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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스탄티누스 대제—그리스도교의 옹호자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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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스탄티누스 대제—그리스도교의 옹호자였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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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98 3/15 26-30면

콘스탄티누스 대제—그리스도교의 옹호자였는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역사에서 “대제”라는 칭호를 붙여 칭송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리스도교국은 그 외에도 “성인”, “열세 번째 사도”, “사도들과 동등한 성도”, “전세계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느님의 섭리로 선택받은 자”라는 표현들을 사용해 왔습니다. 상반된 관점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를 “피로 물들어 있고, 수많은 무법한 행위와 숱한 속임수로 지탄받는 인물이며, ·⁠·⁠· 끔찍한 범죄들을 저지른 추악한 전제 군주”라고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매우 탁월한 그리스도교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의 참혹한 박해로부터 구출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른 추종자로서 그리스도교 대의를 증진하려는 강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와 콥트 교회는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를 모두 “성인”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의 축제 행사는 6월 3일에, 교회력에 따르면 5월 21일에 거행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사도 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발전 과정에서 그가 한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역사와 학자들의 대답을 듣는다면 많은 점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역사에 나타나 있는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로서 기원 275년경에 세르비아의 나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가 기원 293년에 로마 서부 속주들의 황제가 되었을 때, 갈레리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다뉴브 강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원 306년에 브리타니아에서 임종을 맞고 있던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얼마 안 있어, 콘스탄티누스는 군대에 의해 황제의 지위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다른 다섯 사람이 자신이 황제라고 자처하였습니다. 기원 306년부터 324년까지는 내전이 지속된 시기였으며, 그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두 차례의 출정에서 거둔 승리로 로마 역사에서 한 장을 차지하였고, 그리하여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것입니다.

기원 312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적수인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외곽에서 벌어진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패배시켰습니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그 전투 중에 태양 아래에 빛을 발하는 십자가상이 “이 기호로 정복하라”는 뜻인 인 호크 시그노 빈케스라는 라틴어 글자와 함께 나타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첫 두 글자를 그의 군대의 방패에다 그리라는 지시를 꿈 속에서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그 시대에 맞지 않는 여러 가지 점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사」(A History of Christianity)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환상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와 세부점들에 관한 증거가 서로 모순된다.”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영접하면서, 이교 원로원은 그를 으뜸 가는 황제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 즉 로마 제국의 이교 수석 사제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기원 313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동부 속주들의 통치자인 리키니우스 황제와 제휴 관계를 맺었습니다.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그들은 함께 모든 종교 단체에 숭배의 자유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이 문서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며, 이 문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책의 변화를 알리는 중요한 칙서가 아니라, 관례적인 공식 서한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 10년 이내에 콘스탄티누스는 남아 있던 마지막 경쟁자인 리키니우스를 무찌르고 로마 세계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기원 325년, 여전히 세례받지 않은 상태로, 그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첫 번째 대규모 세계 공의회를 주재하였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를 정죄하였으며 니케아 신경이라는, 기본 신앙에 관한 선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원 337년에 치명적인 병으로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그는 임종이 가까웠을 무렵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에, 원로원은 그를 로마 신들의 지위로 높여 주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전략에서의 종교

3, 4세기의 로마 황제들이 종교에 대해 가졌던 일반적인 태도에 관하여, 「그리스 민족사」(Istoria tou Ellinikou Ethnous)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황제의 왕좌에 오른 사람들은 비록 종교적인 성향이 그처럼 강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시대의 분위기에 부응하여, 종교를 정치 계획의 골격 내에서 우선 순위에 두며 적어도 자기들의 활동에 종교적인 특징을 첨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확실히, 콘스탄티누스는 그 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통치자로서 생애의 초기에 그는 “신(神)의” 후원을 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사라져 가는 로마 신들은 그 역할을 해낼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종교 및 그 밖의 제도들까지 쇠퇴해 가고 있었으며, 그 제국을 다시 견고하게 하려면 무엇인가 새롭고 활력을 주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드리아」 백과 사전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특히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승리를 거두도록 더 나아가 그의 제국을 재조직하도록 그리스도교가 후원하였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어디에나 있던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그의 정치적 기둥이 되었다. ·⁠·⁠· 그는 당대의 고위 교직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 그들이 연합을 그대로 유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그 무렵에는 배교한 상태에 있었고 매우 부패되어 있었음에도—부흥시키고 연합시키는 세력으로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제국을 지배하려는 자신의 웅대한 계획에 이바지하게 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배도한 그리스도교의 기반을 택하면서, 하나의 “가톨릭” 즉 보편적인 종교 아래 백성을 연합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교 관습과 축제들에 “그리스도교” 명칭들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직자들에게는 이교 사제들이 누리는 지위와 보수와 영향력 있는 권력이 부여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종교적인 화합을 추구하였던 콘스탄티누스는 교리적인 진리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받아들이는지의 여부에 근거하여 여하한 반대 견해도 신속히 제압하였습니다. 매우 분열된 “그리스도교” 교회 내에 교리적인 차이가 심각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중개자로서 개입할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 교인들과 제국의 동방에 있는 아리우스 추종자들을 상대하면서, 견고한 통합된 신앙을 만드는 데는 설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게 되었습니다.a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그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네모 안의 “콘스탄티누스와 니케아 공의회” 참조.

콘스탄티누스에 관하여, 역사가인 폴 존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에 관용을 나타낸 한 가지 주된 이유는, 그리스도교에서 비정통 교리를 다루는 일과 정통 교리에 관한 교회 방침을 통제할 기회를 그 자신과 국가에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있는가?

존슨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 숭배를 결코 그만두지 않았으며 태양 형상을 그의 주화에 보존시켜 두었다.” 「가톨릭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양쪽 종교에 똑같은 호의를 나타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 그는 이교 숭배를 돌보았으며 이교의 권리를 보호하였다.” 「이드리아」 백과 사전은 “콘스탄티누스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고 기술하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그의 전기를 쓴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는 그가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는데, 바로 세례받기 전날 [콘스탄티누스는] 제우스에게 희생을 바쳤던 것이다.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 337년에 사망하는 날까지, 콘스탄티누스는 종교 문제의 수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이교 칭호를 지녔습니다. 그의 세례와 관련하여 이렇게 질문해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바와 같이, 그 의식에 앞서 진정한 회개와 전환을 하였는가? (사도 2:38, 40, 41) 그 의식은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헌신의 상징으로서 온전히 물에 잠기는 것이었는가?’—비교 사도 8:36-39.

“성인”?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사람됨이 아니라, 그의 업적에 근거해서 대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인품으로 평가하면, 실로 그는 고대나 현대에 칭호[대제]가 붙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또한 「그리스도교사」라는 책은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가 기질이 난폭하고 화가 나면 잔혹하다는 초기 보고들이 있다. ·⁠·⁠· 그는 인간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다. ·⁠·⁠· 그의 사생활은 나이가 들면서 추악해졌다.”

필시 콘스탄티누스는 심각한 성격상의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 원인은 종종 그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한 역사 연구가는 말합니다. (네모 안의 “왕실 내의 살해 사건” 참조)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다운 인물”이 아니었다고, 역사가 H. 피셔는 저서 「유럽사」(History of Europe)에서 반박합니다. 제반 사실에 따르면, 그는 “새 인간성”을 입은, 그리고 하느님의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선함, 믿음, 온화, 자제—를 찾아볼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골로새 3:9, 10; 갈라디아 5:22, 23.

그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이교의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따라서 로마 제국의 종교적 수장으로서—콘스탄티누스는 배교한 교회의 주교들을 자기 편으로 삼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로마 국교를 맡은 관리들로서 권력과 탁월함과 부를 누리는 지위를 제공하였습니다. 「가톨릭 백과 사전」은 이렇게 시인합니다. “일부 주교들은 궁전의 화려함에 눈멀게 되어, 황제를 하느님의 사자로, 신성한 존재로 찬양하며 그가 하느님의 아들처럼 하늘에서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까지 하였다.”

배교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정부의 호의를 얻게 되어, 점점 더 이 세상 즉 현 세속 제도의 일부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요한 15:19; 17:14, 16; 계시 17:1, 2) 그 결과로, “그리스도교”가 그릇된 교리와 관습—삼위일체, 영혼불멸, 지옥불, 연옥,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 로사리오의 사용, 성상, 형상 등—과 융합되었습니다.—비교 고린도 둘째 6:14-18.

교회는 또한 콘스탄티누스로부터 권위주의적인 경향을 물려받았습니다. 학자들인 헨더슨과 벅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서의 단순성이 변질되었고, 호화스런 의식과 행사들이 도입되었으며, 세속적인 영예와 보수가 그리스도교 교사들에게 제공되었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대부분 이 세상의 왕국으로 바뀌었다.”

참 그리스도교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적 사실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위대함” 이면의 진상을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참 그리스도인 회중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이교 황제의 정치적 방편과 간교한 술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역사가 폴 존슨이 이렇게 질문한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제국이 그리스도교에 굴복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제국과 야합한 것인가?”

순수한 그리스도교에 고착하기를 참으로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의 참 그리스도인 회중을 식별하고 그 회중과 연합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계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교를 식별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방법으로 그분을 숭배하도록 아주 기꺼이 돕고 있습니다.—요한 4:23, 24.

[각주]

a 도나투스파는 기원 4, 5세기의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였다. 그 종파의 신봉자들은 성사(聖事)의 유효성은 교직자의 도덕적인 특성에 좌우되며 교회는 심각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교회 성원 가운데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던, 4세기의 “그리스도교” 운동이었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은 태어난 분이 아니고 시작이 없으시다. 아들은 태어난 분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경우와 똑같은 의미로 하느님이 될 수 없다. 아들은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28면 네모]

콘스탄티누스와 니케아 공의회

세례받지 않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무슨 역할을 하였는가?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 주교들은 황제에게 압도당하여, 단지 두 명만 제외하고 신경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두 달간의 격렬한 종교적 논쟁 후에, 그 이교 정치가는 중재에 나서서, 예수가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왜 그렇게 결정하였는가? “콘스탄티누스는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학에서 제기하는 그 어떠한 의문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라고 「간추린 그리스도교 교리사」(A Short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는 알려 준다. 그가 이해한 것은 종교적 분열이 자신의 제국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국을 결속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후원 아래 니케아에서 작성된 최종 문서에 관하여, 「그리스 민족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교리 문제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무관심, ·⁠·⁠·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교회 내에 연합을 회복시키려는 그의 완고한 고집, 그리고 끝으로 어떠한 종교 문제에 관해서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교’인 자기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다는 그의 확신을 드러내 준다.” 하느님의 영이 그 공의회에서 내려진 결정 배후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비교 사도 15:28, 29.

[29면 네모]

왕실 내의 살해 사건

위의 표제 아래, 「그리스 민족사」는 소위 “콘스탄티누스가 저지른 혐오스러운 집안 범죄”에 관해 기술한다. 왕조를 건립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예기치 않게 이룬 업적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자기 신변의 위험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의심 많은 사람이 되었고 어쩌면 아첨꾼들에게서 부추김을 받아, 우선 그의 조카인 리키니아누스—이미 처형한 공동 황제의 아들—를 적수가 될 만한 사람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살해된 뒤에, 콘스탄티누스의 맏아들인 크리스푸스가 처형되었다. 여기에 크리스푸스의 의붓어머니 파우스타가 관련된 이유는, 파우스타의 친자손이 전권을 잡는 데 크리스푸스가 장애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파우스타의 이 행동은 마침내 그 자신이 극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유가 되었다. 파우스타를 살해하는 데 황후 헬레나가 관련된 것 같은데, 헬레나는 자기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끝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콘스탄티누스를 종종 지배했던 불합리한 정서 역시 그가 많은 친구와 제휴자를 거침없이 처형한 원인이 되었다. 「중세사」(History of the Middle Ages)라는 책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자기 친아들과 아내를—살해는 아닐지라도—처형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조금도 감화를 받지 못했음을 나타내 준다.”

[30면 삽화]

로마에 있는 이 아치형의 문은 콘스탄티누스에게 영예를 돌리는 데 사용되어 왔다

[26면 사진 자료 제공]

Musée du Louvr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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