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영혼을 보존하기 위하여 믿음을 가지라
1. 특히 히브리 11:1, 2에 정의된 바와 같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니요? 무슨 믿음 말입니까?하고 새로운 「파수대」 독자는 질문할지 모릅니다. 각 독자는 가장 손쉬운 곳에 있는 사전으로부터 『믿음』에 관한 정의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러나 여기 히브리 11:1, 2에 주어진 믿음의 정의가 있읍니다. 이것은 고대 서기 기원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들로 말미암아 예증된 바와 같읍니다. 『[믿음은 바라는 사물의 보증된 기대이며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본체의 명백한 증거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함으로써 뒷바침하였기 때문에 기쁘시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증거하셨읍니다.
2. 그러한 사람들은, 예를 들어 「아벨」은 왜 소망을 가졌읍니까?
2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의 소망을 가졌었읍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즉 약속하신 것 때문에 그들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벨」이 있었읍니다. 그는 「에덴」 동산 밖에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탄생된 둘째 아들이었읍니다. 「아벨」은 소망을 가졌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벨」의 부모가 듣는 중에 유혹한 뱀에게 하신 말씀 때문이었읍니다. 창세기 3:14, 15은 이것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 .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벨」은 하나님의 『여자』의 약속된 씨가 오셔서 그 씨로 말미암아 유혹자의 머리가 부서지는 것을 소망하였읍니다.
3. 「아브라함」은 어떠한 소망을 가졌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3 그리고 또한 「히브리」인 족장 「아브라함」이 있었읍니다. 그가 고향과 친척들을 떠나라는 불리움을 받았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확실히 자기 자신들을 축복하게 될 것이다.]』 (창세 12:1-3, 신세) 그렇기 때문에 이 무자한 「히브리」인 「아브라함」은 자녀들을 가질 소망과 큰 나라를 이룬다는 소망 그리고 그의 이름이 위대하게 된다는 소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었고 그리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은 그로 말미암아 축복을 얻게 될 것이었읍니다.
4. 「아벨」과 「아브라함」은 두 분 다 무엇과 일치조화하여 행동하였으며, 그들의 행동의 경로는 무엇을 의미하였읍니까?
4 「아벨」과 「아브라함」은 그들이 소망하였던 것을 얻게 되리라고 기대하였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랄만한 그 무엇을 얻게 된다는 기대와 일치 조화하여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의 경로는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소망이 근거를 가졌듯이 믿음은 근거를 가지고 있읍니다. 소망은 그 무엇을 바란다는 것 뿐만 아니라 얻게 된다는 기대를 포함합니다. 이제 믿음은 단순한 기대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이란 소망과 같거나 최소한 소망의 일부일 것입니다. 비록 서로 관계는 있을 망정 하나님의 말씀은 소망과 믿음을 각각 다른 것으로 취급합니다.
5. (ㄱ) 첫째로 히브리 11:1은 어떠한 믿음의 정의를 내렸읍니까? (ㄴ) 그곳에서 사용된 희랍어 「후포스타시스」에 의하면, 믿음을 물질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까?
5 「신 세계역」의 히브리 11:1의 믿음은 바라는 사물의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바라는 사물의 『보증된』 기대라고 말한데에 유의하십시오. 물론 희랍어 성서의 히브리 11:1이사용한단어는 「후포스타시스」(hypóstasis)이며, 한 문장 안에서 그 단어를 동반하는 말들에 따라 「후포스타시스」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할 수 있읍니다. 즉 (ㄱ) 근거, 기초, 토대, 확신, 담대함, 결의, 확고성, 보증, 약속, 혹은 (ㄴ) 실질적인 성질, 본질, 실제적 존재, 실체, 진실된 성질, 실제, (한 생각의) 온전한 표현 혹은 확장.a 이제 우리는 믿음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저울에 달 수 있는,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그것은 마음의 질입니다. 마치 로마서 10:10(신세)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바와 같읍니다. 『왜냐 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6. 그렇다면 「후포스타시스」는 기대하는 사물과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합니까?
6 그렇다면, 여기 믿음에 적용되는 「후포스타시스」는 소망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행동하도록 움직이며 자극을 줄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 세계역」이 히브리 11:1에서 제공하듯이 믿음이란 기대가 잘 기초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움직이어 행동하게 하는 기대이며, 다짐받은 즉 보증받은 기대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확고하지 않으며 불확실 하며 자신이 없으며 결과가 없도록 버려두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후포스다시스」는 『보증된』 기대입니다.
7, 8. 「아벨」의 바랐던 바 기대는 왜 잘 기초한 것이었읍니까?
7 그러면, 「아벨」은 무슨 이유로 『보증된 기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까요? 「에덴」에서의 유혹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이 「아벨」의 소망을 일으켰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수행하시리라는 「아벨」의 기대는 보증되었으며 잘 기초하였고 실현이 확실하였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읍니까?
8 「아벨」은 뱀에게 일어난바가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을 증명하였다는 것을 봤읍니다.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찌니라.』 「아벨」은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 위에 틀림 없이 집행된 하나님의 선고도 보았읍니다. 즉 이들은 「에덴」 낙원으로부터 쫓겨났고 「아담」이 가족의 생필품을 얻기 위하여 땀흘리며 고통 중에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과 「하와」가 남편의 지배아래 잉태하는 고통과 출생하는 고통을 가지고 「아담」을 위하여 아들 딸을 낳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창세 3:14, 16-19) 「아벨」은 또한 그의 부모가 죽어가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도 보았으며, 자기도 그들의 후손으로서 때가 이르면 죽게 된다는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신 대로 되었읍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6, 17) 「아벨」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바 즉 약속하신 바에 참되셨다는 것을 보았읍니다.
9. 믿음으로 「아벨」은 어떻게 행하였으며, 그 결과는 무엇이었읍니까?
9 그렇다면 「아벨」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증명하는 알려진 사실들 위에 믿음을 이치적으로 놓았읍니다. 그는 확실히 성취될 하나님의 『여자』의 씨에 관한 약속에 믿음을 두었읍니다. 유혹자는 죽음을 유발시켰읍니다. 여자의 씨는 유혹자를 정복할 것이며 죽음을 물려 받은 인간들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줄 책임을 지게 되었읍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어떻게 행하였읍니까? 그는 동물의 희생을 하나님께 바쳤읍니다. 그는 자기의 무리로부터 양의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아벨」은 자기가 먹기 위하여 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표상적으로 그러한 희생의 양들의 생명이 그 자신의 생명의 대용물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읍니다. 그의 형 「가인」은 단지 생명없는 농산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식물 제물을 거절하시고 승인하시는 뜻으로 「아벨」의 희생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에 대한 거룩한 승인을 그에게 증거하셨읍니다.—창세 4:1-8.
10. 히브리 11:4에서 말한바와 같이 「아벨」은 무엇에 따라 거룩한 승인을 얻었읍니까?
10 그 이유가 무엇이었다고요? 「아벨」이 여호와께 믿음을 가지고 그의 믿음과 일치하는 희생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예시하기 위하여 히브리 11:4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11. 「아벨」은 비록 죽었으나 어떻게 말하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여기는 뿌린 피는 무엇입니까?
11 「아벨」은 그의 질투 많은 형의 손에 무참히도 죽었읍니다. (창세 4:8-12) 비록 「아벨」은 그리스도보다 사천년 전에 죽었으나 그가 가졌었던 믿음은 성경에 보고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의 처음 인간 증인으로서 말합니다. 「아벨」의 피는 아무도 대속하지 못하였읍니다. 즉 속가를 지불하지 못하였읍니다. 그것은 그의 제물이 된 양의 피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읍니다. 「아벨」의 피는 암살자 「가인」을 복수하여 주실 것을 하나님께 외쳤읍니다. 그러나 「아벨」이 오실 것을 믿었던 하나님의 『여자』의 씨의 피는 「아벨」과 「아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주실 것을 하나님께 부르짖읍니다. 이 때문에 히브리 12:24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그러므로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였고, 이제 「아벨」은 신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보상을 기다리고 있읍니다.—히브리 11:6.
보이지는 않으나 사물의 명백한 증거
12. 히브리 11:1은 믿음이 어떠 하다고 더 말하며, 아직 보이지 않은 실체와 관련하여 희랍어 「엘렝코스」가 사용된 것은 왜 적합합니까?
12 그러나 믿음은 단지 『바라는 사물의 보증된 기대』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보이지는 않으나 본체의 명백한 증거』라고도 말하였읍니다. 『명백한 증거』라는 표현을 위하여 히브리 11:1은 희랍어 「엘렝코스(élengkhos)」를 사용합니다. 이미 말한 희랍어—영어 사전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은 뜻으로 정의합니다. (ㄱ) 증거가 아니라는 즉 반증하는 논증, (ㄴ) 일반적으로, 반대심문, 시험하는 것, 면밀한 음미, 특히 반증의 목적을 위한 것, (ㄷ) 목록, 일람. 그리하여 그 희랍 단어는 어떤 사물 특히 나타나는 바와는 반대되는 것 같은 경우에 어떤 사물을 증명하는 증거를 캐 내는 것과 관련이 있읍니다. 이리하여 외면상이 아니라 연구 해 내야 하는 사물의 진상이 나타나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3. 「크리스도퍼 콜럼버스」는 이에 관한 어떠한 좋은 예를 제공합니까?
13 「크리스도퍼 콜럼버스」를 한 실예로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에 성경 읽는 것이 금지된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가 「유대」인이었다면, 땅이 둥글다는 데 관한 이사야 40:22을 읽었을 것입니다. 즉 『그는 [둥근 땅 위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또한 욥기 26:7은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그런데 「콜럼버스」는 오늘날 우주에서 지구를 돌고 그들의 눈으로 땅이 둥글다는 것을 보고 온 우주인과 같은 사람은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1) 자연적인 이유들로부터, (2) 지리학자의 학설로부터, 그리고 (3) 항해하는 사람들의 보고와 전통으로부터 뽑아 낸 세 가지의 주요 논증으로 「콜럼버스」는 우리의 지구가 하나의 구체에 틀림 없고 이치를 궁구하며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예컨데, 그는 달이 둥글다는 것을 볼 수 있었읍니다. 월식은 둥글게 되었읍니다. 배들이 수평선으로부터 닥아올 때 항해하는 배들의 돛대 끝이 첫째로 나타나고 선체는 마지막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가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지구에 관한 참다운 사실이 매우 명백하게 그에게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이 명백한 증거에 준하여 행동해서 그는 서쪽으로 항해하였으며 서인도와 남 「아메리카」를 발견하였읍니다. 그의 믿음은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14. 「콜럼버스」의 믿음은 어떤 종류였으며, 히브리 11 장에서는 어떤 종류의 믿음이 예시되어 있읍니까?
14 그러나 「콜럼버스」의 믿음은 영적 믿음은 아니었읍니다. 그것은 단지 과학적인 것이었읍니다. 그것으로 그는 이 물질적인 세계와 그 신에게 공헌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4:4) 그러나 히브리 11장은 신 세계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그들의 성서적 믿음으로 기쁘시게 한 역사적인 인물들의 예를 제공합니다. 그들 모두는 소위 미국의 신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여자』의 약속된 씨 밑에 있을 신 세계가 임하는 데 믿음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히브리 11:3(신세)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물의 제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5. 어떤 면으로 이 세상의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지만, 우리는 왜 믿음을 가지고 있읍니까?
15 이 세상의 물질적인 인간들은 한 하나님이 항상 계셨고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망원경과 전자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사물들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라』 즉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읍니다. 그러나 성경 연구생인 우리는 실용적인 믿음 때문에, 『사물의 제도』 즉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어떻게 무로부터 자신들을 창조할 수 있었으며, 이지적이시고 전능하시고 무한한 「에네루기」와 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없읍니다. 우리는 소경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계시며 항상 계셨다는 『명백한 증거』를 볼 수 있읍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물의 제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로마 1:20-23.
16, 17. (ㄱ) 베드로 후 3:13에 따라 우리는 무엇을 왜 기다리고 있읍니까? (ㄴ) 그와 관련하여, 히브리 11:8-10은 「히브리」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16 우리의 믿음은 약한 혹은 불충분한 증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식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지적이며 하나님의 거짓이 없는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받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밑에 사람의 거하는 땅을 가진 사물의 새로운 제도를 창조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브리 2:5-9, 1:2) 바로 베드로 후 3:13이 말하듯이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히브리11장이 의가 거하는 사물의 새로운 제도의 임하는 것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옛 사람들 중에는 「히브리」인 족장 「아브라함」도 있었읍니다. 그에 관하여 히브리 11:8-10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이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결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8. 「아브라함」은 어디를 떠났으며, 어디에 누구와 함께 머물렀으며, 「에서」는 왜 그와 함께 한 사람으로 언급되지 않읍니까?
18 창세기 11:31과 사도행전 7:2-5에 의하면, 처음에는 「아브람」이었던 「아브라함」은 「갈데아」인들의 땅 다시 말한다면 약 이백년 전에 「바벨」탑이 구축되었던 「시날」 땅에 있었던 「우루」 성읍을 떠났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여 들이신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읍니다. (창세 12:1-9) 여기에서 그에게는 「이삭」과 「야곱」을 포함한 아들들과 딸들이 탄생되었읍니다. 히브리 11:9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과 천막에 거하였으며 「야곱」과 15년간 살았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에서」라는 사람과 쌍동이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에서」와 천막에 거하였다거나 혹은 「이삭」과 쌍동이 중 형인 「에서」와 거하였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압니다. 장자인 「에서」는 분명히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의 공적을 간결하게 기록한 히브리 11장에서는 빠졌읍니다. 사실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표시합니다.
19, 20. (ㄱ) 「에서」는 누구와 결혼 하였으며 어디로 갔읍니까? (ㄴ) 「에서」(즉 「에돔」)의 후손들은 그들의 증조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어떻게 표시 하였읍니까?
19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친척 중에서 결혼하지 않고 「에서」는 마흔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결혼 마련을 하여 「가나안」 땅의 「헷」족속의 두 이방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읍니다. (창세 26:34)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그들의 아버지 「이삭」은 「아브라함」의 친척으로부터 아내를 취하도록 그의 쌍동이 동생 「야곱」을 북쪽 「시리아」로 보냈읍니다. (창세 28:1-8) 「야곱」이 없는 동안에 쌍동이 형인 「에서」는 그들의 아버지인 「이삭」을 떠나 『「세일」 땅 「에돔」 들』에 살기 시작하였읍니다.—창세 28:8, 9; 32:3; 33:16.
20 「야곱」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돌아오자 「에서」는 확정적으로 『「세일」 산』까지를 포함하여 「세일」 땅에 정착하였읍니다. (창세 36:1-9)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 왕들이 그의 허리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기도 전에 「에서」 (즉 「에돔」)의 후손들은 그들을 다스릴 왕들을 세웠고 영원한 거주지로서 성읍들을 건축하였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볼 수 있읍니다. 『「이스라엘」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다른 도성은 「아윗」과 「바우」였읍니다. (창세 36:31-39; 35:9-11) 「에서」는 「아브라함」의 씨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부분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읍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세 15:13) 「에서」의 후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올 어떤 장래의 성읍도 바라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성읍에서 살기 위하여 천막을 떠났던 것입니다.
21. (ㄱ) 히브리 12:15-17이 「에서」를 경고의 본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히브리 11:9이 「에서」 대신에 「야곱」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1 「이삭」의 장자인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을 경시하였으며 쌍동이 동생인 「야곱」에게 팔았읍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읍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온 「아브라함」의 언약과 같은 거룩한 것들을 인식하지 않았읍니다. (창세 25:29-34) 이 때문에 히브리 12:15-17은 물질주의적인 「에서」를 경고의 본으로 삼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에서」와 같은)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라.』 히브리 11:9은 그러므로 「에서」를 제외하여 「아브라함」이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고 말한 것은 올바른 일이었읍니다. 「야곱」은 「시리아」에서 큰 가족을 이루어 그 곳을 떠났읍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인 「이삭」에게로 돌아왔으며 「이삭」이 사망할 때까지 가깝게 살았읍니다. 그후에도 「야곱」은 성읍을 짓지 않았던 것입니다.—창세 31:17, 18; 35:27-29.
2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몇해 동안이나 약속의 땅에 살았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215년이란 기간동안 (주전1943년으로부터 1728년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외국 땅처럼 약속의 땅에 나그네 거주자들로 계속 천막에 살았읍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하였읍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한 영원한 성읍 즉 그들이 그 밑에서 살게 될 천적인 정부의 기초를 놓시고 세우실 것을 바랐기 때문이었읍니다. 히브리 11:10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23. 각자는 얼마 동안이나 외국에서 천막 생활을 하였으며, 그들이 그렇게 오래 동안 천막 생활을 하면서 그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았읍니까?
23 「아브라함」 자신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100년간 천막에 거하였읍니다. 「이삭」은 180년간 천막 생활을 하였으며, 「야곱」은 「애굽」의 총리대신이었던 그의 아들 「요셉」이 「애굽」으로 불를 때까지 110년간 천막 생활을 하였읍니다. 「아브라함」은 그 당시에 고도로 문명화된 「갈데아」인들의 「우루」에서 모든 편리한 물건들을 가지고 살았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였었읍니다. 그는 외국에 방랑자로 여기 저기 이사하며 천막에 계속 살 필요가 없었읍니다. 「야곱」이 「시리아」에 있는 「하란」 성읍을 떠나 이방 「가나안」 땅에서 그의 아버지 「이삭」과 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돌아올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생활을 물질주의적으로 보지 않고 「갈데아」인들의 문화도시인 「우루」의 모든 편리한 것들과 기회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외국에서의 거칠은 천막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땅의 성읍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겠읍니까? 그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가나안」 땅에 천막을 쳤던지 간에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시리라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였읍니다. 왜 도대체 왜 그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지키다가 마침내는 외국땅에서 모두 죽었읍니까? 히브리 11:13-16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4. 히브리 11:13-16은 그들이 「가나안」을 떠나 「우루」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25. 만일 그들이 「우루」로 되돌아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겠읍니까? (ㄴ) 그들이 정말 바랐던 『성』은 무엇이며, 이제 그들은 어떻게 그 성과 접촉을 하게 될 것입니까?
25 만일 그들이 「갈데아」 성읍 「우루」로 되돌아가서 일부분이 되었다면 어떻겠읍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그들에 대한 약속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영혼의 멸망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그들은 「우루」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여호와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였읍니다. 그들은 뒤를 돌아다 본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 봤읍니다. 그들은 땅의 성읍인 「우루」보다 더 좋은 곳을 바라보았읍니다. 그들은 하늘에 속하는 성읍, 하늘 정부 즉 하나님의 『여자』의 씨인 「메시야」로 말미암은 그의 왕국을 기대하였읍니다. 오늘날의 「갈데아」 「우루」가 무엇입니까? 얼마 전에 고고학자들로 말미암아 발굴된 한낱 폐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위하여 준비된 하늘의 성인 하나님의 왕국은 어떠합니까? 그것은 주후 1914년 이래로 하늘에서 권능을 잡고 있읍니다. 잠시 후에 그것은 이 낡은 세상적 사물의 제도를 멸망시키고 온 땅을 절대적으로 통치할 것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자로부터 부활될 것이며 하늘의 정부 아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누가 20:37, 38.
우리는 어떠한가?
26. 전에 있었던 사람들과 비교하여 우리는 어떻게 자문하며, 우리가 히브리 10:38, 39로 우리의 대답을 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6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만일 우리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라면, 모독적인 「에서」(에돔)와 같은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금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뒤로 돌이키지 않은 여호와의 「히브리」인 증인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사람들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믿기 시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가 되었던지 간에, 지금에 와서 이 물질주의와 거짓 종교의 낡은 세상으로 돌이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히브리 10:38, 39(신세)와 같이 그것을 다짐하여 말합시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이제 우리는 멸망으로 뒷걸음질 치는 자들이 아니라 산 영혼을 보존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27.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뒷걸음질 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7 우리는 하나님의 영혼이 우리를 기뻐하셔야겠다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하는 의로운 입장을 가지며 우리의 믿음 때문에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람이 뒷걸음 친다, 혹은 움추린다는 것은 괴롭거나 혹은 불쾌한 어떤 일을 만나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후퇴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뒷걸음질 친다 혹은 움추린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히브리 10:38, 39의 뒷걸음질 친다는 말은 고대 희랍 작가들로 말미암아 두려움으로 후퇴함 혹은 자신을 숨김이라는 말로 사용 되었읍니다.b 우리가 뒷걸음질 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멸망으로 인도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마태 10:28.
28, 29 (ㄱ) 뒷걸음질 치는데 있어서 위험은 어디에 존재하며, 그것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읍니까? (ㄴ) 히브리 5:11–6:3은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8 뒷걸음질 친다 혹은 움추린다는 것은 작은 위축과 같아서 주름살을 생기게 합니다. 바로 이 사실에 위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멸망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뒷걸음질 친다는 것 혹은 후퇴한다는 것은 자기 진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발전하기를 거절하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읍니다. 그것은 마치 한 아이가 자라서 책임을 지기 원하지 않고 책임을 지게 된 타인의 마음 편한 아이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것과 같읍니다. 예를들어, 필자가 「히브리」인들에게 죄에 대한 회개라든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든가, 침례며, 선출된 사람들에게 안수하는 것이라든가 부활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심판과 같은 성경 교리보다도 더 앞섰으며 더 포괄적인 일들을 설명하는데 그렇게 길게 쓸 필요가 무엇이었겠읍니까? 그것은 그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우유와 같은 교리만을 먹을 수 있는 영적 어린 아이들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였으며, 말한 것이나 가르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듣는데 둔한자들이 되었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래서 히브리 5:11로 6:3(신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9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인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장성으로 매진하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30. 하나님께서는 사실 우리가 그렇게 행하도록 어느 정도까지 허락하시며, 따라서 영적 어린 아이들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30 하나님께서 우리로 계속 살게 하시며 이 세상을 멸망사키시지 않으시는 정도까지 사실상 허락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장성으로 매진』할 것입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즉 『터』 뿐 아니라 『해석하기 어려』운 것을 가르칠 수 있기 위하여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이용하겠읍니까? 우리가 진리를 안 시간으로 보건데, 우리가 성경의 『젖』과 같은 교리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 즉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거나, 지금까지 우리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비단 회중에서 뿐만 아니라 아직도 회중에 속하지 않는 흥미를 가진 사람들의 가정에서 다른 사람에대한 스승이 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합니까?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데 대하여 정직하게 그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그것에 관하여 어떤 적극적인 일을 해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31, 32. (ㄱ) 영적 어린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입니까? (ㄴ) 그러한 나쁜 습관을 경고하여 히브리 10:23- 27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1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정말 우리 앞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노력과 행동에 꾸준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영적 발전이 더 지체한다거나 혹은 직접 후퇴함으로써 움추리는 것 즉 뒷걸음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행동이란 우리가 개인적으로 계속 성경을 연구하는 것 이상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여호와의 증인의 신 세계 사회와 더불어 연구하기 위하여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의 현대 그리스도인 증인들과의 모임을 필요 이상으로 참석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뒷걸음질의 시작입니다. 계속된다면 마침내 습관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 10:23-27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3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쑤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있으리라.』
33. 우리가 만일 고의적으로 집회를 빠진다면, 히브리 2:1과 관련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정말 무엇이 시작된 것입니까?
33 사랑을 격려하며 선행이 행하여지는 모임에 고의적으로 빠질 때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있읍니까? 우리는 히브리 2:1이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는 바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들은 것들에 대하여 더 보통 이상의 주의를 돌리고 있읍니까? 혹은 보통 이하의 주의를 돌리고 있읍니까? 비록 우리가 스스로 가정 성경 연구를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이상이 아니라 이하로 주의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멸망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더 높은 중요성 때문에 그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34. 우리의 믿음이 완전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므로 고대의 「히브리」인들은 왜 그들의 믿음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읍니까?
34 만일 우리가 산 영혼을 영원히 보존하기에 이르는 완전하게 된 믿음을 갖고자 절실히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정말 합당한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 . . . 온전케 하시는 이』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가 십구세기 전에 오시기 전 고대 「히브리」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믿었으며 기대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그들의 믿음은 그 당시에 그에게 성취된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매우 결핍된 것이었읍니다.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메시야」 즉 그리스도께 관한 예언들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1:10-12) 그런 까닭에 그들의 믿음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읍니다.
35, 36. 누가 오시는 것과 더불어 믿음이 정말 도착하였으며, 어떻게 해서 그렇읍니까?
3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전도하시다가 돌아가시고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어 하늘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을 때, 종래까지 이해못하였던 그에 관한 예언들은 세밀하게 이루어졌읍니다. 그때에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은 역사적 사실들로서 가득 차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믿음은 정말 도착하였읍니다. 즉 그와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믿음은 올바른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한때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히브리」인들에게 갈라디아 3:23-25은 이렇게 말합니다.
3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37.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 믿음과 관련하여 어떠한 분이셨으며, 따라서 그와 더불어 정말 무엇이 시작되었읍니까?
37 이 사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정말 우리의 믿음의 지도자와 개척자와 총대리자이셨읍니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며 「메시야」의 예언을 성취시키셔서 우리를 위하여 그러한 성경 예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명백하게 하시는 일을 맡으셨읍니다. 올바른 믿음 즉 신앙은 십구세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 되었읍니다.
38. 그 때로부터 그는 그의 추종자들의 믿음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시고 계십니까?
38 33년에 예수께서 하늘의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히브리」인 제자들에게 부어주셨을 때인 그의 부활하신 후 오십일이지난 오순절 명절까지, 자기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일하셨읍니다. 36년에 그가 비 「히브리」인 할례받지 않은 신자에게 처음으로 성령을 부어주셨을 때, 그는 자기에 관한 그들의 믿음을 더욱 완전하게 하셨읍니다. (히브리 2:4) 사도 「요한」이 복음서와 서간들과 계시록 혹은 요한묵시록을 기록하였을 때까지 그가 하늘에서 지상의 제자들을 다루신데 관한 한,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완전하게 하고 계셨으며 그들이 구원 받기에 충분하게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상의 자기 제자들에 대한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때까지 약 구십년 동안 행하신 것으로써 그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시대의 필요성에 직면하도록 우리의 믿음을 완전하게 해 오셨읍니다.
경주하라!
39. 그렇다면, 우리가 하여야 할 중대한 일은 무엇이며, 그와 일치하여 히브리 12:1-4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합니까?
39 그렇다면 우리가 하여야 할 중대한 일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 일 혹은 돌아다 보기 조차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보존하기 위하여 할 일은 앞을 바라보며 경주! 하는 일입니다. 히브리 12:1-4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캐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형주]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믿음의 결핍의) 죄와 싸우되 아직 피홀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40. 우리는 그리스도인 이전 증인들 중에 어떤 고대 「히브리」인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0 믿음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한 그리스도인 이전 증인들의 『구름 같이 . . . 허다한』 중에는 충성스러웠던 족장 「아브라함」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어떤 성읍에 자리잡거나 혹은 이 낡은 사물의 제도에 영구적인 거할 곳으로서 성읍을 세우지 않았읍니다. 그는 영원한 기초를 가진 성읍을 바라보았읍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창조될 성읍이었읍니다. 따라서 그는 여기 저기 천막에 계속 살았으며 땅에 성읍이 없음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히브리 11: 9, 10, 15, 16.
41. 이에 관하여 에수께서는 어떠하셨으며, 우리는 히브리 13:12-15와 일치하여 무엇 행할 것을 결심합니까?
41 하나님의 아들도 어느 성읍을 자기의 영구한 성읍으로 삼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그때 성전과 제단을 가진 땅의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었읍니다. 그를 바라보며, 히브리 13:12-15(신세)에서 말한 바와 같이 행할 것을 결심하십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42. 우리가 접근하였기 때문에 지금 무엇보다도 할 일은 무엇입니까?
42 무엇보다도 지금 그렇게 행하십시다. 그 『올 도성』 즉 『영구한 도성』은 임박하였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이방인의 때의 마지막인 1914년에 설립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십구세기 전에 기록된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참됩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 . .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브리 12:22-24) 우리가 접근한 하늘의 왕국은 『진동치 못할 나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낡은 믿음없는 사물의 질서를 제거하시기 위하여 천지를 진동시키실 때 그 왕국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통과하여 남을 것입니다.—히브리 12:26-28.
43. 마태 24:14와 관련하여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에 어떻게 보통 이상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읍니까?
43 예수의 몸소 말씀하신 예언이 성취되기 위하여, 이 설립된 왕국의 기쁜 소식은 땅의 거민들이 산산조각으로 파멸되며 영원히 제거되기 전에 모든 나라에 증거로서 전파되고 있읍니다. (마태 24:14; 마가 13:10) 가능한 한 그 중 일부가 되어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께서 말씀하신 그 예언에 보통 이상의 주의를 돌리도록 하십시다. 믿음으로 그렇게 행하십시오. 전도하십시오!
44. 특별히 이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성품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영속적인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까?
44 어느시기보다도 지금은 믿음을 가져야 할 때이며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증가시킴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장성시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입증할 때입니다. 완전하게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믿음은 결코 영원한 재난 즉 우리 영혼이 멸망으로 뒷걸음질 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하게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보존하시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어디로요? 단순한 천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 중의 아들이시며 총대리인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새 하늘』과 『장차올 세상』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사물의 질서로요.
[각주]
a 희랍어 영어 사전에 의함. 「리멜」과 「스콜」 저. 두권으로 된 새로운 개역 증보판. 1948년 재판
b 「죤 파아크 허어스트 멤 · 에이 · 」저, 신약의 희랍어와 영어 사전, 644b참조「런던」, 1845년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