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부도덕한 희롱을 경계하라
성에 관한 하나님의 법이 그의 말씀 가운데에 들어 있다. 이것은 성 관계가 단지 올바로 결혼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임을 명백히 해 준다. 독신자가 성 관계를 맺는 것은 간음이다. 기혼자가 자기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것은 간통이다. 성서는 명백히 말한다. 『(간음)하는 자들과 (간통)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간음)하는 자나 . . . (간통)하는 자는 . . .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히브리 13:14; 고린도 전 6:9, 10, 신세.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표준은 간음이나 간통을 단순히 피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 노골적인 간음이나 간통은 물론, 단정치 못한 행실과 부정(不淨)함을 금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산상 수훈 가운데 말씀하신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 5:28.
간음과 간통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의 부도덕한 『희롱』도 또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정욕에 불타서 자기의 결혼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의 용모를 계속해서 쳐다보며,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셨다. 동일한 결과를 가져 오는 어떠한 다른 행실을 하는 것도 똑 같이 잘못이다.
왜 성의 부도덕한 희롱이 나쁘며 그리스도인들이 피하여야 할 일인가?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명령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쾌하심을 초래하며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또한 그의 거룩한 이름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충고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간음)과 부정과 (성적 욕망)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이니라.』 그렇다, 그러한 『모든 육체의 일』은 일종의 우상이며, 고대의 음경 혹은 성 숭배와 동류의 것이다.—골로새 3:5, 신세; 갈라디아 5:19-21.
둘째로, 성의 부도덕한 희롱으로써 심적으로, 신체적으로 나아가서 영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특히 포함된 여자는 감정에 달뜬다. 그것은 큰 슬픔과 정신, 및 마음의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나아가서 곧은 길을 걷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쉽게 부도덕한 습관으로 인도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부터 떠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회중으로부터 파문될 수 있으며 하나님에 의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될 수도 있다.
성을 부도덕하게 희롱하는 것은 쉽게 간음으로 이끌며, 그 결과 소름끼치는 성병에 걸리며 평생의 후회가 된다. 사생아를 보게 되는 것은 그 경우이다. 이것은 다반사가 되고 말았다. 1962년에 영국 「런던」에서는 8, 835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그 도시의 일년 전체의 총 출생자의 칠분의 일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성병에 관하여 또한 미국인 권위자는 『성병은 악화 일로에 있는 심각한 문제이며 그 위협은 (미국)을 핥아 가고 있는 산불과도 같다.』고 말하였다.
성을 부도덕하게 『희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을 부도덕하게 희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간음이나 간통올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런 일들은 부도덕한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의 부도덕한 『회롱』은 처음에는 고의적으로 간음이나 간통을 행하려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느덧 간음이나 간통을 저지르고 만다. 명심할 점은 부도덕한 희롱이 부도덕을 향해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으며, 언제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실제로 간음이나 간통을 행하는 것이 아니나, 어떠한 행동이 단정치 못한 행실이며, 성을 부도덕하게 희롱하는 일에 해당하는 가를 살펴 보자.
기혼자가 자기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 희롱하는 것은 그 한 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좋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대개 자아(自我)를, 쌓아 올리거나 그것이 가져 오는 성적 자극을 돋구는 데 빠질 따름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좋지 않는 동기로 쳐다 보는 것이다. 그것이 계속되면 결과적으로 이르게 되는 결말은 간통일 것이다.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와 혹은 가까운 친척이 아닌 이성을 정답게 당신의 두 팔로 감는 것도 역시 부도덕한 장난이다. 그 정도까지 가지 않고도 우정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한 것이 몹시 흠없는 것같이 생각 될지 모르지만, 간음이나 간통에 이를 수 있으며 또한 이르렀다. 그 결과 더러는 그리스도인 회중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였다. 부수적으로, 서로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독신자들보다 이 점에 있어서 더 자유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그렇지 않으면 더욱 자주 독신들과 꼭 마찬가지로 기혼자들이 자기 배우자 아닌 사람들과 그런 짓들을 함으로써 곤경에 빠지게 된다.
음란한 농담을 하는 것도 성의 부도덕한 희롱이다. 그것은 높은 그리스도인 표준을 낮추는 시초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일을 중심으로 농담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무엇보다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웃어대는 가를 좀 보라. 그것이 깨끗하고 옳은 일인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 즉 부도덕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며, 그의 생각을 더럽힌 데 이른다.—에베소 5: 3, 4.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성적으로 흥분을 일으키기나 자극을 주는 방법으로 춤추는 것도 또한 성을 부도덕하게 희롱하는 일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의 결혼 배우자와 가깝게 접촉하여 춤추는 일은 정당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이 당신의 집에 와서 저녁 시간마다 오분이나 십분 동안 당신의 아내를 그가 손으로 감고 꼭 앉아 있다거나, 방 한가운데 서 있다거나, 혹은 당신의 아내를 꼭 껴안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좋아하겠는가? 그야 물론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단지 음악을 즐기기 위하여 흑은 춤춘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행하는 것이 정당화 되어야 하겠는가?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피하여야 한다. 이 함정을 피하라. 상대방과 딱 붙거나 진정한 포옹을 요하지 않는 다른 형태의 춤들도 있다. 그런 것으로서 「스퀘아 댄스」나 다른 집단 춤 혹은 동성끼리 추는 춤들도 있다. 물론, 한 사람이나 동성끼리 추는 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발적이거나 부도덕인 것이라면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성욕을 일으키게 하는 독서나 그림 감상은 성을 부도덕하게 희롱을 하는 것이다. 부도덕을 강조하는 영화나 「텔리비젼」 혹은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은 같은 유에 속한다. 마음에 부정한 생각을 넣어주기 때문이다.
이성의 한 사람을 친하게 사귀려고 하는 독신자는 부도덕한 희롱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의 이성과 친하게 항상 사귈 수 있는 단 하나의 정당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결혼으로 이끄는 존경할 만한 교제를 배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연장되면 이성의 한 사람과 단 둘이 있는 것은, 흥분되어 『껴안는 일』 이나 『애무』에 빠질 정도까지 이를지도 모르므로, 한적한 곳을 『낭만적으로』 산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정열에 못이겨 독신 상대방에게 성욕을 일으키는「키스」를 하는 것은 약혼한 사이라 할지라도 부당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성교의 간음을 행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느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성적 부도덕으로 당신을 인도하는 상태를 피하는 것이 한결 낫다.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은 남녀의 밀회는 매우 쉽게 성적 부도덕으로 이끌 수 있다. 애당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 밀접한 교제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받지 않은 사람은 대개 세상에 유행되어 있는 부도덕의 단정치 못한 법에 젖어 있으며, 부도덕한 희롱을 당연지사, 즉 마음에 드는 사회 처신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 된다.
지방 습관을 고려하라
지방 습관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만일 지방 습관이 미혼 소년 소녀가 홀로 방문하는 것까지도, 혹 보호자 없이 밀회하는 것을 단정치 못한 습관으로, 본다면, 이 습관을 존중히 여길 것이다. 심지어 부모 앞에서도 미혼 남녀가 손잡는 것을 지방 습관이 단정치 않게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습관 중에서 살아야 한다. 지방 습관에 의할 때 미혼 남녀가 한 번이라도 「키스」하는 것이 나쁘다면,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 나라의 표준을 따를 것이다. 지방의 습관이 하나님의 명령을 범한다면, 우리들은 이를 적응시키지 않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범하지 않는 지방 습관을 깨뜨릴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한편 지방 습관이 젊은 사람이 결혼 전에 알게 되는 것을 받아 들인다면, 이에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초대에 응하는 어떤 이성과도 외출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 남자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 여자와 사귀려고 한다면, 그 여자는 그가 교제를 발전시켜 결혼으로 이끌고자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이 계속하여 서로 밀접히 오랫동안 사귄다면, 그들이 연합하고 있는 회중은 또한 양자가 존경받을 수 있는 결혼 의사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때로 젊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영화를 관람한다. 그들이 『낭만적』인 광경을 보고 그것을 본받고자 원한다. 그러나 단순히 다른 나라에서 행하여진다고 당신의 나라에서도 그렇게 행하여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땅의 어떤 지방의 사람들은 거의 옷이라곤 입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그렇게 행한다면, 아마 체포될지도 모른다. 「스크린」에 영사된 것이 그것을 생산한 나라에서도 반드시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영사된 것이 실제로 행하여진 일인지 의문이며, 단정치 못한 사람들의 행실인지도 모른다!
경계하라—어떻게?
이상으로 보아 성의 부도덕한 희롱을 우리가 언제나 경계해야 함이 명백하다. 이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광고, 「텔리비젼」, 영화, 연극 등이 사람의 마음을 성으로 가득 채워 사람들로 이것들이 그 이상 건전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든다. 심지어 옳은 일을 하고자 원하는 사람들까지도 그가 옳은 것을 위하여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면, 자기 주변의 압력에 못 이겨 나쁜 일을 하는데 밀려 들어 간다는 것올 볼 수 있다.
성경은 『악을 미워하라』고 충고한다. (시 97:10) 성의 부도덕한 희롱은 나쁜 일이다. 매우 달콤하나,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 독올 피하는 것같이 이를 피하라. 당신 자신을 속이기 쉽다는 것을 기억하라. 타락된 마음의 경향은 환자의 욕망과도 같다. 환자는 흔히 병을 가장 악화사키는 것을 바란다. 심지어 당뇨병 환자가 단 것을 간청하는 것과 같다.—예레미야 17:9.
이처럼 나쁜 일에 대한 미움은 자연적으로 오지 않는다. 나쁜 일에 대한 미움이 배양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떻게? 당신의 마음을 옳은 생각으로 채움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옳은 생각을 무진장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이다. 성서는 당신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할 수 있다. (로마 12:2) 성서는 당신이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도록 도울 것이다. (골로새 3:9, 10) 그렇다, 성서는 「참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할 만하고, 덕이 있고, 칭찬할 만한」 것을 마련해 준다. (빌립보 4:8) 우리는 이런 종류의 지식을 말하면서, 나쁜 일을 일삼는 사람일 수 없다. 우리는 옳은 욕망과 옳은 생각을 세워나가고 있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함이 크게 우리의 경험과 주위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조심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 조건을 존경하는 사람들과 사귀어야 한다. 우리가 도덕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과 사귀면 어느새 그들처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옳은 교제를 가져야 한다.
특히 『단정치 못한 행실』을 경계하라. 수년 내에 결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십대나, 배우자 외의 이성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기혼자들의 근대 습관과 같이 부당하게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습관을 버리라. 그림으로 그린 것이든지 말로 묘사한 것이든지 모든 호색 문학을 피하라. 부정한 제목을 강조하는 모든 접대를 멀리하라. 성적으로 자극하는 모든 노래와 춤을 피하라.
당신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함께 있는 시간을 건설적이고 유용한 일로 가득 채우라. 놀이나 운동, 좋은 서적 특히 성서의 낭독 혹은 하나님의 봉사에 종사하는 일과 같은 건전한 일로 당신의 생각과 대화와 행동을 차지하게 하라.
노소를 막론하고, 기혼이든 미혼이든 모두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 6:7, 8)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성의 부도덕한 희롱을 하지 않음으로 썩은 것을 거두지 않도록 경계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사 그의 새로운 사물의 질서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