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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우리는 누구인가?깨어라!—1998 |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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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진화론자인 리처드 리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세기 동안, 철학자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속성의 여러 부면을 다뤄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속성의 특징에 대한 일치된 정의는 없다.”
하지만 코펜하겐 동물원은 영장류 전시관에 있는 전시품을 통해서 자신들의 의견을 대담하게 제시하였습니다. 「1997 브리태니카 연감」(1997 Britannica Book of the Year)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덴마크인 부부는 방문객들에게 그들이 유인원과 긴밀한 혈연 관계에 있음을 상기시킬 목적으로 동물원에 있는 임시 숙소로 이사하였다.”
참조 자료들은 특정한 동물과 인간이 긴밀한 혈연 관계에 있다는 그러한 주장을 지지합니다. 예를 들어, 「월드 북 백과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유인원, 여우원숭이, 원숭이, 안경원숭이와 함께 포유류에서 영장류라고 하는 목(目)을 구성한다.”
하지만 사실, 인간은 동물의 특징과는 맞지 않는 독특한 특성들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특성들 가운데는 사랑, 양심, 도덕, 영성, 공의, 자비, 유머, 창의성, 시간 관념, 자의식, 미적 감각, 미래에 대한 관심, 여러 세대에 걸쳐 지식을 축적하는 능력, 죽음이 우리의 존재의 궁극적인 끝은 아니라는 희망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들을 동물의 특징과 조화시키기 위해, 일부 사람은 진화론과 심리학과 사회학을 혼합시킨 진화론적 심리학을 도입합니다. 진화론적 심리학은 인간 본성의 수수께끼에 빛을 던져 주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진화론자인 로버트 라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화론적 심리학의 전제는 간단하다. 인간의 정신도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과 생각도 이러한 전제를 근거로 이해해야 가장 잘 이해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전자의 지배를 받으며 정신 작용에 반영되어 있는 우리 인생의 목적은 순전히 번식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진화론적 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대부분 유전자의 냉혹한 이기주의로 요약”됩니다. 「도덕적인 동물」(The Moral Animal)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 선택은 남성들이 여러 여성들과 끊임없이 성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이러한 진화론적 개념에 의하면, 특정한 상황에서는 여성의 부도덕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심지어 부모의 사랑도 자손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유전자가 꾸며 낸 계략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진화론적 심리학의 한 가지 견해는, 인간 가족의 영속적인 생존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자기 개발에 관한 일부 책들은 현재 진화론적 심리학의 새로운 조류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책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본성이 “침팬지의 본성이나 고릴라의 본성이나 비비의 본성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 책은 또한 이렇게 기술합니다. “진화에 관한 한, ··· 중요한 것은 번식이다.”
반면에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단지 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서 하느님의 특성들, 특히 사랑과 공의와 지혜와 능력을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인간의 독특한 특성들과 이 점을 함께 생각해 보면, 성서가 인간을 동물보다 높은 위치에 두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사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의로운 신세계에서 그 욕망이 충족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고 알려 줍니다.—창세 1:27, 28; 시 37:9-11, 29; 전도 3:11; 요한 3:16; 계시 21:3, 4.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정확한 견해를 알아내는 일은 결코 학문적 탐구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원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우리가 사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H. G. 웰스는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발행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도달하게 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주목하였습니다.
“그 후로 진정한 타락이 뒤따랐다. ··· 1859년 이후로 실제로 믿음이 상실되었다. ··· 19세기 말, 지배 계층의 사람들은, 강하고 약삭빠른 자가 약하고 어수룩한 자 위에 올라선다는 생존 경쟁 덕택에 자기들이 번영하는 것으로 믿었다. ··· 그들은 인간이 인도의 사냥개와 같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생각하였다. ··· 그들에게는 인간의 무리 가운데서 강한 자들이 남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에 관해 정확한 견해를 갖는 것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한 진화론자가 다음과 같이 질문한 바와 같습니다. “다윈의 평범한 구식 진화론이 ··· 서구 문명의 도덕적 힘을 약화시켰다면, 새로운 형태의 [진화론적 심리학]이 완전히 자리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우리의 기원에 관한 우리의 믿음은 생명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견해에 영향을 미치므로, 우리가 이 문제 전체를 면밀히 조사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4면 삽입]
역사가 H. G. 웰스는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행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도달하게 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주목하였다. “그 후로 진정한 타락이 뒤따랐다. ··· 1859년 이후로 실제로 믿음이 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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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형상대로, 동물의 형상대로?깨어라!—1998 |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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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형상대로, 동물의 형상대로?
첫 인간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누가 3:38) 어떤 동물도 그렇게 구분되는 즐거움을 누린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서는 인간이 동물과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알려 줍니다. 예를 들어, 인간과 동물은 모두 영혼입니다. 창세기 2:7(「신세」)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첫째 15:45에서도 이렇게 동의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혼이 되었다.” 인간이 곧 영혼이므로, 영혼은 몸이 죽을 때 살아 남는 어떤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창세기 1:24(「신세」 참조)에서는 동물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땅은 생물[“산 영혼들”]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사체로는 본지에서) 이처럼, 성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인간을 고귀한 존재가 되게 해주는 한편, 동물과 마찬가지로 땅의 영혼이라는 우리의 비천한 신분을 상기시켜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그 밖에도 더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느니라].” 그렇습니다. 죽는다는 면에서도, 인간과 동물은 다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둘 다 근원지로, 즉 “흙으로” 돌아갑니다.—전도 3:19, 20; 창세 3:19.
그러면 인간이 죽음으로 인해 그토록 심한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한 삶을 꿈꾸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확실히 우리는 동물과 매우 다릅니다!
우리가 동물과 다른 점
먹고 자고 자손을 낳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당신은 행복하겠습니까? 심지어 열렬한 진화론자들도 그러한 생각은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자인 T. 도브찬스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현대인, 즉 이 계몽된 회의론자이자 불가지론자도 다음과 같은 오래 된 질문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남모르게라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인생에는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의 고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보다 나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내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의미가 있는가?”
사실,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리처드 리키는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술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영적 자질로 인해, 자기가 태어난 우주와 자신을 조화시키기 위해 평생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우리의 기원과 영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습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분명히 커다란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 간격은 얼마나 큽니까?
간격이 너무 커서 도저히 메울 수 없다?
진화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시켜 주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 간격은 과연 얼마나 큽니까? 진화론자들이 그 간격에 관해 직접 말한 내용 가운데 몇 가지를 고려해 봅시다.
19세기의 저명한 진화론 주창자인 토머스 H. 헉슬리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인간과 동물 ··· 사이의 간격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을 할 수 있는 놀라운 자질을 갖고 있[으며] ··· 마치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처럼 그의 비천한 동료들인 동물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인 마이클 C. 코밸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과 다른 영장류들 사이에는 놀라운 차이가 있다. ··· ‘우리의 뇌는 우리와 체격이 비슷한 영장류가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뇌보다 세 배나 더 크다.’” 또한, 신경학자인 리처드 M. 레스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뇌는 알려진 우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리키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인간이 의식(意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과학자들은 난감해하는데, 일부 과학자들은 그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가 경험하는 자의식은 어찌나 뚜렷한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분명히 밝혀 줄 정도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언어로 인해 호모 사피엔스[인간]와 자연계의 나머지 생물들 사이에 실로 커다란 간격이 생긴다.”
피터 러셀은 인간의 정신에서 또 다른 놀라운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의문의 여지 없이, 기억력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이다. 기억력이 없다면 학습과 ··· 지적인 기능과 언어의 발달은 물론, 일반적으로 인간의 속성과 연관 지어지는 ··· 특성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동물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에드워드 O. 윌슨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신앙을 가지려는 경향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작용하는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힘이며, 인간의 본성에서 결코 뽑아 버릴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진화론자인 로버트 라이트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인간의 행동은 다윈의 진화론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제기한다. 유머와 웃음의 기능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고백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슬픔의 기능은 정확히 무엇인가? ···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슬퍼해 봐야 유전자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진화론자인 일레인 모건은 이렇게 시인합니다. “인간에 관한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 가운데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두 다리로 걷는 이유는 무엇인가? (2) 그들의 몸에서 털이 없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3) 그들의 뇌가 그토록 커진 이유는 무엇인가? (4) 그들이 말하는 법을 배운 이유는 무엇인가?”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합니까? 모건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관례적인 대답은 이러하다. (1) ‘우리는 아직 모른다.’ (2) ‘우리는 아직 모른다.’ (3) ‘우리는 아직 모른다.’ (4) ‘우리는 아직 모른다.’”
흔들리고 있는 이론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유인원」(The Lopsided Ape)이라는 책의 저자는 자신의 목표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인간의 진화 과정을 개략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결론은 주로 오래 된 이빨과 뼈와 돌멩이 몇 개에 근거하여 추측한 것”이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사실, 다윈 자신의 원래 이론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리처드 리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진화 방법에 관한 다윈의 견해가 인류학을 지배했지만, 그의 견해는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다.”
일레인 모건의 말에 따르면, 많은 진화론자들은 “30년 전에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여러 가지 해답에 대해 신뢰를 잃었”습니다. 따라서 진화론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론들 가운데 일부가 무너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비참한 결과
몇몇 연구 결과, 동물의 수컷이 짝짓기를 하는 암컷의 수는 수컷과 암컷의 몸집 차이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일부 사람들은 인간의 성생활 습관이 침팬지와 유사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침팬지 수컷은 인간 남성들처럼 암컷보다 조금밖에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인간이 침팬지와 같이 한 사람 이상의 성 상대를 갖도록 허용되어야 한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침팬지에게는 효과가 있어 보이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재난이 된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여러 가지 사실이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난잡한 성관계는 가정 파탄, 낙태, 질병, 정신적·감정적 충격, 질투, 가정 폭력 그리고 버림받은 자녀들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 채 성장하여 결국 상처를 주는 그러한 순환을 되풀이하는 일 등이 흔히 일어나는, 불행한 환경으로 빠져 드는 지름길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까?
진화론적인 사고 방식은 또한, 인간의 생명의 신성함에도 의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고 우리 자신을 고등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혹시 우리의 지성 때문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다른 점」(The Human Difference)이라는 책에서 제기한 이러한 질문을 고려해 보는 것이 매우 적절할 것입니다. “[진화가 던져 주는] 온갖 행운을 우리가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을 개나 고양이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대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가?”
새로운 형태의 진화론적 사고 방식이 널리 퍼지게 되면, “도덕적 사고 방식에 반드시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도덕적인 동물」(The Moral Animal)이라는 책에서는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자연 선택”에 의해 생겨났다는 전제에 근거를 둔, 그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해 H. G. 웰스의 말대로 “강하고 약삭빠른 자가 약하고 어수룩한 자 위에 올라선다”는 전제에 근거를 둔 잔인한 도덕성일 것입니다.
의미 심장하게도, 여러 해에 걸쳐 도덕성을 좀먹어 온 진화론자들의 많은 이론은 그 후에 물밀듯 쏟아져 나온 사상가들의 이론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비극적인 일은, 그러한 이론이 가한 손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을 숭배할 것인가, 창조주를 숭배할 것인가?
진화론은 대답을 얻기 위해 고개를 들어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여 피조물을 바라보게 합니다. 반면에 성서는 도덕 가치관과 인생의 목적을 알기 위해 고개를 들어 참 하느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서는 또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와 인간만이 죽음으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이유에 대한 성서의 설명은 인간이 정신과 마음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 만족스러운 설명을 고려해 보도록 당신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7면 삽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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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얻기 위해 아래가 아니라 위를 바라봄깨어라!—1998 |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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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얻기 위해 아래가 아니라 위를 바라봄
진화론에서는 우리가 일련의 변화를 통해 점차 고등 형태의 동물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성서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출발했지만, 그 후 얼마 안 있어 불완전해지더니 인류가 기나긴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도덕적 독립을 추구하여 하느님께 고의로 불순종함으로 양심을 손상시켰을 때 이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동차로 보호용 난간을 들이받듯이 하느님의 법이라는 보호용 난간을 고의로 뚫고 나가 현재 우리가 처한 것과 같은 상황으로 추락하는 바람에, 우리는 인종적 편견과 종교적 증오와 끔찍한 전쟁은 물론 병과 노령과 죽음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창세 2:17; 3:6, 7.
동물의 유전자인가, 결함 있는 유전자인가?
물론, 성서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의 완전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과학 용어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자동차 취급 설명서가 자동차 공학 교과서가 아닌 것처럼 성서도 과학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동차 취급 설명서처럼 성서는 정확합니다. 성서는 신화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법이라는 보호용 난간을 뚫고 나갔을 때, 그들의 신체는 손상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들은 죽음을 향해 서서히 쇠퇴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전 법칙을 통해, 그들의 자녀들 즉 인간 가족은 불완전성을 유전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 죽습니다.—욥 14:4; 시 51:5; 로마 5:12.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유전받은 것에는 죄를 지으려는 경향도 포함되는데, 그 경향은 이기심과 부도덕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성은 제자리에 있을 때는 합당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 1:28) 그리고 사랑에 찬 창조주로서 그분은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이 남편과 아내에게 즐거운 일이 되게 하셨습니다. (잠언 5:18)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성으로 인해 성을 남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불완전성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정신과 몸의 기능을 포함하여 생활의 모든 부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불완전성이 우리의 도덕 감각을 없애 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죄에 빠지려는 경향과 싸움으로, “운전대”를 잡고 방향을 조종하듯 생활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 가운데 죄와 싸워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게도 이 점을 고려하십니다.—시 103:14; 로마 7:21-23.
우리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
성서는 또한, 진화론이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수수께끼에 빛을 던져 주는데, 죽음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상적인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서에서 밝혀 주는 바와 같이, 죽음은 죄 즉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이 계속 순종했다면, 그들은 후손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정신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욕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신 국제역」으로 전도서 3:11을 보면, “그분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죽음의 판결을 받음으로 인간에게는 내적 갈등, 즉 끊임없는 부조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계속 살고 싶어하는 자연스러운 염원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은 영혼불멸 교리에서 환생에 대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믿음을 지어냈습니다. 과학자들도 죽음을 피하거나 적어도 죽음을 맞는 시기를 늦추기를 원하기 때문에 노화의 신비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진화론자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욕망을 진화상의 속임수라고 묵살하는데, 그러한 욕망은 인간이 고등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들의 견해와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죽음이 적이라는 성서의 말씀은, 살고 싶어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염원과 조화를 이룹니다.—고린도 첫째 15:26.
그러면 우리의 몸은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다는 어떤 실마리라도 제공합니까?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인간의 뇌에만도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 살도록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다
뇌는 무게가 약 1.4킬로그램이며 뇌에는 100억 개에서 1000억 개가량의 뉴런이 있는데, 그 중에 똑같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각 뉴런은 최고 20만 개의 다른 뉴런과 교신할 수 있기 때문에, 뇌에 있는 서로 다른 회로 즉 경로의 수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됩니다. 게다가 마치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각 뉴런” 자체가 “고성능 컴퓨터”라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는 말합니다.
뇌는 화학 물질로 이루어진 액체 속에 들어 있는데, 이 액체는 뉴런이 활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뇌는 심지어 가장 강력한 컴퓨터보다도 훨씬 더 복잡합니다. 토니 부잰과 테런츠 딕슨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모든 두뇌에는 경탄스러울 정도로 매우 강력한 기관이 있는데, 이 오밀조밀하고 효율적인 기관의 용량은 우리가 그것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무한대를 향해 더 확장되는 것 같다.” 그들은 표트르 아노힌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자기 뇌의 잠재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뇌의 한계에 대한 어떤 비관적인 추측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뇌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들은 진화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진화가 단순한 동굴 거주자들이나 심지어 고등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을 위해, 사람의 수명보다 100만 배, 심지어 10억 배나 긴 기간 사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기관을 “창조”해 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실로, 영원한 생명으로만 이러한 사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어떠합니까?
「보수와 재생—정신과 몸을 돌아보는 여행」(Repair and Renewal—Journey Through the Mind and Body)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손상된 뼈와 조직과 기관이 스스로 복구하는 방식을 보면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우리가 잠시 멈춰서 그 점에 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피부와 머리카락과 손발톱—또한 몸의 다른 부분들—이 소리 없이 재생되는 과정이 매우 놀랍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매주 하루 24시간 계속되면서 우리를 문자 그대로 다시 만들어 내는데, 생화학적으로 말해서 일생 동안 여러 번 우리를 다시 만들어 낸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스스로 재생하는 이 기적과도 같은 과정을 영원히 지속되게 하는 일은 그분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마침내 “죽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고린도 첫째 15:26) 하지만 참으로 행복해지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평화가—하느님과의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의 평화가—필요합니다. 그러한 평화는 사람들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할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사랑에 근거한 신세계
요한 첫째 4:8에서는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특히 여호와 하느님의 사랑—은 매우 강해서,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요한 3:16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매우 사랑하시어 자기의 유일하게 태어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참으로 놀라운 전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유전받았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성서에서는 “죄가 지불하는 삯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6:23) 하지만 다행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에 대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내주셨”다고 썼습니다. (요한 첫째 3:16) 그렇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많은 사람들과 교환하는 대속물”로 주심으로 그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우리가 죄를 면제받아 영원한 생명을 즐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태 20:28) 성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의 유일하게 태어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첫째 4:9.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성서에서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하느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 자신도 서로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요한 첫째 4:11)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 특성이 하느님의 신세계의 모퉁잇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분의 말씀인 성서에서 강조하신 바와 같이 사랑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 그리고 자연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자리」(Love and Its Place in Nature)라는 책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아이들은 쉽게 죽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의 필요성은 사람들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탁월한 인류학자는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의 중심에는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사랑을 받아 온 아이와 생화학적으로,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매우 다르다.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사랑을 받아 온 아이와 심지어 성장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자기와 국적이나 인종이나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편견을 갖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관리 체제 아래 땅이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됨으로 영감받은 성서 시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리로다].”—시 72:1, 4, 7, 8, 12, 13.
성서 시편의 또 다른 구절에 다음과 같이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악한 자는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살도록 허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9-11.
그 때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되는 일을 통해 무덤에서 일으킴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순종하는 모든 인간의 정신과 몸이 고침을 받을 것입니다. 결국,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옳은 일을 행하려는 엄청난 고투가 끝날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우리의 염원과 죽음이라는 현재의 냉혹한 현실 사이의 부조화 역시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 많으신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십니다.—계시 21:4; 사도 24:15.
따라서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한 전투에서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훈계를 청종하십시오. “믿음의 훌륭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굳건히 잡으십시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누리게 될 그러한 생명을 “참된 생명”이라고 부릅니다.—디모데 첫째 6:12, 19.
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당신이 인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 우리를 지으신 분은 그분이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이러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의와 사랑이 깃들여 있을 여호와의 신세계에서 생명을 누릴 자격을 갖추는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시 100:3, 「신세」; 베드로 둘째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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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누리게 될 생명을 “참된 생명”이라고 부른다.—디모데 첫째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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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느님의 법이라는 보호용 난간을 뚫고 나감으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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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느님의 통치권 아래서 평화가 있는 신세계를 즐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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