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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생각을 재조정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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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생각을 재조정하신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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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회중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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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3
파73 6/1 257-260면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생각을 재조정하신다

여호와는 잘못이 없으시며, 위대한 선생이시며 자기 백성들의 인도자이시다. (시 143:10) 그 백성들은 잘못이 있으며, 결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점진적으로 인도하시어 진리가 꾸준히 밝아지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온전히 반영하고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도록 해주신다. (고린도 후 3:18) 그들은 하나님을 보다 친밀하게 알게 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히 공급되며, 그들의 영적 복지를 위해 모든 것이 공급된다. (빌립보 4:19) 그러한 발전 가운데는 그들의 생각의 변경 곧 재조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견해의 변경이나 어떤 성귀에 대한 이해의 변경 또는 절차의 변경을 반대한다. 예를 들어 1940년대 이후 여호와의 증인들은 혈액을 주는 일이나 수혈을 받는 일을 거절해왔으나 그 이전에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었다. 1962년 이후부터 그들은 로마서 13:1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세”를 세상 정부의 통치자들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1929년부터 그때까지는 달리 생각하였었다. 그러한 예들이 그 외에도 또 있다. 이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 사실은 가르침의 기본 원칙에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이사야 54:13) 그들이 결코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행하면서 끝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계속 배우고 있다.

초기 회중의 본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시던 때에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하셨다. (요한 16:12) 만일 그러한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말씀해 주신다면 그들은 어리둥절해 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파악하여 자기들 생활에서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점진적으로 가르치셨었다.

「사도 행전」에 기록된 초기 회중의 역사를 살펴보라.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조금 전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 제자들은 그때에 예수께서 육적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상에 왕국을 설립하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도 1:6) 그러나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 그들은 다르게 배웠다. (사도 2:32-36; 3:19-21; 베드로 전 3:18) 그런지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해를 넓혀서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인 회중으로 들어오게 하는 “경건의 비밀”을 밝혀 주셨다. (사도 10:34-48; 로마 11장; 골로새 1:25-27) 그 후에 이방인 개종자들의 할례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 통치체에 의해 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최근의 진전 상황에 비추어 성귀를 검토함으로써 생각을 재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 행전 15장) 또한 사도들은 그들의 편지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두번째 임재, 부활 (고린도 전 15장; 데살로니가 전 4:13-17) 그리고 회중 조직에 관한 문제들(‘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들) 등 많은 것들을 밝혔다.

이처럼 새로 이해된 것들과 조정한 점들은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회중의 지위를 약화시켰는가? 아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받고 사용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한 증거는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신 점으로 보아 알 수 있다. 할례 문제에 관한 설명문이 각처 회중에 전해지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디모데 전 3:15; 사도 16:4, 5.

오늘날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의 조정

여호와로부터 점진적인 인도를 받았던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의 통치체가 여호와께서 발전을 허락하시는 대로 문제를 처리하고 여호와의 인도에 따라 회중을 지휘하기 위해 성경 귀절을 탐구하였던 바와 같이, 오늘날의 회중 통치체도 그렇게 한다. 예를 들면, 피에 대한 문제는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최초의 혈액 은행이 설립된 해인 1937년 이후에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병석에 누운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내가 이런 형태의 치료를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도하는 정신으로 성경을 검토해보니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13:1의 성귀도 그 문맥을 자세히 비평적으로 연구하고 거기에 관련된 성경 귀절을 연구한 결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된 바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먼저 회중 내의 문제를 논의하고 나서 다음에 17절부터 회중 밖으로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바울’은 거기서부터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한 설명으로 진행하였으며, 13장 7절까지 나아가면서 이 세상 정부에 속한 권세에 관하여 명확히 말하였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다 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통치자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변한 것은 없다. 그들은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알려 주신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 22:21) 그러나 로마서 13:1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재조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였다.

고대의 ‘극적인’ 사건들

의문이 생기는 또 다른 점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예언적 모형 곧 유사한 사건을 현대의 상황이나 사람들의 집단에 적용하는 점이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 가운데 그 내용을 모두 단순한 역사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과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 그 내용이 단순한 역사 이상임을 이해하게 되어 견해를 재조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평야에 모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브올’의 ‘바알’ 숭배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였다. 이 결과 거기에 장막을 쳤던 약 300만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24,000명이 여호와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민수 25:1-9) 이 사건은 오늘날 하나님의 새 질서의 문턱에 다가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처지에 비교 되었으며, 그들에게 경고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현재 세상에 악과 부도덕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성이 가중되고 있으며, 근년에 그와 비슷한 비율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회중으로부터 추방 곧 제명을 당하였다. 이러한 제명으로 회중을 부패케 하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하였으며, 그것은 악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제거하라는 사도들의 교훈과 일치한다.—고린도 전 5:9-13; 요한 2서 9-11.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러한 ‘극적인’ 사건을 일으키시어 현재 우리에게 경고를 주도록 하셨는가? 하는 질문이 간혹 생긴다. 그럼, 하나님이 그러한 나쁜 일을 일으키시겠는가? 하나님이 그러한 일을 조종하시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제자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하였다. (야고보 1:13) 하나님의 행동과 이 원칙의 적용에 관한한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상황 하에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충실한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목적과 원칙에 일치하게 행동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로 악행을 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거나 그들을 악행으로 유인하지는 않는다.—마태 6:13.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브올’과 관련하여 이탈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유발시키지는 않았으나 이 역사적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실 수는 있다. 왜냐 하면, 그들도 고대 ‘이스라엘’과 똑 같이 시험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원수인 ‘사단’ 마귀는 그들을 너머지게 하기위해 비슷한 술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험성을 보여주셨으며, 그리스도인 회중에 더러운 것을 들여오려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도 알려주셨다. ‘모압’ 평야에서 있었던 그 사건과 다른 고대 ‘이스라엘’에게 발생하였던 사건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린도 전 10:11) 그러한 사건들은 ‘유대’: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울”, 교훈, 곧 경고가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에게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

이 사실은 그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과도 일치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로마 15: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신 때와 같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전부 마련하시기도 하였다. 그 ‘드라마’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희생물로 바칠 것을 전영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명하신 것은 조금도 나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완전히 희생시키도록 놔두시지 않고 수양을 한 마리 준비해 주셨다.—창세 22:1-18; 갈라디아 3:16; 요한 3:16.

다른 여러 가지 극적인 사건들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원칙에 맞게 행동을 취하시어 오늘날 우리를 위한 예언적 ‘드라마’로 만드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일으키시지 않은 것들도 많다. 예를 들면, 성서 어디를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죽게 하셨다는 증거가 없다. 또한 하나님이 기업을 무를 일차적인 책임을 가진 자, 성서에서 “아무”라고 한 사람으로 하여금 ‘엘리멜렉’의 유산을 사는 일을 거절하도록 시키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법을 통하여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가 취할 길을 알려주셨으며,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에 따라 행동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의 경과를 기록시켜 다가올 일을 상징하도록 하셨다. 「파수대」 1972년 5월 15일호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룻기 1, 4장.

고대의 사람들이 실제 인물들이었으며, 자기 가족과 동료들과 접촉하면서 생활하였으며,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희망과 욕망을 가졌으며, 그들의 지체를 통해서 작용하는 죄로 인한 일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한 싸움을 충실하게 싸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더욱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과 율법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쓸하셨으며, 그들에게 행동을 취하시어 의를 보상하시고 악을 징벌하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시대가 변한다고 여호와도 변하여 그의 원칙과 판결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 (말라기 3:6)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에 발생한 일들을 읽고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 우리의 입장과 같이 실제적인 것이었음과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꼭 그대로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실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 백성을 대하신 기록들을 보고 유익을 얻음에 따라 우리는 견해를 재조정하게 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터득하기가 어려운 점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믿음과 참을성이 필요하다

질문이 생기는 경우에는, 영적 “연로자”이며 이해력이 있는 사람들인 회중 내의 책임진 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다. (사도 20:28; 베드로 전 5:1-4) 그렇게 해도 만일 그 당시에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회중에 순응하고 하나님께서 때가 오면 우리에게 밝혀줄 것이라고 확신하겠는가?

가령 우리에게 친구가 있는데, 그 사람이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져버리는가?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회중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하겠는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히브리 11:6) 진리의 지식을 접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죄를 위한 속죄 희생을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가 이 전도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온 땅에서 평화와 영적 번영으로 누구를 축복하실 것인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활동과 조직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헐어 내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에게 호응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어떤 거치는 돌에 걸려서 영구히 넘어져버린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이탈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생명을 얻을 것인가?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어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반대 의사를 나타냈을 때에 예수께서는 가까운 제자들에게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사도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한 6:61, 67-69.

성서는 참을성을 나타내라고 교훈한다. (야고보 5:9-11) 우리는 가장 위대하신 벗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분들이 어떤 행동에 대한 이유를 밝힐 때까지 참아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우리의 지식과 판단력을 가지고 그분들께 대항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여호와의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이사야 40:13.

그리고 그리스도인 회중에 대하여도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으로 구성되었으니만큼,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면서 참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참아준다면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히 여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는다면 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회중을 점도 없고 흠도 없게 만드실 것이다.—베드로 후 3:15; 에베소 5:25-27; 계시 19:7, 8.

사실이지, 행복과 생명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여호와의 인도를 따를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의 문턱에 서 있으니만큼, 여호와께서 우리의 생각을 재조정하시는데도 기꺼이 따르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서 마귀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서로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고린도 후 2:11; 에베소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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