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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교적 행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절도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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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교적 행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절도의 필요성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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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8/15 364-367면

사교적 행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절도의 필요성

고대 ‘유대’인의 결혼 잔치는 즐거운 때로서, 노래와 춤이 있었고, 먹고 마시는 일이 있었읍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갈릴리·가나’에서 그러한 잔치에 참석하였음을 알 수 있읍니다. 상기 성서 기사는 예수께서 그 결혼 잔치에 어느 정도로 관계하셨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으나,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음료인 포도주를 기적으로 만들어 주심으로써, 그 잔치를 더욱 흥겹게 해 주셨음을 알려 줍니다.—시 104:15; 요한 2:1-11.

이것은 사교적 행사에서는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고 예수께서 생각하셨음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디모데 전서 3:2은 회중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세울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 감독자는 “습관이 절도”(신세)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방종”을 비난하셨읍니다.—마태 23:25, 새번역.

그리스도인들은 “복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행복한 백성입니다. (디모데 전 1:11) 그들은 상호 격려가 되는 교제를 가집니다. 그들은 바쁘게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상호 친교를 위한 모임을 가지며, 그러한 모임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물론 그들은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에 온당치 못한 일들이 그러한 기회에 생길 수 있음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도있게 함으로써 그러한 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사교적 행사에서 어떠한 면으로 그리스도인 중용을 지킬 필요가 있읍니까? 결혼에 관련된 사교적 행사를 예로 들어 고찰해 봄으로써 알아 보기로 합시다.

피로연 혹은 결혼 잔치

예수께서 결혼 잔치에 참석하셨다는 사실로 볼 때, 그리스도인 신랑 신부가 그들의 가까운 친지들을 피로연에 초대하여 결혼의 기쁨을 나누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결혼 잔치를 배경으로 하여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하셨읍니다.—마태 22:1-13; 25:1-13; 누가 14:7-11.

그러나, 우리는 결혼 잔치가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신혼부부가 피로연을 열기 원하고, 또 환경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결혼식 후에 피로연을 가지지 않는 그리스도인 부부도 많이 있읍니다. 그런데 피로연을 열 계획을 한 사람들은 그러한 행사가 그리스도인 절도를 반영하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세심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있읍니다.

세상 사람들의 피로연은 흔히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에 지나치는 일입니다! 우선 경비가 도에 지나칩니다. 일례로 ‘뉴욕’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읍니다. “1968년 6월부터 1969년 6월까지 [미국인들은] 약 1,800,000건의 결혼식에서 약 72억불을 지출한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상 그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 . . 대부분의 경우, 굉장한 피로연을 차리는데 돈을 쓴다.” 그 다음으로, 먹고 마시는 일과 유흥도 도에 지나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무절도함을 피해야 합니다.

결혼 잔치의 규모는 어느 정도라야 할 것입니까? 이것은 신혼 부부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북미에 사는 두 부모는 딸 결혼식에 너무나 경비를 많이 들였기 때문에, 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다른 직장을 구하러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이러한 사례가 그리스도인 절도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이생의 자랑”에 더 가깝습니까?—요한 1서 2:16.

서부 ‘아프리카’의 한 감독자는 또 하나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일단 결혼이 발표되면, 회중 전원과 인근 회중의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초대받았든지 안받았든지 간에 피로연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신혼부부가 피로연을 열 의무가 있으며,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풍성한 음식과 음료를 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결혼 잔치와 관련된 두 가지 비유에서 그는 “청함을 받은” 손님들에 관하여 언급하셨읍니다. (마태 22:3; 누가 14:8) 심지어 그는 잔치에 참여할 마련이 없을 때, 일부는 참석이 거절되었음에 관하여도 말씀하셨읍니다.—마태 25:11, 12.

한 신혼 부부는 ‘캐나다·터론토’에서 결혼식을 가진 후, 소수의 가까운 친지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그 다음엔 회중 전반이 참석한 다과회를 가졌읍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는 결혼식을 가진 다음, 단지 16명만이 식당에서 피로연을 가졌읍니다. 수가 적었기 때문에 서로 활발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읍니다. 규모를 적게 함으로 절약된 돈은 이 부부가 특별 파이오니아 전도인으로서 새로운 임지로 가는데 사용되었읍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 축하식에 참석하였더라면 더 좋았었겠지만, 신랑이 말한 대로, 그들은 “모두를 초대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왕국회관에 참석하여 결혼 강연을 들음으로써 그 부부의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였읍니다.

그러므로 피로연에 참석할 사람들의 수를 얼마로 할 것인가, 참석 자격을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만 한할 것인가의 여부, 혹은 피로연을 열 것인가의 여부는 결혼하는 부부가 결정할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인 절도에 맞는 성품을 배양해 온 사람들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 나갈 것입니다.—디도 2:12.

계획된 대로 절도있게 행함

피로연에서 할 활동에 관해 구체적인 마련이 있어야 합니까? 네, 있어야 합니다. ‘가나’의 잔치에 “연회장”이 있었읍니다. (요한 2:8) 물론, 최종적으로 볼 때는 누가 잔치 비용을 담당하든지 간에 피로연에 대한 책임은 신랑에게 있읍니다. 그러나 신랑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도록 감독하는 일을 도와 줄 어떤 사람을 마련할 수 있읍니다. (고린도 전 14:40) ‘로디지아’의 영적으로 장성한 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참석 수가 많을 수록, 만사가 원활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사전의 조직이 더 필요합니다. 미리 마련된 계획은 크게 도움이 됩니다.”

‘덴마크·엘시노어’에서 결혼한 두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친척이 참 숭배자들이 아니었읍니다. 그들은 만약 이 세상 친척들이 잔치에 참석하면 절도있게 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그 때 우리의 영적 형제들과 모이기를 원하였읍니다”라는 신랑의 말대로 하였읍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 신랑의 아버지는 사전에 여러 사람들에게 짤막한 이야기를 하도록 부탁해 놓았읍니다. 거기에 참석한 소수의 사람들은 혹은 재미있는 이야기 혹은 심각한 이야기로 뒤섞인 이 마련을 크게 즐겼읍니다. 그후 남편은 흐뭇한 마음으로 “참으로 좋은 방법이었읍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만족감을 표명하였읍니다.

“‘칠레’에서는 피로연에 춤추는 일이 없으면 축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고 남‘아메리카’에 사는 한 그리스도인은 말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 피로연에서 춤추는 일은 잘못입니까? 우선, 춤추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춤과 관련된 위험성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나이지리아’의 한 감독자는 깨끗하고 온당한 것이 “보통 성을 자극하고 음란한 춤을 출 기분을 일으키는 세속 유행 음악으로 말미암아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것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대단히 유해”하다고 덧붙였읍니다.a

특히 세속 악단을 고용하면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노바 스코티아’의 한 전도인은 자기 피로연에서 사용할 음악을 녹음해 두었읍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절도에 맞는 춤을 출 수 있었읍니다. 그 피로연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스퀘어 댄스’를 즐겼읍니다.

그 피로연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알콜’ 음료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지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신랑은 만약 술을 대접한다면 그 지방의 일부 사람들을 거리끼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러한 말을 생각하였읍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내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로마 14:21) 만약 피로연에서 술을 대접한다면, 청량음료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충분한 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이 결혼 잔치에서 술에 취하는 일은 드믄 일이 아니었음이 명백합니다. (요한 2:10)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행복한 기회가 과음으로 망쳐지는 일이 없도록 크게 주의할 필요가 있읍니다.—잠언 23:20, 21.

밤 늦게까지 피로연을 계속해야지만 즐거움이 배가됩니까? 아닙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한 감독자는 때때로 “피로연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읍니다. “정식은 밤 11시 30분에 나옵니다. 다음날 아침, 그 집단의 야외 봉사 참석률이 저조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피로연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여, 다음날 그들의 창조주를 올바로 섬기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피로하게 만드는 습관을 그리스인들이 따를 필요가 있겠읍니까? 그것이 절도있는 방법이겠읍니까? 정반대일 것입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충고에 일치한 마련을 할 것입니다.—고린도 전 10:3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결혼 잔치와 같은 사교적 모임을 열기로 결정하였다면, 과음으로 특징을 이루는 세상의 떠들썩하고 무절제한 잔치 습관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모임은 그리스도인의 절도있고 잘 준비되고 행복한 모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술한 ‘노바 스코티아’의 그리스도인은 “삼년 후 우리가 그 회중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그 피로연이 좋은 본이었다고 그 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읍니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도의 열매는 그 얼마나 즐거운 것입니까!

결혼 “샤워”

어떤 나라에서는 신랑 신부의 친지들이 결혼식이 있기 얼마 전에 모임을 가지는 습관이 있읍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흔히 결혼할 부부에게 선물을 줍니다.

재차 말하지만, 이것도 필수 요건은 아니며, 또한 이러한 모임이 습관화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이 이러한 모임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읍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교적 행사가 계획되었다면, 절도있게 그리스도인 원칙을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과 음료와 오락에 관해 전술한 내용은 이 경우에도 적용됩니다.b

선물에 관해 몇 마디 필요한 말이 있읍니다. 만약 이러한 모임에 초대를 받은 그리스도인 중 어떤 사람이 비싼 선물을 할 여유가 없다거나 혹은 전혀 선물을 할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그 초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참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방을 그러한 처지에 집어넣으려고 할 것입니까? 선물이란 애정의 자발적 표시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표현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질 수 있으며, 특수한 기회에 눈에 보이는 선물을 하는 것이 반드시 의무는 아닙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그러한 모임을 가질 때, 선물을 준 사람의 이름을 쓰지 않고 선물들을 한데 모아서 주는 경우가 있읍니다. 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선물을 주는 자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선물해서는 안된다는 예수의 충고를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마태 6:1-4) 그들은 만약 어떤 사람은 선물을 가져오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그만 애정의 표시를 하고, 어떤 사람은 비싼 선물을 가져온다면, 누구는 무엇을 가져왔다는 식의 사랑과 관련이 먼 비교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마태 7:12.

그러면 특정 선물을 하는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잘못이란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한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선물을 전달하거나, 선물에 명함을 부쳐서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물을 개봉하거나 전시할 때에 그 선물을 한 사람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서로 어색해지는 일을 피할 수 있읍니다.

오늘날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다는 표시를 나타내는 무절제한 사교적 행사를 흔히 가집니다. (디모데 후 3:4) 그러나 여호와의 영감받은 말씀으로부터 지도를 받는 여호와의 종들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반복적인 충고를 인식하고, 그것에 일치하게 행동합니다. (고린도 전 10:31) 따라서 그들은 사교적 행사를 마친 다음에 양심의 부담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쉼을 가졌고, 동시에 영적으로 격려를 받았다는 만족감을 가지게 됩니다.

[각주]

a 「파수대」(영문) 1965년 1월 1일호, 31, 32면 참조.

b 오락에 관한 더 자세한 제안은 「깨어라!」 1966년 6월 22일호, 7-10면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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