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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71 1/15 27-30면
  • 부모의 은공에 대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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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모의 은공에 대한 감사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1
  • 소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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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1
파71 1/15 27-30면

부모의 은공에 대한 감사

부모 사후에 감사하는 것과 생존시에 감사하는 것—어느 쪽이 더 나은가?

기회를 놓쳤다! 당신도 그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읍니까? 바로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그러면 무슨 기회를 놓쳤다는 말입니까? 부모의 은공에 대하여 온전히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그렇습니다. 부모 생존시에 부모에게 감사함을 나타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읍니다.

부모 상을 당한 후에야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를 좀더 섬겼어야 할 것을! 부모에게 필요한 것들, 또 좋아하시는 것들을 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좀더 자주 방문했어야 하고, 좀더 자주 편지를 올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연로한 부모들이 살아 계신 동안 등한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하면 자녀들은 후회합니다. 그들은 부모가 살아계셨을 때, 좀더 잘 했어야 할 것을 하고 뉘우칩니다.

당신이 부모에게 감사함을 나타내는 일이란 크지 않은 작은 일을 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작은 친절, 그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일을 너무나 흔히 등한히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가족에 반신불수로 누워 계신 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은 ‘아이스크림’을 특히 좋아하셨읍니다. 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 아들은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오곤 하였지만 자기만 먹었지 아버지에게 드린 적은 별로 없었읍니다. 갑자기 아버지의 상을 당하게 되자 그는 비로소 자기에게 은공이 그렇게도 크신 아버지에게 불효하였음을 크게 후회하게 되었읍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당신은 부모의 영상이 차차 흐려져가게 버려둡니까? 당신은 간단히 부모를 잊어버릴 것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에 대한 부모의 크신 은공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오늘날, 자녀들이 부모가 살아 계신 동안 그들의 은공을 감사하고 행동으로써 그것을 나타내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존경심의 결핍의 증가

진정으로 부모의 은공을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부모를 존경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존경심의 결핍이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서양에만 있는 경향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양에는 조상 숭배가 있읍니다. 그것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를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동양의 젊은이들이 점점 살아 계신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가고 있읍니다. 예를 들면, ‘홍콩’에서 중국인 어머니 아버지들이 “뀌이 므-뗑 와 케”라고 한탄하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읍니다. 이 말은 자녀들이 더는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부모들은 어떠한 형태의 부모의 권위와 징계이든지 무시당하는 일이 증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읍니다. 그것이 많은 비극을 초래하였읍니다. 예를 들면 ‘홍콩’에서 14세 된 한 소녀가 숙제를 하지 않고 ‘텔레비’ ‘프로’를 가지고 자기 동생과 싸우고 있었읍니다. 어머니는 즉시 ‘텔레비’를 껐읍니다. 징계를 받자 그 소녀는 “난 죽어버릴테야” 하고 소리치면서 5층 ‘아파트’ ‘발코니’로 달려 갔읍니다. 그 소녀는 거기에서 거리로 뛰어 내려 자살하였읍니다.

의문의 여지 없이 이 중국 소녀에게 살아계신 부모에 대한 더 큰 존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 소녀의 죽음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동양의 대도시 신문들은 수 세기 간의 조상 숭배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보도합니다. 그 사실은 부모에 대한 존경심의 결핍이 증가하고 있음을 잘 반영합니다.

중국 본토를 잠간 살펴 보십시오. 공산주의가 집권하자 그들은 조상 숭배를 배격하였읍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살아 계신 부모에게 존경심과 감사함을 나타낼 것도 격려하지 않았읍니다. 그와는 반대로 젊은이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쳐왔읍니다.

이 표어는 부모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약화시켰읍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읍니까? 최근에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문화 혁명 때 어떤 일이 일어 났읍니까? 젊은이들은 심지어 자신의 부모들까지도 아껴보지 않는 완전한 불법과 폭력을 자행하였읍니다. 이것이 얼마나 악화하였던지 중공은 최근에 새로운 표어를 내걸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려 하고 있읍니다. 그 새로운 표어란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라. 그러나 특히 나라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 철학과 전통의 약점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철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패임이 증명되며, 부족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실제로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불교 신자들과 유교 신자들, 신도교 신자들 및 특별한 종교 신앙이 없다고 주장하는 수 많은 사람들은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조상을 숭배합니다. 가정에는 제단이 있으며, 대부분의 제단을 밝은 주홍색으로 칠해 놓고, 그중 한 쪽에는 가족의 이름을 금색으로 써 놓습니다. 제단 앞에는 선향을 끊임 없이 피웁니다. 때때로 음식을 제단에 차려 놓기도 합니다. 가족 성원들이 그 앞에 절할 때, 축문을 읽습니다.

여러 세대를 걸쳐 세계 여러 지방에 있는 중국인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조상을 존중할 것을 가르쳐 왔읍니다. 어린이들이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될 때부터 그들은 조상을 숭배하는 제단 앞에서 절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린이가 이 의무를 태만히 하려는 경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즉시 그리고 엄한 훈계를 받습니다.

부모들은 그들이 죽으면 자녀들이 그들을 숭배해야만 “저승”에서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러한 가족적 의무를 자녀들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새겨 주려고 합니다. 또한 만일 살아있는 사람들이 숭배하지 않으면 조상들은 원수의 영들이 되어서 그들에게 벌을 내린다고도 믿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친 조상 숭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살아있는 부모에게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조상 숭배와 살아 계신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죽은 후에 자녀에게서 존경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혹은 살아있는 동안에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자녀들과 사랑에 찬 교제를 하기를 원하십니까?

성서적 방법—더 나은 방법

얼마 전에 한 중국인 어머니가 그러한 질문에 직면했었읍니다. 자기 아들들 가운데서 한 아들은 다른 아들들처럼 제사 지내는데 참여하지 않으므로 불평을 하게 되었읍니다. 이 아들은 자기가 죽어도 자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부모의 은공에 대하여 감사함을 나타내고 있었읍니다.

그 아들은 부모가 살 ‘아파트’를 사들였읍니다. 그는 또한 자기 월급 중에서 매달 생활비를 들여서 늙으신 부모가 벌지 않고도 생활하실 수 있게 하였읍니다. 이 아들에게는 부양해야 할 아내와 두 자녀들이 있지만 그렇게 하였읍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 어머니에게 지적해 드려서 그 아들이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 그의 은공에 대해 감사하고 있음을 이해시켜 드렸읍니다.

왜 이 아들은 이렇게 달랐읍니까? 왜 그는 부모가 살아 계신 동안 매우 효성스럽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부모를 봉양합니까? 그 이유는 이 젊은이가 가장 오래된 경전인 성서로부터 배운 것을 믿고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살아 계신 부모에게 감사할 것을 격려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명 5:16; 에베소 6:1, 2.

성서적 방법이 참으로 더 나은 방법이 아닙니까? 당신은 지금 살아있을 때에 당신의 지녀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더 원하지 않습니까? 그럴 것입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젯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거나 곡을 할 것을 생각하고 만족해 하는 것보다 당신이 살아있는 지금 감사함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이 젊은이는 자기 자녀들에게 제단에다 절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실상 그의 집에는 제단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자녀들을 “주[여호와]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건전한 성서의 충고를 따르고 있읍니다. (에베소 6:4) 자녀들은 부모의 사후에 존경하도록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에 부모를 순종하며 존경하고 감사하도록 교육받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원칙들을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부모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부모는 서로 행복과 복지에 이바지하며 아주 단란한 가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조상 숭배를 믿는다 할지라도, 당신의 자녀가 성서를 연구한다고 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읍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의 은공에 대하여 더 감사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더 나은 자녀, 더 존경심을 가진, 더 효도하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왜 조상들을 두려워하는가?

당신은 조상을 숭배하는 사람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조상을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조상이 타고 있는 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까? 참으로 조상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제사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읍니까? 실제로 조상이 살아 있는 사람을 해할 수 있읍니까? 조상 숭배를 믿는 한 가지 이유는 아마 사후에 “저승”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저승”이라는 것이 있읍니까?

성서에 의하면 없읍니다.

공자와 석가모니의 시대보다 400여년 전에 성서 필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지 않는다고 증명하였읍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은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하고 말했읍니다. (시 6:5) 성서 시편의 또 다른 필자는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여 이렇게 말했읍니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 146:4) 이러한 말씀에 부가하여 ‘솔로몬’ 왕은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강조하였읍니다.—전도 9:5.

이러한 고대 성서 기록들은 시험을 거쳐 참됨이 증명되었읍니다.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하여 그들이 말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진리입니다. 과학자들과 외과의들은 몸이 죽은 후에 의식을 가진 어떤 살아 있는 부분이 남는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였읍니다.

사후에 “저승”이 있다는 사상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상들은 아마도 해할 수 없으며 벌하지도 못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잠자고 있으며 무의식 상태이며 “저승”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조상 숭배를 믿는 부모를 가진 젊은이라면 당신이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자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부모를 도울 것입니까? 죽은 자는 잠자고 있으며 “저승”에서 살지 않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설명해 드리십시오. 또한 당신이 배우고 있는 것들은 당신이 더 나은 아들, 더 나은 딸이 되게 할 것임을 설명해 드리십시오. 부모가 생전에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이 사후에 단순한 의식(儀式)을 통하여 존경받는 것보다 훨씬 더 바랄만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그렇습니다. 성서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더 감사함을 나타낼 것을 격려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조상들의 장래

그러면 부모를 사별한 사람들로서 부모가 살아 계셨을 때 좀더 감사함을 나타내지 못한 것을 지금 후회하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성서에 따르면 그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읍니다.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한 진리를 알려 주는 그 동일한 기록들은 또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고대 충신자들은 이러한 희망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였읍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리라]”는 말로 보증하였읍니다. (이사야 26:19) 인간의 창조주께서도 그의 예언자 ‘다니엘’에게 그가 죽어 무덤에서 쉰 다음 다시 생명으로 회복될 것임을 보증하셨읍니다.—다니엘 12:13.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기 전에 이 지구에는 큰 변동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땅을 망하게 하는 모든 자를 이 땅에서 깨끗이 일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계시 11:18) 그 때는 지금 매우 가까왔읍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은 자를 생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요한 복음 5:28, 29에 있는 성서의 말씀이 실현될 것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부활로 나오리라.”

그 얼마나 넘치는 축복일 것입니까!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상 낙원에서 살게 될 즐거움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숭배하고 또 자녀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읍니까? 그 시간을 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데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읍니까? 그분만이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실 수 있읍니다. 그러면 부모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끝없이, 아니 영원히 서로 사랑과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28면 삽화]

동양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조상을 숭배한다. 그러나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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