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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혼을 위한 더 나은 희망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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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파96 8/1 4-8면

영혼을 위한 더 나은 희망

로마 병사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반란군의 최후의 보루인 마사다 요새로 돌진해 들어가면서, 적들의 반격과 전사들의 함성과 여자와 아이들의 비명 소리에 대비하여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것이라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타는 불꽃에서 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불타는 요새를 뒤져 본 후에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적들이—약 960명의 사람들이—이미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전사들은 계획적으로 자기 가족들을 살해하였고, 그 후 서로 죽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a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끔찍한 대량 살육과 자살을 하게 되었습니까?

동시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불멸의 영혼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마사다에서 열심당원들의 지도자였던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처음에는, 로마 사람들의 손에 죽거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더 영예로울 것이라고 자기 부하들을 설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부하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는 영혼에 관한 감동적인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몸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즉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영혼을 가두는 몸에서 자유롭게 될 때, 원래 처소로 돌아가서, 사실상 축복받은 권능과 완전히 해방된 힘을 얻게 되며, 하느님 자신이 그러하듯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 연설에 대해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엘리아자르가 이러한 논조로 충분히 납득할 만큼 연설하고 나자 “그의 이야기를 듣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중단시키고, 억제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여 신속히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부언합니다. “그들은 홀린 것처럼, 모두 다 다음 사람보다 더 빨리 끝내려는 열망에 가득 차서 급히 행동을 취하였으며, ·⁠·⁠· 억누를 수 없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살육하고 나서 자살하였다.”

이 섬뜩한 예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교리가 죽음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견해를 어느 정도로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참으로 잘 예시해 줍니다. 그러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인간 최대의 적이 아니라 영혼을 자유롭게 하여 더 고등한 존재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침받습니다. 그러면 그 유대인 열심당원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열심당원들은 거룩한 기록인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람 속에 의식을 가진 영이 있다고, 즉 몸을 벗어나서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는 영혼이 있다고 가르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정말 그렇게 가르칩니까?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영혼

한마디로 말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성서의 맨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우리는 영혼이 당신이 소유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첫 인간인 아담의 창조에 관해 이러한 기록을 읽게 됩니다. “그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 (창세 2:7, 「신세」) 여기에서 사용된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네페시는 히브리어 성경에 700회가 넘게 나오는데, 사람에게 있는, 별개의 것이고 공기와 같으며 영으로 된 부분이라는 개념을 전달하는 경우는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오히려 영혼은 명확히 볼 수 있고 형체가 있으며 물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음에 참조된 성구들을 당신의 성서로 직접 찾아보십시오. 각 성구에 히브리어 단어 네페시가 나옵니다. 이 성구들은 영혼이 위기를 맞고, 위험에 직면하고, 심지어 납치될 수 있으며(신명 24:7; 사사 9:17; 사무엘 상 19:11, 「신세」 참조), 사물을 만질 수 있으며(욥 6:7), 쇠사슬에 매일 수 있으며(시 105:18, 난외주 참조), 먹을 것을 갈구하고, 금식으로 고통을 겪고,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기력을 잃을 수 있으며, 쇠약해지게 하는 질병이나 심지어 슬픔으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릴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신명 12:20; 시 35:13; 69:10; 106:15; 107:9; 119:28, 「신세」 참조) 바꿔 말해서, 당신의 영혼이 바로 당신, 즉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b

그렇다면 이 말은 영혼이 실제로 죽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까? 그렇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인간 영혼을 불멸로 언급하기는커녕, 범죄 때문에 “끊쳐”지거나 사형을 당하며, 치명상을 입고, 살해를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찢겨지는 것으로 언급합니다. (출애굽 31:14; 신명 19:6; 22:26; 시 7:2, 「신세」 참조) 에스겔 18:4에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 영혼들의 공통적인 종말임이 분명합니다. (시 51:5) 첫 사람 아담은 죄에 대한 형벌이—영계로 옮겨지거나 불멸성을 입는 것이 아니라—죽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창세 2:17)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이러한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 3:19) 아담과 하와가 죽었을 때, 그들은 단지, 성서에서 흔히 말하는 “죽은 영혼” 즉 “사망한 영혼”이 된 것입니다.—민수 5:2; 6:6, 「신세」.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영혼에 대해 「아메리카나 백과 사전」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구약의 개념은, 단일체이지, 영혼과 몸의 결합체가 아니다.” 동 사전은 이렇게 부언합니다. “네페시에는 ·⁠·⁠· 몸과는 별도로 활동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충실한 유대인들이 믿었던 죽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죽음이 생명의 반대라고 믿었습니다. 시편 146:4(「신세」 참조)에서는 영 즉 생명력이 인간을 떠날 때 어떻게 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호흡[“영”]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c 그와 비슷하게, 솔로몬 왕도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기술하였습니다.—전도 9:5.

그렇다면, 마사다에 있던 열심당원들과 같은 1세기의 많은 유대인들이 영혼의 불멸을 그처럼 확신하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의 영향

유대인들은 이 개념을 성서에서가 아니라 그리스 사람들에게서 들여왔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이 개념은 신비의 그리스 종교 집단들에서 그리스 철학으로 흘러들어간 것 같습니다. 악한 영혼들이 고통스러운 보응을 받는다는 사후 생명에 대한 개념이 오랫동안 큰 호소력이 있었으며, 그러한 생각이 구체화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영혼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해 끝없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호메로스는 영혼은 죽는 순간 즉시 분리되며, 들을 수 있게 윙윙거리거나 찍찍거리거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영혼에 실제로 질량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은 극히 미소한 몸이라고 말하였습니다.d

하지만 불멸의 영혼에 대한 가장 주된 주창자는, 아마도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자기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여러 세기 후에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이 나타낸 것과 매우 유사한 신념을 표명하였습니다. 학자인 오스카르 퀼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플라톤은 우리에게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온전히 평화롭고 태연하게 죽어 갔는지를 알려 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다. 여기에는 죽음의 공포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할 수 없는데, 사실 죽음이 우리를 몸에서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 죽음은 영혼의 위대한 벗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가르치며, 자기의 가르침과 놀랄 만큼 일치하게 죽는다.”

유대인들이 그리스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 전 2세기인 마카베오 시대였을 것입니다. 기원 1세기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에세네파 사람들—유력한 유대인 종교 집단들—이 이 교리를 채택하였다고 요세푸스는 알려 줍니다. 필시 그 시대에 지어졌을 일부 시(詩)에 그와 같은 신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그분과 그분의 추종자들도 그리스 종교에서 유래한 이러한 개념을 가르쳤습니까?

영혼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견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에 대해 그리스 사람들과 같은 견해를 갖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벗이었던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고려해 봅시다. 만약 나사로가 죽는 순간 즉시 분리되는 자유롭고 행복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면, 요한 11장의 기록은 상당히 달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사로가 하늘에서 살아서 잘 지내고 있고 의식이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분명히 추종자들에게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고, 그분은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자고 있다고 즉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 자기의 벗이 경이로운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분명히 기뻐하셨을 것인데, 오히려 우리는 그분이 이 죽음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우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5절) 나사로의 영혼이 하늘에서 더없이 행복한 불멸성을 만끽하고 있었다면, 분명히 예수께서는 그를 병들고 죽어 가는 인류 가운데서 불완전한 육체의 “감옥”에 갇혀 몇 년 더 살도록 다시 불러오는 잔인한 일을 결코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해방되어 육체에서 벗어난 영자로서 지낸 경이로운 나흘간에 대해 열정적으로 할 이야기를 가지고 죽음으로부터 돌아왔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이야기도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불멸의 영혼을 믿는 사람들은, 그 이유가 나사로의 경험이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쨌든 나사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즉 자기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경이로운 경험을 하였다는 것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오히려 나사로는 죽어 있는 동안 겪은 어떤 경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그 어떤 주제보다도 더 호기심의 초점이 되는 주제, 즉 죽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침묵하였다는 것을! 그러한 침묵은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자고 있으며 무의식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죽음이 영혼의 벗이라고, 즉 존재의 단계들을 건너가는 통과 의식일 뿐이라고 말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결코 벗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맨 마지막 적”이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15:26)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끔찍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죽음이 죄와 하느님에 대한 반역의 직접적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5:12; 6:23) 죽음은 결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원래 목적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참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죽음과 관련하여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은 영혼들을 위한 참다운 성경적 희망—부활—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여러 성서 기록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서는 두 가지 다른 유형의 부활에 관해 가르쳐 줍니다. 무덤에서 자고 있는 인류 대다수에게는, 그들이 의로운 사람이든 불의한 사람이든 간에, 이 곳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누가 23:43; 요한 5:28, 29; 사도 24:15) 예수께서 “적은 무리”라고 지칭하신 작은 집단을 위해서는, 하늘에서 영자로서 불멸의 생명을 누릴 부활이 있습니다. 이 영자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인류를 통치하면서 사람들을 완전성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누가 12:32; 고린도 첫째 15:53, 54; 계시 20:6.

그런데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에서 부활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 1959년에 「하버드 신학 평론」(The Harvard Theological Review)에서 신학자인 워너 제이거가 제시한 이러한 대답을 고려해 봅시다. “그리스도교 교리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아버지인 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플라톤주의 철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영혼에 관한 방대한 개념 전체를 들여왔는데, 그 개념은 그가 플라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대인들이 여러 세기 전에 한 일을 그대로 따라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을 선호하여 성서의 가르침을 버렸던 것입니다.

영혼불멸 교리의 실제 근원

이제 어떤 사람들은 영혼불멸 교리를 변호하기 위해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그토록 많은 종교들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그와 동일한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이 가르침이 현 세상의 종교들 전반에 걸쳐 퍼져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제시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온 세상은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다”고 알려 주며, 사탄이 “이 세상의 통치자”임을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요한 첫째 5:19; 요한 12:31) 분명히 세상의 종교들은 사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들은 오늘날의 세상의 문제들과 분쟁들을 크게 부추겨 왔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종교들은 사탄의 생각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역사상 최초의 거짓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자신을 거슬러 죄를 짓는다면 그 결과는 죽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창세 3:4) 물론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거짓의 아버지”인 사탄은 결코 자기의 첫 번째 거짓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한 8:44) 성서의 교리에서 벗어나 있거나 성서의 교리를 공공연히 무시하는 수많은 종교들에서는, 여전히 그와 동일한 이러한 견해를 주입받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몸은 소멸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영혼은—마치 하느님과 같이—계속,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탄 역시 하와에게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창세 3:5.

거짓말이나 인간 철학이 아니라 진리에 근거한 희망을 갖는 것은 참으로 훨씬 더 낫습니다. 사랑하는 사망한 사람들이 불멸의 영혼으로서 어디에 있는지 염려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무덤에서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는 편이 참으로 훨씬 더 낫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는 이러한 잠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거나 우울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죽은 자들이 안전한 안식처에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안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서에서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죽은 자들이 특별한 의미로 살아 있다고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20:38) 그들은 여호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크게 위안이 되는데, 그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랑받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들에게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기회를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비교 욥 14:14, 15, 「신세」 참조.

부활의 영광스러운 날은 올 것입니다. 여호와의 모든 약속은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10, 11) 이러한 예언들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땅에서 잠자는 자들이 깨어서 기뻐 외칠 것입니다. 당신의 이슬은 번쩍이는 빛의 이슬이며 땅은 오랫동안 죽어 있던 자들을 다시 출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6:19, 「신 영어 성서」) 그러므로 무덤에서 자고 있는 죽은 자들은 어머니의 태 속에 있는 아기만큼이나 안전합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지상 낙원에서 생명으로 되돌아옴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보다 더 나은 희망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각주]

a 두 명의 여자와 다섯 명의 아이들이 숨어서 생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여자들은 후에 자기들을 사로잡은 로마 사람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b 물론,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많은 단어들이 그러하듯이, 네페시라는 단어에도 다른 뉘앙스의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속사람을, 특히 깊은 감정을 가리킬 수 있다. (사무엘 상 18:1, 「신세」 참조) 또한 사람이 영혼으로서 누리는 생명을 가리킬 수도 있다.—열왕 상 17:21-23, 「신세」 참조.

c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루아흐는 “호흡” 혹은 “바람”을 의미한다. 인간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의식이 있는 영의 존재를 가리키지 않으며, 오히려 「신약 신학 신 국제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사람의 생명력”을 가리킨다.

d 이러한 다소 기괴한 생각에 동조한 사람은 에피쿠로스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금세기 초에 한 과학자는 실제로 죽기 직전의 몸무게에서 죽은 직후의 몸무게를 뺌으로 여러 사람들의 영혼의 무게를 재었다고 주장하였다.

[7면 삽화]

마사다의 유대인 열심당원들은 죽음이 자기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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