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이혼—반드시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깨어라!—1991 | 5월 1일
    • 이혼—반드시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지난 수십 년 간 이혼에 관해 이른바 “전문가들”이 기술한 바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현대의 이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지 모른다.

      많은 부모는 널리 과대 선전되는 몇몇 상투어구, 이를테면, ‘불행하게 결혼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낫다;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지 않을 “적당한 나이”가 될 때까지만 기다리라; 아이들은 한두 해만 지나면 아픔을 잊는다’는 말로 인해 쉽사리 이혼길에 들어섰다.

      이런 안일한 견해를 부추겨 온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저술가 수전 게틀먼과 재닛 마코위츠는 “손상된 어린이라는 통념”을 무시한다. 그들은 부모가 ‘원숙하게 처리하는’ 한 이혼이 자녀에게 꼭 상처를 남기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심지어 부모의 이혼이 언젠가 자녀 자신이 이혼하게 될 경우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 개선해야 할 것은 결혼 제도와 가정 애착이라는 통념 자체다”라고 그들은 역설한다.—「이혼의 용기」(The Courage to Divorce).

      그러나 과연 그런 대담한 단언은 사실인 것처럼 들리는가? 이혼율이 치솟는 세상에서 이혼으로 인해 자녀들이 실제로 치르는 대가는 무엇인가?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가?

      끔찍한 대가

      1971년 미국의 연구가 주디스 월러스타인과 존 벌린 켈리는 이혼이 가정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획기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혼으로 몹시 고민하는 60가정을 택하였다. 이 가정들에는 두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자녀가 모두 131명 있었다. 연구가들은 이혼이 거의 언제나 결코 자녀에게 구제책이 되지 않았음을 알고 놀랐다. 부모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한 경우에도 그러하였다. 도리어 이혼은 자녀에게 심한 동요를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영향은 약간의 단기 상처에 불과하였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5년 후, 그 자녀들 중 37퍼센트는 보통 정도 혹은 심한 정도로 우울한 상태에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부모가 다시 결합하기를 바랐다. 심지어 재혼한 상태일지라도 그러하였다! 10년 혹은 15년 후에도 조사된 자녀들 중 절반 가량은 “염려에 싸여 있고, 성취도가 낮았으며, 자기 비하에 빠져 있고 때때로 울분에 차 있는 젊은 남녀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한 결과는 통속적인 지혜와 어긋난 것이다. 월러스타인이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다. “우리가 얻게 된 결론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발표를 달갑지 않게 여겼으며, 우리는 치료 전문가, 부모, 법률가들로부터 우리의 연구가 터무니없는 것임에 분명하다고 분노를 표하는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자녀들은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 그 외의 여러 연구들도 월러스타인과 켈리의 결론이 옳음을 확증하였다. 「사회 문제 저널」(Journal of Social Issues)은 행동 과학 연구가들 같은 전문가들 대부분이 “부모의 별거와 결혼 파탄이 어린이와 십대 청소년에게 심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였다. 그 잡지는 그러한 견해가 “대단히 옳음이 확증되었다”고 덧붙이면서,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의 경우 온전한 가정의 자녀들보다 비행을 저지르고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비율이 높으며,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비율은 온전한 가정의 자녀들의 경우보다 두 배나 높을 것이며, 이혼은 아동 우울증의 주된 원인일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연구 결론을 언급하였다.

      나이 든 자녀는 어떠한가?

      좀더 나이 든 자녀라고 해서 어린 자녀보다 이혼에 더 잘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십대 청소년은 부모가 이혼하는 것을 보게 될 경우, 심한 환멸을 느낀 나머지 결혼 제도를 비롯하여 학교 등의 여러 제도에 대한 비뚤어진 견해를 갖기도 한다. 일부 청소년은 모든 관계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언젠가 배신과 불충실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단정한다.

      일부 십대 청소년들은 부모가 이혼할 때 그런 식으로 균형을 잃고서 극도로 거칠어진다. 마약을 복용하는가 하면 난잡한 성행위에 빠지며, 가출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부모의 이혼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듯하다가도 나중에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 청소년도 있다. 「워싱터니언」 잡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혼 건수의 증가가 십대 청소년의 식욕 이상 및 심지어 자살 건수의 증가와 비례해 온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적당한 나이’가 된 다음 이혼하려고 벼르는 부모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부모가 이혼해도 아무 탈 없이 잘 넘길 자녀의 ‘적당한 나이’란 없는 것 같다.a 사회학자 노벌 D. 글렌은 「오늘날의 심리학」(Psychology Today)지에서, 자녀는 “평생토록 가실 줄 모르는”, 이혼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피력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우리는 이혼한 가정의 자녀 수의 증가로 인해 국민 전반의 복지 수준이 서서히, 끊임없이 침식될 것이라는 불안스런 예측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밝혀진 사실들과 여러 연구 및 통계들이 암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혼한 가정의 자녀는 모두 불안정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 결과와 통계들은 이혼이 자녀들에게 매우 실제적인 위험을 초래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문제는 ‘이혼의 영향으로부터 어떻게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자녀들을 위한 희망은 무엇인가?

      예방보다 나은 보호책은 없다. 다이앤 메드베드 박사가 저서 「이혼 반박론」(The Case Against Divorce)에서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한 바와 같다. “우리는 오로지 이기적 관심사를 근거로 이혼을 타당하다고 허용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 만연된, 자아에 사로잡힌, 자아제일주의적인 태도가 무수한 결혼을 퇴락시켰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결혼한 남녀는 어떻게 이러한 영향력과 싸워서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가?

      성서는 성서의 저자가 결혼의 창시자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옳음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결혼에 관한 성서의 조언은 실제로 효과가 있다. 성서의 조언은 수많은 남녀가 가정 생활의 질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성서는 이혼으로 끝날 뻔한 결혼을 수없이 건져 주었다. 성서는 독자에게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b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언제나 이혼을 모면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혼은 현 세상의 엄연한 현실이다. 일부 부모는 이미 이혼한 후에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배운다. 그런가 하면 그러한 표준에 따라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이라도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배우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성서 자체에서도 일부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해 이혼이 허용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마태 19:9)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먼저 “비용을 예산”하지 않는다면 결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누가 14:28.

      이미 이혼한 상태라면, 이제는 죄책감이나 후회에 눌려 있을 때가 아님이 분명하다. 지금은 자녀에게 미친 타격을 완화시켜 줄 때다. 그렇게 할 수 있다! 이혼 상담가이자 중재자로 널리 존경받는 플로런스 비넨펠드 박사는 이혼한 부모에게 이렇게 보증한다. “이혼은 모두가 죽는 그리스식 비극이 되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살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고 건강해져 매우 원만하게 지낼 수 있다.”—「이혼 후의 자녀 양육」(Helping Your Child Succeed After Divorce).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부모, 친족, 벗들은 이혼한 가정의 자녀를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각주]

      a 사실 최근의 연구들은 20대 초의 젊은 성인들도 부모가 이혼할 경우 상당히 고통을 받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부모의 도덕성의 퇴조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고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보도한다. 그들 중 다수는 쾌락주의와 난잡한 성행위에 빠지는 한편, 일부는 모든 낭만적 관계를 멀리하고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기도 한다.

      b 사단 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길」 책 참조.

  • 이혼 가정의 자녀를 돕는 일
    깨어라!—1991 | 5월 1일
    • 이혼 가정의 자녀를 돕는 일

      “세 살쯤 되었을 때 한번은, 아버지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왔습니다. 나를 데리고 나가 예쁜 빨간 옷을 입은 인형을 사준 다음 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잠시 차 안에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데리러 나오자마자 아버지와 서로 언쟁을 하면서, 나를 사이에 둔 채 차창 너머로 다투었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문을 확 열면서 나를 차 밖으로 떼밀더군요. 그러고는 쌩 하고 차를 몰고 가버렸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새로 갖게 된 인형을 풀어보게 하지도 않더군요. 그 뒤로 그 인형을 다시는 못 보았지요. 그리고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만나 보지 못하였습니다.”—하이디.

      “세월이 약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과연 사실인가? 아니면 자녀는 이혼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가?

      「사회 문제 저널」(The Journal of Social Issues)에 따르면, 이혼 후의 상황이 어떠하냐에 많은 것이 좌우된다. 그 잡지는 이렇게 기술한다. “이혼 후에 대두되는 가족 관계가 이혼 그 자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이디의 경우 부모의 이혼은 괴로운 일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흔히 그렇듯이, 하이디의 어머니가 재혼하였지만 전보다 그다지 나은 것이 없었고 그 다음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디의 어린 시절은, 접시를 깨뜨리며 소리치는 싸움 아니면 여름날 홀로 텅 빈 아파트에서 어머니가—혹 온다면—언제나 집에 올까를 두려움 속에 생각하는 것으로 일관된, 일종의 덜컹대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같았다.

      이혼의 그러한 혼란스런 여파가 자녀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이혼은 결혼의 끝이지, 부모 역할의 끝이 아닌 것이다.

      부모—중대한 역할

      “자녀는 수태에 공동 참여한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두 심리학자는 「오늘날의 심리학」(Psychology Today)지에서 기술하였다. 그 말은 두말할 여지 없는 말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런데 이혼은 어떤 면으로는 단번에 자녀에게서 부모 양쪽을 다 앗아간다.

      예를 들어 통계상 세계에서 으뜸가는 이혼 국가로 불릴 만한 미국을 고려해 보자. 미국에서는 이혼한 가정의 자녀 중 90퍼센트 이상이 어머니와 살며 아버지와는 서로 왕래한다. 그러한 자녀 중 반수 이상은 아버지를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역시 이혼 후에는 1주일에 무려 21시간이나 급격히 줄었다고 한 연구는 알려 준다.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녀가 부모 양쪽과 적극적이고 일관성 있는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경우 부모의 이혼 후의 생활에 잘 적응하기가 더 쉬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적어도 한쪽 어버이와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이혼의 타격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부모는 어떻게 이혼한 후에도 자녀와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시간 계획을 함

      이혼한 어머니의 경우 자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가장 힘겨운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런 어머니는 흔히 일부 사회에서 이중 수치로 여기는 것—이혼과 빈곤—으로 낙인 찍힐지 모른다. 아무런 준비 없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고, 이전 배우자가 보내 주는 미덥지 않거나 불충분한 지원금을 보충하느라 안간힘을 쓰다보면 자녀와 보낼 시간이 거의 없다고 생각될 것이다.

      해결책은 결심과 계획이다. 가능한 한 자투리 시간이라도 조금씩 사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시간에 함께 무엇을 할 것인지 자녀와 계획하는 것이 좋다. 날마다 약간의 시간이라도 자녀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전혀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특별한 나들이를 위해 미리 함께 계획하는 것 역시 자녀에게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자녀에게는 영적 인도와 징계 및 훈련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목적을 위해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기가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조언한다. “네 자녀에게 [하나님의 법을]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라.]”—신명 6:7.

      함께 차를 타고 가거나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와 같이 “길에 행할” 때가 있는가? 그럴 때 자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가, 아니면 신문이나 차 안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가? 함께 식사할 때 텔레비전을 보느라 대화를 못하는가, 아니면 식사 시간을 가족끼리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삼는가? 밥상을 차리거나 세탁을 하는 일과 같이 자녀와 함께할 수 있는 집안일이 있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기회에 반드시 자녀에게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녀와 함께 있으면서 따뜻하고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부모의 가치관을 자녀에게 분명히 심어 줄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은 또한 바로 지금 자녀에게 절실히 필요한 안정감을 베푸는 데 최상의 기회일 수 있다. 일부 자녀들은 부모가 헤어진 것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어떤 자녀는 집을 떠난 어버이에게 배척을 받았다고 느낀다. 어버이가 자녀에게 자주 사랑을 나타내고, 자녀의 훌륭한 특성과 수행한 일에 대해 칭찬하며, 자녀가 마음놓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한다면 이혼의 타격을 상당히 완화시켜 주게 될 것이다.

      일부 부모들은 이혼한 후에 흔히 죄책감 때문에 징계를 등한히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힘겨운 고비를 넘긴 지도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녀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자녀에게 사랑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한 정신과 병원에서 십대 청소년과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워싱터니언」지에 이렇게 말하였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부모는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버려둡니다. 내게 관심이 없어요.’” 성서에서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언 13:24.

      찢긴 자녀

      이혼 상담소에서 한 소년은 그림을 그리라는 말을 듣고, 자신을 성난 부모가 서로 차지하려고 잡아당기면서 싸우는 바람에 반으로 찢기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이것이 바로 일부 이혼한 부모의 자녀들이 느끼는 심정이다. 자녀는 부모 양쪽을 다 사랑하지만, 어버이는 자녀가 상대편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혼에 흔히 따르는 원한과 신랄한 말이 오가는 싸움을 벌이면서 부모가 자녀를 관련시키지 않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월러스타인과 켈리는 조사한 부모들 중 3분의 2는 자녀의 사랑과 충성을 놓고 공공연히 경쟁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비넨펠드 박사는, 자녀에게 부모 사이에서 찢기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자기 증오와 죄책감을 야기할 수 있으며 “자녀에게서 행복, 성취, 성공의 기회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부모에게 경고한다.

      성서는 현명하게 이렇게 충고한다. “어버이 된 이들이여,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고 주의 말씀으로 훈련하고 훈계하여 기르시오.” (에베소 6:4, 「새번역」) 자녀가 다른 쪽 어버이에 대해 노하게 하는 것은 주의 말씀으로 기르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자녀에게는 누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이 사실은 죽음으로 인해 바뀔 수는 있어도 이혼으로 인해 바뀔 수는 없다. 그리고 법정에서 다른 쪽 어버이에게 자녀와 접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는 한 (혹은 다른 쪽 어버이가 고의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한)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서 이전 배우자와 협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전 배우자에 대해 원한을 품을 만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원한을 갚는 데 자녀를 사용한다면, 실제로 고통당하는 쪽은 자녀다. 비넨펠드 박사는, 부부간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원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부모」(Parents)지는, 이전 남편에 대해 악감정이 자리잡기 시작할 때면 그를 위해 기도하려고 노력한 한 여인에 대해 말한다. 여인은 그렇게 함으로 매우 새로운 안정감과 자제력을 갖게 되었으며, ‘끊임없는 전투 태세로 경직’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았다.—비교 마태 5:43-45.

      다른 사람들이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심리학자 줄리어스 시걸과 젤다 시걸은 「부모」지에서 이혼 풍파 후에 “붕괴된 가정의 자녀는 약간의 지속적인 유대만이라도 한결같이 유지된다면 기운을 얻을 것이다”라고 기술한다. 이들 심리학자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이웃 사람들과 벗들은 거리를 두려고 하며, 또한 일부 조부모 역시 그러한데, 조부모는 어버이간의 싸움에서 한쪽 편을 드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혼은 다른 친족들 역시 멀어질 경우 자녀들에게 특히 잔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더욱 뼈아프게 갖는다. 그러므로 이혼한 가정의 자녀의 아주머니나 아저씨 혹은 조부모는 그 가정의 부부간의 문제에 끼어들 것이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 바로 지금 절실히 필요한 안정감을 주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때로 그런 위축된 자녀의 사기를 드높이는 데 인자한 조부모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 기사의 서두에 인용된 하이디는 그러한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성공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현재 26세 된 그는 마음이 트인 근면한 여자로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그의 성공에 기여한 요소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벗 관계다. 하이디는 십대 시절에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여 참다운 벗들을 사귀게 되었다. 하이디는 이렇게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되더군요. 무엇이든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 하나 있었어요.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알고 있었기에 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같았지요. 그렇지만 함께 일할 만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이디는, 그리스도인 회중이 친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충분히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예수의 약속이 참됨을 실감하였다.—마가 10:29, 30.

      그러나 하이디가 솔선하여 이러한 벗들을 사귄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나를 찾았어요”라고 하이디는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야기를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 가운데서 자주 들어볼 수 있다. 예로서, 멕이라는 젊은 여자는 부모가 별거하였을 때,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 준 부부를 기억한다. “그들은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때를 정확히 알고서 늘 함께해 주었습니다. ‘지금 시간을 내주었으면 좋겠군요. 함께 있고 싶어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이혼한 가정의 자녀에게 형이나 언니 혹은 어머니나 아버지, 조부모처럼 대할 수 있는가? 그런 청소년들은 우리에게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온전한 가정의 모든 기능을 다 대체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동정심을 가지고 귀기울여 주는 벗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그런 가정의 청소년이 우리의 창조주 즉 참으로 “고아의 아버지”이자 누구나 친분을 맺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벗과 더 나은 관계를 갖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시 68:5.

      하지만 이혼하는 일이 없어질 때, 자녀들이 누구나 온전히 행복한 가정에서 자랄 때가 오리라는 희망이 있는가?

      가정이 치유될 때

      해결책을 사람에게 기대해야 한다면 해결책은 나오지 않을 것이며, 자녀들을 위한 진정한 희망도 전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 도처의 무수히 많은 분열된 가정은 고사하고, 형편없이 분열된 전세계 인류 가정을 화합시킬 엄두도 내지 못한다. 린다 버드 프랭크가 「이혼한 환경에서의 성장」(Growing Up Divorced)에서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다. “너무 많은 일이 너무 빨리 벌어졌다. 법정이 허둥거린다. 학교가 허둥거린다. 가정이 허둥거린다. 이혼 많은 이 시대에 서로에 대해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야 할 규범도, 선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창조주는 허둥거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분열된 세상을 익히 아시며,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 “전문가들”에 의한 세밀한 조정이 아님을 알고 계신다. 이 세상은 대치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그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이 부패한 제도가 사라질 때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생존하여 지구 전체가 낙원으로 회복되는 것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누가 23:43; 요한 1서 2:17) 그때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사람은 인간 본성을 더럽히는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분열, 증오, 불일치를 가져오는 이기심과 불완전성은 드디어 일소될 것이다. 인간 가족은 치유될 것이다.—계시 21:3, 4.

      그때가 되면 이혼은 희미한 옛일이 될 것이다.

      [9면 네모]

      이혼한 부모를 위한 조언

      결코 자녀 앞에서, 이전 배우자와—전화로 혹은 대면하여—싸우지 말 것.

      결코 자녀 앞에서, 이전 배우자를 헐뜯지 말 것. 자녀가 떨어져 사는 어버이를 비난할 때 부추기거나 동조하지 말 것.

      결코 자녀에게 부모 중 한쪽을 택하라고 강요하지 말 것. 자녀가 다른 쪽 어버이를 배척하게 하지 말 것.

      결코 자녀가 다른 쪽 어버이에게 가겠다고 위협하는 일이 있게 하지 말 것. 그러한 감정상의 협박을 내버려두는 것은 자녀를 교활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며, 자녀의 도덕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결코 이전 배우자를 염탐하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면서, 자녀가 다녀올 때마다 정보를 캐내려고 하지 말 것.

      결코 자녀를 시켜 이전 배우자에게 분노 섞인 전갈문을 보내거나 돈을 구걸하지 말 것.

      결코 “어쩌면 그렇게 네 아버지를 꼭 닮았니”라는 식의 말로 자녀를 풀죽게 하지 말 것. 그러한 말은 자녀에게 아버지에 대한 비난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의 잘못을 그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

      반드시 잘 들어 주는 사람이 되고, 자녀가 자신의 느낌을—심지어 어버이가 동감하지 않는 느낌이라도—표현하게 할 것.

      반드시 분명하고 자유롭게, 터놓고 의사 소통을 할 것. 하지만 자녀가 알 필요가 없는 세부점은 말하지 말 것. 아들이나 딸이 더할 나위 없이 믿을 만한 대상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자녀가 아무리 성숙해 보일지라도 자녀는 소형 성인이 아니며 대리 배우자도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자녀를 위로하고 자녀가 이혼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과 이제 와서 자녀가 개입하여 결혼 생활을 건져낼 수 없음을 확신시킬 것.

      반드시 진실하고 따뜻한 애정을 충분히 나타낼 것. 자녀는 서로 사랑하기를 중단한 부모는 쉽사리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중단할 수 있다고 가정할지 모른다.

      반드시 이전 배우자와 벌이는 다툼에서 자녀가 다치지 않도록 이전 배우자와 협조할 것.

      반드시 칭찬과 징계를 베푸는 데 균형을 유지하며 정당한 한계와 현실적인 목표를 세울 것.

      반드시 자녀에게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부도덕한 행위를 멀리하면서 스스로 본을 세울 것.

      반드시 자녀와 여가 시간을 가능한 한 많이 보낼 것.

      [11면 네모]

      멀리 떨어져 있는 어버이인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버이라면 자신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가 아주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방문 계획을 하다 보면 친자녀를 보기 위해 이전 배우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불편을 느낄지 모른다. 혹은 자녀에게 새로운 의붓어버이가 생겼으니 이제 더는 자신이 자녀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버이도 필요한 존재다. 성서는 “어버이 된 이들이여,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라]”고 강력히 권한다. (에베소 6:4, 「새번역」) 어버이가 자녀의 생활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자녀를 노하게 할 뿐 아니라 자녀의 자기 가치 의식을 침식하며 자녀로 하여금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자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느낌이 들게 할 수 있다. 자녀와 제한된 관계나마 유지하는 것이 발길을 끊는 것보다 낫다.

      방문하여 함께하는 시간의 양이 방문하는 횟수보다 훨씬 중요한 것 같다. 방문하여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더 자녀는 기억에 남을 만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인 미리엄 갤퍼 코엔은 그 문제에 관한 저서에서 그러한 방문이 꼭 호화로운 나들이가 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함께 조용히 걷거나 식사를 하는 것도 아주 흐뭇한 추억거리가 될 수 있다.

      정기적으로 계획하여 자주 전화를 하는 것 역시 자녀와 친밀한 관계를 갖게 해준다. 혹은 들려줄 만한 이야기나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녹음하여 자녀에게 전해 줄 수 있다. 녹음 테이프와 편지 외에도 자신의 어렸을 적 사진이라든가, 그림 혹은 풍자적인 그림이나 흥미 있었던 잡지 기사를 보내줄 수 있다. 코엔 씨는 또한 자녀가 즐기는 책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알아내서 그런 책을 읽거나 그런 프로그램을 본 다음 편지나 전화로 이야기할 것을 제안한다.

      코엔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어버이 역할은 자녀 보호권 마련 중에서 자녀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자녀에게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다. 심지어 자녀에게 매우 사소한 것이나마 사려 깊은 행동을 나타낸다면 자녀는 고통을 상당히 덜 느낄 수 있다.

      [7면 삽화]

      자녀와 함께할 만한 일들이 있는가? 이혼은 결혼의 끝이지, 부모 역할의 끝이 아니다

      [10면 삽화]

      벗이 되어 줄, 이혼 가정의 자녀를 아는가?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