번째 열매로서 기록되어 있는 친절은 참으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친절한 사람은 선한 즉 자비로운 성품을 나타내고 생각이 깊으며 도움을 베풉니다. 친절이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어떠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그러한 친절을 받아본 일이 있으며 그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사도 28:1, 2) 이 「멜리데」 사람들은 다 나와 파선 당한 사람들을 도아 주었읍니다. 그들은 이들을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들은 그 섬을 침략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들 외국말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보지 않았읍니다. 여기에 그들에게는 특별한 친절을 보일 기회가 온 것입니다.
14, 15.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나타내고 있읍니까?
14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기회가 많이 있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생명의 소식을 전해 주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재방문하며 성경연구를 사회함으로써 특별한 친절을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는것은 그들에게 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타내고 있는 이러한 친절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드라도 이러한 친절을 나타내는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예수께서 그의 생명을 바침으로 전 인류를 사셨다는 것을 알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 드리느냐 않느냐는 각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15 그리스도인이 이 성령의 열매인 친절을 갖고자 원한다면 그는 다만 몇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착함
16, 17. (ㄱ) 착함의 정의를 말하고, 그것은 어떠한 성품과 반대되는가를 말하십시요. (ㄴ) 이 성품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16 착함은 참으로 칭찬을 받을 만한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 우아성과 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착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조적으로 말함으로 그 성품을 뚜렷하게 하였읍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 . .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 . .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에베소 5:3-5) 「바울」은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떠날 것을 권고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사람들과 사귈 여유가 없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 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에베소 5:7-9) 올바르고 암전한 생활, 존경 받을만한 생활 그것이 착함입니다. 이 악하고 부패한 세상에서도 그것은 필요한 성령의 열매라고 「바울」은 말하였읍니다.
17 착함은 우리가 항상 보호하지 않으면 안될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여호와의 봉사에 자기의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목표가 되지않으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움을 받기 전에 그는 부끄러운 행위를 멀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신 세계에서 살수 있는 자격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이 성령의 열매인 착함을 맺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
18. 「바울」은 믿음의 정의를 어떻게 내렸으며, 사람이 그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바울」은 믿음의 정의를 내렸읍니다. (히브리 11:1)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11:6) 제자 「야고보」는 그의 믿음을 나타냈고 그는 그 믿음을 행함으로써 뒷받침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읍니다. (야고보 2:26) 만일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왕국을 믿는다면 그는 그의 말로써 또 그의 행동으로써 그리고 그의 생활 방식으로써 그의 믿음을 나타낼 것입니다.
19. (ㄱ) 믿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ㄴ) 믿음의 본을 보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19 사람의 믿음은 죽을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주가 되시며 인류의 구주이심을 믿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화론으로 빠져 버렸읍니다. 그들은 성경을 배척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 신자인체하고 기독교국에 있는 교회에 나갑니다. 「야고보」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의를 위하여 마음으로부터 믿음을 실천하여야 하고 구원을 위하여는 입으로 공개적 선포를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읍니다. (로마 10:10, 신세) 만일 우리가 마음과 정신과 입을 사용하여 우리가 믿는 바 하나님의 왕국이 인간의 유일한 소망임을 선포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더 튼튼해 질 수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땅에 모든 거민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그리고 그후에 완전한 종말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읍니다. (마태 24:14, 신세) 이 일은 오늘날 다만 예수께서 천 구백년전 부터 모으시기 시작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적은 무리』들에 의하여 수행될 뿐만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전 세계로부터 나온 『큰 무리』에 의하여도 수행되고 있읍니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과 같이 매우 환난이 심한 때에 이 위대한 사업이 수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
20. (ㄱ) 예수께서는 온유함이 약함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보이셨읍니까? (ㄴ)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20 온유는 가끔 약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하여 기록된 네가지 복음서를 읽어 본다면 예수가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었는 가를 알 수 있읍니다. 그러나 마태 23장을 읽어 보십시요. 예수는 악에 대하여 매우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분이었읍니다. 그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 완전한 사랑은 그에게서 두려움을 내어 쫓았읍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그는 친절하고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부드럽게 대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온유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가르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11:29) 그들은 그에게 확신을 가졌읍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명백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에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읍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으로써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읍니다. 「바울」은 온유함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라고 말하였읍니다. 다투는 것은 사람들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주의 종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말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2:24, 25) 사람을 회개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말하는 것이요 강제가 아닙니다.
21. (ㄱ) 「카톨릭」교회의 역사는 그것이 온유한 조직임을 증명하였읍니까? 당신이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 점에 있어서 참다운 기독교는 어떻게 다릅니까?
21 오늘날까지도 체계에서 크나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직 정체가 종교 심판을 사용하면 때에 취하던 길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 거짓종교 조직은 결코 그의 역사에서 남녀들을 나무에 매달고 신체에서 그들의 수족을 꺾고 엄지 손가락으로 사람을 달음으로 고초를 주는 것과 같은 짓을 행한 것을 씻어 버릴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재판관들은 소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고 주장하였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무어」인들과 『이단』들을 무자비한 고통을 당하게 한 사제들이 온유한 정신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종교적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로마 카톨릭」교회로 몰아 넣기 위하여 투쟁하였읍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전쟁과 고초로써 어떠한 일을 수행하였읍니까? 평화와 통일의 세계를 가져왔읍니까? 거짓 종교는 사람들을 그의 전쟁과 십자군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였읍니다. 기독교는 결코 육체적 무기의 사용으로 존재하게 할수 없읍니다. 만일 어떠한 사람이 진리를 받아 드린다면 그것은 전도인이 성경의 소식에 대하여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온유와 인내를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셨고 그의 사도들이 그러하였읍니다. 오늘날의 참다운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데 영구적인 열매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절제
22. (ㄱ) 절제력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어느 정도로 관리합니까? (ㄴ) 절제력이 약한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과 같이 취급되었읍니까?
22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 절제를 실천하기는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절제하도록 노력하십시요. 그것도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절제력을 갖는 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말하는 것을, 우리의 먹는 것과 마시는 습관을,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제약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절제력을 가지고 있지않은 사람들은 비열한 무리들과 같이 보였읍니다. 그는 절제력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마지막날에 유행되리라고 말한 매우 비천한 자들로 취급하였읍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디모데 후 3:1-3) 절제력이 약한 것이 왜 그와 같은 범죄에 속하는 것이 됩니까? 「솔로몬」은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고 말하였읍니다. (잠언 29:11)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자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 버린다면 그로 육체의 일로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잃게 하기가 얼마나 쉬운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성령의 열매 즉 절제력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절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23. 우리 자신을 세워 나가고 하나님의 건축 사업에 남아 있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23 「바울」은 이러한 모든 성령의 열매를 육체의 일과 대조하여 놓았읍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헌신할 때에 그에게는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더는 이 세상 사람들이 행동하는대로 행동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자들은 육체를 그의 정욕과 함께 못박았읍니다.』 (갈라디아 5:24, 신세)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되며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갈라디아 5:25, 26)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가 여호와의 신 세계사회 안에 있을 자격을 갖게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항상 당신과 당신의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게속하십시요.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하게 해 줄 것입니다. 즉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 전 4:16) 당신의 성령의 열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당신 자신을 세워 나가십시요. 동시에 여호와의 신세계 사회가 자라나가도록 도우십시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연합하고 『우리 안에 양 떼와 같고 풀밭 한 가운데 있는 무리와 같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호와의 양을 기르고 연합을 유지하십시요. 왜냐하면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잠언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