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희생
1. 고대 하나님의 종들이 희생을 드렸을 때 그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읍니까?
고대 하나님의 종들이 합당한 방법으로 그분에게 희생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읍니다. 세계적인 홍수로 모든 악인들이 일소된 후에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를 드렸을 때, 기록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읍니다. (창세 8:21) 그것은 분명히 그 분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의 교훈과 일치하게 ‘이스라엘’ 땅에서 드린 희생도 마찬가지였읍니다.
2. 여호와께서는 모든 희생을 다 좋게 여기시고 받으셨읍니까?
2 반면에 여호와께서는 모든 희생을 다 그토록 좋게 여기시고 받으시지는 않으셨음을 기록은 명시하고 있읍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아말렉’ 나라와 관련하여 여호와께 불순종한 일이 있읍니다. 그는 ‘아말렉’ 왕 ‘아각’과 ‘아말렉’인들의 소떼와 양떼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살려두었고 이것들이 훌륭한 희생이 될 것이라고 변명하였읍니다. 그 때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셨나이다.]”—사무엘 상 15:21-23.
3. ‘말라기’ 시대에 드린 희생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하셨읍니까?
3 ‘바벨론’에 잡혀갔던 ‘이스라엘’ 포로들이 돌아온 후인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성전 제단에서 드린 희생과 관련하여 백성들과 제자들이 죄가 있음을 아셨읍니다. 제사장들이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눈 먼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고 대답하셨읍니다. (말라기 1:7, 8) 여호와께서는 즉각 성전과 제단과 관련된 이 문제를 바로잡으셨읍니다. 희생에 있어서 위선과 부정직이 용납되지 않았읍니다.
4. 미가 6:6-8은 우리가 여호와와 희생물에 관하여 무엇을 인식하도록 도와줍니까?
4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백히 밝히셨읍니다. 동물은 최상의 것이어야 했읍니다. 또한 동물의 희생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동기로 바쳐야 되었읍니다. 미가 6:6-8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께서는 제사의 배후에 있는 정신 상태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 분명합니다.
5. (ㄱ)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희생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ㄴ) 오늘날의 희생에는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만 포함됩니까? 아니면 또 무엇이 포함됩니까?
5 율법 언약이 폐지되었을 때 동물 희생은 필요없게 되었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희생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종류의 희생에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13:15의 기록에서 그 점을 명백히 하셨읍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미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데는 왕국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과 올바른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 즉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 외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헌신한 전체 생활 행로 자체가 하나의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 전 2:21) 일반적으로 헌신하고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기쁘게 받아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베드로’가 또 이렇게 말한 것에 유의하십시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라.” (베드로 전 2:12) 사도 ‘바울’도 이 점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리고 이러한 행로가 이 낡은 사물의 제도의 사람들이 따르는 행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명백히하기 위하여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 12:1, 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동물 희생에는 관심이 없으시지만 그 분의 종들이 오늘날 이 땅에서 순결한 숭배를 위하여 드리는 희생에는 관심이 있으시며 그 희생 가운데는 그들의 전체 생활 방식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도 그의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밝히셨읍니다.
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표시하는 어떠한 다른 일을 하셨읍니까?
6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그의 백성들이 그의 은총을 받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다른 일들을 하셨읍니까? 네, 하셨읍니다. 그 분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을 1919년에 큰 ‘바벨론’에서 포로 상태로부터 구출하시고 그들이 그의 봉사에 매진하게 하셨읍니다. 그의 모든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을 모으는 일이 1935년 경에 완성되었음이 분명해졌을 때, 그 분께서는 그들에게 “큰 무리”를 구성할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하도록 시키셨읍니다. 이들이 또 이 거대한 모으는 사업을 도울 것이었읍니다. 오늘날 110만을 초과하는 이들 양같은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25,000 이상의 회중 내에서 빈틈없고 자애로운 양육을 받고 있읍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때를 맞추어 영적인 진수성찬으로 먹이시며 그들은 영적인 강력을 얻으며 계속 자라고 있읍니다. 이 “적은 무리”에게 그분께서는 수행해야 할 중대한 사업을 주셨읍니다. 그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땅의 모든 거민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천국의 기쁜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마태 24:14) 그들이 서 있는 은총받은 위치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보호의 마련에 관하여 이사야 32:1, 2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이니라]” 여호와의 백성들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알고, 행복하며 만족해 하고 있읍니다.
7.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여러 면으로 은총을 보이셨다면, 어떠한 질문이 생길만합니까?
7 이상에 논한 모든 것이 사실인데, 왜 우리가 구태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희생에 그토록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히 밝혀졌다고 말하였읍니다! 또한 그 분께서는 그의 조직을 승인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받으셨고 우리의 사업을 기뻐하신다고 확신해야 되지 않겠읍니까? 그런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8.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무엇을 해야 하며 왜 그렇습니까?
8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승인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셨으며 그들의 활동을 번창하게 하신 것은 사실일지 모르나, 그리스도인들이 그 은총받은 위치를 계속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항상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그 당시 이미 진리 안에 확고히 서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한 것에 유의하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브리 3:12, 13.
9. 다른 성서 필자들은 자신을 검토할 필요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9 그러므로 분명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으로 악한 마음이 발전되는 것이 가능이며, 따라서 우리는 항상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예레미야 17:9)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충고합니다. (고린도 후 13:5)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 전 10:12)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 필요성
10. 어떤 것들이 우리 자신을 검토하도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희생을 드리도록 우리를 도와줍니까?
10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우선, 우리는 진리와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인자하시게도 오늘날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시며 계속 진리를 부가하신다면, 우리는 진리를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이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를 표시할 수 있읍니다. 현 세상에서는 공학 및 과학 지식이 다각도로 급진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미처 그것을 기록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진리도 그렇습니다. 배울 것은 많고 배울 시간은 제한되어 있읍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보조를 맞추는데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읍니까?
11. 진리를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정확하고 뒤떨어지지 않은 지식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가 남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알아야지만 남을 가르칠 수 있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면, 관심가진 사람들에게 진리를 제공할 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읍니다. 마태 복음 7:28, 29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단순히 예수의 강력한 연설 솜씨와 인상적인 풍채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읍니다. 분명히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더욱 설복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연설 내용이었읍니다. 연설 솜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 즉 무엇을 말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였읍니다. 분명히 그의 풍채는 그리 인상적이 아니었고 그의 연설 솜씨도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설 내용은 인상적이었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설복시켜 그리스도의 길을 걷도록 하였읍니다.
12, 13. 정확하고 온전한 지식의 중요성을 무엇이 예시해 줍니까?
12 진정으로 아는 것의 중요성은 사람들의 돈 취급이 예시해 줍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속지 않고 되도록 저렴한 가격으로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최종 선택을 하기 전에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과 상의하는 가치를 인식합니다. 그가 받은 교육과 쌓은 경험 때문에 그는 그 분야의 전문가이며 그러므로 그의 지식은 가치가 있읍니다. 그가 절친한 친구라서 그의 말을 참으로 신용할 수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한 지식의 출처는 여하한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13 우리의 건강 관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참된 건강 상태를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완쾌 혹은 차도를 가능케 하는 치료를 받을 마련을 할 수 있읍니다. 이 때에 우리는 이 분야의 권위자와 상담하기를 원합니다. 진실로 정통한 사람이며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14. 진리에 대하여는 이것이 왜 더 중요합니까?
14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 점이 더욱 참됩니다. 아직도 오늘날 외부 세상에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알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멀지 않아 하실 일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 줄 때 그들은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 아직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박식한 가르침에 놀라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들이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르치고 확신시키기 위하여 연구하고 알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비이기적인 이유로 부지런히 지식을 취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도와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대한 그의 희생 즉 공개적인 선포가 가납된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읍니다.
15. (ㄱ) 지식은 사람속의 어디에까지 도달해야 합니까? (ㄴ) 언제 진리가 마음을 감동시키며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15 그러한 지식을 취함에 있어서 지식이 어디에까지 들어가는지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은 머리에 뿐만 아니라 마음에까지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전도 봉사에 열심을 내지 않으며 반면에 지적으로 그만큼 명석하지 않은 사람이 진리의 깊은 것들에 대한 예리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고도 봉사에 참여하고 배운 것을 남에게 전해 주는 데 열심인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우리가 결코 확언할 수 없는 많은 요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진리가 마음을 감동시켰느냐에 크게 좌우되는 문제라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 후자의 경우는 배운 진리가 그 사람을 올바로 감화시켰읍니다. 진리가 마음속 깊숙이 도달했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최대한으로 유용하여 선행을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은총을 계속 유지하고 그 분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희생을 드리고자 한다면, 이것은 극히 중요합니다.
16. (ㄱ) 여호와와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ㄴ) 이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본이 됩니까?
16 진리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그는 타인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법입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둘 때 당신의 희생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신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물에 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분명히 이 때문에 그 분께서는 물질적 우주와 동물을 창조하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셨읍니다. 창세기 1:2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 . .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읍니다. 이 말은 인간이 여호와와 같은 특성을 가질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 복음 3:16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말은 하나님께서는 현재로서는 “기쁜 소식”을 정통하게 알지 못하고 아직 그 분께 헌신도 하지 않았지만 대속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마태 복음 9:36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 같이 고생하고 유리함이라.” 그 분께서 민망히 여기신 사람들 대다수는 결코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으며 그의 추종자가 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들에게 꾸밈없는 관심을 나타내셨고 그들을 돕고자 원하는 욕망을 가지셨읍니다.
17. 다른 성서 필자는 타인에 대한 개인적 관심에 대하여 무엇이다고 말하며, 이것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됩니까?
17 타인에 대한 이러한 따뜻한 개인적인 관심을 잃는 것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드높이 치하하는 성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고차적인 목적을 염두에 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의 문제와 다른 사람들에게 냉담하거나,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리를 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요한 13:35) 시편 필자는 이 필요성을 인식하고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고 말하였읍니다. (시 119:63) 사도 ‘바울’은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13:16) 사도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의 형제들에게 사랑에 찬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인식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그릇된 동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고 말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4:9)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배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18. (ㄱ) 어떤 사람들이 다년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봉사를 하도록 도운 것은 무엇입니까? (ㄴ) 왜 이것이 도움이 되었읍니까? (ㄷ) 그 행로를 따르는 사람들의 무엇을 하나님께서는 승인하십니까?
18 당신의 희생이 항상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부단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내를 의미합니다. 당신은 많은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이 이러한 위치를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하도록 도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으십니까? 그들은 그들을 계속 왕국 관심사에 전적으로 몰두하게 하고 열중하게 한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행로에 투신하였읍니다. 매일 매일의 자기 희생의 개인적 행동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호와를 전시간으로 섬기기로 책임을 지는 것은 훨씬 더 좋습니다. 실상 그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전시간 전파자 누구에게나 물어 보십시오. 이들 중 절대 다수의 마음에는 더 이상 그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없읍니다. 그들의 행로는 자기 희생의 행로입니다. 물론 열심과 결의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그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지적으로 자진해서 계획 혹은 여정을 따르기로 한 것을 볼 때, 그들이 이미 결심을 했다는 것과 그들이 할 일이 앞에 놓여 있음과 그들이 수행할 것을 미리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읍니다.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행하기로 봉사의 인생 행로에 자진하여 투신하였음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또한 우리는 그가 그 후로 하나님께서 승인하시는 이 행로를 따르기가 더욱 쉬웠다고 확신할 수 있읍니다.
19. (ㄱ) 올바른 종류의 희생을 하면 왜 행복합니까? (ㄴ) ‘다윗’과 기타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증명되었읍니까?
1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희생은 어떻게 보면 전연 희생같지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희생자는 손실이나 난관이 있을지라도 마냥 즐겁기 때문입니다. 무릇 보람있는 어떤 일을 달성하려면 노력이 드는 법입니다. ‘다윗’ 왕의 생애는 시종 평탄하지만은 않았읍니다. 일찌기 그는 그의 수하의 군사들과 함께 전장에서 고투하였으며 항상 왕으로서의 직무상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노령이 되어서 자신의 여호와의 봉사의 생애를 회고해 볼 때 만족감과 흡족감을 금할 수 없었읍니다. 자신의 헌신의 생활과 다른 하나님의 종들의 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하나님의 봉사의 생애에서 희생한 것에 대하여 그가 후회했다는 추호의 증거도 없읍니다. 의를 행하고 그는 행복에 젖었읍니다. 「잠언」에서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잠언 21:15.
20. 오늘날 어떤 사람들 가운데서 행복과 만족을 볼 수 있읍니까?
20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봉사에서 생애를 바친 사람들은 만족을 느낍니다. ‘브루클린·벧엘’에서 20년, 30년, 40년 혹은 그 이상을 보낸 사람들은 그러합니다. 그 동안 사뭇 편안하기만 하였읍니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왙취 타워 협회’ 본부에서 1,000여명 중 한 사람이 되면 단련을 받게 됩니다. 각자는 한 가지 일에 임명되는데 그 일은 때때로 쉽기만 하고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최고의 선을 위하여 취침 시간 외에는 전시간을 바칠 수 있는 기회가 있읍니다. 생활 필수품이 공급되기 때문에 왕국 관심사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칠 수 있읍니다. 그들의 인생 목표를 알고 있고 그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장성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할 수 있읍니다. 그러한 봉사에 다년간을 바치고 아직도 그 봉사에서 기뻐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아마겟돈’ 후에 새 질서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저는 여기서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지금 여기에 있는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어 보면 희생을 하는 것같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2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의 본을 어디에서 볼 수 없읍니까?
21 그 말은 오랫 동안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그리고 교회에서 한 동안 교직 생활을 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내리는 결론과 같이 들립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성서의 신봉자로 분장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있읍니다. 그들은 행로를 바꾸어 시위 행진, 더 나아가서는 폭동의 선동자가 되고 있읍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단지 성서만 가르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압박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행동을 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며 하나님과 “가이사” 정부가 비난하는 폭력을 수반하는 한이 있어도 팔을 걷고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희생을 드리는 사람들의 본을 그리스도교국에서는 볼 수 없읍니다.
경계해야 할 일들
22. (ㄱ) 가납되는 희생을 계속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ㄴ) 예를 드십시오.
22 여기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분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리한 요구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읍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읍니다. 뛰어나게 온유했던 ‘모세’도 그렇게 생각한 일이 있었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해 ‘가나안’을 향해서 막 여행을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식을 할 수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읍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찐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민수 11:14, 15)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할 일은 많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견해는 우리를 시정해 줄 것입니다. ‘모세’도 올바른 견해를 갖도록 도움을 받았으며 시정을 받았읍니다.
23. (ㄱ) 가납될만한 희생을 계속하기 위하여 무엇을 또 경계해야 합니까? (ㄴ) 예를 드십시오.
23 우리는 또한 시기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누구나 역시 이런 일을 할 수 있읍니다.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도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들은 ‘모세’가 너무 많은 능력과 권세를 행사한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민수 12:2) 여호와께서는 ‘미리암’을 문둥병으로 치셨읍니다. 그리고 ‘모세’가 중재해서 비로소 그는 고침을 받았읍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책임과 특권을 푸짐하게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가끔 무의식 중에 회중에서 좀 더 탁월해지고 싶은 욕망이 자라가도록 방임합니까? 그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다른 형제들이 그들이 한 선한 일에 대하여 보상을 받을 때 기뻐하고 사실 그들이 순결한 숭배를 위하여 더 큰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24. 그릇된 방향의 희생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24 우리는 또한 그릇된 희생을 경계해야 합니다. 당신은 아들을 대학에 보낼 학자금을 벌기 위하여 시간외 근무를 하거나 당신의 아내도 직업을 가지도록 허용할 생각을 해 왔읍니까? 이러한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거의 혹은 완전히 상실하고 그가 고등 교육을 받게 하기까지의 부모의 눈물겨운 노고에 대하여 사랑과 존경심을 갖지 않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보기에 딱한 일이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일 때문에 실망하였읍니다. 그것은 그릇된 종류의 희생입니다. 반대로, 자녀들의 그리스도인 훈련에 주된 관심을 두고 그들이 따라오도록 그리스도인의 본을 세우는 부모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5. 여호와께 드리는 희생에 대하여 무엇 때문에 우리는 행복합니까?
25 여호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을 그 분께 드릴 수 있는 때에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러한 희생을 이지적이고 계몽된 그리스도인들이 형식적이 아니고 종파적이 아닌 찬양의 형태로 드리게 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졌읍니다. 그 분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희생을 알고 그 희생을 드리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특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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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진리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그는 타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공개적 선포의 희생을 정기적으로 드리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