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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기 희망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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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1
파81 08월호 26-30면

천년기 희망의 기원

오늘날 일반 ‘가톨릭’교인, ‘프로테스탄트’교인 혹은 ‘유대’교인은 희망과 두려움을 주는 것 중에서 선택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들은 거의 모두 인간 영혼의 선천적인 불멸성 및 그와 관련된 신앙, 즉 영계에서의 천적 축복 아니면 “지옥”과 같은 곳에서의 영원한 고초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이 ‘유대’인들의 유일신교와의 유사성을 주장하고 있고 ‘유대’인 성경을 영감받은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으므로, 현대의 ‘유대’인 희망 및 “그리스도인” 희망이 「히브리어 성경」에 나와 있는 희망 및 ‘유대’인의 초기 신앙들과 부합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메시야’ 희망

고대 ‘유대’인 회당에서 ‘메시야’에 관한 것으로 간주된 ‘히브리’어 성서의 456귀절 중 단 네귀절만 참조하여, 창세기 3:15; 22:15-18; 49:10 및 신명기 18:18을 살펴 볼 때, ‘유대’인들은 정확하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가? 그들의 희망은 무엇이었는가?

한 권위있는 ‘유대’인 참고서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 인격적인 ‘메시야’ 개념은 구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다. 그것은 예언적인 장래 희망의 당연한 귀결이다. 장래의 이상적인 왕에 대해 최초로 상세한 묘사를 한 예언자는 ‘이사야’였다. (사 9장 1-6절[비‘유대’인 성서로는 2-7절], 11장 1-10절, 32장 1-5절) ·⁠·⁠· ‘이사야’가 기다린 이상적인 왕은 ‘이새’의 줄기의 한 싹[후손]으로서 그 왕에게는 지혜의 영인 하나님의 영, 용기 및 숭배가 있을 것이며, 그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다스리고 의와 성실로 허리 띠를 삼을 것이다. (11장 1-3ㄱ, 5절) 그분은 전쟁을 벌리거나 열국을 정복하지도 않을 것이며, 전쟁 도구도 파괴될 것이다. (9장 4[5]절) 그분의 유일한 관심사는 백성 사이에 공의를 시행하는 일일 것이다. (9장 6ㄴ[7ㄴ]절, 11장 3ㄴ, 4절). 그분의 의로운 정부의 열매로 온 땅에 평화와 질서가 있을 것이다. 어린 양이 이리를 무서워 하지 않을 것이며, 표범도 어린 염소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11장 8[6]절), 즉, 그 다음 귀절이 설명하듯이, 탄압과 폭력이 더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땅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 32장 1, 2, 16절) 사람들은 정치적인 명성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전원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32장 18, 20절). 그러한 이상적인 상태하에서 그 나라는 번창할 수 밖에 없으며 외부 나라들의 공격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9장 6ㄱ[7ㄱ]절, 32장 15절) ‘이새’의 새로 자란 싹은 다른 나라들에게 기호가 될 것이며, 그들은 지침과 중재를 위해 그분께 나아올 것이다. (11장 10절) 당연하게도 그분은 ‘훌륭한 고문’, ‘하나님 같은 영웅’,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고 불리울 것이다. (9장 5[6]절)

“장래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이사야’의 견해, 즉 심판으로 영적 갱생이 이루어질 것이며 도덕적 및 종교적 완전 상태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과 온전히 일치한다.”—「유대인 백과 사전」 제8권 506면.

성경에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메시야’ 희망에 관한 내용이 참으로 많다. 확실히 그 가운데는 “천적”인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비 성서적 ‘유대’인 기록들은 어떠한가? 동 참고서는 한 걸음 조금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랍비’의 묵시적 문헌에서는 지적 ‘메시야’ 개념이 주된 것이다. 그러한 개념은 통용 기원 1세기말부터 ‘유대’교에 의해서도 공식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510면.

땅의 희망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원래 희망은 땅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충실한 조상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이 하늘에 가기를 바랐다는 성경적 증거는 없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도 그러한 희망을 제시하지 않았다. ‘히브리’ 성경의 시서(詩書)들 및 예언서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취지로 권위있는 「가톨릭 신학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구약에서, 종교적인 사람이 바란 일시적 번영은 모두 자기에 대한, 자기 가족에 대한 그리고 자기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해 있음을 관찰하게 된다. 그에 더하여 그런 사람은 영적 및 도덕적 은사의 희망, ‘메시야’의 오심과 그분의 왕국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고딕’체로는 본지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성서 사전 백과」에는 이 점을 확증하는 이러한 말이 있다. “구약에 나와 있는 희망은 점차 밝혀졌다. 그 희망은 지적 유익, 정치적 회복 및 거민의 재정착으로 시작한다. ·⁠·⁠· 그 희망이 발전하여 보편화되었다. 여호와가 세상의 주인이시다. ·⁠·⁠· ‘영원의 종’이 올 것이며 그는 자신의 고통과 굴욕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할 것이다. 이사야 42:1-4은 세계가 그분의 가르침에서 희망을 갖게 된다고 알려 준다. 그 다음 영원의 종의 영광, ‘메시야’ 시대 그리고 새로와진 인류가 있게 될 것이다.”(‘고딕’체로는 본지에서)

여기서 「유대인 백과사전」에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땅의 희망이 다음과 같이 잘 요약되어 있다. “·⁠·⁠· 예언서들은 ‘다윗’ 가의 한 아들의 통치를 통한 장래의 이상적인 ‘메시야’ 희망, 즉 낙원의 축복이 깃들인 황금 시대를 밝혀 주었다. 여기서 그들은 모든 피조물 사이의 완전한 평화와 조화의 세계 상태, 자기 죄앞에서 인간의 천사같은 상태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사야 11장 1-10절; 65장 17-25절, ‘새 하늘과 새 땅’) ·⁠·⁠·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단 하나의 무리로 뭉치는 전환’은 ‘이스라엘’의 ‘메시야’ 희망에서 최우선적인 목표이다. 하나님의 왕국 설립에 앞서서 기필코 ‘폭력 왕국’이 제거되어야 한다. ·⁠·⁠· 그러나, 12천년기라는 ‘페르소 바빌로니아’식 세계년(world-year)이 ‘유대’인의 종말론[인류와 세계의 궁극적 운명에 관한 학문]에서는, 창조의 주간과 부합하는, 7천년이라는 세계주(world-week)로 바뀌게 되었고,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다’는 귀절 (시 90편 5[흠정4]절)은 현 고난의 세상(‘올람 하제’)에 뒤이어 안식의 천년기인 ‘장차 올 세상’(‘올람 하바’ ·⁠·⁠·)이 올 것이라는 사상을 시사해 왔다.”—제5권 209-211면 (‘고딕’체로는 본지에서)

선천적 불멸성이 아니라, 부활

수 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이교 신앙인 인간의 영혼불멸을 믿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잘 교육받은 백성이었으며, 학식있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영혼”(‘히브리’어로 ‘네베스’)이 죽을 수 있음을 확실한 말로 알려주는 「히브리어 성경」 귀절들을 수십번 읽을 수 있었다. 여기 몇 가지 예가 있다. 창세 19:19, 20; 민수 23:10; 여호수아 2:13, 14, 신세; 시 22:29(‘유대’인 성서에는 30절); 에스겔 18:4, 20.

그러므로, ‘메시야’가 회복시키는 지상 낙원에서의 생명을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초기 희망은 선천적 불멸성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믿음에 의존해 있었다. 「유대인 백과사전」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확증한다. “부활은 ‘메시야’ 희망의 일부분을 형성하였다. (이사야 26장 19절, 다니엘 12장 2절). ·⁠·⁠· 처음에는 부활이 의인에게만 수여되는 기적적 은혜로 여겨졌으나, ·⁠·⁠· 나중에는 그 적용이 보편적이고 최후의 심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 부활시의 신체 형성 과정이 출생시와 같은지의 여부는 ‘힐렐’ 신봉자들과 ‘샴마’ 신봉자들 사이의 논쟁점이다.”—제5권 216면.

이 동일한 권위있는 ‘유대’인 참고서는 “게헨나”(그리스도교국의 “지옥”)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영혼의 사후 응벌 신앙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전달한 것이며 ‘게힌놈’(‘힌놈’의 골짜기)이라는 단어가 ‘유대’인에게 착색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므낫세’의 불의 ‘몰록’ 제사들로 인해 가증한 것이 되었다. (열왕 하 23장 10절)”—같은 권 217면.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유대’교 신학자들이 선천적 불멸성 및 영원한 형벌에 대한 교리들을 가르치게 되었는가? 「성서 사전 부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자료를 공급해 준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구원이 지상에서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 ‘메시야’ 희망이 얼마나 찬란하든, 그리고 장래 통치가 얼마나 길게 예정되든—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까지 믿은 것 같다—그 종교적 시대의 민족적이고 지적(地的)인 특성이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전망, 즉 사후의 행복한 존재의 ‘발견’이 있게 된 것이다.”(‘고딕’체로는 본지에서)

어떻게 하여 ‘유대’인들이 육체의 죽음을 살아 남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다시 한번 권위있는 참고서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다. 「유대인 백과사전」은 이렇게 시인한다. “자기 자신의 개성을 가진, 육체에서 분리되는 영혼이 있다는 사상이 ‘유대’교에 뿌리를 내리게 된 유일한 통로는 ‘페르시아’ 및 희랍 사상과의 ‘유대’인들의 접촉이었다.” 이 점이 「성서 사전 백과」의 다음과 같은 말로 확증된다. “불멸성에 대한 개념은 희랍 사상의 산물인 반면에, 부활의 희망은 ‘유대’인 사상에 속한 것이다. ·⁠·⁠· ‘알렉산더’의 정복에 뒤 따라, ‘유대’교는 점차 희랍 개념들을 흡수하였다.”

‘유대’인들이 원래는 영혼불멸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통용 기원 1세기까지도 그 질문이 ‘유대’인들의 정신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이, ‘바리새’인들은 불멸성을 믿은 반면, ‘사두개’인들은 믿지 않았다는 사실로 입증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참조. ‘요세퍼스’의 「고대의 풍습 제도」 18권 1장 3, 4항; 「전쟁들」 2권 8장 14항; 비교 사도 23:8.

본래의 ‘메시야’ 희망이 변형되다

‘유대’인들이 부활을 통한 장래 생명의 희망을 점차 버리고 선천적 불멸성을 지닌 별개의 “영혼”에 관한 이교 사상을 받아 들인 것처럼, 그들의 본래 ‘메시야’ 희망도 변형되었다. 통용 기원 1세기 무렵 ‘유대’인의 ‘메시야’ 희망은 민족주의적 정치적 희망이 되어버렸다.

이 점을 확증하여 「유대인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기원전 2세기] ‘마카베’ 왕국이 멸망되고 나서 비로소, 그리고 ‘헤롯’ 대왕과 그 가문의 포악한 통치 및 ‘로마’ 제국의 점증하는 학정이 상태를 더욱 참기 어렵게 만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인격적인 ‘메시야’에 대한 희망에서 피신처를 찾으려 하였다. 그들은 미운 외국 강탈자의 굴레로부터 자기들을 벗어나게 해 줄 ‘다윗’ 가문의 약속된 구세주를 갈망하였다.”

「메시야 예수의 생애와 당 시대」(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라는 저서에서 ‘알프레드 에데르쉐임’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스라엘’이 희망한 바는 오직 민족적 회복과 영광뿐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즉 ‘메시야’ 자신도 그것을 달성하는 커다란 도구에 불과하였다. ·⁠·⁠· ‘메시야’에 대한 ‘랍비’적 관념도 ‘이방인들에게 비추어 주는 빛,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즉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관념이 아니었다.”

‘에데르쉐임’은 더 나아가 통용 기원 1세기 무렵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더는 ‘메시야’ 구주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저술들로부터 그들의 견해를 읽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볼 때, 고대 ‘랍비’들은 원죄 및 우리의 전체 천성의 죄많은 상태 등의 중대한 교리들을 고수하지 않았다. ·⁠·⁠· 죄로부터의 구출을 느끼지 못하였으므로, 왜 ‘랍비’ 전통이 ‘메시야’의 제사 직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그 백성의 예언자라는 그분의 주장이 그들의 왕 및 구출자로서의 그분의 나타나심으로 인해 거의 전적으로 무시당하였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참으로 이것이 항상 존재하는 욕구가 되었으며 더욱 더 강한 압박을 주게 되어 ‘이스라엘’ 민족에 고통이 되었다. 이것은 거의 설명할 수 없는 일같이 보였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본래의 희망은 점차 사라져갔다. ‘유대’인들을 통치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게도 기호”가 되실 ‘메시야’ 왕을 기다리는 희망이 변형되어, 정치적 및 종교적 적들에 대한 승리로 인도할 민족 지도자를 기다리는 광적인 희망이 되어 버렸다. ‘메시야’가 “낙원의 축복이 깃들인 황금 시대”, “모든 피조물 사이의 완전한 평화와 조화의 세계”를 가져올 기간인 “안식의 천년기”를 기다리는 지적 희망 대신에 ‘바빌로니아’인들, ‘페르시아’인들 및 희랍인들로부터 빌려온 선천적 불멸성 개념에 근거한 모호한 천적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세월은 흘러 갔다. ‘유대’인들을 구출할, 즉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그들을 다시 모아 재정착시킬 그러한 정치적 ‘메시야’는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처럼 변형된 ‘메시야’ 희망마저 ‘유대’인의 마음 속에서 사라져 갔다. ‘에데르쉐임’은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스라엘’의 구출과 ‘메시야’의 오심이 왜 그토록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늦어지고 있는가? 바로 회당에서 풀리지 않는 신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이 점이다. 시도된 설명들은 추측들, 혹은 다소 쟁점을 피하려는 시도들임을 고백한다.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권위있게 그러한 모든 의문들에 대해 침묵, 즉 그들의 표현처럼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애처로운 굴복인 은연중의 침묵, ·⁠·⁠· 끝없이 되풀이되는 실망과 절망의 침묵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말하자면, 깨어진 묘비의 비문에 기록된 회당의 웅대한 희망은, 이 기나긴 여러 세기 동안 헛된 눈물로 성전의 폐허를 씻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진실한 ‘유대’인들이라면, ‘메시야’의 통치 아래 회복될 지적 낙원을 기다리는 본래의 희망을 아직도 가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러한 희망을 얻어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러나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질문이 남아 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땅의 ‘모든 피조물 사이의 평화와 조화’를 이루는 “안식의 천년기” 희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희망을 확증하셨다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러한 천년기 희망을 사실상 가지고 있지 않는가?

[29면 삽화]

공산주의자들의 “행복한 내일”? ‘힌두’교 혹은 불교인들의 열반? ‘가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의 “천당”? 성서의 희망은 어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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