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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95 10/1 19-23면
  • 참 믿음을 찾으려는 나의 힘들고 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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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믿음을 찾으려는 나의 힘들고 긴 투쟁
  • 깨어라!—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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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5 10/1 19-23면

참 믿음을 찾으려는 나의 힘들고 긴 투쟁

나는 늘 지옥에 가게 될까 봐 두려웠고, 내가 천국에 갈 만큼 선하지 않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행여나 연옥에라도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면하려고 열심히 기도하며 촛불을 밝혔습니다.

미국, 오리건 주의 얼어붙은 산길에서 내 자동차 타이어가 헛돌며 미끄러졌을 때, 정말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눈길에서 운전하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이 곳 낯선 길에서 심한 눈보라를 만난데다가, 길 양옆은 낭떠러지이고, 자동차 보닛 너머로는 앞이 거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하느님께 함께 탄 사람과 나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그 보답으로 다시 교회에 나가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나는 다시 교회에 나가겠다는 서약을 지켰습니다. 전화 번호부를 뒤져서 시애틀에 있는 가까운 교회를 찾아낸 다음, 그 주 일요일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에서도 이전에 경험한 것과 동일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 교회도 전에 다니던 교회와 동일한 것, 즉 돈을 강조하였습니다. 연보 바구니를 세 번씩이나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숭배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하느님께 기도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에, 나는 군인 가정에서 철저한 가톨릭교인으로 양육받았고, 가톨릭 학교에 다녔습니다. 교리 문답서를 배울 때, 수녀에게 “우리는 왜 도무지 성서를 사용하지 않나요?”라고 질문하던 생각이 납니다. 나는 믿음이 약하다는 말을 들었으며, 부모님은 내 믿음이 약하다는 통지를 여러 차례 받으셨습니다.

나는 하느님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양육받았습니다. 그분에 대한 내 개념은 모호하였습니다. 그분은 숭배받으실 만한 하느님이면서도 우리가 제대로 숭배하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고초를 주시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열일곱 살 때쯤, 나는 부모님께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보다는 오히려 다른 곳들에서 하느님이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종종 바닷가를 거닐었으며, 뭔가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그 문제에 관해 하느님께 말씀 드리곤 하였습니다. 사제를 통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빌면서,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을 이렇게 말씀 드릴 수밖에 없다고 아뢰었습니다. 나는 또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보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히피 시대였는데, 내 친구들은 무엇이든지 좋다는 식으로 성과 마약에 빠져 있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 낙태, 마약 남용 등의 슬픈 결과를 보았고, 내가 거기에 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찾아 나서다

절친한 친구, 베키와 나는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찾기 위해 대학을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이 있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워싱턴 주에 사는 베키의 어머니를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이 상태에서 좀 벗어나 봐야겠다고,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잊어버리기 위한 시도를 해봐야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오리건 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눈보라를 만난 것이 바로 이 때입니다. 시애틀에서 그 일요일에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떠난 나는, 집에 돌아가 베키의 어머니인 에드나와 대화를 하면서 내 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베키의 어머니는 내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왕국회관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기억이 납니다. 사흘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왔을 때, 이제껏 보던 중 가장 그리스도인다워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클레런스 뫼니에와 에디스 뫼니에 부부였습니다. 클레런스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졸업생으로서 눈에 띄게 성경에 익숙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시다고 설명해 주었을 때 나는 즉시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치 내 머리 속에 불이 켜진 것 같았습니다. 첫 연구는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 다음 연구를 위해 이틀 후에 다시 왔습니다.

나는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곧 부모님께 전화를 하여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시며 여호와의 증인이 성서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나는 부모님이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고 내가 배운 내용을 알게 되면 나 못지않게 기뻐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었으며 무척 심란해하셨습니다. 두 분은 나를 다시 캘리포니아로 데려가려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당장 회중과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왕국회관의 위치를 알아내어 다음 집회에 가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한 자매가 나를 보고 방긋 웃기에, 그 자매에게 나하고 연구를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는 깜짝 놀라더니 재빨리 내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고립된 느낌이 들기 시작했던 터였으므로, 회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참으로 기뻤습니다. 나에게는 교제가 필요하였습니다.—히브리 10:24, 25.

가족의 반대가 시작되다

부모님은 여전히 내 새로운 종교를 몹시 반대하셨고 나를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셨습니다. 부모님이 진단 결과를 묻자, 의사는 내가 반항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반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내 의문에 대답해 주고 삶의 이유를 알려 주는 가치 있는 것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내가 왕국회관에 가면 부모님은 몹시 화를 내셨습니다. 두 분은, 내가 어디든지 원하는 대학에 가서 무엇이든 원하는 분야를 전공할 수 있고 또 그 학비를 대주겠지만, 여호와의 증인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특히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유난히 기분이 상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여호와의 증인이 되느니 차라리 매춘부가 되는 게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뭐가 되어도 좋지만, 여호와의 증인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집을 나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27:10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한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우리 회중의 한 자매에게 빈 집이 있었는데, 그 자매는 내가 그 집에서 살게 해주었습니다.

나처럼 아주 새로운 자매 한 사람을 왕국회관에서 만났습니다. 그 자매의 이름은 크리스 켐프였는데,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어 함께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1969년 7월 18일에 로스앤젤레스의 다저 스타디움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회중 집회에서, 우리는 전 시간 파이오니아인 데이나 울프 자매를 눈여겨보곤 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대단히 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자매에게 살 곳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훌륭한 동거인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집회에서 처음으로 연단에 올라갔던 때가 생각납니다. 실연을 맡아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연습하였습니다. 서적을 제공하는 실연이었는데, 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 내용을 쪽지에 적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습니다. 연단에 올라서서는 그만 할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이 말을 아마 다섯 번은 했나 봅니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청중을 보고 “보통 때는 집주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구겨진 쪽지를 꺼내어 내가 말하게 되어 있는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습니다. 다 끝낸 뒤, 내 자리로 돌아와서 울었습니다.

내게 실연을 부탁한 형제가 청중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제공 연설에서 어떤 점을 배웠습니까?” 회관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내가 일어나서, 청중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형편없었는데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게 당연하지요!” 그리고 나서 다시 앉아 계속 울었습니다. 지금은 연단에서 그 때보다는 더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때보다 더 못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데이나는 자기와 함께 더 필요한 곳으로 가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사람을 찾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날 밤, 크리스와 나는 우리 방으로 가서 그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이튿날, 우리는 데이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가면 어떨까요?” 데이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침례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기에도 미흡한 새로운 전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데이나가 짝으로 생각한 자매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데이나는 워치타워 협회에 편지를 보냈고, 협회는 우리 셋 모두를 켄터키 주의 미들즈브러로 임명하였습니다.

가족의 반대가 수포로 돌아가다

우리가 이삿짐을 꾸리고 있을 때 부모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내 차를 캘리포니아 주 밖으로는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내 차의 대금 지불에 대한 보증인이었으므로, 만일 내가 주 밖으로 차를 가져가려 한다면 경찰에 알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한 송별회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형제가 내게 오더니, “자동차 대금으로 3000달러를 갚으셔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는 자기가 그 대금을 지불해 주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우리 회중 형제들을 만나 보도록 마련해 주었는데, 형제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하시지요. 여호와의 영과 싸우지 마십시오.” 그래서 자동차 대금이 지불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몹시 화가 나셨지만, 돈을 대신 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셨습니다. 우리는 다음날 켄터키 주로 떠났습니다.

미들즈브러에 도착하자, 이전 왕국회관의 뒤에 딸린 집을 우리가 살도록 내주었습니다. 단열재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집이었습니다. 겨울에는 몹시 추웠습니다. 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였지만, 집세를 내고 살 여유가 없었던 우리로서는 그 집이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난방기가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심지어 잘 때도 옷을 여러 겹으로 껴입었습니다. 아침에는 때때로 바닥 전체에 살얼음이 깔려서, 양말이 바닥에 들러붙곤 하였습니다. 밤새 변기의 물이 얼어붙곤 했으므로, 화장실에는 언제나 얼음을 깰 망치를 놓아 두었습니다.

크리스와 나는 전 시간 봉사자가 된 지 겨우 다섯 달밖에 안 되었지만, 벌써 좋은 성서 연구를 많이 사회하고 있었고, 그 곳 생활은 흥미진진하였습니다.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우리는 모두 이 파이오니아 봉사의 처음 몇 달 동안에 매월 평균 150시간을 훨씬 웃돌게 봉사하였습니다. 데이나는 여름에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고 싶어서 뉴욕에 있는 증인들의 본부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곳에 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함께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하자, 데이나는 봉사부로 갔고, 우리도 따라갔습니다. 놀랍게도, 봉사부에서는 우리 셋 모두를 전 시간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성구를 잘못 적용하며 약속을 어기다

내가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바로 그 달에, 사탄은 나를 위축시키려는 노력을 한층 더 기울였습니다. 은행에서 명세를 밝힌 청구서를 보내 왔는데, 내가 받은 대학 교육에 대한 학비를 지금부터 매달 32.80달러씩 지불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평균 A학점을 받으면 대학교 학비를 대주시겠다고 부모님이 늘 말씀하셨는데, 나는 실제로 평균 A학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께 편지를 쓰면서, 이 문제에 있어서 나를 여호와의 증인으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딸로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내 교육에 관해서 합의했던 점, 즉 아버지가 요구하는 학점을 유지한다면 언제나 내 학비를 지불해 주기로 한 점을 부드럽게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나는 한 달에 겨우 50달러를 받아 생활하기 때문에 그 금액을 계속 지불해 나가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므로, 죄송하지만 이런 부담을 내게 지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한 달에 32.80달러를 지불한다면 생활비가 17.20달러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답장에서 성구로 응답하며, 이렇게 쓰셨습니다. “네가 항상 성서를 사용하니까,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십시오’라는 성구를 생각해 봐라. 너는 교육받은 것을 유익한 데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그 비용을 네가 은행에 지불해야 한다.”—데살로니가 둘째 3:10.

이 짧고 무뚝뚝한 편지를 받고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를 몰고 혼자 어디엔가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울음이 멎으면서 화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는 부모님이 아니라 사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탄에게 내게서 물러가라고,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며 내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그만두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소리 쳤습니다.

많은 고생, 많은 축복

나는 시간제 일자리를 구하여 한 주에 20시간씩—하루는 11시간, 다음날엔 9시간—일하면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중고 의류점을 이용하는 법도 재빨리 익혔습니다. 겨울철 옷으로 1달러에 치마 네 개를 장만하였습니다. 내 겨울 코트는 1.50달러였습니다. 20달러짜리 겨울 구두를 사려고, 바닥을 문질러 닦는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안간힘을 써야 하였습니다. 나는 돈을 절약하려고 저축 예금 계좌를 개설하였습니다. 때로는 25센트를 예금했다가 휘발유를 넣으려고 그 돈을 찾곤 하였습니다. 은행 직원들은 내가 들어가면 싫어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내 계좌를 해지해 버렸는데, 항상 예금의 잔액이 너무 적었던 것입니다. 나는 주유소에 멈추어 25센트어치 휘발유를 넣곤 하였습니다. 얼마 후, 급유원들은 내가 갈 때마다 따분한 듯이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습니다. 휘발유를 넣을 돈이 한푼도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차에 오르고 보면, 성서 연구를 사회하러 가야 하는데 기름은 떨어져 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우체국에 갔을 때, 우리 우편물 속에서 누군가가 보내 준 1달러짜리를 발견하곤 했는데, 우리에게는 때마침 요긴한 돈이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는 생활에서 여호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뭉클한 일이었습니다.

단지 편지에 붙일 우표를 사기 위해 빈 병을 수집하던 기억이 납니다. 석 달 동안 돈을 모아서 8달러짜리 구두를 샀습니다. 그런데 아주 개인적인 일이 생겼습니다. 속옷이 실제로 단 두 벌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이 문제가 기도에 정말 적절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두 주 후에, 팬티 17개, 속치마, 블라우스 및 기타 물건이 들어 있는 소포를 받았습니다! 일 년 동안 소식이 없던 어떤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보내 준 것입니다.

그 지역의 가장 큰 문제 한 가지는 주류 밀조 및 밀매였습니다. 자기들의 불법적인 행위 때문에, 어떤 구역의 주민들은 낯선 사람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며 수상히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구 건수가 많아서 나중에는 혼자서 한 주에 약 25시간씩 야외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만큼 그분께 가까이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때 나는 그분께 온전히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여호와와 우리의 관계임을 배우게 됩니다. 물질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분은 여호와임을 배우게 됩니다.—누가 12:15.

사랑에 넘치는 새 가정을 갖게 되다

내가 대학 교육에 대한 청구액을 다 지불한 바로 그 달에, 장래 남편이자 가장 친한 벗이 될 사람인 제프 말론을 만났습니다. 제프는 벧엘에 있었는데, 우리는 일 년 뒤에 결혼하였습니다. 제프와 결혼했을 때, 나는 남편뿐 아니라, 내가 지금 매우 사랑하는 그이의 어머니와 누이와 삼촌도 얻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 대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랑은 다른 어떤 유대보다도 우리를 연합시켜 줍니다. 남편과 나는 테네시 주의 유니온시티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곳에 간 지 겨우 넉 달 만에, 우리는 벧엘 봉사를 신청하였고 수락되었습니다.

우리는 1980년에 벧엘을 떠났으며, 그 뒤 우리 딸, 메건이 그 해에 태어났습니다. 아들 J. T.는 1983년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부는 현재 텍사스 주의 포트워스에 있는 포리스트힐 회중에서 둘 다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사랑하도록 자녀를 양육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인 제프는 장로로 봉사하고 있지만, 언제나 우리 가족의 영적 관심사를 첫째로 두어 왔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일, 자녀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 야외 봉사에 참여하는 일, 날마다 성구를 검토하는 일, 왕국회관 건축 현장 방문 등에 관한 협회의 제안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둘 다 아이들을 재우는 데—노래를 불러 주거나, 성서 이야기를 읽어 주거나, 개별적으로 각 아이와 함께 기도하는 데—한 시간 이상씩 보내곤 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의 목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전 시간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우리가 견지해 온 뚜렷한 생각 한 가지는, 일할 때나 놀 때나, 한 가족으로 뭉치고 한 가족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볼 때, 나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한 다윗의 말이 지당함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시 116:12) 이제껏 사탄이 저지를 수 있었던 일 가운데 여호와께서 원상으로 복구하실 수 없었던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나에게는 남편과 메건과 J. T.로 이루어진 친밀하고 사랑에 넘치는 가족이 있으며,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는 데 연합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조직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훌륭한 세계적인 가족도 생겼습니다. 그야말로 영원토록 고마워할 일인 것입니다.—캐런 말론의 체험담.

[23면 삽화]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한 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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