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생이 삶의 신비를 푸는 열쇠인가?깨어라!—1994 | 6월 15일
-
-
환생이 삶의 신비를 푸는 열쇠인가?
우리에게 전생(前生)이 있는가?
죽은 후에 어떤 형태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을 들으면 환생(還生)이라는 교리가 생각날지 모른다.
「신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의하면, “환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영혼이 인간이나 동물 혹은 어떤 경우에는 식물과 같은 존재로 한 번 이상 연속해서 재생 즉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
환생은 동양 종교 특히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와 같이 인도에서 기원한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인도의 힌두교인들은 삶을 죽음과 재생의 연속적인 순환으로 본다.
하지만 좀더 근년에는 서반구에 사는 많은 사람이 환생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청소년도 많이 있다. 캐나다 「선데이 스타」지의 한 칼럼니스트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처럼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다분히 “동양의 종교 사상이 1960년대부터 서구 사회에 미치기 시작한 영향의 결과”이다.
환생에 대해 관심이 생긴 다른 이유는 일부 유명 인사들이 목청을 높여 자기들에게 한 번 이상 전생이 있었노라고 정색을 하며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나 교사 같은 여러 전문직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라디오, TV, 잡지, 기타 뉴스 매체에서 환생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대단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일부 여론 조사에 의하면,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환생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대략 네 명 중 한 명에 이르렀다.
전생을 경험했다는 주장
여배우 셜리 매클레인은 「레이디스 홈 저널」지의 필리스 배틀리와의 회견에서 자신이 여러 번 시간의 흐름에서 뒤로 “여행”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과거의 삶이 여러 가지 기억난다—나는 어떤 때는 남자였고, 어떤 때는 여자였다.”
「귀환」(Coming Back)이라는 책에서, 의학 박사 레이먼드 무디는 학생들과 그리고 그 외 여러 사람에게 행한 실험 결과를 기술하였다. 그의 말은, 최면을 통해 그들을 출생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더니 그들이 전생이 기억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에스키모 집단 사회에서 에스키모로 살았다고 말하였고, 다른 사람은 자기가 수천 년 전 ‘석기 시대’에 살았다고 단언하였다.
무디 박사 자신도 아홉 번의 전생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나무 꼭대기에서 일종의 “선사 시대 인간의 형태”로 산 일로부터, 로마 제국 시대에 살다가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무디 박사의 전생은 다양하였다.
최면을 사용해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출생 이전 가상의 시간으로 데려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 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의사들은 최면을 이용해서 정서 장애를 치료해 왔다. 불가사의한 공포증도 그 문제를 전생의 어떤 사건과 연관지어 추적함으로써 해소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사상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사경 체험담
일부 사람의 사경 체험담은 환생 사상을 대중화하는 데 한몫 했다. 「삶 후의 삶」(Life After Life)이라는 책에서 무디 박사는 약 50명의 사경 체험담으로부터 알아낸 사실에 대해 보고한다.
그들의 경험이 다양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정해진 틀이 있다고 무디 박사는 생각한다. 그들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여행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유로이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밝은 빛을 향해 터널 속을 빠르게 통과해 올라가는 것을 감지했으며, 터널 끝에 가서는 죽은 지 오래 된 가족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깨어났다. 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단계를 전부 경험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험이 당사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로 인해 더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고, 삶에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며, 삶에 참다운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없다.
환생을 믿는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을 보면 인간 영혼이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재생 사상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리는 신빙성이 있는가? 환생이 참으로 삶의 신비를 푸는 열쇠를 제공하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전생이 있는가? 우리는 다시 살게 되는가? 인간에게는 죽을 때 육체를 떠나는 영혼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다음 기사에서 논의될 것이다.
[4면 삽입]
환생은 동양 종교의 기본 교리이다
[4면 삽화]
힌두교의 삶의 바퀴
-
-
환생 현상에 대한 설명깨어라!—1994 | 6월 15일
-
-
환생 현상에 대한 설명
환생 이론에 대한 한 가지 이의는, 지상에 사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전생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기억은커녕, 그들은 자기에게 전생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어디서 본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분명히 자기가 알고 있는 한 처음 간 곳인데도 어떤 집이나 시가지, 풍경이 낯익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환생 이론을 빌리지 않고서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 서로 비슷하게 생겨서, 전에 가 본 적이 없는 곳인데도 가 본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이 세상 어떤 곳에 있는 집이나 사무실, 상점, 시가지 혹은 풍경 등이 다른 곳에 있는 것들과 비슷할 경우가 많다. 전에 본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전생에 그 곳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단지 낯익은 곳과 흡사할 뿐이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외모가 아주 비슷해서 꼭 닮았다는 말을 듣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의 버릇을 보면 현재 살아 있는 다른 어떤 사람 혹은 심지어 죽은 사람이 생각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전생이 아니라 현생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외모나 개성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전생에서 알게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때로는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곧잘 착각한다. 하지만 양편 모두 전생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현생에 살던 사람들이다. 환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최면의 영향
최면의 영향 아래 경험하는 일도 환생 이론을 빌리지 않고 설명할 수 있다. 정신의 잠재 의식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식의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서적, 잡지, TV, 라디오 그리고 그 외의 경험과 관찰을 통해 이 창고에 지식이 들어온다.
이러한 지식은 직접 혹은 즉시 사용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잠재 의식 세계의 한쪽 구석에 저장된다. 잠재 의식은 마치 당장 사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도서실 한쪽 구석 서가에 꽂아 둔 책과 흡사하다.
하지만 최면 상태에서는 피실험자의 의식에 변화가 생겨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기억을 전생의 것으로 해석하지만, 실은 잠시 잊었던, 현생의 경험에 불과하다.
하지만 순리적으로 설명하기가 다소 어려운 몇 가지 경우가 있다. 한 가지 예는 최면의 영향 아래서 갑자기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는 경우이다. 그 언어는 이따금 알아들을 수 있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환생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 전생에서 사용하던 언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위 방언을 하는 일은 신비적 혹은 종교적 황홀경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은, 그 일이 전생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단지 현생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이 힘이 무슨 힘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파운틴 트러스트와 영국 국교회 복음 전도회의 공동 선언문에는 방언을 하는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슷한 현상이 신비적/악귀적 영향 아래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현상을 우리에게 전생이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릇된 결론으로 비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경의 체험
그러면 사람들이 사경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은 몇 가지 순리적인 방법으로 훨씬 잘 설명된다.
프랑스의 과학 잡지 「과학과 생명」(Science & Vie) 1991년 3월 호에서는, 사경에서 체험하는 여러 단계를 가리켜, “환각에서 흔히 있는 전형”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온 것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체험을 사경에서만 겪는 것은 아니다. “피로, 열병, 간질 발작, 마약 남용”과 관련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신경 외과학의 개척자인 빌더 펜필트는 국소 마취를 하여 간질 환자를 수술하다가 흥미있는 발견을 했다. 뇌의 여러 부위를 전극으로 자극함으로써, 환자가 자기 몸에서 벗어난 느낌을 갖고 터널 속을 여행하여 죽은 친척들을 만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있는 점은, 사경을 체험해 본 어린이들이 죽은 친척이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인 급우나 교사를 만난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그러한 경험은 특정한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경험은 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사후의 어떤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리처드 블래커 박사는 「미국 의학 협회지」(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죽어 가는 것, 즉 신체적으로 위기를 겪는 것은 과정이며, 죽음은 상태이다.” 예를 들어, 블래커 박사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처음 비행기 여행을 하는 사람에 관해 말한다. “비행 자체가 유럽[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는 기술한다. 비행기가 유럽을 향해 출발했다가 출발 몇 분 후에 선회해 돌아와 버리면 관광객이 유럽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혼수 상태에서 돌아온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경에 놓였던 사람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경험한 것이다. 죽기 몇 초 전이라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간 것이지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심장 박동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된 사람일지라도, “죽었다”고 할 수 있는 무의식 상태의 순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사실상 기억할 수 없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깐 정지해 있는 그 동안이 아니라 그것에 다가갈 때 일어난 일일 것이다.
사경의 체험담이 나오는 출판물들을 보면, 거의 언제나 긍정적인 면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알려진 바로는 부정적인 경험도 있다. 프랑스의 정신 분석학자 카트린 르메르는 그러한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IANDS[국제 사경 연구 협회]가 설정해 놓은 양상에 들어맞는 [사경의]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할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기억이 없다
사실, 우리는 전생이든 사후 생명이든 현재의 삶 외의 다른 삶을 경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실제로 살아온 삶 이외의 어떤 일에 대해 사실상 기억할 만한 것이 없다.
환생을 믿는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상황을 개선할 새로운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에게 정말로 전생이 있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렸다면, 그러한 기억 상실은 커다란 장애 요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그것을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른바 환생 요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최면에 의해 전생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문제들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이유는 어떤 일인가를 개선하기 위한 것인데 바로 그 어떤 일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현생에서도 기억 상실은 신체 장애로 간주된다. 환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선한 사람들만 인간으로 재생하기 때문에 그러한 망각은 문제 될 게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타당한 주장이 못 된다. 선한 사람들만 인간으로 재생한다면 모든 악한 사람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악한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 누구도 또 한 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인간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환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혹시 ‘환생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말할지 모른다. 다음 기사에서 이 질문을 고려해 보자.
[6면 삽입]
우리 정신의 잠재 의식은 마치 한쪽 구석에 있지만 후에 빼낼 수 있는 자료가 모여 있는 도서실과 같다
[7면 삽입]
“죽음은 상태”이지 과정이 아니다.—리처드 블래커 박사. 「미국 의학 협회지」에서
-
-
하나님의 말씀은 환생을 가르치는가?깨어라!—1994 | 6월 15일
-
-
하나님의 말씀은 환생을 가르치는가?
환생 교리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기 위해 성서를 조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서 어디에서도 인간에게 전생이 있다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생”이나 “영혼의 전생(轉生)”, “불멸의 영혼” 같은 표현조차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환생을 믿는 일부 사람들은 이처럼 성서의 뒷받침이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에는 환생 사상이 아주 보편적이었기에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고 말하려 한다. 환생 교리가 아주 오래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됐든 또는 얼마나 보편적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성서에서 그것을 가르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디모데 후서 3:16, 17(「신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책망하고 사물을 바로잡고 의로 징계하는 데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완전히 갖추게 해줍니다.” 그렇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며, 인간 가족에 대한 그분의 의사 전달 수단이다. 그리고 바울이 기술한 것처럼, 성서는 정직한 조사자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여 인생의 모든 중요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 완전히 갖추게’ 해준다.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받았[읍니다].” (I 데살로니가 2:13, 「새번역」) 성서에는 불완전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서가 인간의 생각과 다른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생각이 여러 해 동안 대중의 호응을 얻어 왔다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독자는 ‘성서 어떤 부분에는 적어도 환생에 대한 암시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할지 모른다.
잘못 이해하는 성구들
환생을 믿는 사람들은 성서 마태 복음 17:11-13에 간단하지만 그 문제가 언급되어 있다고 말한다. 거기 보면 예수께서는 침례자 요한을 고대 예언자 엘리야와 연관시켜 말씀하신다. 그 구절은 이러하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느니라] ···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침례자”, 「신세」]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의 이 말씀은 침례자 요한이 환생한 예언자 엘리야라는 의미였는가? 요한 자신은 자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은 사람들이 “네가 엘리야냐”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분명히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요한 1:21) 하지만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메시야 앞에 앞서 갈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 (누가 1:17; 말라기 4:5, 6) 다시 말해서, 엘리야와 견줄 만한 일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침례자 요한은 “엘리야”였다.
요한 복음 9:1, 2에 이러한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환생을 믿는 일부 사람들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을 보면 전생에 죄를 지었음에 틀림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어떤 생각에서 그런 질문을 했든, 결정적인 요인은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다. 그분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셨다. (요한 9:3) 이 말씀은, 불구가 된 것이 전생의 죄 때문이라고 암시하는 환생 교리와 맞지 않는다.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도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을 바울도 강조해서, 에서와 야곱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기술하였다.—로마 9:11.
환생이 아니라 부활
하지만 성서가 환생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성서의 소식은 병, 슬픔, 고통,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보다 훨씬 위안이 되는 내용을 제시한다. 성서가 제시하는 것은 위안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진리 곧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바울은 격려적인 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있읍니다. ··· 그 희망은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50회 이상 나오는데,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인 믿음의 하나의 기본 교리라고 말한다.—사도 24:15, 「새번역」; 히브리 6:1, 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된다는 것은 분명히 죽음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성서 어디에서도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인간에게 사망 시 육체와 분리되는 불멸의 영혼이 있어 하늘이나 지옥에서 영원한 운명에 처하거나 환생한다면, 부활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 100개 정도의 성구가 인간 영혼이 불멸이 아니라 멸성이며 죽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성서는 일관성 있게 죽음은 생명의 반대, 즉 존재와 대조되는 무존재라고 말한다.
죽음 혹은 무존재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죽음은 형벌이었지 어떤 다른 곳에서 불멸의 생명을 누리기 위한 관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나온 곳—땅의 흙—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 3:19) 그들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시어 지상의 에덴 동산에 두시기 전에도 없었고 그들이 죽은 후에도 없었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은 잠이나 쉼에서 깨어나는 것에 비유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부활시키러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한 11:11) 예언자 다니엘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그만 가서 쉬어라. 세상 끝날에 너는 일어나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다니엘 12:13, 「공동번역」.
지상에서의 영원한 생명
죽음으로부터 부활되는 사람에게 어떠한 몫이 있을 것인가? 성서는 두 종류의 부활, 즉 하늘 부활과 땅의 부활에 대해 말한다. 땅의 부활은 전에 살다 죽은 사람 대다수의 몫이 될 것이다. 매우 소수만이 하늘 부활을 받아 하나님의 하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 (계시 14:1-3; 20:4) 땅의 부활은 언제 시작될 것인가? 현 악한 제도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되고 “새 땅” 즉 의로운 새 인간 사회가 실현된 다음에 시작될 것이다.—베드로 후 3:13; 잠언 2:21, 22; 다니엘 2:44.
“새 땅”에서는 더 이상 병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죽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전망으로 대치될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시 21:4) 또한 시편 필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시 37:29)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 5:5.
하나님의 이러한 웅대한 약속을 환생 교리와 비교해 보라. 환생 사상에 의하면, 우리는 거듭거듭, 지금과 다름없는 낡고 부패한 사물의 제도로 돌아와 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악, 고통, 병, 죽음이라고 하는 거의 끝없는 순환에 갇히게 됨을 의미한다. 얼마나 절망적인 전망인가!
따라서 성서는 ‘우리에게 전생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다시 살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 외의 다른 삶을 산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지속적인 것, 아니 영원한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 우리에게는 이 세상 끝을 살아 남아 죽지 않고 하나님의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디모데 후 3:1-5, 「신세」; 계시 7:9-15) 혹은 하나님의 신세계가 도래하기 전에 죽는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부활되어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희망이 있다.—누가 23:43.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실천한다면,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그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 11:25, 26.
[8면 삽입]
아담은 불멸의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망 시 흙으로 되돌아갔다
[9면 삽화]
하나님의 말씀은 환생이 아니라 부활을 가르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