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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3
파63 9/15 343-346면

온유란 지혜를 말한다

솔솔 부는 바람이나 따뜻한 겨울과 봄은 얼마나 상쾌합니까! 온유한 답변과 온유한 성질, 혹은 난관을 부드러운 태도로 다루는 것은 한결 상쾌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유한 성품은 그것이 지니고 있지 않는 성품을 말함으로 제일 잘 정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온유함은 혹독하지 않으며 날카롭지 않으며 신랄하지 않으며 거슬리지 않는 따위이며 온유함은 또한 『어느 정도의 조용한 엄숙성과 미(美)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지혜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알려주시는 바와 같이 자기 목전에 소중히 여기시며 귀중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마치 사랑이나 믿음, 자기 절제와 동일하게 『성령의 열매』로 되어 있읍니다. 그리스도인은 공의와 하나님께 드리는 전념과 믿음, 사랑을 추구하는 동시에 『온유한 성품』을 구하라고 명령받고 있읍니다. 여자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하나님 앞에 값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는 충고를 받았읍니다.—갈라디아 5:22, 23; 디모데 전 6:11; 베드로 전 3:4.

한편, 온유는 남을 유익하게 하므로 지혜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남의 신을 신어보는 것처럼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감정이입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이해성과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고대의 족장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모세」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성품입니다. 예수께서는 적절하게 부르셨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마태 11:28-30; 고린도 후 10:1.

또한 온유함은 우리 자신을 유익케 하므로 지혜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소리를 우리는 듣지 않았읍니까? (마태 5:5) 그러나, 하나님이 온유한 자를 보상하여 주시기 전에도 그들은 상을 받읍니다. 우리는 심은 것을 거둠으로 남도 동일하게 우리를 대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에게 대하여 온유하면 그들도 우리에게 온유합니다. 우리의 목소리 자체를 온유하게 혹은 부드럽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사람을 끌지만 혹독한 목소리는 사람을 쫓읍니다. 특히 전화로 이야기 할 때 목소리로써 사람이 판단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읍니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말하였읍니다.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온유한]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언 25:15, 신세.

사실, 온유함은 우리의 건강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신경과민』에서 갖는 위궤양(胃潰瘍)을 방지할 뿐 아니라 잠을 못자게 하는 여러 가지의 곤난한 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여 줍니다.

그러나, 온유가 용이한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제력을 필요로 하며 고려와 이해성, 비이기적 즉 자기만 생각지 않고 남을 생각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또 그것은 겸손을 요구합니다. 흔히 성경은 온유와 마음의 낮은 것을 병행하여 말하고 있읍니다. 거만한 자가 온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온유하지 않은 자와 상관할 때 온유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온유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며』 또 남이 그리스도인에게 그의 소망하는 바를 강요하여 물을 때 그는 동일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여야 합니다.—잠언 15:1, 신세; 베드로 전 3:15.

남을 징계하여야 할 때에는 온유한 성품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온유는 지혜로운 것이 됩니다. 따라서 다음의 충고가 기록된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렇습니다,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거역하는 자로써 잘못하는 자에게 거칠은 태도를 취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이상의 충고는 인간의 성품을 얼마나 잘 이해한 것이며 얼마나 거룩하고 지혜로운 충고입니까!—갈라디아 6:1; 디모데 후 2:24, 25.

그러나, 항상 온유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으니 마치 예수께서 당시 종교 교직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거듭 부르셨듯이 심각하거나 비난할 때도 있읍니다. 어떤 경우에나 온유한 것이 알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물질주의적 「고린도」의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 한 말에서 표현하였읍니다. 즉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그러나 온유치 않는 것은 예외의 경우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하여 측정하고 원칙에 따라서만 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주를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도 온유하게 대하셨던 것입니다.—마태 23:13, 29, 신세; 고린도 전 4:21; 요한 21:15-19.

만일, 우리가 쓸데없이 거칠었다가 우리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알게 되면, 우리가 온유하였던 것보다 우리의 말한바를 거두어 사과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읍니까! 그뿐 아니라 필요없이 거칠다면 잘못한 자로 증오감을 갖게 하며 고집세우게 되어 더욱 나빠지는 수가 있읍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망하는 목적은 아니지요? 온유하게 삼가서 책망하는 것이 『마땅히 받을 만한 분량의 징계』를 하는것보다 잘못할 자를 더 유익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거칠은 것은 사실을 과장하고 망치는 경향이 있읍니다. 온유하면 조용하게 또 명확하게 사실을 측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자주 강조하여 온유하라고 권하는 데는 참으로 적절한 이유가 있읍니다. 『그러므로 . .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당신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십시오.—에베소 4:1, 2; 골로새 3:12.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피할 수는 없읍니다. 온유함은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계와 본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유하라고 권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남을 더욱 상쾌하게 하고 만사를 한결 쉽게 하여 줍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야고보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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