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67 2/1 56-62면
  • 가옥들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고침을 받지 못함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가옥들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고침을 받지 못함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7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임명받기 전에 깨끗해질 필요가 있다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나무 그루터기와 같은 『거룩한 씨』
  • 여호와 하느님께서 자신의 성전에 계시다
    이사야의 예언—온 인류를 위한 빛 제1권
  • 당신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할 것인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7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당신은 말하였는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7
  • 현대에 필요한 소식을 전한 고대의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온 인류를 위한 빛 제1권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7
파67 2/1 56-62면

가옥들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고침을 받지 못함

내가 또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소서.”—이사야 6:8.

1, 2. (ㄱ) 예언자 「아모스」는 자기 예언의 때를 어떻게 알리고 있읍니까? (ㄴ) 어느 다른 예언자가 「아모스」가 언급한 동일한 유명한 사건을 언급하였으며, 지상의 어떠한 변동과 관련하여 언급하였읍니까?

가옥들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는 그 지진에 관한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읍니다. 그러나 그 지진이 대단히 유명하였기 때문에 그 지진 발생의 때가 기원전 9세기에 유명한 예언의 연대를 정하는 데 사용되었읍니다. 한 예언자는 자기의 영감받은 책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1:1) 이 사실로 보면, 그 지진은 기원 전 809년 경에 발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부터 받은 인상이 심히 컸기 때문에 삼 세기 후 (기원 전 519년) 「스가랴」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에 서는 그 사건을 상기시켜 지구상의 다른 변동과 비교하였읍니다. 그 예언은 이러합니다.

2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대」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스가랴 14:4, 5.

3. 「요셉 벤 마티야스」가 저술한 「유대인의 고대 풍습 제도」에 「웃시야」 왕 때의 지진이 어떻게 기술되었읍니까?

3 그 예언보다 6세기 후, 기원 1세기의 「유대」역사가 「요셉 벤 마티야스」는 「유대인의 고대 풍습 제도」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 9권 10장 4항에 「웃시야」 왕 때의 지진을 생생하게 기술하였읍니다.

. . . 따라서 주목할 만한 날이 이르러 전국적인 축제를 기념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거룩한 옷을 입고 금 제단에다 하나님께 분향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제사장 80명을 거느린 대제사장 「아사랴」는 그가 제사를 드리는 것이 불법이며 「아론」의 후예 외에는 아무도 그렇게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었다고 주장하였다. 성전 밖으로 나가고 하나님 앞에 범과하지 말라고 그들이 소리를 지르자 그는 화를 발하여 잠잠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때에 굉장한 지진이 땅을 흔들었고 성전에 금이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밝은 햇살이 금 사이로 들어와 왕의 얼굴에 비췄다. 그러자 그가 즉시 문둥병에 걸렸다. 그리고 성 앞 「에로게」라고 하는 곳에서 산의 반쪽이 서쪽의 나머지 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오리를 굴러가서 동쪽 산에서 머물러 섰다. 그로 인하여 도로가 파괴되었고 왕의 정원들도 장애물들로 망쳐졌다. 제사장들 이 왕의 얼굴에 문둥병이 발생된 것을 보자마자 그가 당한 재난을 그에게 말하였고 부정한 사람이니 만큼 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매우 당황하여 명령을 받은 대로 행하였으며, 그의 주제넘은 의도 때문에 그리고 그 행동에 내포된 하나님께 대한 불경 때문에 이 무시무시하고 비참한 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얼마 동안 성 밖에서 거하였고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그의 아들 「요담」이 정치를 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발생된 일로 인하여 슬픔과 고민 속에 죽었다. 그는 68년을 살았고 52년을 통치하였으며 그의 시체는 그의 정원에 매장되었다.

4. (ㄱ) 「요셉」이 말한 지진 발생의 시기와 「아모스」가 말한 시기는 서로 일치합니까? (ㄴ) 성서 내에서는 「웃시야」가 성전에 침입하였을 때에 지진이 발생한 것을 말하고 있읍니까? 그러나 성서는 지진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4 「웃시야」 왕은 기원 전 774년에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죽었기 때문에 지진이 두번 있었으면 모르되 「유대」 역사가 「요셉」이 기록한 지진의 시기는 예언자 「아모스」가 기록한 시기와 일치하지 않읍니다. 「웃시야」왕이 「예루살렘」 성전 성소에 침입하였을 때에 그에게 발생되었던 사건에 대한 성서의 설명은 역대 하 26:16-23과 열왕기 하 15:1-7에 나와 있읍니다. 성서는 그 때에 지진이 일어난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읍니다. 그렇지만 「웃시야」 왕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되풀이하여 언급할 만한 유명한 지진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개인 집들과 기타 재산의 피해 정도에 대해서는 성서는 말하고 있지 않읍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지진 때문에 집에서 도망할 정도였다면 피해가 상당하였음에 틀림없읍니다.

5, 6. 이사야 6:1-4에 기록된 바와 같이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성전이 어떻게 요동하였읍니까?

5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의 성전 문지방이 흔들렸읍니다. 아마 그 일은 병에 걸린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성전이 흔들림을 보았으며 그는 그 사건 발생에 대하여 그의 책 6장 1절로 4절에서 이렇게 알려 줍니다.

6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여호와]a 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화창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화창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 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7. 성전에 대한 왕의 침입과 성전에 대한 예언자의 환상에 있어서, 「웃시야」와 「이사야」 사이에 어떠한 대조되는 점이 있읍니까?

7 여기에 보면 「웃시야」 왕과 예언자 「이사야」와 얼마나 대조됩니까! 「웃시야」 왕은 주제넘게도 보좌에 앉은 왕에게 금지된 구역을 침입하였읍니다. 그는 왕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새로운 더 밀접한 관계를 수립하고 하나님께 직접 숭배를 드리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들을 무시하였읍니다. 신앙심이 없는 침입자와 같이 그는 성전의 성소를 보았읍니다. 그 곳에는 황금 등대들과 『진설병』을 놓은 상들과 분향하는 금 향단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승인을 표시하는 여호와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고 여호와로부터 특별 임명을 받지 않았었읍니다. 그와는 반대로 예언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무시하여 거룩한 지역을 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시는 환상을 보았읍니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해(害)를 받은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나라에 대한 임명으로 높임을 받았읍니다. 여호와의 높이 들린 보좌에서 시중 드는 「스랍」들은 보좌에 앉은 하나님을 보지 않기 위하여 자기들의 얼굴을 가렸읍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환상 중에 여호와를 보도록 허락되었읍니다.

8. (ㄱ) 성전 문지방의 터를 요동하게 한 것은 무엇이며, 여호와의 영광이 어떻게 하여 그 집에 가득하였읍니까? (ㄴ) 분명하여진 영적 환상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이사야」와 같은 특권을 누립니까?

8 예언자 「이사야」는 희귀하게 거룩한 특권을 누렸읍니다. 이 사실은 「스랍」들이 서로 화창하여 거침없이 교대로 이러한 말을 주고받은 점에 나타나 있읍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말하자면, 온 땅에 충만한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 「스랍」들의 발표의 중요성은 충분히 성전 문지방의 터를 요동케 할 만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은 숭배의 집을 기적적인 연기로 가득 채움으로써 저절로 표현되었읍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크게 은총을 입어서 성서 예언의 성취로 말미암아 그들의 환상은 더 분명하여졌읍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전에 임하셨음을 봅니다. 그들은 이 사실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가득찼읍니다.

9, 10. 「이사야」는 환상을 보고 어떻게 느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이사야」는 그러한 것을 보고 듣게 되자 자신이 대단히 거룩하지 못하고 깨긋지 못하다고 느끼어, 그는 두려움에 가득찼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여 줍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여 가로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5.

10 이것은 단지 하나의 환상이었읍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사야」는 그가 죽으리라는, 곧 죽어 잠잠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읍니다. 의심할 것 없이 그는 예언자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볼것을 요청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신 말씀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 (출애굽 33:20) 그런데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직접 보았읍니다.

11. (ㄱ) 왜 「이사야」와 그의 백성들은 「웃시야」왕의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없었읍니까? (ㄴ) 오늘날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훌륭한 일입니까?

11 여호와께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유다」 왕국의 실제 왕이셨읍니다. 그러므로 예언자 「이사야」가 성전 환상을 보던 해에 「웃시야」 왕이 죽었을지라도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계속 「유다」의 왕이셨읍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나 그의 백성들은 고도로 발달된 군장비를 갖춘 「웃시야」와 같은 세력있는 왕이 죽었다고 하여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읍니다. (역대 하 26:1-9) 오늘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주의 왕이시며, 『영원한 왕』이시므로 우리가 그의 숭배자로서 그리고 그의 종으로서 이 땅의 통치권에 대하여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계시 15:3; 예레미야 10:10.

임명받기 전에 깨끗해질 필요가 있다

12, 13. 왜 「이사야」는 여호와로부터 임명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 하였읍니까?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극복되었읍니까?

12 예언자 「이사야」는 자기에게 왕, 만군의 여호와로부터 그의 성전에서 임명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는 그러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왕 하나님의 대변자 노릇을 할 사람은 입술이 깨끗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입술은 깨끗지 못하였읍니다. 또한 그가 입술이 깨끗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살며 그들의 말을 들었으므로 그의 입술은 더러워졌읍니다. 그러나 만일 「이사야」가 이것을 극복할 수 없는 장애라고 생각하였었다면 그는 자기가 잘못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13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 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이사야 6:6, 7.

14. 왜 핀 숯이 「이사야」의 입술의 깨끗지 못함을 태워 없앨 수 있었읍니까?

14 「스람」이 성전 제사장들의 뜰에 있는 동물 희생을 드리는 구리 제단으로부터 핀 숯을 집어 왔읍니다. 제단의 거룩한 불에서 꺼내온 핀 숯이 「이사야」의 입에 닿았을 때에 그것은 상징적으로 그의 입술의 모든 깨끗지 못한 것을 태워 버렸읍니다. 그 제단 위에서 행하는 동물의 희생이나 제물의 흘린 피가 아니라 이 핀 숯이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게하여 그를 여호와의 대변자로서 봉사할 적임자로 만들었읍니다. 성전 건축자 「솔로몬」의 때에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불이 원래 그 성전 제단의 나무를 태웠읍니다. (역대 하 7:1-3) 그러므로 이제 「스랍」은 「이사야」 에게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당연히 말할 수 있었읍니다. 죄와 잘못을 씻기 위하여 바친 제물을 하나님의 불이 태웠기 때문에, 동일한 희생의 제단에서 꺼낸 핀 숯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술에서 더러운 것을 태워 버릴 수 있었읍니다.

15, 16. (ㄱ) 여호와께서는 왜 기다리셨으며, 그는 이제 무슨 말씀을 하셨읍니까? (ㄴ) 왜 이 말은 틀림없이 「이사야」를 봉사에 초대하는 말이었읍니까?

1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깨끗지 못한 사람을 자기가 승인한 대변자 곧 예언자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예언적 봉사의 직책을 임명하시지 않고 「이사야」가 깨끗해질 때까지 기다렸읍니다. 그러므로 이제 입술이 깨끗해진 「이사야」는 올바른 순서에 따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 주〔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이사야 6:8.

16 여호와께서는 「이사야」가 듣게끔, 더구나 그 환상을 보는 사람은 「이사야」 한 사람 밖에 없는데 그 환상에서 이 질문을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이사야」가 여호와의 사자 곧 보냄받은 자로서 행할 봉사의 부름에 응하도록 하는 초대였읍니다.

17.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서 복수 대명사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셨는데, 누구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17 여호와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셨을 때에 그는 편집자들이 쓰는 식의 『우리』라든가 위엄의 뜻으로 복수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위엄을 인정받기 위하여 자신에게 적용시킨 것이 아닙니다. 단수 인칭 대명사 『나』를 복수 대명사 『우리』라는 말로 바꿈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어느 다른 분 적어도 다른 한 분을 자기와 함께 포함시키셨읍니다. 그 다른 분은 그의 독생 자,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미가엘」이 었읍니다. 그가 성전에서 여호와와 함께 연합해 있으며, 『우리』라는 대명사에 포함되었 다는 사실은 요한복음 12:36-41b에 확실히 나타나 있읍니다. 그 귀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그의 독생자는 두 별개의 존재이지 삼위일체가 아닙니다!

18. (ㄱ) 「이사야」는 여호와의 질문에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었읍니까?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그러므로 「이사야」는 오늘날 누구를 위한 훌륭한 본입니까?

18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독생자를 위하여 기꺼이 가고자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어떠한 임명을 주어서든지 보낼 수 있으셨읍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입술이 깨끗함을 인식하였고 여호와께서 보낼 사람을 청하러 다른 곳으로 가시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소서』라고 응답하였음을 「이사야」는 말해 주고 있읍니다. (이사야 6:8) 「이사야」가 보냄 받을 임무가 달갑지 않은 것일지 모르나 「이사야」는 여호와의 관심사를 위하여 봉사하고 여호와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가고자 하였읍니다. 「이사야」는 자기에게 난관이 더욱 닥칠지도 모르지만 계속 여호와의 할동적인 예언자로 활약하고자 하였읍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헌신한 여호와의 백성들이며 하나님께서 사(買)시고 하나님과 함께 국가적인 언약 관계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민족의 일원인 「이사야」는 헌신한 사람이 었읍니다. 그는 여호와의 뜻을 행하고 여호와를 대표하여 임명을 수행함으로써 자기의 헌신을 증명하고자 하였읍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사야」는 오늘날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을 위한 훌륭한 본이 됩니다. (이사야 43:10-12) 「이사야」같이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에 의해 보냄받았음을 인식하므로 최고의 권위를 받은 것으로 알고 만족스럽게 임무를 계속 수행합니다.

19. 「이사야」에게 주신 여호와의 임명은 무엇이었습니까?

19 가겠다는 「이사야」의 자청은 즉시 만군의 여호와의 수락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말해야 하였으며, 누구에게 보냄을 받을 것입니까? 「이사야」는 여호와로부터 온 그의 임명을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一이사야 6:9, 10.

20. 「이사야」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 백성』들에게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말할 수 있었읍니까?

20 이방 나라에게가 아니라 「이사야」는 『이 백성』 바로 자기의 백성에게 가야 하였읍니다. 그는 실제로 『이 백성』에게 깨닫지 말고 알지 말라고 말할 것이었읍니까? 그렇지 않읍니다. 오히려 『이 백성』에게 누차 가서 재삼 재사 듣게 함으로써 그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깨닫고자 하지 않음을 스스로 나타내도록 하여야 하였읍니다. 그는 마찬가지로 그들의 관찰과 분별의 눈으로 재삼 재사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알지 못함을 나타내게 하여야 하였읍니다. 「이사야」가 서투른 스승 혹은 서투른 논증자 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 백성』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좋은 스승으로부터 깨닫거나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21. (ㄱ) 「이사야」는 어떻게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 것입니까? (ㄴ) 왜 「이사야」는 계속 용감하게 말하여야 했읍니까?

21 그러므로 그들의 인식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반응이 없게 하고 앞을 못보게 눈이 감기게 하는 사람은 「이사야」가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 『이 백성』 사이에서 행하는 참을성 있는 교육적 예언 사업으로써 그는 그들이 스스로가 자기들의 인식의 마음을 둔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귀를 반응이 없게 하였고 자기들의 이기적인 사상으로 눈을 감아 버려서 여호와의 사자, 대변자로서의 「이사야」가 행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을 그들 앞에 증명할 것이었읍니다. 「이사야」는 실수 없이 용감하게 말하였고 백성들에게 자기의 말을 들려 주었읍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일을 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듣지 않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관심이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도록 자기들의 귀를 닫아 버렸기 때문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의 말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다는 사실입니다.

22. 백성들을 되돌리려는 「이사야」의 노력이 실패하고 그들이 고침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그가 전력을 다하여 예언하고 전도하고 가르칠지라도 『이 백성』들의 마음 속은 감동 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미리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읍니다. 그의 계속적이고 참을성있는 노력은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을 스스로 둔하게 만들었음을 실제로 증거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인식의 마음은 강한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사야」의 말과 행동의 심각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돌리려는 「이사야」의 노력이 실패한 것은 그들이 고의로 돌아갈 것을 거절하기 때문이었읍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영적인 결핍과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의 결핍을 고침받도록 도우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영적으로 병들고 여호와와 나쁜 관계하에 있다고 생각지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만하게도 고침받기를 거절하였으며 그들의 통치자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과의 건전한 관계로 되돌아오기를 거절했읍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23. 그에 대한 여호와의 임명이 여기까지 이를 때에 「이사야」는 어떻게 말씀을 가로막았읍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3 상태가 진실로 그처럼 험악한 정도에 까지 이를 것이었읍니까? 「이사야」는 공포에 떨었읍니다. 그 나라가 그처럼 악화되고 위험한 상태로 될리는 결코 없겠지. 그러나 『이 백성』이 고침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음을 당할텐데. 아, 얼마나 비참한 일이 될 것인가! 여기서 「이사야」는 일이 그렇게까지 되는 것에 약간 못마땅함을 느껴 여호와의 말씀을 가로막았읍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이사야 6:11.

24. 「이사야」가 물은 것은 얼마나 오래 동안 보냄을 받을 것이며 얼마나 오래 동안 가야 하는가를 물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엇입니까?

24 반쯤 항의의 뜻이 들어 있는 이 질문은 「이사야」가 「여호와여 나를 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오래 보내려고 계획하십니까? 내가 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가야 합니까?」라고 묻는 말이 아니었읍니다. 「이사야」는 자신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 아니고 그 백성들을 염려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니이까?』 한 그의 말은 『이 백성』의 이 악한 영적 상태를 여호와께서 얼마나 계속하도록 허락하실 것인가를 묻는 말이었읍니다. 상태를 바로잡을 수 없을 때까지입니까? 백성들의 고침받지 않은 상태가 완만한 치료로는 고칠 수 없게 될 때까지입니까? 최악의 경우가 될 때까지입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한 치료를 필요로 할 만큼 이 백성들을 이 악한 상태에 오래 버려두지 마십시오!

25.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이사야」의 말은 시 74:9-11의 「아삽」의 말과 어떻게 같습니까?

25 「이사야」가 말한 『어느 때까지니이까?』의 의미는 예언자 「아삽」이 시편 74:9-11에 말한 의미와 같읍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중에 아는자도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26. 예레미야 4:14에 있는 「예레미야」의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은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26 예언자 「예레미야」도 그가 「유대」 나라에 대하여 말할 때에 『얼마나 오래』라는 말로 항의하였읍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예레미야 4:14.

27. (ㄱ) 왜 여호와의 임명에 내포된 의미는 「이사야」에게 유쾌하지 않았읍니까? (ㄴ) 「이사야」가 전해야 할 소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무엇이 결정할 것입니까?

27 마찬가지로 「이사야」에게도 자기의 백성이 영적으로 대단히 저열한 상태에 이르러 드디어 하나님께서 최후의 행동 곧 비상하게 혹독한 형벌을 내리게까지 되리라는 생각은 별로 유쾌한 것이 못되었읍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반응이 없게 하고 눈을 감아서 하나님께 돌아서서 영적으로 고침을 받기를 거절할 것인가? 분명코 회복의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멸망을 당하게 까지는 되지 않겠지!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 생각에 반발을 일으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미리 알고 계셨으며, 「이사야」에게 나타내신 그의 예지(豫知)는 「이사야」가 자기 백성에게 전해야 할 소식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확실하게 해 주었읍니다. 아, 그렇다면 그들은 어느 때까지 그럴 것인가?

28. 「이사야」의 질문에 대답하여 여호와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28 「이사야」의 놀란 항의의 부르짖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유도하는 질문 구실을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말에 내한 대답으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셨읍니다. 「이사야」는 그 말씀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이사야 6:11, 12.

29. (ㄱ) 이 말에 의하면, 백성들의 영적 타락은 얼마나 심한 것이었읍니까? (ㄴ) 그러므로 「이사야」는 무슨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으며 왜 그는 충실한 증인이 되었읍니까?

29 그러므로 섭섭하게도 「이사야」의 백성들의 영적 타락은, 그들의 경건치 못한 행동에 대한 비참한 종국,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와 맺으신 성문(成文) 언약 가운데 완고한 언약 파기자들 위에 임할 재앙들을 예언하신 대로 재앙을 받을때까지 이를 것입니다. (레위 26:22-41; 신명 28:49-68) 그러므로 「이사야」는 다가오는 황폐와 파괴와 백성들의 유형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그는 그렇게 하였읍니다. 이것만 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언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그것은 『이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었으며 예언자 「이사야」는 자신을 바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말로 보내어주실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 헌신과 요청에서 후퇴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여호와로부터 온 말씀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심한 것이든 지간에 후퇴하지 않았읍니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의 충실한 종이 되었읍니다.

30. (ㄱ) 「이사야」는 가옥들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계속 전하였읍니까? (ㄴ) 그의 순종적인 활동은 헛된 것이었읍니까?

30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의로운 통치때까지 곧 기원전 775년 경부터 732년 경까지 약 43년간 예언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은 기원전 607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그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 온 땅이 황폐되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생존한 「유대」인들은 「유다」 땅으로부터 먼 땅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사로잡힌 자로서 고생을 할때까지 전도하지는 않았읍니다. 멸망된 후에도 소수의 천한 「유대」인들이 그 땅에 남았었으나 그들은 「바벨론」 사람들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죽었읍니다. 이처럼 「이사야」는 그의 예언 사업을 이 전국적인 재난이 오기 약 125년전에 마쳤으나 여호와께서 그로 자기 백성에게 선포하도록 주신 혹독한 말씀은 가슴아프게도 사실임이 증명되었읍니다. 그는 헛되게 보냄을 받지 않았읍니다. 그는 헛된 일을 위하여 순종하지 않았읍니다.—역대 하 36:15-21; 열왕 하 25:1-26.

나무 그루터기와 같은 『거룩한 씨』

31. 「이사야」에세 맡기신 말씀을 완전히 절망적으로 만들지 않은 무슨 말씀을 여호와께서는 부가하셨습니까?

31 그러나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사야」에게 맡기신 말씀은 전혀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마지막 말씀을 부가하셨던 것입니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 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 터기니라.』(이사야 6:13) 이 말은 『이 백성』 가운데 거룩한 남은자들이 있을 것을 확증하므로 「이사야」에게 위안이 되있읍니다. 연료로 사용되기 위하여 베임당한 큰 나무처럼, 「이스라엘」나라가 누차 불에 탈지라도 「이스 라엘」이라는 상징적 나무의 중요한 그루터기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물기를 만나면 이 그루터기는 다시 순이 나서 나무가 자랄 것입니다. 아직도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 남은 자 곧 그루터기는 여호와 앞에 거룩한 씨 혹은 후손일 것입니다.

32. (ㄱ) 「이사야」의 말씀의 이 위안이 되는 부분은 어떻게 참됨이 증명되었읍니까? (ㄴ)이것은 동일한 그 성전 예언에 관해 무엇을 가능케 했으며, 그것은 또한 어떻게 우리시대에 영향을 줍니까?

32 「이사야」로 전파하도록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의 이 위안이 되는 부분도 또한 참됨이 증명되었읍니다. 「유다」 땅이 70년 동안 완전히 황폐된 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회개한 「유대」인 남은 자들이 기원전 537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왔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했고 동시에 그들의 성읍 「예루살렘」을 재건했읍니다. 이렇게 하여 『거룩한 씨』는 「유다」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깨끗한 숭배를 회복하는 일에 사용되었읍니다. (역대 하 36:20-23; 에스라 1:1-6:22)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국으로 「유대」인들이 이처럼 회복됨으로써, 성전에서 「이사야」에게 주신 여호와의 예언이 두번째 성취될 수 있었읍니다. 이 두번째 성취는 더 큰 「이사야」와 관련하여 성취되었읍니다. 육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어진 2차에 걸친 이 역사적 성취는 현대 우리시대에 이루어지는 「이사야」의 성전 예언의 세번째 성취를 위한 예언적 모형이 됩니다. 이것을 다음에 살펴 봅시다.

[각주]

a 여기에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신세계역 히브리어 성경」 1958년판 4권 이사야 6:1에 대한 각주 「b」에 이렇게 설명되었다. 『「여호와」, 「시리아」 사본과 약 100개의 「히브리」어 사본. 「여호와의 위엄」, 「탈검」. 「주」, 칠십인 역. 「주(Do’mi · nus)」 「벌게이트」. 「아도나이」, 「마소레트」와 이사야의 사해 두루마리. 이 곳은 「유대」서 기관들이 원시 「히브리」어교 본에서 「여호와」를 「아도나이」로 고친 134귀절 중의 하나이다.』

「아담 클라아크」 박사의 「주석」 4권 이사야 6:1의 각주 참조.

b 64면 7항 참조.

[59면 삽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62면 삽화]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을] . . . 때 까지니라.”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