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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생을 믿어야 하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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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7
파97 5/15 4-8면

환생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환생 사상을 연관지었습니다. 그는 육체가 죽은 후에 불멸의 존재인 영혼이 “순수 형상의 세계”라고 불리는 곳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영혼은 육체가 없는 상태로 그 곳에 얼마간 머무르면서 형상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나중에 또 다른 육체로 환생하게 될 때, 영혼은 형상의 세계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그리워하게 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들은 희미하게 기억하고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이상적인 형상을 자기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보게 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집니다.

근원과 근거를 식별함

환생의 가르침은 영혼이 불멸이라는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환생설의 기원을 알려면 그러한 영혼불멸 신앙을 가졌던 민족이나 나라들에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일부 사람들은 이 설이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종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사제들은 영혼 윤회 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영웅들이 오래 전에 죽은 탁월한 조상들이 환생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환생 신앙은 인도에서 온전히 개화하게 되었습니다. 힌두교의 현인들은 악과 인간들 사이의 고난에 관한 보편적인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의로운 창조주라는 개념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의로우심과 세상에 있는 예기치 못한 재난과 불평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카르마[갈마]의 법” 즉—“사람이 무엇을 뿌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인과의 법칙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들은, 한 생애에서 쌓은 덕과 악덕에 따라 다음 생애에서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다는 상세한 ‘대차 대조표’를 고안해 냈습니다.

“카르마”란 단지 “행위” 즉 “업”을 의미합니다. 힌두교인은, 사회적·종교적 규범을 따르면 선한 카르마를, 그렇지 않으면 악한 카르마를 쌓게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행위 즉 카르마에 따라, 계속되는 각각의 재생에서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철학자 니킬라난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개성이라는 청사진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것은 주로 전생들에서 한 그의 행위에 의해 미리 만들어진다. 하지만 신체적 특징은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의 설계자이자 자신의 숙명의 건축자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이 윤회 과정에서 해방되어 브라만—궁극적 실재—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행위를 하고 특별한 힌두교의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함으로 달성된다고 믿어집니다.

따라서 윤회 가르침은, 영혼불멸 교리가 그 기초이며 이 기초 위에서 카르마의 법을 통해 성립됩니다.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인 성서는 이러한 사상과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영혼은 불멸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문제에 관한 최고의 권위인, 창조주의 영감받은 말씀을 조사해 보도록 합시다. 성서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우리는 “영혼”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첫 사람 아담의 창조와 관련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이 된지라.” (창세 2:7, 「신세」 참조) 분명히, 영혼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네페시입니다. 이 단어는 성서에 약 700회 나오는데, 인간의 분리될 수 있고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적이 전혀 없으며, 만질 수 있고 물질적인 어떤 것을 언제나 가리킵니다.—욥 6:7, 「신세」 참조; 시 35:13; 107:9; 119:28, 「공동번역」 참조.

사망시에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아담이 죽었을 때 그에게 일어난 일을 고려해 보십시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 3:19)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흙으로부터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에,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후에 아담은 그와 똑같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서에서는 죽음이 생명의 반대라고 가르칩니다. 전도서 9:5, 10에서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읽게 됩니다.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이 말씀은, 죽은 자는 아무 일도 못하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죽은 자는 더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며,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3, 4.

성서는, 사망시에 영혼이 다른 몸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성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단호하게 언명합니다. (에스겔 18:4, 20; 사도 3:23; 계시 16:3) 따라서 영혼불멸 교리—환생설의 기초—는,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하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근거가 없다면, 환생설은 와해되고 맙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보게 되는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이유는?

인간이 겪는 고난의 주된 이유는, 죄많은 아담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유전받은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로마 5:12)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시 41:1, 3; 빌립보 2:25-27.

더 나아가, 창조주의 변치 않는 도덕 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릇 인도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뿌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뿌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부패를 ·⁠·⁠·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6:7, 8) 따라서 문란한 생활 방식은 감정적인 고통과 원치 않는 임신과 성 매개 질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놀랍게도 치사적인 암의 30퍼센트는 주로 흡연에, 그리고 또 다른 30퍼센트는 생활 방식, 특히 식생활 습관과 운동 부족에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는 말합니다. 고난을 초래하는 일부 재난들은 사람들이 땅의 자원을 오용한 결과입니다.—비교 계시 11:18.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겪은 불행의 상당 부분은 사람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불멸이 아니기 때문에, ‘심는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인간이 겪는 고난을 카르마—전생에 행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들—와 연관짓는 데 사용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자기의 죄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성서는 언명합니다. (로마 6:7, 23) 그러므로 죄의 결과가 사후 생명으로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사탄 마귀 역시 많은 고난을 초래합니다. 사실상 현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요한 첫째 5:19)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의 대상’이 될 것이었습니다. (마태 10:22) 그 결과, 흔히 의로운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현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의 경우, 그 원인을 쉽게 알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가장 빠른 육상 선수가 넘어져서 경기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막강한 군대가 그보다 약한 군대에게 패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굶주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데 매우 밝은 사람들이 상황 때문에 자기들의 지식을 활용하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학식 있는 사람들이 당국자들의 분노를 사서 신망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습니까?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하기 때문이라고 현명한 왕 솔로몬은 대답합니다.—전도 9:11.

힌두교의 현인들이 고난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쓰기 오래 전부터 인류는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더 나은 장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까? 그리고 성서는 죽은 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합니까?

평화로운 장래

창조주께서는 사탄이 지배하는 현 세상 사회에 머지않아 끝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잠언 2:21, 22; 다니엘 2:44) 그렇게 되면 의로운 새 인간 사회—“새 땅”—가 실현될 것입니다. (베드로 둘째 3:13) 그 때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사야 33:24) 죽음의 고통까지도 제거될 것인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애통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계시 21:4.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신세계에 거할 사람들에 대해, 시편 필자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시 37:29) 더욱이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입니다.—시 37:11.

앞 기사에서 언급한 무쿤드바이는 하느님의 놀라운 약속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의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사망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평화로운 신세계에서 깨어날 전망이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렇게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사도 24:15; 누가 23:43.

여기에 나오는 “부활”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단어 아나스타시스를 번역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다시 일어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활에는 개인이 가지고 있던 생명의 형태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일이 포함됩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께서는 지혜에 있어서 무한하십니다. (욥 12:13) 죽은 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명의 형태를 기억하는 것은 그분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교 이사야 40:26)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랑이 많으십니다. (요한 첫째 4:8)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의 완전한 기억력을 사용하셔서, 죽은 자들이 저지른 악한 일들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죽기 전에 지니고 있던 개성을 가지고 낙원이 된 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쿤드바이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무쿤드바이의 아들에 대해 고려해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목적에 관한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거의 끊임없이 재생하며 그 때마다 악과 고난에 둘러싸이게 되는 과정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참으로 큰 위로가 됩니다! 아버지는 단지 죽음의 잠을 자면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자신이 성서에서 배운 것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그는 참으로 가슴이 설렙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디모데 첫째 2:3, 4) 지금은 바로, 당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미 행하고 있는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낙원이 된 땅에서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는지에 관해 배워야 할 때입니다.—요한 17:3.

[7면 삽입]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도 9:11

[6면 네모]

하느님의 성품과 카르마의 법

모한다스 K. 간디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카르마의 법에는 예외가 없으며 빠져 나갈 수도 없다. 따라서 하느님이 개입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분은 그 법을 설정하시고, 말하자면 은퇴하셨다.” 간디는 이러한 설명이 당혹스러운 것임을 알았다.

한편, 부활의 약속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준다. 죽은 자들을 낙원이 된 땅으로 다시 살리시려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개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기억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실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베드로 첫째 5:6, 7.

[5면 삽화]

힌두교의 삶의 바퀴

[8면 삽화]

하느님의 말씀은 부활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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