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접하고 귀중한 관계
1, 2. (ㄱ) 어떤 면으로 에수께서는 그의 형제들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읍니까? (ㄴ) 이것은 주의 만찬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읍니까?
「이스라엘」 장자의 그림의 성취를 고려하는데 있어서 한가지 일이 매우 명백하게 뛰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와 영적 장자의 회중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져오신 극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아브라함」의 씨의 일부로서 참예합니다. 「히브리」인들에 대한 「바울」의 서한에서 다시 보건대 그가 히브리 2:10-18에서 그것을 강조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많은 아들을 이끌어 [천적]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리고 이 많은 아들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예수]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 (수단, 신세)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 .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붙들어 주려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2 그렇습니다. 이 아들들은 약속된 씨의 부분으로서 예수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당신의 주의를 다른 하나의 관계 즉 전술한 예수와 그의 이 『형제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는 것에 이끌고 싶습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과 그 당시 예수로 말미암아 토의된 진리를 즉시 밀접하게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살펴 보겠다고 약속한 바 있읍니다.
3.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의 유월절에 어떻게 접근하셨읍니까?
3 한 충성스러운 「유대」인으로서 예수께서는 「니산」월 14일에 항상 매년 유월절을 지키셨읍니다. 그러나 그가 참다운 『유월절의 희생』으로서 정확한 때에 그의 전도를 끝마치실 것과 그의 희생의 과정을 온전케 하실 것을 충분히 아시고 그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가장 중대한 의의로 뛰어나게 될 경우로서 이 마지막 유월절에 접근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것이 개최될 집을 선택하시는 것도 특이한 환경 즉 세밀하게 미리 알고 계셨던 흥미 있는 한 실예로 뛰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저희가 나가 [예수] 그 하시던 말씀대로』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된바와 같습니다. 그런 후에 『때가 이르매』 그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기대셨읍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읍니다.—누가 22:7-16.
4. 「바울」로 말미암아 기록된 것 같이 예수께서는 최후의 유월절의 마지막에 무엇을 시작하셨으며, 어떠한 세밀한 것을 주셨읍니까?
4 유월절의 모든 요구 조건들을 지키시고 예수께서는 전연 새로운 것을 시작하셨읍니다. 「바울」이 『주께』 받아 기록한 것을 살필 때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다음 것을 읽을 수 있읍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린도 전 11:23-25.
5. (ㄱ) 예수의 자제들에 대한 그의 마지막 강연에 있어서 무엇이 현저한 것입니까? (ㄴ)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무엇에 대하여 경계하여야 합니까?
5 예수께서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그날 밤에 (요한 13–17장에 기록됨) 말씀하신 것을 포함하여 전항의 기사를 관련있는 성귀들과 함께 고려할 때에 두가지의 주요한 일 즉 가치있게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유익과 참예하게 되는 유익이 강조되었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 자들은 사도가 경고한 바와 같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죄를 확실히 저질르지 않도록 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것을 완전히 성실한 중에서 개최하며 지킨다하드라도 비성서적인 견해와 습관을 일으키는 한 두가지의 일반적 오해를 우리는 즉시 간단히 말하고자 합니다.—고린도 전 11:27.
6. 주의 만찬을 자주 지키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읍니까?
6 첫째로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주의 만찬을 자주 지키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습니다. 유월절은 얼마나 자주 지켰읍니까? 물론 매년 「니산」월 14일에 1회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도 없었고 하고자 꿈도 꾸지 않았읍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지키신 같은 24시간이내 즉 그 날에 그는 그것으로 예표된 바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돌아가셨고 『단번에』 돌아가셨읍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바울」은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으로 그의 죽음의 기념으로서 이바지하는 이 축하는 해마다 한번 「니산」월 14일에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년은 1962년 4월 17일 해질 때 시작됩니다.—고린도 전 11:25, 26; 히브리 9:26.
7. 화체의 교리가 성서적으로 거짓임이 어떻게 증명됩니까?
7 둘째로, 『이것은 나의 몸 . . . 나의 피(혹은 흔히 이것은 나의 몸 나의 피로라)를 의미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화체의 교리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리로써 가르쳐지고 있는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는 그때에 문자 그대로 그의 혈육으로 되지 않았읍니다. 또한 가상적인 기적이 매년 미사를 축하할 때 마다 교직자로 봉사하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풀이 되지 않았읍니다. 어떠한 뜻으로도 그리스도의 희생이 되풀이 되어야 할 필요는 전연 없읍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한 중에서 가장 강력한 논증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자주 자기 [그리스도]를 드리려고 아니 하실찌니 . .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 하나의 희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참다운 그리스도인들]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린도 전 11:24, 25, 신세; 참조 히브리 9:25–10:10.
8. 예수께서 흔히 어떠한 강연방법을 사용하셨으며, 이것은 왜 중요합니까?
8 흔히 말씀하셨던 것 같이 예수께서 『이것은 나의 몸 . . . 나의 피를 의미한다. [로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생생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은 그가 다른 경우에서 말씀하신 것과 흡사합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그러나 누가 그가 문자 그대로 문이되셨다고 잠간이나마 믿겠읍니까?—요한 10:7.
9. 주의 만찬을 성체로서 보는 것은 왜 잘못이며 해롭습니까?
9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성체를 가르치시지 않으셨읍니다. 이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외면적 종교 예식 혹은 의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 지키는 것에 의지하는 것은 인간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잘 보아주시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그 잘못을 저질렀으며 오늘날 기독교국에서 같은 것을 볼 수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단지 두가지 상식적인 일 즉 침례와 주의 만찬을 주셨읍니다. 그러나 만일 예표된 것이 이에 따라 실제로 실현되지 않았고 아직도 심령과 행동에서 실행되지 않고 있다면 그들이 지키는 것은 유익한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
10. 이 제목을 연구할 때 어떠한 좋은 일들을 인식하게 됩니까?
10 그러나 이제 이 중요한 제목의 적극적이고도 더 건설적인 면을 살펴보십시다. 그것으로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상징된 영적 장자들에게 수여된 거대한 유익을 더 잘 이해하며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유익을 받는 것은 단지 예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유익과 특권을 그들 상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및 주로 여호와 자신과 참여하는 훌륭한 방법은 훨씬더 현저한 것입니다.
받게 되는 유익
11. 『이것은 나의 몸을 의미한다』는 말씀 중에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11 첫째로, 떡을 떼셨을 때 우리 주의 말씀을 고려하십시오. 그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어져야 할 나의 몸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관련되어 있는 성귀들을 볼 때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의 육체를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가 침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요한」에게 오셨을 때 예수께서는 오래 전에 영감으로 기록된 시편 40:6-8의 말씀을 자신에 적용하셨읍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에 대하여 언급 함으로써 표시되었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예수께서]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서소 . . .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러므로 그의 희생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며 이것은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을 때 마침내 대속의 가치의 실제적 마련의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누가 22:19, 신세; 히브리 10:5-7; 베드로 전 4:1; 2:24.
12. 성경은 인간 창조물의 피에 어떠한 중요성을 첨부하였으며, 이것은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됩니까?
12 그러나 『자기를 속전으로 주』신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물론 단순한 육체는 아니였읍니다. 이것은 마치 『산 영혼이 된』 「아담」이 단순한 육체가 아닌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와 완전히 일치하는 분입니다. 인간의 산 영혼은 혈육으로 된 피조물입니다. 사실 성경이 생명 혹은 영혼을 대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육체보다도 피입니다. 『피는 그 생명』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정당하게도 「바울」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그의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포기하셨는가를 묘사할 때 피뿐 아니과 살도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하늘의 생명을 얻는 길 즉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디모데 전 2:5, 6; 고린도 전 15:45, 신세; 신명 12:23; 레위 17:11; 에베소 1:7; 히브리 10:19, 20.
13. 어떠한 종류의 해방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지금 즐깁니까?
13 그리하여 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들을 위한 천적 보상의 확실성은 보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혈육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흑암의 권세』로부터 현재의 구출을 가져왔읍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고 그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해방입니까? 아들이신 그가 머리로 임명되신 조직 혹은 집에 데려오게 된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며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이들은 얼마나 훌륭한 유익입니까!—골로새 1:13; 히브리 2:15; 3:6; 요한 8:31-36.
14, 15. (ㄱ) 성경에서 마신다는 것에 상징적 중대한 의의가 어떻게 부여되었읍니까? (ㄴ) 떡을 먹고 잔을 마실 자격이 주어진 사람들의 행동으로 무엇이 표시되며,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지지합니까?
14 보통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고 마십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행동은 성경에서 흔히 상징적인 중대한 의의를 가집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우물에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와 같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 .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 (요한 4:10, 14) 흡사하게, 주의 만찬에서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자격이 부여된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주신 예수 자신의 희생으로부터 받는 유익 즉 생명의 유익을 그들이 감사함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신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참다운 상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극단적인 것으로 혹은 심지어 반대적으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이 그렇게 표현하셨고 「유대」인들도 그에 대하여 불평하게 하였다는 것을 기억 하십시요. 심지어 그의 많은 제자들까지도 충격을 받아 그를 따르지 않고 떠났읍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12명을 대신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 . .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그러한 반응을 일으키게 한 예수께서 실제 사용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한 6:51, 53-56, 68, 69.
15 이 마지막으로 참조된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제목의 다른 면을 되생각나게 합니다. 그것은 즉 그와 함께 밀접하고 귀중한 관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 참여케 될 유익
16. 주의 만찬시의 상태로 무엇이 표시되며, 예수께서 기도 중에 그의 아버지께 말씀하신 방법으로는 무엇이 표시되었읍니까?
16 예수께서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도록 초청하시어 충성스러운 11제자들이 모다 같은 식탁에 기대였을 때 말씀하신 상태 자체가 우정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유력한 사람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고자 청하였는데 그가 「나의 사무실로 오셔서 만나 얘기합시다.」라고 대답하였다면 이제 당신은 사무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토론될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집으로 오셔서 저녁이나 하고 이야기 합시다.」라고 말하였다면 물론 당신은 즉시 그 싸움은 반 이상 이긴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가장 풍부하고도 가장 깊은 얼마의 진리를 예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밤과 그의 천부께 대한 마지막 기도 가운데서 말씀하셨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었읍니다. 그 기도와 이것의 첫머리 자체에서 까지도 예수 자신이 그의 아버지와 즐기신 매우 밀접한 관계를 표시합니다. 그가 말씀하실 때 그는 그의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을 하셨고 그가 필요하실 때에는 단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계속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도 단순한 것이었읍니다.—요한 17:1.
17. (ㄱ) 새 언약에 관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우며, 거기에는 어떠한 대조가 표시되어 있읍니까? (ㄴ) 새 언약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17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돌리고자 포도주 잔을 드셨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이 잔은 내 피에 의한 새 언약을 의미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어져야 하는 것이다.』 (누가 22:20, 신세) 이 새로운 언약에 대한 언급은 받게 될 유익과 참여케 될 유익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히브리」인들에 보낸 서한으로 되돌아가 볼 때, 이 언약을 증명하며 이것의 의의를 인식하도록 우리를 돕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새 언약은 이전 구 언약과의 대조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옛것을 거절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하여 「바울」은 말합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첫 것은 중보자인 「모세」를 통하여 육적 「이스라엘」과 맺으신 구 율법의 언약이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언약 하에서 「백성들의 허물을 발견」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예언자 「예레미야」 시대까지 올라가서 우리는 이러한 말씀으로 새로운 언약이 약속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 . .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 8:8, 13, 신세; 예레미야 31:33, 34.
18. 새 언약과 관련하여 예수의 피흘리심으로써 무슨 두가지 일에 효력있게 하였읍니까?
18 한 언약이 유효하게 되며 또한 죄가 사하여지기 위하여는 양편 다 피 흘림을 요구합니다. 『언약에 관하여는 죽은 자(희생들)를 통하여 효력있게 된다. . . . 그리고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 예수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흘리신 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죄의 참다운 사하심에 대한 법적 기초를 마련하며, 심지어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반하여 동물 희생에 기초한 구 율법 언약은 단지 외면적이며 전형적인 면 즉 『그 육체를 정결케 하』는 그러한 마련을 하였을 뿐입니다.—히브리 9:13, 14, 17, 22, 신세.
19. 새 언약은 누구와 맺은 것입니까?
19 새 언약은 누구와 맺습니까? 참다운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 즉 예수의 왕국의 천적 보좌에 참여하는 『적은 무리』와 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처음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읍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관계에 들어오게 될 것을 그는 아셨읍니다. 이것은 그의 기도에 표시된바와 같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한 17:20) 이들은 영적 「이스라엘」을 구성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율법 언약 하의 육적 「이스라엘」 나라는 「시내」산에서 시작되었읍니다. 영적 「이스라엘」을 다루신 것은 이전에 토론된 그림과 비교한 바와 같이 물론 다른 그림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에 특히 유대의 장자들을 다루셨읍니다. 율법 언약은 「모세」를 통하여 국민 전체와 맺은 것이지 단지 장자들과 하신 것은 아닙니다.
20. 성경의 많은 예들에 관하여 무엇을 명심하여야 합니까?
20 앞에서 성경은 예표들과 예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적한 바 있읍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표마다 그 자체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우리는 한 예표를 다른 것에다 맞추고자 하지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에 주어진 그 많은 예를 그렇게 하지 말 것입니다. 즉 『양들』을 『군사』나 혹은 『산돌』에 맞추고자 하지 말 것입니다.—고린도 전 10:11; 요한 10:14; 디모데 후 2:3; 베드로 전 2:5.
21. 친교제를 바치는데 어떤 절차를 따랐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읍니까?
21 구 율법 언약의 제헌시에 제공된 희생을 볼 때 우리는 『친교제』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약 한다면, 그러한 제물의 피를 여호와의 제단에 뿌렸으며 그것은 또한 『상』이라고 불리웠읍니다. 그리고 기름은 제물의 여호와의 부분으로 그 위에 태웠읍니다. 직무를 수행한 제사장은 그의 몫으로서 떡과 오른쪽 다리를 가졌으며 이 제물을 바친 「이스라엘」 사람은 회막에 있는 동안에 남은 고기를 먹었읍니다. 「시내」 산에서 제헌식이 있었을 때 후자의 특징은 『「이스라엘」장로 칠십인』은 지켰읍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대표하였읍니다. 그러한 경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상에서 그와 특별한 친교를 즐겼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거짓종교를 실천하는 주위의 나라들과 같이 그들의 상에서 마귀들에게 제물 바치는 것이 금지 되었읍니다.—레위 7:11-37; 17:5-7; 출애굽 24:9-11; 에스겔 44:16.
22. 어떠한 면으로 「바울」은 이들 희생을 주의 만찬과 연결시켰읍니까?
22 「고린도」의 영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편지하였을 때, 「바울」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거울의 하나로서 이러한 일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읍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린도 전 10:16-18, 21.
23. 따라서 참예자들로 말미암아 (ㄱ) 상호간에 (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ㄷ) 여호와와 함께 어떠한 특별한 벗함이 표시됩니까?
23 이상의 경우를 종합할 때, 주의 만찬은 희생 만찬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미 묘사된 바와 같이 친교제에 비할 수 있읍니다. 새 언약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잔으로부터 마시며 떡을 먹음으로 다음 분들과 밀접한 친교와 귀중한 교제에 참예하며 즐기고 있음을 표시합니다. (1) 그들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 하에 『한 몸』을 이루는 영적 「이스라엘」의 연합된 회중으로서 새 언약의 전도에 있어서 상호간과 또한 (2) 그의 피와 살의 제물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는 유익에 참예하며, 『고난에 참예』하며, 또한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며, 『첫째 부활』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리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3) 전체 마련의 창작자인 여호와 하나님과 참여하는 것입니다.—고린도 후 3:6; 빌립보 3:10; 베드로 후 1:4; 계시 20:6.
24. 여호와와 하나가 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그의 기도에서 이것을 어떻게 강조하셨읍니까?
24 이 마지막 점에 관하여 예수께서 그러한 희생을 바치실 수 있게 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잔』과 『주의 상』이라고 올바로 말하였읍니다. 첫째로 영적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성의에 따라 사용될 수 있도록 예수께서 그의 희생의 가치를 바치셨던 것은 바로 여호와께였읍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의 마지막 밤에 그들을 위한 기도 가운데서 천부와의 이 밀접하고 귀중한 관계를 크게 강조 하셨읍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 하셨읍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 .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 17:20-26.
25. 「바울」은 어디에서 어떻게 새 언약의 전도에 관하여 묘사하였으며, 「베드로」는 이것을 어떻게 다짐하였읍니까?
25 바로 이상을 종합함에 있어서 전에 토론하지 않은 한 두가지 점이 있는데 이들에 관하여 우리는 몇가지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새 언약의 전도에 관하여 「바울」은 고린도 후 3:4-4:6에서 이를 확대합니다. 그리고 그는 새 언약의 영광이 율법 언약의 영광을 훨씬 능가함을 표시합니다. 『우리[그리스도인들]가 . . . 여호와의 영광을 거울과 같이 반사한다.』(신세)고 그는 말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고 그 후에 기쁜 소식을 전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빛과 『진리를 나타』내어 반사합니다. 주의 『다른 양들』은 지상에 아직 있는 적은 무리의 남은자들과 밀접하게 연합한 이유로써 이 같은 전도에 참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무거운 짐 즉 책임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영적 「이스라엘」 위에 놓여 있읍니다. 이것은 「베드로」로 말미암아 묘사된바와 같습니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요한 10:16; 베드로 전 2:9.
26. (ㄱ) 대속의 혜택은 영적「이스라엘」을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어떻게 적용됩니까? (ㄴ) 그렇다면 『다른 양들』에 관하여는 어떤 구별이 표시되었읍니까?
26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자들을 위하여 적용된 그리스도 희생의 혜택과 그들의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즉 아직 육체로 있는 동안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일커름을 얻는 결과를 가져온 그리스도 희생의 혜택이 특별한 목적을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은 거룩한 뜻입니다. 첫째 그들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만하게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천적 생명의 새로운 소망을 가진 그의 영적 아들들로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탄생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작용으로써 수행됩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에게 기름을 붇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몸 혹은 회중의 성원으로서 그들을 법적으로 인정하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다른 양』에 관한 명백한 구별을 볼 수 있읍니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천국 편에 서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내놓을지도 모르나 회복된 낙원에 그들의 생명의 지적 소망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들의 천국 봉사와 올바른 행동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지탱하며 자격을 갖추도록 그들을 위하여 작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내부에 천적 부활의 소망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로마 5:1, 2; 8:15-17; 골로새 1:18.
27. (ㄱ) 양과 같은 모든 사람들은 왜 주의 만찬에 참석합니까? (ㄴ) 그때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어떠한 진리가 강조됩니까?
27 새로운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받게 된 놀라운 유익과 참여케 된 유익과 및 그들이 들어가는 밀접하고 귀중한 관계을 간단하게 살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특권이 얼마나 훌륭하며 한편 그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더욱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읍니다. 『다른 양들』도 비록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는 의미에 있어서 그들에 참가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목적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이들 중요한 진리에 관하여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이 주의 만찬에 병합된 연례적 모임은 사실 독특합니다. 성실하게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으며 또한 참석하고자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모임은 참다운 숭배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참석한 전원은 상징적 의미에 있어서 『여호와의 상』에 참석하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영적 아들들 즉 「하나님의 후사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만이 누룩없는 떡과 포도주의 표상물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녁에 이야기 하는 바를 잘 들음으로써 나뉘지 않은 전적 숭배의 정신으로 여호와의 천국의 관심사 안에서 그를 섬기는 중요성과 『귀신의 상』에서 그들이 섬긴다는 것을 증명하는 어떠한 행동에도 결백함을 유지하는 중요성과 여호와의 헌신한 증인들의 신 세계 사회와의 밀접한 연합을 유지하는 중요성을 모두는 다시 한번 생생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지금은 여호와께서 모든 양들을 『우리 안에 있는 양떼와 같이 . . . 연합하게』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미가 2:12; 요한 10:16, 신세.
28. 시편 116편은 예수와 관련하여 어떻게 성취되었으며, 이것은 새 언약 안에 있는 모두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28 그러나 천적 소망이 자기의 것임을 아는 사람들과 바로 말한 영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은 표상물에 참여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피고』 주의하여 합당하게 참예할 것입니다. 이들 영적 아들들은 상호간과, 그들의 주 즉 머리이신 분과 그중에서도 여호와와 귀중하고도 밀접한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이 포함된 다는 것을 잘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의 손에서 받은 모든 것을 인식한다면 그들의 기도는 예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언적인 한편의 시부터 알 수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들의 굳건한 결심은 같은 시편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그의 결심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 [여호와]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찌라.』 그들의 희생 바치는 행동을 충성스럽게 성취하며 『죽도록 충성』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약속으로 유지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필요하셨을 때에 얼마나 위안과 강력한 보증을 확실히 주었을 것입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희생의 행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그 오래 전에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케 하신 말씀을 읽을 수 있읍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귀중한 것은 그의 충신자들의 죽음이로다!』(신세)—고린도 전 11:28; 계시 2:10; 시 11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