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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인의 기대가 희미해진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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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인의 기대가 희미해진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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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파85 4/1 11-14면

그리스도인의 기대가 희미해진 경위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의 임재와 왕국의 임함을 계속 “깨어” 살피라고 말씀하셨다. (마가 13:37)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는 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말씀대로 하였다는 증거가 풍부히 들어 있다. 사실 매우 조급해 한 사람들도 있었다. (데살로니가 후 2:1, 2)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기대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울’과 ‘야고보’와 ‘베드로’ 및 ‘요한’은 모두 형제들이 계속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여호와의 날”을 참을성있게 기다리도록 권면하는 편지들을 썼다.—히브리 10:25, 37; 야고보 5:7, 8, 신세 참조; 베드로 전 4:7; 베드로 후 3:1-15, 신세 참조; 요한 1서 2:18, 28.

그리스도교국의 역사가 및 신학자들이 발행한 참조 문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한다. ‘프랑스’ ‘가톨릭’의 권위있는 「성서 사전」(Dictionnaire de la Bible)은 그 방대한 부록(Supplément)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대부분의 신약 본문에 명백히 나오는 종말에 대한 기대가 차지하는 역할을 부인하려드는 것은 헛된 일이다. ·⁠·⁠·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 ‘파로우시아’[임재]에 대한 기대는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약에서 시종 일관 계속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국의 일부 신학자들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명백히 볼 수 있었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차지하는 역할을 부인하려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문의 여지없이,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 및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서 명백히 볼 수 있는 영적 혼수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었는가?

기대가 흐려진 경위

그리스도인의 기대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죽기 전에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배교였다. 사도 ‘바울’이 경고하였듯이 그 당시에 배교가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후 2:3, 4, 7) 수년 후에 사도 ‘베드로’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 선생들”과 다음과 같이 말할 “기롱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주의 강림[임재, 신세] 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베드로 후 2:1; 3:3, 4.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기대는 예수의 약속된 “임재”가 땅에 대한 그분의 천년 통치가 가까왔음을 알려 줄 것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믿은 사람들에 의해 한 동안 유지되었다. ‘주스틴 마터’(기원 165년경 사망), ‘이레네우스’(기원 202년경 사망) 및 ‘터툴리안’(기원 220년 이후 사망)은 모두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믿고 현 악한 사물의 제도의 종말을 열렬히 기대할 것을 권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배교가 일어남에 따라, 지구가 그리스도의 왕국 아래 세계적인 낙원으로 변모될 것이라는 천년기 희망은 점차, 희랍의 선천적 인간 불멸성에 대한 철학 개념에 기초한 가상적 기대로 대치되었다. 낙원에 대한 희망은 지상에서 실현되는 것에서 사망시에 하늘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파로우시아’ 곧 임재와 그분의 왕국이 임하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대는 약해졌다. 그들은 이렇게 추리하였다. ‘사망시에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희망을 가질 수 있는데, 예수의 임재의 표징을 열렬히 깨어 살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깨어 살피는 일이 그처럼 희미해 지는 것을 틈타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튼튼한 구조의 교회로 조직함으로, 더는 그리스도의 다가오는 ‘파로우시아’ 곧 임재가 아니라, 교인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세계까지 지배하는 것에 눈을 고정시키게 되었다.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파로우시아’가 늦추어지는 것[같아 보임]으로 말미암아 초기 교회에서 절실한 기대가 약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종말론 퇴화’[“말세”에 관한 가르침이 약해지는 것] 과정 중에, 제도화된 교회가 기대의 대상인 하나님의 왕국을 점차 대치하였다. 교직 계급 제도로서 ‘가톨릭 교회’가 형성된 것은 절실한 기대의 쇠퇴와 직결되어 있다.”

치명타가 가해지다

그리스도인의 깨어 살피는 일에 치명타를 가한 “교부”, 즉 “교회 박사”가 ‘히포우’의 ‘아우구스티누스’(기원 354-430년)였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 「신국론」(The City of God)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왕국도 되고 하늘 왕국도 된다.”

「신 성서 사전」(The New Bible Dictionary)은 이러한 견해가 ‘가톨릭’ 신학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 독특한 점은 하나님의 왕국과 지적 체제의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처럼 동일시하는 것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때문이다. 교회의 교직 계급 제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의 왕으로 구현된다. 그 왕국 영역은 교회의 권세 및 권위의 범위와 동일하다. [같은 경계 안에 있다.] 하늘 왕국은 세상에 있는 교회의 포교 활동과 발전에 의해 확장된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왔음을 알려 줄 표징을 ‘계속 깨어 살필’ 필요가 없게 되었다. ‘E. W. 벤즈’ 교수는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기술하면서, 이 점을 확증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왕국은 교회 제도를 통해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언함으로써 원래의 절실한 기대의 중요성을 깎아 내렸다.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의 지상의 역사적 대표자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첫째 부활은 세례 성사의 형태로 교회 내에서 항상 일어난다고 한다. 그 성사를 통하여 충실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유입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낙원을 회복시키실 기간인 그분의 천년 통치에 대한 성경적 희망을 그리스도교국이 내버리는 일을 마무리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계시 20:1-3, 6; 21:1-5) 「가톨릭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침내 천년기가 없을 것이라는 신념을 주장하였다. ·⁠·⁠· 육천년간의 역사 후에 일천년간의 안식일이란 영원한 생명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일천이라는 수는 완전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브리태니커 매크로패디아」(1977년판)는 이렇게 부언한다. “그[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천년기란 오순절날 교회가 집단적으로 들어간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 절박한 초자연적 역사 개입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인들에게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가 무의미하게 되었다.

중세의 암흑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중세에 표준 교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기대는 최저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중세 그리스도교국에서 신약의 종말론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교리 체계의 기초는, 처음에는 ‘플라톤’주의[희랍 철학자 ‘플라톤’이 원조]를, 그 후에는 서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원조]를 중심으로 한 철학적인 것이었다. ‘파로우시아’, 부활 등등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영혼 및 영혼불멸에 관한 희랍 사상들과 병합되었다. ·⁠·⁠·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 종말론의 열정을 위한 자리를 거의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열정은 사멸되지 않았다. 그것은 얼마의 이단 운동들 속에 살아 있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70년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천년기 파”라고 부름으로 그러한 “이단 운동”들을 경멸한다. 그 교회의 역사가들은 “기원 1000년 공포”에 대해 멸시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보통 사람들이 기원 1000년에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이었는가? 그 “공포”는 ‘가톨릭’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그는 ‘사단’이 그리스도의 초림시에 결박되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계시록 20:3, 7, 8에서 ‘사단’은 1,000년간 결박되었다가 “만국을 미혹”하도록 “놓”일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10세기에 살던 일부 사람들이 기원 1000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한 것도 당연하다.

물론, 공식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러한 “공포”를 정죄하였고, 그 교회는 1260년에 그리스도인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예언한 ‘플로라’의 ‘시토’ 수도회 수도사 ‘애봇 요아김’도 정죄하였다. 마침내 1516년에 제 5차 ‘라테란’ 회의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여하한 ‘가톨릭’교인도 적그리스도와 최후의 심판이 오게 되어 있는 때를 예언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하였다. 그러한 법을 범하면 파문의 벌을 받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가 단순한 이론상의 것으로 만들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성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인의 기대를 소생시켰어야 한다. 그리고 한 동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점에서와 같이 이 점에 있어서도 종교 개혁은 그 약속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참다운 성서적 그리스도교로 복귀하는 계기가 되지 못하였다. 종교 개혁으로 생겨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그리스도인의 깨어 살피는 일에서 신속히 벗어나 현 세상과 타협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개혁 교회들은 곧 제도화된 지방 교회[국교]가 되었다. 이윽고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를 억압하였고, 그리하여 ‘말세’에 관한 교리는 교리 신학의 부속물이 되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교인들과 ‘유대’교인들 사이에서 종교의 자유주의가 출현함으로 말미암아, 18세기 말경과 19세기 내내, 종말론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것은 계몽의 시대에 더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전통 종교의, 유치하고 원시적이며 켸켸 묵은 장식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종말론 사상은 모조리 밀려나고, 단순한 사후의 영혼불멸이 인간의 끝으로 제시되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기대를 윤리적인, 신비에 가까운 혹은 사회적인 용어로 재해석하였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처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왕국의 임함을 ‘계속 깨어 살’피도록 돕지 못하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기대를 단순한 이론상의 것이 되게 하고 말았다. 그들 중 다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은 ·⁠·⁠· 점차 개개인의 지각 속에 느끼게 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행사되는 은총과 평화의 주권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왕국이 임하는 것은 사회적 의와 자치제의 발달을 전진시키는 데 있다.”—「신 성서 사전」(‘프로테스탄트’계).

‘가톨릭’이 기대하는 것들

‘가톨릭’교인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깨어 살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가톨릭’교인들에게서 왕국에 대한 기대와 천년기 희망을 앗아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계속 깨어 살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여전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티칸’ 신앙 신조 성성(聖省)은 전세계에 있는 ‘가톨릭’ 주교들에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재가를 받은 1979년 5월 17일자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경과 일치하게,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린다.”

‘가톨릭’ 교회의 이론상의 가르침은 그러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보통 ‘가톨릭’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왕국의 임함을 계속 깨어 살펴야 할 필요성에 관해 사제가 설교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듣게 되는가? 흥미롭게도, 위에 인용된 ‘로마 교황청’ 발 서신의 목적은 바로 “의문시되어 온 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의문시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인용문에 들어 있는 것일 수 있는가? “교회는 말세의 전체 분야에 관한 가르침들을 오랫 동안 소홀히 해왔다.” “종교 개혁 이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말론 운동들에 사실상 면역이 되어 왔다.”

그리스도인의 깨어 살피는 일은 사멸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대가 희미해진 이유는, 그들이 성서의 명확한 진리를 버리고 희랍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따르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의 기사들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참다운 종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대하면서 살아 왔으며,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깨어 살펴 왔고 독자의 희망이 될 수도 있는 놀라운 희망을 재발견한 백성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계속해서 읽어 보고, 그 다음에 그 성서 희망의 성취를 ‘계속 깨어 살’피도록 ‘여호와의 증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바란다.

[12면 삽입]

“대부분의 신약 본문에 명백히 나오는 종말에 대한 기대가 차지하는 역할을 부인 ·⁠·⁠·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12면 삽화]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주장하였다

[13면 삽화]

교황 ‘레오’ 10세는 여하한 ‘가톨릭’교인도 최후의 심판이 올 때를 예언하는 것을 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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