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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충격과 상처
    깨어라!—1989 | 10월 15일
    • 전쟁—충격과 상처

      “우리는 별다른 사고 없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우리 지휘관은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직업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인솔하여 부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보초병이 우리에게 수하하였다. 우리 지휘관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참호 뒤에 있던 한 병사가 긴장한 나머지 발포를 하였고, 탄환은 지휘관의 얼굴에 맞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헐떡이다 사망하였다.” 영국군 병사, 에드워드 B——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제 2차 세계 대전의 상처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일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전쟁의 진상을 은폐하려 한다. 예를 들어, 일부 선전원들은 제 1차 세계 대전이 “부분적으로는 아마겟돈—선과 악 사이의 최후의 전투 ·⁠·⁠·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중세 마상 창시합에 크리켓의 성격을 더한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권력의 얼굴」[The Faces of Power]) 실제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신문 특파원이자 저술가였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묘사가 더 적절하였다. 그는 그 전쟁이 “지상에서 벌어졌던 것 중에서 가장 어마어마하고 잔인하며 그릇된 대량 살육”—제 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이었다고 기술하였다.

      그와 같은 대량 살육은 금세기와 그 이전에 벌어진 모든 전쟁의 특징을 이루었다. 맬컴 브라운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역사상의 모든 전쟁은, 그 대의나 정당화의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관련된 모두에게 더럽고, 고통스러우며, 천박한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그는 증거 자료를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는 살육 행위와 전쟁의 고통을 직접 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베트남에서 벌어진 온갖 참사가 인간의 경험에 전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전쟁의 새 얼굴」(The New Face of War).

      제 2차 세계 대전중에도 분명히 비슷한 참사가 벌어졌다. 독일과 일본은 황폐되었으며, 군인 및 민간인 전사자가 도합 수백만명에 달하였다. 미국은 약 400,000명, 영국은 450,000명, 그리고 프랑스는 500,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소련은 2천만명 가량의 사망자를 냈다. 「제 2차 세계 대전」(World War II) 책에서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이 대가”로 묘사한 것을 열거하면서, “전쟁의 전체 사망자 수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적어도 5천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민간인 사망자는 제럴드 프리스틀랜드가 그의 저서 「프리스틀랜드—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Priestland—Right and Wrong)에서 “전면 전쟁: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나이가 어느 정도이든 혹은 얼마나 무력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쟁”으로 묘사한 것의 일부였다. 그 전형적인 예가 “연합군이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을 초토화하고, 독일군이 리버풀과 코번트리를 파괴[하였을]” 때라고 그는 말하였다.

      전쟁에서 수천만명이 멸절되는 것은 끔찍스런 일이다. 그러나 “더럽고, 고통스러우며, 천박한”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어떤 영향을 받는가? 그리고 그들은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다음 기사들은 그러한 질문을 검토할 것이다.

  • 전쟁—견디기 어려운 여파
    깨어라!—1989 | 10월 15일
    • 전쟁—견디기 어려운 여파

      전쟁이라는 거대한 괴물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지 않고, 수많은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괴물은 많은 사람에게 신체적, 감정적, 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군인

      분쟁의 대학살을 살아 남은 많은 군인은 불구자가 되고 팔다리가 잘려, 장래 인생의 전망을 망치고 말았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살아 남은 한 노병이 그 전형적인 예인데, 그는 그 전쟁에서 사용된 독가스의 후유증 때문에, 그후 30년의 인생을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가장 대처하기 어려운 것은 흔히 감정적, 심리적 상처다. 키스 로빈스는 「제 1차 세계 대전」(The First World War)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은 아무도 그 경험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평형과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여러 해 후에도 그들은 밤중에 잠을 깨곤하며, 오래 지속되는 어떤 공포를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1916년 솜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진 끔찍한 일에 관해 생각해 보자. 영국군에서만 21,000명이 죽임을 당하고 36,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끔찍스러운 일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충격 때문에 멍해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 한 사람은 자신이 무인 지대를 가로질러 기어가면서 후퇴할 때,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부상당한 동료를 도와주지 못한 일에 대한 생각으로 평생을 시달렸다.”—「선데이 타임스 매거진」 1988년 10월 30일자.

      노먼 J——는 강도 높은 전투 훈련과 실전의 결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게 될까 두렵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면, 본능적으로 공격하려는 반응을 나타낸다.” 충격적인 상황을 오랫동안 겪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 무뎌짐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도무지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게 된다. 또한 긴장 때문에 심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맥주 잔을 깨서 유리 조각을 씹는 사람도 보았다.”

      노먼이 나타낸 반응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베트남 참전병 일곱명 중에 한명은 충격 후에 따르는 스트레스 질환으로 고통을 겪는다”고 한 보도는 알려 주었다. 또 다른 보도는, “많은 사람에게, 전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라는 머리 기사를 실었다. 그 보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백만명이나 되는 베트남 참전병들이, 아직도 매일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전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 어떤 사람들은 자살을 하였고 자기 가족을 학대한 사람도 있다. 불현듯 되살아나는 기억, 악몽 및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 그런 사람들은 깊고 지속적인 심리적 상처로 고통을 겪었다.”

      때로는 이런 것이 범죄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제럴드 프리스틀랜드가 말한 대로, “어떤 환경에서는 살인 행위 때문에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고, 다른 환경에서는 훈장을 탈 수도 있는” 경우에, 사람들이 생명과 높은 도덕 원칙에 어느 정도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프리스틀랜드—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한 베트남 참전병은 이렇게 말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살인 청부업자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고향의 포드[자동차] 공장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잊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뉴스위크」, 1988년 7월 4일자.

      민간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는 이렇게 알려 주었다. 양차 세계 대전은 “한 세대 전체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 ·⁠·⁠· 그와 같은 일을 겪은 까닭에,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남았으며, 이 상처는 손자대와 증손대까지 전해 내려간다. ·⁠·⁠· 드러나지 않던 손상의 증후들이 40년 후에 나타나고 있다.” 그와 같은 손상은 세계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메리 C——는 제 2차 세계 대전중 영국에서 독일의 폭격 목표 지점 근처에 살았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기 위해서 속으로만 감정을 억제하느라고, 담배를 많이 피우게 되었다. 마침내는 신경 쇠약으로 밀실 공포증에 걸리고 말았다.”

      전선의 반대쪽, 독일에는 실리 P——가 있었다. “피난민으로서 우리는 굶주림의 의미를 배웠다”라고 그 여자는 말하였다. 그는 또한 슬픔의 의미도 배웠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전사자나 실종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집안의 남자들을 생각했다. 내 약혼자의 누이인 애니는, 쌍둥이를 출산하기 직전에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쟁은 많은 가족에게서 남자들과 가정과 소유물을 빼앗아 갔다.”

      이탈리아의 안나 V——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또 다른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전쟁의 공포와 가족의 고통으로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년 후, 어머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포로 수용소에 있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여동생은 영양 실조 때문에 그리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탓으로 사망하였다. 하느님께서 고통과 잔학 행위를 허락하셨다는 것 때문에, 나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잃고 말았다.”

      그와 같은 상황 변동, 별거 및 사별의 충격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흔히 인간적인 면에서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포클랜드 전쟁중에 과부가 된 한 젊은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고 과부가 된 수많은 사람의 느낌을 이러한 말로 표현하였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곳 때문에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내게 아무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 큰 문제는 감정적 충격을 극복하는 일이다.”—「선데이 텔레그래프」, 1982년 10월 3일자.

      또한 핵전쟁 생존자들이 입은 신체적, 감정적 상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1945년에 기록된 보고서, 「히로시마의 그림자」(Shadows of Hiroshima)는 히로시마 폭격의 끔찍한 여파에 대해 충격적인 사실을 상기시킨다.

      “히로시마에서는, 최초의 원자 폭탄이 도시를 파괴하고 세계를 뒤흔든 지 3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의문스럽고도 끔찍하게—그 대격변에서 부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로서는 원자 재앙이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죽어가고 있다. 히로시마는 폭격당한 도시 같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괴물 같은 스팀롤러가 그 위를 지나가면서 깔아 뭉개 없앤 것 같다.” 40여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 핵폭발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다.

      어린이

      세계의 전쟁 지역에서 가장 비극적인 피해자로는 어린이를 들 수 있는데, 에티오피아, 레바논, 니카라과 및 캄푸치아 같은 곳에서는 많은 어린이가 군대에 징집되어 왔다.

      “이란에서, 지뢰밭을 가로질러 소년들을 보낼 때, 분명한 것은 소년들이 더 고분고분하여 다루기 쉽고, 성인 병사들의 경우에는 결코 불가능한 방식으로 오랜 기간 동안을 극도의 감정적 열기에 휩싸이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라고 런던의 「타임스」지는 알려 주었다. 이런 일이 분명히 그와 같은 어린이들을 잔인하게 만드는 영향을 미칠 것임을 논하면서, 한 인권 단체 의장은 “그런 어린이들이 어떻게 건전하고 균형잡힌 어른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하였다.

      그 질문은 로저 로전블랫의 저서 「전쟁의 어린이들」(Children of War)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는 전쟁밖에 모르는 지역에서 자란 어린이들과 회견하였다. 많은 어린이는 끔찍스러운 일을 겪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다른 어린이들, “특히 부모를 베트남에 두고 떠나 바다에서 표류하는 많은 어린이 같은 경우는 심한 괴로움과 혼란을 겪고 있는 듯하다.”

      전쟁을 살아 남은 피해자들—남자, 여자 및 어린이들—은 전쟁이 그들의 생활에 만들어 놓은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다른 식구들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비극이 끝날 때가 있을 것인가?

      [6면 삽입]

      ‘거기에서 우리는 살인 청부업자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고향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잊기로 되어 있었다!’

  • 전쟁—여파를 극복하는 길
    깨어라!—1989 | 10월 15일
    • 전쟁—여파를 극복하는 길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본지는 전쟁의 몇몇 피해자들과 회견하였다.

      보브 허니스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서태평양의 이오지마(硫黃島) 전투에 참전했던 수만명의 미국 해병대원에 속해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싣는 이유는 충격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극도의 충격적 경험을 한 사람들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상처

      “우리가 이오지마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2월 19일, 오전 8시 30분이었다. 전함 테네시 호의 대포가 우리 뒤에서 침묵을 지키자, 적 해안 포대의 포격에 의해 우리의 상륙용 주정(舟艇)이 마구 흔들렸다. 감정의 열기가 극에 달하고, 앞으로 하게 될 전투로 인해 흥분이 고조된 나는 선발 공격 부대를 따라갈 때, 요란스럽기 그지 없는 상황 속에서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겨!’라고 외쳤다.

      “해변에 상륙했을 때, 맡을 수 있는 냄새라고는 화약과 화산재와 불타는 장비의 구역질나는 냄새뿐이었다. 우리의 상륙용 주정은 포격을 당했다. 운전병은 즉사했고, 우리 장비는 모두 파괴되었다.

      “그 밖의 죽은 해병대원들의 모습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한 대원은 모래 속에 얼굴이 파묻혀 있었다. 발 부분이 달아난 그의 군화는, 한때 젊고 튼튼했던 다리에, 무릎까지 완전히 끈이 묶여 있었다. 서둘러 판 참호 속에 몸을 웅크리고서 오른쪽을 보니, 소총을 가슴에 안고 앞쪽을 향한 채로, 어깨까지 머리 부분이 없는 또 다른 해병대원의 모습이 보였다. 해변에는 해병대원들의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많은 경우는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팔다리가 잘려 있었다. 이 일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둘째 날에 나는 아군 진지 중 하나를 점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실로 소름끼치는 광경을 보았다! 내가 처음 본 해병대원의 팔다리를 파열탄이 날려 버렸던 것이다. 그의 철모와 턱끈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마치 깊은 명상에 잠긴 것처럼, 똑바로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속을 채운 장난감 인형이 부서진 것처럼 흩어져 있는, 그 포병의 다른 신체 부분들은 부드럽고 검은 화산재 속에 흩어진, 찢겨진 살점에 지나지 않았다.

      “살육 행위는 셋째 날에도 종일 계속되었다. 그런데다가 시체가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맥을 못출 지경이었다. 어디에나 마찬가지였다. 피할 곳이라곤 전혀 없었다.

      “나흘 동안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나서, 2월 23일에, 지금은 유명해진, 수리바치 산에 미국기를 게양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사기가 충천해지기는커녕, 절망밖에 느끼지 못했다. 어디에나 시체가 있었다. 생명이 너무도 값어치 없어 보였다. 야만적인 전투는 3월 26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수주일 동안의 끊임없는 살육 행위 후인 그때 마침내 이오지마를 점령한 것이다. 실로 엄청난 유혈극이었다! 크기가 20평방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섬에서 모두 26,000명이나 되는 미국인과 일본인이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여파

      “내가 해병대에서 제대하고 가족과 재회했을 때는 매우 행복한 때가 되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커녕, 오히려 내 속에 쌓여 왔던 것—끔찍한 공허감과 무력감—이 이제는 겉으로 드러났다.

      “의문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생명이 그처럼 값어치 없는 것이라면,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참으로 관심을 가진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가? 내가 경험한 일 때문에 여생을 줄곧 시달릴 것인가? 심지어 아내, 메리와 결혼한 후에도, 괴로움은 계속되었다. 지속적이고 행복한 장래의 전망은 전혀 볼 수 없었고, 오로지 땅과 그 중의 모든 생명이 마침내 멸망될 때까지 전쟁과 더 지각 없는 살육 행위가 계속될 전망밖에 보이지 않았다.

      해결책을 발견함

      “결혼 직후, 아내와 나는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의 방문을 받았다. 그 기회에 전쟁과 고통 및 인생의 목적에 대해 궁금히 여기던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이 곧바로 성서에서 나왔다.

      “그렇다.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곧 없애 주실 인자한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시 83:18; 계시 21:1-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전쟁을 결코 승인하지 않으신다. (시 46:9; 이사야 2:4; 요한 18:36) 땅은 결코 핵참사로 멸망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낙원 같은 집으로서, 땅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시 37:29; 이사야 45:18; 계시 11:17, 18.

      “성서에 들어 있는,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약속들에 관하여 계속 연구함에 따라, 마음속의 공허감이 점차로 메워졌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이야말로 땅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올 유일한 현실적 수단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마겟돈 전쟁으로 마침내 땅에서 모든 악이 제거될 것이다.—다니엘 2:21, 22; 마태 6:10; 계시 16:14-16.”

      하나님의 약속에 희망을 두라

      다른 사람들도,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분이 일시적으로 악을 허락하시는 이유에 관한 진리를 배운 것이, 전쟁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가장 강력한 요소였음을 확증한다.

      이것은 때때로 전문적인 의료상의 도움이 필요치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성서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믿을 만한 약속에 기초를 둔 진정한 희망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들을 인내할 내적인 힘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의 상처로부터 개인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베풀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전쟁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한 사람인 메리 C——는 “이런 식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심을 나타내고 격려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장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며, 과거의 비극에 묻혀 있지 않도록 도우라”고 그는 충고한다. 그렇다. 참을성을 나타내고 동정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입장을 참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장래에 희망을 두도록 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전쟁인 아마겟돈이 어떻게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모든 악을 대항하는 하나님의 전쟁인 아마겟돈은 무고한 피해자가 없는 전쟁일 것이다. 그 전쟁은 공의와 선의 원칙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쟁은 ‘공의롭게’ 수행되어, 악한 자들만 죽게 될 것이다.—계시 19:11; 잠언 2:20-22.

      아마겟돈은 끔찍한 후유증이나 거듭 되살아나는 악몽이나 그 밖의 심리적 상처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세계에서 이사야 65:17-19에 묘사된 예언적 장면이 성취될 것이다. “이전 것은 기억되[지] ·⁠·⁠· 아니할 것이라 ·⁠·⁠·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과거의 잔인한 전쟁과 폭력의 피해자였던 모든 사람, 심지어 죽은 자들도 이 전쟁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것이다. (시 72:4, 12-14; 요한 5:28, 29) 생각해 보라—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신 평화로운 낙원이 회복될 일을.

      보브 허니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서에서 알려 주는 이 희망이 전쟁의 여파를 극복하는 비결이다. 전쟁의 상처로 피해를 당한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은 희망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희망이야말로, 성서에서 말하는 ‘영혼의 닻’이다.”—히브리 6:19.

      [8면 삽입]

      “내 속에 쌓여 왔던 것—끔찍한 공허감과 무력감—이 이제는 겉으로 드러났다”

      [7면 삽화]

      이오지마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섬의 모형을 연구했다

      오른쪽 맨 위가 허니스

      [자료 제공]

      U.S. Marine Corps

      [9면 삽화]

      오늘날의 보브와 메리 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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