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봉사함
“너희의 인내로 너희의 영혼을 얻으리라.”—누가 21:19.
1. 정상적인 사람은 생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상적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기를 원하지 않읍니다. 노유(老幼), 빈부강약(貧富强弱)을 막론하고, 생명을 지속하려는 본능은 매우 강합니다. 이러한 본능은 생활이 훨씬 안이하고 편안한 부유(富裕)한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이 흔히 비참하고 곤궁하고 불안정한 미개(未開)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합니다. 그 모든 어려움과 두통거리 가운데서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는 속담은 적용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2 생명을 위한 이 동경과 노력이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절실하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부지런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영원한 생명을 굳게 잡아야 하겠읍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려는 자극은 고작해야 100년을 넘지 못하는 현재의 인간 생명을 지속하려는 자연적 본능보다 말할 수 없이 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는 성서의 약속을 읽고, 믿는 사람은, 지금까지 어떠한 사람도 원하거나 생각해 본 적 이 없는 가장 큰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로마 6:23.
3.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예수께서는 어떻게 묘사하셨읍니까?
3 우리가 성서를 죽 읽으면서, 질병과 분쟁으로부터 해방된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사는데 관한 놀랄 만한 묘사들을 참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 세상 사람 중에서 그러한 것을 믿지 못하고 생명의 수여자이신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사람이 도대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의아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극소수만이 여호와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라고 예언하셨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 7:13, 14.
4. (ㄱ)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인 전(前)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의 태도는 어떠하였읍니까? (ㄴ) 왜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인식보다 더 커야 합니까?
4 만일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그에 부수해서 지상 낙원에 있을 축복을 진심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호한 결심을 할 것입니다.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하였으니 다른 아무 것도 그 길로부터 우리를 돌이키지 못하게 하리라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노력해야 할 목표물로서, 도달해야 할 목적 지점으로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목표물을 향해 여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바라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음을 압니다. 『이 사람들은 . . .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브리 11:13, 14) 이들 충실한 사람들은 인내하였읍니다. 그들 시대에 그들은 죽을 것을 알았으며, 약속의 성취를 인식할 수 있기 전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부활의 약속을 기다렸읍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유리한 상태에 있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통치를 시작하셨으며, 우리 세대 안에 왕국이 「사단」의 통치에 종말을 고하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새땅』을 소개하리라는 증거를 우리 주위에서 실지 보고 있읍니다. (베드로 후 3:13) 그러므로 고대의 충실한 사람들이 죽기까지 생명의 도상에서 인내하기를 원하였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새 질서의 문턱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얼마나 더 인내할 수 있어야 하겠읍니까?
5. 생명의 길에 확고히 서있는 것의 중요성을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5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나 극소수만이 찾고 있는 생명의 길에 확고히 서있기를 원합니다. 이 길을 걷는 데 있어서 우리를 외국 나라에 있는 여행자로 비유할 수 있읍니다. 지평선상에서 목표물을 볼 때, 우리는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쪽을 향해 걸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목표물에서 시선을 돌린다면, 방황하게 되며 마침내 길을 잃게 됩니다. 만일 생명의 소망이 매우 강하다면, 우리는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닻에 비하여 히브리 6: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 큰 배를 안전하게 붙잡고, 배가 떠내려가서 좌초(坐礁)하는 것을 방지해 주는 닻과 같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 소망은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 꼭 붙들어 매며, 항상 생명의 길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방지해 줍니다. 그러나 닻이 질질 끌리기 시작한다면, 배를 잃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닻, 우리의 소망을 결코 잃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잃어 버린다면 우리는 믿음의 파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6. 생명의 소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유지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6 우리가 항상 바라보아야 할 소망과 같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계속 보강해야 할 필요가 있읍니다. 믿음이란 한 번 얻으면 다음부터는 아무런 지원 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영원히 계속될 하나님의 새 질서에 관한 미래의 놀라운 전망을 줍니다. 그러나 전망이란 우리가 명확히 볼 수 있을 때에만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망이 아름다운 집에 산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가 창문들을 한번도 닦지 않는다면, 경치는 곧 시야(視野)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밖의 경치는 그대로 있지만 더 이상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경치를 계속 바라보기 위해서는 창문들을 정규적으로 닦지 않으면 안됩니다.
7. 우리는 어떻게 믿지 아니하는 죄를 피할 수 있읍니까?
7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계속 믿음을 새롭게 하고 믿음에 거하고 그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여 믿음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결국에 가서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생기있게 유지하라고 강력히 경고하였읍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 3:12-14) 우리는 생명의 도상에서 인내가 필요하며 이것은 우리가 생명의 소망을 항상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지 않는 것은 생명 결국 생명 그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바라보는 것을 흐리게 할 수있는 것들
8. (ㄱ)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 (ㄴ) 영적 조망의 상실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이란 목표물의 상실을 가져 올 수 있읍니까?
8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요한 6:63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위대하신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영적 소망입니다. 우리는 세상적 소망이나 육체적 욕망을 먹이고 기르면서 동시에 영적 목표물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수는 없읍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계속 바라보는가는 우리가 영적 상태를 유지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읍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을 하여야 하며 영적인 것은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목표물을 항상 바라볼 수 있읍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봅시다. 걸어가야 할 길이 먼 경우에 설상가상으로 다리까지 매우 피곤할 때 당신으로 계속 걸어가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말할 것 없이 목표물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비록 그것이 아직 멀리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점차 가까와지는 것을 볼 때, 당신은 힘이 날 것이며, 점점 희미해지는 피로를 극복하고 노력을 새로이 해서 전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물을 볼 수도 없고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를 때는 어떠합니까? 비록 길 모퉁이만 돌면 있을지라도, 당신이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피로는 점점 심해질 것이며, 급기야는 중단하려는 마음을 먹을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 조망(眺望)을 상실하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표물을 잃어버리고 여호와의 봉사에서 점차로 뒤처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 위험은 많은 헌신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읍니다.
9. 영적 상태를 상실할 때 우리는 어떠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까?
9 영적 상태의 상실은 더 큰 손해를 가져올 수 있읍니다. 그것을 상실할 때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 5:19-21에 말한 육체의 일들에 휩쓸릴 수 있읍니다. 거기에 보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 그러한 육체의 일들, 그러한 세상 사람들의 습관에 얽혀 들어가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명백하고 폐부를 찌르는 듯한 성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에 달하는 여호와의 헌신한 종들은 그러한 육체의 일에 사로잡히게 되어 여호와의 깨끗한 백성들 가운데서 제명처분을 받았읍니다. 이러한 일은 그들이 그들의 영적 상태를 상실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그들에게는 더 바람직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다른 아무 것도 의로운 상태 아래서의 영원한 생명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읍니다. 아무 것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을 흐리게 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10. 성귀로부터 우리의 타락한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십시오.
10 우리의 인간 육체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을 흐리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 8:6) 죄많은 우리의 인간 육체는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을 좇도록 우리를 질질 끌며,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헌신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첫째로 두고 항상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을 저항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갈라디아 5:16, 17.
11. 오늘날 우리 형제들의 대다수는 생명이 관련된 어떠한 중요한 결정들을 직면하고 있읍니까?
11 육체의 주장 중 어떤 것은 매우 강하고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생명 자체가 위험할 경우가 생깁니다. 우리는 병이 나서 수혈(輸血)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건지지 못한다는 말을 듣게 될 수 있읍니다. 우리는 피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에 어긋남을 알고 있읍니다. (사도 15:28, 29) 우리는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겠읍니까? 종종 우리의 형제들 중 얼마는 국가주의적 정부로부터 국가적 상징물에 절하고 우상과 같이 숭배하라는 명령을 받읍니다. 이것은 세명의 충실한 「히브리」인들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경우와 꼭 같읍니다. 그들은 절하지 않을 때는 즉각 사형에 처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읍니다. 다른 이들은 세상 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동일한 생명의 위협을 받아 왔읍니다.
12. 생명에 대한 어떠한 올바른 태도가 이 중대한 시련을 이겨 내도록 힘 줄 것입니까?
12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시련을 이겨내고 여호와의 은총을 유지할 수 있읍니까? 자,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읍니까? 우리의 현재 인간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까? 혹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목표물로서 진심으로 여긴다면, 만일 우리가 그것을 항상 바라본다면, 우리는 현재의 인간 생명을 하나님의 율법을 타협할 만큼 중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여호와께 대하여 성실을 유지하는 것이지 현재의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이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육체가 당신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범하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예수께서는 매우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 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 16:25) 만일 당신이 현재의 짧은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항상 바라본다면, 당신은 성실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3. 우리는 어떠한 유혹을 저항하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13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기다릴 수 있읍니까? 많은 사람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가치는 매우 열등할지라도 좀 더 즉각적인 보수를 추구합니다. 잠시적인 이익을 붙잡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희생하려는 유혹을 저항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영적 인식과 장성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 (고린도 후 4:18) 당신의 영적 시 야를 발전시키십시오. 당신의 눈을 영원한 생명에 고정시키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당신이 바라보는 것을 흐리게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계속바라보는 방법
14. 여호와와의 관계에 있어서 무슨 원칙을 마음속에 명백히 간직해야 합니까?
14 여호와께서는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읍니다. (시 36:9) 우리가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께 고착하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없읍니다. 「스바냐」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함으로써 바로 이점 즉 여호와를 첫째로 둘 것을 강조하였읍니다. (스바냐 2:3) 「다윗」도 시편 16:8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겠다고 말함으로써 이 동일한 중요한 진리 즉 여호와를 첫째로 둘 것을 말하였읍니다.
15. (ㄱ) 우리는 헌신에 관해서 무엇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까? (ㄴ) 우리가 여호와께 항상 고착하고 그를 항상 우리 앞에 모시도록 해 주는 어떠한 필수적인 것이 있읍니까?
15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호와께 우리의 생명을 바칠 때에 우리가 이해하고 있었던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어떠한 종교나 어떠한 인간이나 어떠한 조직에 바치지 않았읍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이신 우주의 최고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였읍니다. 따라서 헌신은 우리와 여호와 사이의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갖게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헌신한 모든 사람들은 기도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특권뿐 아니라 의무를 받았읍니다. 야고보 4:8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만일 우리가 기도로써 여호와를 항상 우리 앞에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헌신의 서약을 완수할 수 없읍니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과 끊임없이 말하지 않는다면, 밀접하고 따뜻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가족 성원들끼리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그들의 관계는 깨어져 버립니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와의 관계에 이런 일이 일어 나게 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치명적이 되게 할 것입니다.
16. 기도의 필요성이 오늘날 어떻게 강조되고 있으며, 기도는 우리로 어떻게 하게 해 줍니까?
16 개인적으로 기도해야 할 필요성은 현 사물의 제도의 완전한 종말이 가까와짐에 따라 더욱 더 커지고 있읍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 전 4:7) 그렇습니다, 우리를 생명의 위대하신 원천이 되시는 분에게 접근하도록 도와 주는 기도의 귀중한 특권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도는 우리로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헌신에 깨어 있게 해 주며 기도는 영적 기질을 가지도록 도와 주며, 기도는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해 여호와께 더욱 감사하게 해 주며, 기도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목표로서 가진 그의 종이 된 데 대해 감사하게 해 줍니다.
17. 개인 연구와 묵상은 우리가 의로운 일에 마음을 고정하도록 어떻게 도와 줍니까?
17 개인 연구와 묵상 역시 우리를 여호와께 접근시켜 주며 진리에 관한 명확한 견해를 가지도록 도와 줍니다. 성서 낭독은 우리의 연구 계획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시간을 내서 그것을 묵상함으로 성서의 올바른 원칙들이 우리의 사고 과정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십시오. 『내 마음이 어떤 특정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내 마음은 어디로 흐르는가?』 마음은 정상적인 일로서 여호와와 그의 목적을 고려 하는 데로 흘러야 합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일시적으로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여질지 모르지만, 항상 북쪽을 가리키도록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여호와와 그의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고난의 때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우리는 인간이 파괴할 수 있는 인쇄된 지면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압제자들이 건드릴 수 없는 우리의 마음속 깊이 간직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떠한 고난이 우리에게 임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18.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은 왜 항상 좋읍니까? 이 문제에 있어서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은 어떻게 우리를 돕습니까?
18 또한 여호와께서 이 땅 위에 있는 그의 보이는 조직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도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 조직에 고착하고 그 조직과 함께 봉사한다면, 우리는 크나큰 보호를 받을 수 있읍니다. 이 조직이야 말로 여호와의 사업을 행할 목적만을 위해 오늘날 존재하는 유일한 조직입니다. 따라서 이 조직은 일하는 사람들의 조직입니다. 그 이유는 그 일이 긴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읍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한 9:4) 종종 우리는 여호와의 봉사를 하는 데 너무나 많은 것이 요구되며, 해야 될 일이 너무 많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생각하는 대신 왜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읍니까? 즉 여호와께서 우리의 시간을 그의 봉사로 넘치도록 채우시는 것은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것이라고. 여호와의 봉사에 진정으로 바쁜 것은 우리에게 보호책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우리의 시 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세상의 관심사를 위한 시간이 전혀 없게 됩니다. 세상적 추구가 우리의 시간을 매우 요구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 일을 하는 데나 쾌락을 추구하는 데나 모두 일분의 시간이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보이는 조직을 통하여 친절하게도 봉사로 우리의 생활을 채워 주실 때에 우리는 기뻐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 전 15:58) 죄에 빠지는 사람은 여호와의 봉사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 들이지 할 일이 많고 그 일을 즐거움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봉사에서 할 일이 많은 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항상 바라보고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19. 우리의 눈을 생명이란 목표물에 고정시키는 데 있어서 즐거움은 어떠한 역할을 합니까?
19 여호와의 봉사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하는 데서 큰 즐거움을 맛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시 100:2) 당신이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일은 더 오래할 수 있다는 점에 당신도 동의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즐거움은 인내를 줍니다. 이 즐거움은 예수께서 고통받으실 때 그를 도왔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12:2에서 말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형주]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여호와의 봉사에서 이 동일한 즐거움을 경험하는 한 그것은 우리를 활동적이 되도록 하여 줄 것이며, 뒤로 처지거나 중단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즐거움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질서에서 영원히 살 놀라운 즐거움을 항상 우리 앞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 앞에 놓인 즐거움을 인해서 형주와 죽음 그 자체도 이기고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즐거움이 없는 것은 영적으로 병든 뚜렷한 증세입니다. 종종 이 즐거움의 결핍은 영원한 생명이란 목표물을 시야에서 잃어 버린데 기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봉사를 계속함
20. 「아브라함」의 훌륭한 본은 우리에게 어떠한 격려가 됩니까?
20 우리는 생명의 길을 택하고 그 길을 고수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한 고대의 충실한 본들로부터 많은 위안과 격려를 이끌어 낼 수 있읍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를 불러 내시고, 그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타국(他國)에서 그를 섬기도록 하셨읍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에 대한 큰 시험이었읍니다. 그는 안락한 생활을 양 무리를 치는 목축 생활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러면 왜 그는 갔읍니까? 그 이유는 그가 장래를 내다 보는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11:10)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왕국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였읍니다. 그는 여호와의 약속이 그의 생전(生前)에 성취되지 않을 줄 알았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하였읍니다. 지상에서 175세까지 사는 동안 그는 여호와께 끝까지 성실을 지켰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봉 사하였기 때문입니다.
21. 「아브라함」과 「모세」가 취한 어떠한 올바른 견해를 본받음으로 유익을 받을 수 있읍니까?
21 「모세」 역시 「바로」의 궁전에서 양육받고 교육받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의 『양』들의 목자로서 봉사하기 위해서 부귀영화를 서슴치 않고 버렸읍니다. 무엇이 그로 그렇게 하도록 하였읍니까? 히브리 11:26은 『이는 상주시는 이를 바라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새질서에 대한 그의 조망을 결코 상실하지 않았읍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어디에서나 무엇이나를 막론하고 여호와를 섬기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읍니다. 그들이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혹은 이리 가라 저리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 그 자체는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다만 여호와를 섬기고, 그 뜻을 행하고,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22. 기꺼히 섬기려는 태도는 어떻게 우리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도록 돕습니까?
22 그와 같은 훌륭한 정신 태도는 모든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들을 식별(識別)하는 성품이 되어 왔읍니다. 우리는 항상 기꺼이 하려는 정신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되며, 항상 여호와를 섬길 기회를 찾아야 하며, 증가되는 봉사의 특권을 위해 자격을 구비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였읍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고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디모데 전 3:1) 우리는 어떻게 그 특권을 얻읍니까? 우리는 연구와 봉사, 경험을 통하여 발전하는 장성, 성령의 열매의 배양 그리고 여호와의 조직을 통하여 오는 모든 부름에 기꺼이 응함으로 성경의 요구 조건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특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 특권을 무거운 짐으로서가 아니라 충실한 봉사에 대한 풍부한 보상으로 봅니다.
23. 여호와를 첫째로 두는 사람들은 현재 어떻게 축복을 받고 있읍니까?
23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부가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봉사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현 시대에 즉 지금 놀라운 보상을 저장하고 계십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태 10:29, 30) 우리 시대의 수만명의 충실한 「파이오니아」들과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이 참됨을 증명하여 왔읍니다. 참된 사랑의 일을 하는 가운데 그들은 여호와의 어린 양들을 찾아 먹였으며 이제 이 양들은 그들의 가정을 개방하여 이들 「파이오니아」들이 마치 그들의 가족 성원들과 같이 되게 하였읍니다. 참으로 그들은 수백 집과 수백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아직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있읍니다.
24.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봉사하도록 우리를 어떻게 격려합니까?
24 당신이 여호와의 조직에 들어온지 6개월이 되었든지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60년이 되었든지 간에, 아직도 계속 봉사할 필요가 있으며 아직도 인내할 필요가 있읍니다. 때때로 박해, 질병, 가족의 반대, 혹은 당신의 전파를 듣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단순한 무관심이 당신의 인내력을 심하게 시험할지 모릅니다. 「야고보」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을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 1:12) 「바울」 역시 인내로써 여호와를 계속 섬기라고 우리에게 격려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 6:9)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조망을 밝게 유지하고 어떠한 것도 생명의 길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함으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계속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웅장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읍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누가 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