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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캄한 굴 속을 통해 과거에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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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캄한 굴 속을 통해 과거에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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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7
파77 1/1 20-23면

캄캄한 굴 속을 통해 과거에 이르다!

손에 든 불빛은 눈 앞만을 겨우 밝히고, 굴 앞쪽은 완전히 캄캄하다. 좌우와 머리 위는 험한 암벽이다. 물이 무릎 높이까지 흐르고 있어 조심해서 움직여야 한다. 이 말이 섬찍하게 들리는가, 아니면 매혹적으로 들리는가?

‘예루살렘’, 고대 ‘다윗’ 성의 지하에 뚫려 있는 이 캄캄한 굴속을 여행한다면, 당신도 매혹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물길을 따라 들어가면 성서 기록을 놀랍게 확증해 주는 역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게 뚫린 바위 굴을 가리켜 흔히 ‘히스기야’의 굴 또는 ‘실로암’ 굴이라고 부른다. (열왕 하 20:20) 이 굴을 지나는 데는 운동화에 짧은 옷차림이 실용적이다. 손에 전등을 들고 한 시간쯤 걸으면 근 3,000년 전 성서에 기록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흐르는 물에서나 인쇄된 이 지면에서 그 동굴을 답사하기 전에 그 인상깊은 동굴의 역사를 간단히 고려해 보도록 하자.

기원전 745년,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 ‘앗수르’ 강국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을 억압하고 있었다. 기원전 740년, ‘앗수르’ 군대는 북쪽 왕국 ‘이스라엘’을 이미 점령하고 나서 ‘유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요새들이 하나씩 하나씩 무자비한 ‘앗수르’인들에게 함락되었다. (열왕 하 18:9-11, 13) 이제 ‘예루살렘’의 차례가 되었다. 그 도시는 어떻게 성서 역사상 둘째 세계 강국의 막강한 군대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앗수르’ 왕 ‘산헤립’은 ‘랍사게’라고 하는 고위 관리를 보내어 ‘유대’인들을 협박하였다. ‘랍사게’는 성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 말로 소리쳐, ‘유대’인들의 사기와 의지를 꺾으려고 하였다. 중동 지방의 더위를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이 “주림과 목마름으로 죽”으리라는 그의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대 하 32:11) 그러면, 그들은 ‘목이 말라 항복하였거나 아니면 죽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히스기야’ 왕은 조속히 자기 부하들을 시켜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아버렸다. (역대 하 32:2-4) 그리하여 에워싼 ‘앗수르’인들이 충분한 물을 구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면 ‘산헤립’의 자랑처럼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포위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물을 확보하였는가? 그렇다, ‘유대’인들은 그 도시 동쪽 비탈에 있는 ‘기혼’ 샘의 동굴에 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샘을 “막”고 위장시켰기 때문에 ‘앗수르’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혼’은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유대’인들을 생존시킬 수 있었는가?

성서는 그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즉, ‘히스기야’는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 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다고 알려 준다. (역대 하 32:30; 열왕 하 20:20) 그는 어떻게 그 일을 하였는가? 단단한 바위를 뚫어 물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굴은 아직도 있다. 전문가들은 그것을 가리켜 “고대 토목 공사 중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신도 직접 그 굴을 답사해 볼 수 있다.

‘기드론’ 골짜기 아래 쪽 비탈에 있는 ‘기혼’ 샘(현재는 때때로 처녀 샘이라고도 불리움)은 동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 도시에 살던 고대 ‘여부스’ 거민들은 뒤쪽으로 바위를 파내어 성벽 가까이 안쪽에서 수직갱을 뚫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수로까지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올릴 수 있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아마 이 수직갱을 통하여 그 도시로 잠입했던 것 같다. (사무엘 하 5:8) 그러나 ‘히스기야’ 시대에는 그 도시의 인구가 훨씬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긴 굴을 뚫어 그 도시 서편 성벽 안에 있는 연못(‘실로암’)에 충분한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하였다. (작은 지도 참조)

그것은 참으로 거대한 사업이었다. 일단의 역군들이 남쪽 ‘실로암’ 못으로부터 파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일군들은 북쪽 ‘기혼’에서 파들어 갔다. 이 돌을 깨는 공사를 상상해 보라—착암기나 현대적인 굴착기로가 아니라 손 연장으로 단단한 바위를 뚫어 평균 1.8‘미터’ 높이에, 0.6‘미터’의 폭을 가진 굴을 뚫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 굴의 길이가 533‘미터’나 된다는 점이다. 단단한 바위를 500‘미터’ 이상 뚫는 이 공사는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한 좁은 장소에서는 한번에 한 사람 밖에는 굴 전면에서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24시간 연속으로’ 작업을 했다 해도, 양쪽 인부들이 만나기까지는 아마 6 내지 8개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 당시 헌신적인 역군들을 직접 만나서 작업 상황을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 낼 수 있다. 어떻게?

1880년, 한 청년이 ‘실로암’의 굴 입구에서 놀다가 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나오다가 벽에서 명각(銘刻)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초기 ‘히브리’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당시 ‘히브리’어 필체에 대한 매우 귀중한 본보기이며, 아마 예언자 ‘이사야’도 이러한 필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 벽에 글이 가득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 여섯 줄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것이 뚫렸다:—[···] 아직 [···] 곡괭이(들) [···] (있던) 동안, 양편에서 서로 자기 동료를 향해 있고, 그리고 아직 뚫어야 할 길이 삼 ‘규빗’ 남아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동료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냐 하면 오른쪽(과 왼쪽) 바위에 겹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굴이 서로 마주 쳤을 때, 석공들은 (그 바위를) 꺼냈으며, 양편에서는 자기 동료를 향해 있었고, 계속 곡괭이질을 하였다; 그리고 물이 샘에서 흘러 저수지로 1,200‘규빗’이나 흘러 들어왔고, 그리고 석공들의 머리 위로 바위의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당신 자신이 그 길고 캄캄한 굴 속에서 돌을 깨내는 인부였다고 가정해 보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오른쪽으로 팔 것인가? 왼쪽으로 팔 것인가? 더 높이? 더 낮게? 그러나 그 역군들은 수백 ‘미터’를 뚫고 가서 서로 만났다—얼마나 장한 업적이었는가!

함께 그 굴의 생김새와 거기 수반된 계획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기혼’(1 지점)으로 계단을 내려가면 샘(2 지점)에 이른다. 다음에 ‘여부스’인들이 파놓은 통로를 지난다. (3 지점) 여기서 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상부 벽들과 천정에서 매우 훌륭한 솜씨를 보게 된다. 분명히 ‘히스기야’의 역군들이 이 부분에 다시 손질을 했을 것이며, 앞서 일한 ‘여부스’ 사람들보다 더 나은 솜씨를 보인 것 같다.

이어서 왼쪽으로 뚫린 굴(4 지점)에서 ‘히스기야’의 굴이 시작된다. 여기서는 쉽사리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19세기에 그 굴을 탐사했던 고고학자들처럼 물위로 10‘센티미터’의 공간 밖에 없었던 좁다란 통로를 기어 가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당시 깔려 있었던 두꺼운 진흙층은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이따금 어떤 곳에서는 몸을 구부려야 하긴 해도, 똑바로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물에 잠겨 걸어야 하는데, 이는 콸콸 흐르는 물이 무릎까지, 심지어 허리까지 차기 때문이며, 그 물 깊이는 하루 중에도 차이가 있고 계절에 따라서도 다르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아무도 그 굴이 왜 일직선으로 뚫리지 않고 ‘S’자 형으로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하여간 그 굴은 그런 식으로 뚫려 있다. 완곡하게 돌아서 5 지점에 다다른다. 여기서 왜 갑자기 방향이 꺾이는가? 분명히 이 지점에서 양쪽이 30‘미터’ 사이를 두고 이르렀을 때 북쪽으로부터 파오던 역군들은 남쪽 역군들이 내는 곡괭이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파오던 사람들은 12 지점에 이르렀을 때 미약한 곡괭이 소리를 들었다. 굴을 살펴 보면 그러한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양쪽 인부들은 빗나갔다가는 바로 잡고 하는 일을 계속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서로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고조되었던 흥분을 상상해 보라. 때로는 그릇된 반향음이 다른 쪽으로 굴을 뚫게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히브리’인 기사가 이를 알아내고는 인부들에게 재지시를 하곤 했을 것이다. ‘기혼’을 향해 오고 있던 인부들은 더 난관이 많았던 것 같다. 그들이 잘못 시작하였다가 중단해 버린 지점이 세 군데나 있다. (11, 10, 9 지점)

머리 속에 그러한 장면을 다시 그려보면, 침침한 불빛에서 굴 전면에서 돌을 깨고 있는 역군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 쪽 굴에서 울려오는 돌깨는 소리를 듣고 그는 긴장하고 흥분한다. 그리고 이제 연기와 희박한 공기로 인하여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의 뒤에는 기사가 몸을 구부리고 횃불을 잡고서 이따금씩 “더 왼쪽으로” 또는 “이쪽으로, 소리나는 쪽으로” 하고 외친다.

역군들은 점점 더 가까와진다. 벽에 나타난 거친 작업 솜씨는 인부들의 흥분과 조바심을 설명해 준다. 그들은 처음 뚫는 작업을 시작하던 때 보여준 솜씨를 얼마간 무시해 버린다.

6 지점 근처에 북쪽 인부들이 와 있을 때, ‘실로암’ 명각의 글처럼 “어떤 사람이 자기 동료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몹시 궁금하여 외치는 소리가 오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새로이 힘을 가다듬고 역군들은 바위를 깨뜨렸다. 두 끝이 이제 삼 ‘규빗’ 즉 약 1.4‘미터’ 간격 밖에는 남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조급하게 일한 증거로 울퉁불퉁한 벽을 보라. 밑바닥까지도 고조되었던 긴장을 증언해 준다. 6과 8 지점부터는 역군들이 깊게 깎지 않음으로 바닥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그리고 드디어 7 지점에서 곡괭이 끝이 굴을 관통시킨다. 불빛과 얼굴이 보인다! 그렇다. 그 당시 보잘것 없는 장비를 생각할 때 두개의 굴이 ‘다윗’ 성 밑 깊은 곳에서 마주쳐 하나의 생명선을 형성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돌을 깨 나아가는 방향이 바뀐 것을 조사해 보면 서로 만난 지점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실로암’ 배수구로부터 6 ‘미터’ 가량되는 곳에 새겨진 명각은 그 위업을 기념하고 있다. (13 지점) 명각이 있는 원래의 돌은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서도 그 복제품을 볼 수 있다.

시원한 물이 ‘기혼’으로부터 ‘실로암’ 못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하기 위하여, 굴을 뚫는 사람들은 ‘실로암’쪽 굴 바닥의 높이를 약간 조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신도 이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곳 굴의 높이가 다른 부분보다 높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만들어 놓은 후에는 물이 약 2.1미터의 낙차를 두고 전체 굴을 따라서 잘 흘러내릴 수 있었다. 「‘다윗’ 성」이라는 책에서는,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의 완전히 균일한 경사”를 가리켜 “고대 공학의 또 한가지 경이”라고 하였다.

여인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는 ‘실로암’에 이르러 (지금은 옛날보다 물에 염기가 많다) 여행을 끝마치고 나면, 방금 살펴본 것들의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이다. ‘히스기야’의 굴에 관한 성서 기사는 수천년 전에 기록되었지만, 당신은 오늘날 그 기록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하여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예루살렘’ 방문객들이 답사해 볼 수 있는 그 굴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이 ‘앗수르’의 침공을 직면했을 때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부지런히 일했는가를 입증해 준다.

‘히스기야’ 왕은 적들의 오랜 포위를 견딜 수 있도록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이러한 굴을 팠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것만을 신뢰하지는 않았다. ‘히스기야’는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숭배자들을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그분께 의지하였다. 예언자 ‘이사야’로부터 격려를 받은 ‘히스기야’ 왕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역대 하 32:7, 8.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성내에 있던 ‘유대’인들이 굴을 통하여 물을 공급받고 있는 동안, ‘앗수르’인들은 성벽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자 하룻밤에 여호와의 한 천사가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위시하여 군대 185,000명을 쳤다. (역대 하 32:21; 열왕 하 19:35)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굴을 답사해 보는 일은 토목 공사의 역사 이상의 일을 머리 속에 떠오르게 해 준다. 그 일은 여호와께서 그분께 의뢰하는 사람들을 적극 지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시켜 줄 것이다.

[2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후기 성전 건축 장소

다윗성

티로피안 골짜기

기혼

기드론 골짜기

실로암

성벽

[2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히스기야의 굴

기혼 1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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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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