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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 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문제
    깨어라!—1974 | 10월 8일
    • 가정 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문제

      당신이 아는 가정들은 화목한가? 부부가 상호 진정한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는가? 자녀는 품행이 좋으며 행복한가? 당신의 가정은 어떠한가?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가정도 있지만 많은 가정은 그렇지 않다. 많은 가정의 실태를 보면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모든 도시, 읍, 교외의 거의 어느 구석에서나 부부는 발길질을 하고, 팔꿈치로 밀고, 손찌검을 하고, 주먹질을 한다. 부유하고 교양있는 사람들도,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싸움을 하며, 맥주 깡통, 병, 칼에서, ‘프라이’팬, 가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흉기를 사용한다.”—1973년 10월 18일자.

      가장 끔찍한 폭행과 많은 사망이 이러한 가정 싸움에서 생긴다. 놀랍게도 미국에서 5명의 순직 경관 중 한 명은 부부 싸움 신고를 받고 달려가서 살해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가정 싸움은 집안에서 그친다. 그러나 그 피해는 극심하다. 그러므로 가정 문제는 정부의 관심사가 되었다. 미국 상원 분과 위원회 앞에서의 보고에 대하여 해설하면서 「비컨 저널」지는 “미국 가정은 동요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가? 다음의 이혼 통계를 살펴보라.

      결혼 유대의 파괴

      1962년에 미국에서 413,000건의 이혼이 있었다. 십년 뒤에 그 수는 두배 이상 증가하여 839,000건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 파탄은 다반사가 되고 있다.

      1973년 처음 9개월 동안에 1972년 같은 기간보다 이혼이 9‘퍼센트’ 증가하였다. 그러한 비율로 증가한다면 1974년에 2,000,000명의 미국인이 이혼할 것이다!

      현재 다섯쌍의 부부 중에서 두 쌍은 이혼한다. 그러나 이혼 건수가 결혼 건수의 절반을 넘는 주(州)도 많다! 1974년 연감(1974 World Almanac and Book of Facts)에 실린 1972년 통계는 다음과 같다.

      주 결혼 이혼

      알래스카 3,682 2,096

      아칸사스 24,949 13,762

      캘리포니아 173,563 111,162

      플로리다 81,322 51,688

      오레곤 18,824 12,435

      와싱턴 40,814 20,702

      이러한 엄청난 이혼률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선, 네명의 아동 중 한 명 꼴이 부모 중 단지 한쪽과만 산다. 십년 전보다 거의 두배이다. 그 영향은 광범위하고 비극적이다. ‘매사추세츠’ 주의 1학년 선생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아이들이 모두 함께 앉아 일을 하는 교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5년 전, 아니면 10년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아동들은 이전보다 훨씬 불안정한 경향이 있다. 선생은 아동들이 가정에서 직면해야 할 문제에 대하여 이해심이 깊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의 입장도 비슷하다. 「런던 데일리 메일」지는 “위기에 처한 가정 생활”이라는 제목 하에 이렇게 보도하였다.

      “1971년에 1968년의 두배인 110,000건의 이혼을 기록한 영국 내에서의 이 결혼 파탄의 범위는 이제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고 [야코부스] ‘도미니안’ 박사는 말하였다. 그것은 중대성에 있어서 ‘알코올’ 중독, 중대 범죄, 성병 및 성범죄의 대열에 끼고 있다.”—1973년 6월 18일자.

      ‘인도네시아’에서는 결혼의 거의 3분의 1이 이혼으로 끝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최근 1년 동안에 이혼 건수가 20‘퍼센트’ 증가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일부다처가 보통인데, 1970년에 단지 325,000건의 결혼이 있었던 것에 비하여 이혼은 700,000건이 있었다.

      통계는 일면만을 알려 준다

      많는 결혼 배우자는 단순히 가출을 한다. 이혼이라는 절차 마저 귀찮아 한다. 「뉴욕 타임즈」지는 미국에서의 이러한 실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집에서 도망하는 혹은 결혼 생활을 떠나는 아내들의 수가 지난 10년 동안에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실종되는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추적하는 형사 기관은 실종 아내 대 남편의 비율이 특히 동부의 대도시에서, 10년 전에는 약 1대 100이었는데 지금은 1대 3 이상이 되었다.” 1973년에는 비율이 거의 대등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소식통도 있다.

      수백만의 다른 부부는 함께 살지만 그들 상호관계는 참으로 빈약하다. 미국의 순회 판사 ‘마빈 제이. 스턴버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법원의 선언없이 신체적으로 이혼한 부부도 흔하다. 그들은 때로는 같은 집에서, 같은 침실에서 생활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그들의 감정과 행동과 행실은 그들이 격리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한 결혼 생활을 하는 배우자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감정적 성적 만족을 얻는다. 미국에서 5명의 남편 중 3명이, 그리고 아마 3명의 아내 중 1명이 혼외 정사를 갖는 것으로 추산된다. 상호 동의에 의한 간음 또한 보편화되었다. 약 8백만의 미국인들이 때때로 그러한 간음을 행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결혼 유대에 대한 존경심의 이러한 부족은 특히 청소년들에게 비극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곤경에 처한 청소년들

      성인들이 결혼을 우롱하였기 때문에 많은 청소년들은 도덕 표준을 전적으로 배척하게 되었다. “멋대로 하라” 혹은 “내일이면 늦으리”가 그들의 좌우명이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부모들과 대학교와 대중이 일반적으로 현재 혼외 성관계를 널리 인정하고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새로운 풍조를 막는 것이 무익하기나 한 것처럼 부도덕을 조용히 묵인하는 경향이 있다.”

      낙태 수술을 하는 수백만의 젊은 여성들은 이러한 부도덕 묵인의 확대되는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사생아 출산의 증가이다. 1970년에 ‘캘리포니아’ 주는 46,600건의 사생아 출산기록을 수립하였다. 1969년에 미국 전역에서 어머니가 된 18세 이하의 소녀가 200,000여명이었다.

      ‘스웨덴’에서는 5명의 출산아 중 한명이 사생아이다. ‘뉴질랜드’의 출산아 중 8분의 1이 사생아이며, ‘캐나다’에서는 10분지 1이 사생아이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2명의 아기 중 한명이 사생아로 태어난다. 「런던 데일리 메일」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십대 신부의 삼분의 일은 임신 중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이혼하지 않는 가정은 어떠한가? 우선 많은 부모는 자녀들을 별로 감독하지 않는다. 흔히 행실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고, 부모와 자녀가 각기 별도의 행동을 하기도 한다. 수백만의 가정은 절실히 도움을 요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시사하여 유명한 심리학자는 작년에 이렇게 논평하였다. “내가 매일 아침 방송을 하는 시간에 ‘뉴욕’의 WMCA 방송국에는 평균 5,000회의 전화가 쇄도한다. 대부분은 결혼 문제에 대하여 묻는 여자들의 전화이다.”

      전화 상담은 안해 본 사람일지라도 가정 문제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부부가 그리고 부모가 가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본 잡지의 다음 몇 기사에서 그러한 것을 논하고 있다.

      [3면 도표]

      미국의 이혼 건수 증가

      1960 - 393,000

      1965 - 479,000

      1970 - 715,000

      1972 - 839,000

      [4면 도표]

      사생아 대 출산아 비율

      스웨덴 1 대 5

      뉴질랜드 1 대 8

      캐나다 1 대 10

      오스트레일리아 1 대 12

  • 아내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깨어라!—1974 | 10월 8일
    • 아내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아내들은 흔히 절망적인 어조로 그러한 질문을 한다. 그들 부부의 문제가 그들에게는 해결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아내는 소수가 아니다. 오늘날 그러한 아내가 대다수인 것같다. 이것은 심리학자 ‘이즈리얼 차니’가 말한 “대부분의 결혼 생활의 거의 비참한 상태”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가정 문제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성공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결혼의 기원을 고려한다면 문제와 해결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된다.

      결혼의 기원

      많은 사람들은 결혼이 인간에게서 기원하였으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이 먼 옛날에 결혼을 생각해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오늘날의 비참한 가정 파탄의 근본 원인이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왜냐 하면, 그러한 생각은 결혼 문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충고를 배척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은 더 높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첫 남녀를 창조하셨고 생식력을 주셨으며 그들을 결혼시키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공적인 결혼 생활에 대한 교훈을 성서에 기록시키셨다. 이러한 교훈을 밀접히 따를 때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즐기게 된다.

      성서가 참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성서를 오랫 동안 가지고 있었지만 결혼 생활은 지금까지 실패하였다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지론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감내하려는 부부가 적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혼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무시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수백만의 불행한 부부가 성서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서를 읽는가? 아니, 그들의 생활에 성서 원칙을 적용하는가? 성서의 충고는 이미 많은 부부로 하여금 그들의 가정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도록 도와 주었다.

      만일 당신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한다면 적어도 가정 문제를 성서의 내용에 비추어 검토하는 것이 현명하다.

      성생활이 문제일 때

      흔히 성 생활이 부부 사이의 주요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것은 흔히 ‘매스컴’이 뒷받침하는 비현실적인 생각 때문이다. 인기있는 서적, 잡지 및 영화는 남녀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그 후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서적은 또한 성적 쾌락을 강조하여 흔히 현실 이상을 기대하게 한다.

      예를 들면, 한 젊은 아내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성 생활이 온 세상을 회전 당구기 같이 환하게 해 주는 어떤 황홀경이기를 바란 것같다. 그것으로도 무방하였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그것이 참으로 전부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사람의 지나친 관심은 자신이 성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남편들이 자기들을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여자들의 불평이다. 그러한 경우 아내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아내가 더 큰 만족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 성서는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가?

      성서에 있는 이러한 솔직한 권고에 유의하여 보라.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합의하기 전에는] 서로 몸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고린도 전 7:3, 5, 새번역.

      이러한 성서의 충고에 따라 배우자는 주로 누구를 기쁘게 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위에서 언급한 아내의 주된 관심과 같이 자신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배우자이다. 이 경우에 성서가 강조하는 원칙은 주는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배우자의 복지와 즐거움을 앞세우는 것이 적절하다. 이것은 성서의 이러한 원칙과 일치한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사랑은 ···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느니라].”—고린도 전 10:24; 13:4, 5.

      그러나, 남편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어떻게 아내의 만족을 증가시킬 수 있는가? 성관계의 즐거움은 다분히 정신과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성관계를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생각할 때, 흔히 부수적인 결과로, 성 관계를 더욱 즐기게 된다. 아내의 정신이 주로 자기의 감각에 있지 않을 때에 아내는 흔히 긴장을 풀게 된다. 그가 품었을지 모르는 노여움이 사라지며, 그 당연한 결과로 아내는 부부 행위에서 참으로 바라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지상에 산 가장 위대한 선생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주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만족시킨다고 지적하셨다. 그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원칙은 친밀한 부부 생활과 관련하여 참됨이 거듭 증명되었다.—사도 20:35.

      더우기, 성서의 충고를 따르면 남편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내가 만족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성서의 충고는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에게 비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감동을 주고 아내의 필요와 욕망에 더욱 사려깊도록 돕는데 무엇보다도 효과가 있다. 많은 부부가 그것을 경험하였다. 솔선하여 주는 사람은 같은 것을 받게 마련이다.—누가 6:38.

      그러므로 성서는 비이기심과 사랑을 가지고 결혼 의무를 다하도록 권고한다. 이것을 실천하도록 노력하여 보라. 그러면 마침내 결혼 생활에서 더 큰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남편에게 솔선력이 부족할 때

      20여년의 경험을 가진 결혼 상담자 ‘리베카 리스우드’ 박사는 결혼 생활상의 또 다른 문제를 지적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에게 찾아오는 많은 사람은 남편이 무력하고 결단력이 없다고 불평한다.”

      아마 당신도 이러한 불평을 할지 모른다. 당신의 남편은 당신이 기대하는 만큼 가족 책임을 지지 않을지 모른다.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 점에서도 성서는 도움이 된다. 성서를 보면, 남녀가 약간 다른 특성과 책임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결합이 상호 행복에 기여하도록 창조되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를 위하여 [보충으로, 신세]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세 2:18.

      그리하여, 두 사람이 조화되고 그들의 특성이 서로 균형잡히고 보충이 되도록 창조되었다. 각 사람은 상대방에 의하여 충족되는 필요를 가진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이처럼 여자는 남편의 조력자로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역할과 일치하게 성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 남편이 아내의 머리[니라].” (에베소 5:22, 23) 이것이 실용적이다. 왜냐 하면, 가족에 머리가 없을 때에는 보통 불화와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 남편은 머리 직분을 행사하지 않는다. 가족을 인도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 이유를 고려하여 보았는가? 당신 자신의 태도가 한 가지 원인이 될 수 있지 않는가?

      오늘날 여자들이 남자들을 공격하고 남자들과 경쟁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당신도 다른 아내들처럼 이러한 정신에 물들어 있는가? 예를 들어, ‘리스우드’ 박사는, 여자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않을지 모르나 여자들의 “공격 전술”이 흔히 가족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하였다.

      많은 남편들은 아내들이 공격할 때에 반감을 가진다. 그들의 반응은 ‘자기 주장대로 하고 싶으면 해 보라지’ 하는 식이 될 수 있다. 남편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집안을 관리할 의도가 당신에게 없을지 모르나 남편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남편이 가족을 인도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을 더욱 격려하여 가정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게 할 수 있지 않는가? 당신은 그의 제안이나 지도를 요청하는가? 당신은 당신이 그의 인도를 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가? 당신은 어떠한 면으로도 남편의 행동을 얕잡지 않는가? 미약하지만 그가 기꺼이 결정을 내리고 집안일을 인도할 때 당신은 이에 대하여 인식을 나타내는가? 아니면 그의 결정에 대하여 항의하는가?

      만일 당신이 결혼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을 참으로 이행하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의 남편은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족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기여할 것이다.

      의사소통이 막혀 있을 때

      아마 아내들의 가장 보편적인 불평 중 하나는 이와 같을 것이다. ‘나의 남편은 구애 시절에는 사려깊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고 또 집에 있다 해도 나에게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의사소통 문제가 당신의 가정의 복지를 위협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성서는 결혼 배우자들이 사물을 현실적으로 보도록 돕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서는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하고 성서는 지적한다. (야고보 3:2) 그러므로 부부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완전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돌이켜 생각해 보라. 결혼 전에 당신은 집안 식구와, 또는 학교 친구와 완전히 화목하였고 결코 말다툼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배우자와 완전한 관계를 즐길 것을 기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의견이나 표현의 차이가 문제를 일으킬지라도 놀라지 말라. 말다툼이나 의견 충돌이 ‘그가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라. 당신이 감정적으로 깊은 상처를 느낄지 모르나 주로 당신의 상한 감정만 생각하거나 보복할 방도를 생각하려 들지 말라. 그렇게 하면 문제가 확대되기만 할 것이다. 불화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라. 그 일을 즉시 하라. “사랑은 ···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는 성서의 충고를 기억하라.—고린도 전 13:4, 5.

      당신 자신의 행동을 분석하라. 당신도 어느 정도 잘못하지 않았는가? 예를 들면, 당신이 “아내도 남편을 경외하라[깊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신세]”는 성경의 훈계를 어느 면으로 청종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에베소 5:33) “깊은 존경심”을 가질 때 아내는 남편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존경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흔히 남편의 냉담의 원인이 된다.

      많은 남편은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의 잔소리에 지친다. (잠언 25:24; 27:15) 한 경우의 이혼한 남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침내 나와 나의 아내를 갈라놓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무슨 수가 있어도 자기가 옳다는 것 때문이었다 ··· 무슨 일이든 잘못되면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신은 남편에 대한 불경을 표시하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가?

      “깊은 존경심”은 또한 아내의 외관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당신은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가? 만일 당신이 결혼하기 전에 외모와 개인적인 위생에 지금 정도의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가 당신을 계속 방문하였을 것인가? 당신의 집은 어떠한가? 항상 산뜻하고 깨끗한가? 맛있는 식사가 준비되는가? 그가 귀가하면 당신은 진정한 애정으로 그를 환영하는가? 남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이 모든 문제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포함한다.

      흔히 듣는 불평 곧 ‘그는 더 이상 나에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불평에 대하여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남자들이 아내들에게 말하지 않는 첫째 가는 이유는 우리가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경우도 그러한가? 당신의 남편이 말을 할 때에 당신은 말을 가로 막거나 잡지를 뒤적이거나 어떤 다른 문제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는가? 그의 의견이나 감정에 관심을 표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깊은 존경심”을 그에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충고에 비추어 당신의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당신은 가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개선할 사항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교훈을 적용함으로써 불화했던 수많은 가정이 만족과 행복에 이르게 되었다.

      남편이 응하지 않을 때에

      아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계속 고통을 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지라도 그리스도인 아내에게는 상당한 만족이 있다. 성서에서 알리는 바와 같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베드로 전 2:20.

      그러한 고통을 받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본을 보이셨다. 성서 기록이 계속 알려 주는 바와 같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니라] ···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베드로 전 2:23-3:1.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을지 모른다. 예수께서 순종적으로 박해를 견딘 것이 쉽지 않은 것과 같다. 하지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혼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고린도 전 7:13)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내는 자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큰 만족감으로 의로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충실함을 기억하시고 그의 의로운 새 제도에서 상을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베드로 후 3:13; 계시 21:3, 4.

      가정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 완전한 해결을 위하여는 남편의 협조가 필요하다.

  • 남편이 할 수 있는 일
    깨어라!—1974 | 10월 8일
    • 남편이 할 수 있는 일

      결혼 생활의 성공은 부부 쌍방의 노력에 달려 있다. 그러나 남편은 가족의 상태에 대하여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의 지위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알려 준다.—에베소 5:23.

      남편은 자기 아내가 주로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할지라도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머리의 표시가 아닌가?

      어떤 사람은 ‘나의 아내를 다루는 것은 다르다. 나의 아내와 화평하게 지내는 것보다 나의 회사 직원 백명을 다루는 것이 더 쉽다’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그 말도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일반적으로, 가족 문제를 다루는 것이 남자들에게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 때문에 가족의 창조주께서는 아내를 어떻게 적절히 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많은 충고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창조하셨으므로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이 아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가장 잘 아신다.

      따뜻한 부부애의 비결

      창조주께서는 결혼 생활에서 따뜻한 부부애를 즐기도록 목적하셨으며, 따라서 여자를 남자의 “보충으로” 설계하셨다. 그러므로 부부는 단순히 같은 집에서 사는 친지가 아니라 “한 몸”이 되어야 하였다. (창세 2:18, 24) 그들 각자의 특성이 적절히 균형잡히고 보충되어 참으로 즐거운 관계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따뜻한 부부애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남편들은 자기들의 아내가 너무 냉담하여 이성 반려자로서 부적합하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가장으로서 분명히 남편은 문제를 지성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느니라].” (에베소 5:28, 29) 이 충고는 얼마나 중요한가? 여자들은 참으로 남편들의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

      참으로 그렇다. 결혼 상담가들은 흔히 이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데이비드 류벤’ 박사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아내는 특히 부드러움과 이해심과 위안을 주는 특별한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주요한 진리이다. 즉 아내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따뜻한 부부애의 비결은 남편들이 이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성서는 남편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라].”—에베소 5:33.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

      그러나 남자들은 흔히 아내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아내들을 물질적으로 부양하는 것이 사랑의 충분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러나 애정을 표현하지 않을 때에 아내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한 아내의 다음과 같은 편지는 몇가지 교훈을 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저의 문제는 이러합니다. 나는 ··· 약간의 달콤한 말, 칭찬, 내가 요리하는 동안 허리를 감아 주는 것, 혹은 그의 무릎에 앉을 수 있는 기회 ··· 를 갈망합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물질을 한번의 애정이 깃든 포옹과 맞바꾸겠읍니다.”

      그렇다. 아내들은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사랑을 받을 때 아름다워지며, 더욱 만족감을 가지게 되고 더욱 매력적이 된다. 그들은 사랑을 이런 욕구를 느끼도록 창조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에게 아내들을 사랑하라고 권고하신다. 이러한 충고를 청종하지 않을 때에 비극적인 결과가 왔다. 사실 그것이 오늘날 허다한 결혼 생활에서 발견되는 불행의 원인이다. 왜 그런가?

      왜냐 하면, 남편의 부드러운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하는 아내는 불안정감을 느끼고 자기의 여성다움에 대하여 자신을 잃기 때문이다. 남편의 태만에 대하여 똑같이 해 주겠다는 잠재적 욕망을 포함하여 남편에 대한 원한이 자랄 수 있다. 그러한 감정을 가진 아내가 따뜻하고 친밀한 이성 반려 자가 될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사랑을 표현하는 일

      흔히 남편들은 아내들을 참으로 사랑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를 어려워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성서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성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골로새 3:12, 13.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아내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를 그러한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거칠고 강요적인 남자가 아니라 친절하고 사려깊은 남자에게 감응하도록 여자를 설계하셨다는 것을 남편이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내에게 성관계는 불만족스럽고 불쾌하기까지 할 수 있다.

      창조주께서는 남편들이 많은 그릇된 생각에 접하게 되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교훈이 필요함을 아셨다. 그러기 때문에 남편이 부드럽고 사려깊어야 함을 이렇게 격려하셨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약한 그릇[으로 알아] ··· 귀히 여기라.”—베드로 전 3:7.

      성 관계에 있어서 남편이 이러한 교훈을 청종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는가에 대한 지식과 일치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여자들은 보통 신체적으로 남자들 같이 강하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남자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민감하고 감상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이 아내를 더 약한 그릇으로 귀히 여기어, 아내의 구성과 한계와 변화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아내가 매우 피곤하여 성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남편은 강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자기의 남자다운 머리 직분을 증명하는 것이며, 나중으로 미루자는 아내의 요구에 동의하는 것은 나약한 행동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아내의 감정을 귀히 여기는 것 즉 존중하는 것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힘의 표시이다. 자제력을 행사하고 아내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 것은 남자다움을 요한다.

      또한 남편은 성교 전과 도중에 지식과 일치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편은 아내가 성적으로 즉시 남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의 성적인 반응은 남자보다 더디다.

      그러므로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남편은 이 점을 고려할 것이다. 그는 부드럽고 참을성있게 아내를 도와 자기를 받아들이게 할 것이며, 그렇게 할 때 부부 행위는 두 사람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줄 수 있다.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그러한 비이기적인 사랑을 받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남편에 대하여 그 결과 느끼는 따뜻한 사랑은 결혼 생활의 다른 면에서 생길 수 있는 알력을 덮어나갈 것이다.

      사실 성은 결혼 생활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적용할 필요가 있는 적은 일부에 불과하다. 남편은 다른 때에도 아내를 지식에 따라 귀히 여겨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그는 아내의 생리적 순환이 때때로 아내에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불리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아내는 평소에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할지 모른다. 남편은 이점을 고려하고 아내가 날카로운 말을 하거나 성급한 행동을 할지라도 지나치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계속 아내를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성공적인 결혼 생활은 협동과 대화를 요한다. 남편이 가족의 머리이지만 결정을 하기 전에 아내의 의견과 호불호를 고려해야 할 것이며, 중요한 일이 아닐 때에는 아내에게 우선권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이 아내를 귀히 여기는 방법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조언을 청종할 때, 결혼생활에는 평화와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배우자가 그들의 결혼 생활의 여러 면에서 협동하지 않는다면 성 관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한 아내는 이에 대하여 매우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남자들은 아내가 ‘냉담’하다고 불평합니다. 나의 경우를 말해 볼까요? ··· 나는 나의 일에 대한 의사소통에 [남편을] 이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읍니다. ··· 그리고 그는 자기 일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우리 사이의 의사소통을 시작하려고 많은 질문을 하여도 그렇습니다. ···

      “일요일 밤은 그이가 ‘휴식’하는 시간이므로 우리는 어느 곳에도 가지 않습니다. 나는 요리와 청소로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9:30에 잠자리에 듭니다. 그는 늦도록 영화 구경을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그는 다정한 침실의 반려자를 찾습니다.

      “일주일 내내 말을 걸어오지 않는 낮선 사람을 열렬히 받아줄 기혼 여성이 몇이나 될까요?”

      사실, 남편들은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의 결혼 생활에 따뜻한 부부애가 없다면 당신에게 그에 대한 책임이 상당히 있지 않을까?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시정하려면 겸손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당신과 당신의 아내는 분명히 더 큰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 당신의 가정의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일지 모른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원하는 것에는 만족한 이성 반려자 이상의 것이 있다.

      다른 문제를 해결함

      가정을 돌보며 맛있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결혼 생활에서 절대 필요하다. 한 남편은 이렇게 불평하였다. “아마 다른 남편들의 생각은 나와 다르겠지만, 일이야 어찌 되었든 늘어지게 자는 아내보다는 좀 더 깨끗한 집과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는 자녀들을 택하겠다.”

      당신의 아내도 성서에 묘사된 “현숙한 아내”에 상당히 미달할지 모른다. (잠언 31:10-31)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어떤 남편들은 집안을 잘 돌보고 요리를 잘하는 다른 아내들과 비교하여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내들을 화나게 할 뿐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집안을 돌보는 면에서 그리고 요리 능력에 있어서 개선하기를 원하도록 호소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집안이 어질러져 있거나 가족이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게 된다는 사실에 재치있게 주의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녀가 있다면, 그들이 지금 부모의 좋지 않은 본을 보고 후에 불리한 영향을 발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친절을 가지고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당신의 아내를 개선시켜 주는 강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의 아내가 집안 일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면 그를 격려하고 도우라. 아내가 하는 수고에 대하여 당신이 참으로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에게 알리라. 조금이라도 발전을 보이면 진심으로 칭찬하라. 그리고 당신이 쉬는 날이나 저녁에 설겆이를 거들고 방청소를 도우라. 이것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성서의 조언을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확실히 보람이 있을 것이다.

      남편은 또한 지나치게 까다로와서는 안되며 이치적이어야 한다. 정돈을 깨끗이 하지 않는다고 아내에게 자주 잔소리를 한 어느 남편이, 자기 아내가 잠깐 병원에 있는 동안 휴가를 하고 집안을 돌보았다. 며칠 동안 일을 하고 자녀를 돌보고 나서 처음으로 집안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까다로웠던 점에 대하여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그러므로 이해심을 보이고 칭찬을 아끼지 말라. 강요하거나 비평적이 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개선을 위한 제안을 할 때에 아내는 잘 받아들일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아내 사이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든지 간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함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다.—에베소 5:28.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의 주요한 문제는 자녀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 자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깨어라!—1974 | 10월 8일
    • 자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수백만의 부모가 그러한 질문을 한다. 그들은 자녀들의 행실에 대하여 염려한다. 예를 들면, 「매콜」지가 인용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 십대층의 52‘퍼센트’는 결혼 전에 성 관계를” 가진다.

      임신을 막기 위하여 어떤 부모는 딸에게 피임약을 주고 있다. 아마 당신은 그러한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무엇인가?

      “말과 행동으로 많은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은 그들이 단호하지 못한 태도로 거의 마비되어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고 「뉴욕 타임즈」지의 한 논설 위원은 말하였다.

      왜 단호하지 못한가?

      주로, 많은 세상 권위자들이 제시하는 충고 때문이다. 근년에 이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자녀가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 전에는 그에게 그 일을 시켜서는 안된다.” “효과적인 징계 계획에 체형이 포함되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이전의 징계 방법이 새로운 방법으로 대치되었다.

      도덕 행실에 대한 태도 역시 달라졌다. 예를 들면, 1973년 12월호 「부모의 잡지」는 청소년들의 혼전 성교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 동지는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의 교목 ‘딘 윌리암 퍼엄’이 자기 딸에게 보낸 편지를 부모에게 추천하였다. 그 목사는 딸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나는 네가 결혼식보다는 결혼 약속의 테두리 안에서 성 관계를 갖도록 제안한다. 결혼 첫날 밤에 두 연인 사이에 신체적인 친교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고지식한 생각이다. ···

      “소위 ‘신도덕’의 가치는 책임져야 할 일에 대하여 본인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

      “너는 우리가 제안하는 한계를 벗어나는 환경 하에서 성 관계를 갖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일 네가 그렇게 결정한다면 ··· 그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우리는 바란다. ··· 사회가 (흔히 위선적으로) 요구하는 일 혹은 네 교회나 네 부모가 제안한 것과 반대로 행동하였다고 수치스러워하지 말아라.”

      저명한 목사가 그러한 충고를 할 때 어떠한 결과가 있는가? 많은 부모는 그 충고를 따르며, 어떤 사람들은 자녀를 위하여 음행하기에 편리한 환경을 조성해 주기까지 한다.

      그것의 나쁜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성병, 임신의 우려, 사생아, 미혼모, 비탄, 은밀한 낙태, 양심의 가책 등이 그 결과이다. 청소년들의 자살이 급증하였고 감정적 혼란이 또한 증가하고 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 문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성공적인 충고의 근원

      성서의 충고를 적용해야 한다. 성서는 혼전 성교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취한다. “음란[음행, 신세]을 버리”라고 성서는 말한다. “음행[은] ··· 그 이름조차도 여러분의 입에 담지 마시오.”—데살로니가 전 4:3; 에베소 5:3, 새번역.

      어떤 부모는, ‘혼전 성교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택하는 생활 방식이다’ 하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타당한 이유인가?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한다면 이러한 행동도 묵인해야 하는가? 이치적인 사람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그릇된 행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확고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자녀에게 이치적인 설명을 하라

      그러나 단순히 자녀에게 ‘나는 음행이 그릇된 행동이므로 네가 음행을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에게 혼전 성교가 그릇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흔히 충분치 않다. 자녀에게는 또한 혼전 성교에 대한 하나님의 금지 조항을 지켜야 할 이유와 그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의 유익을 이해하도록 도와 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수정된 하나의 세포가 분열되고 사전 계획에 따라 증가되어 인체가 되는 참으로 기적적인 생식 과정을 자녀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러한 놀라운 생식 과정을 설계하신 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식 능력을 인간들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신다고 생각지 않니?’ (시 139:13-17) 혹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에게서 생활의 즐거움을 빼앗는 법을 만드실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분의 율법에 순종할 때 우리의 행복이 증진되지 않겠니?’

      그러한 질문은 당신의 자녀가 생식 기관의 사용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도울 수 있다. 당신의 자녀의 견해를 환영하라. 만일 자녀의 견해가 당신의 기대에 어긋날지라도 화내지 말라. 자녀가 말을 할 때마다 심한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한다면, 그는 단순히 잠잠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을 것이며, 그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방적이 되고 솔직하라. 아마 당신도 한때 비슷한 견해를 가졌거나 같은 행동을 하였을지 모른다. 때때로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유익하다. 당신의 자녀의 세대가 성서에 있는 의로운 원칙에서 멀리 이탈하였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되 그의 세대에 부도덕한 행실이 현명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노력하라.

      아마 당신은 성적 부도덕으로 인한 사생아 출산, 성병 혹은 기타 불행의 구체적인 예(우리 주위에 많은 슬픈 경우가 있다)를 자녀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신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응한 사람들이 즐기는 유익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녀는 성서의 내용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지침과 징계

      그러나 자녀에게는 말 이상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성서의 요구 조건에 순응하도록 돕는 명확한 지침이 필요하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지침을 범할 때에 사랑으로 징계받을 필요가 있다.

      일반의 생각과는 반대로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부모가 그들의 활동에 이치적인 제한을 둘 때 그것을 감사한다. 그렇게 하면 자녀는 자기들이 머물러야 할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안전감을 느낀다. 어떤 자녀는 불평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녀의 복지에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는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할 줄 알게 된다.

      반면에, 자녀가 멋대로 행동하도록 방임하는 부모는 흔히 실망을 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자녀는 후에 부모에게 항의할지 모른다. 여기 한 소녀의 예가 있다. 그는 마침내 임신을 고백하고 나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왜 나를 말리지 않았지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지미’ 부모가 집에 없을 때에 내가 ‘지미’네 집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부모님이 나의 행동에 도무지 무관심했어요.”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가 그릇된 길로 갈 때에 그들을 징계함으로 자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낼 필요가 있다. 영감받은 성서가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15.

      징계는 꾸중 이상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왜냐 하면, 성서에서 알려 주듯이, 사람은 “말로만 하고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하기 때문이다. (잠언 29: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격려한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무덤]에서 구원하리라.”—잠언 23:13, 14.

      자녀의 생명 자체가 여기에 좌우된다! 만일 그가 그릇된 길을 가도록 방임된다면 그는 불행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언 13:24.

      그렇다. 자녀에게 매를 잘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자녀를 징계하려면 부모가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상의 권위자들이 징계에 관한 하나님의 충고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가정 생활에 불행이 초래되었다.—잠언 29:15.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자녀에게 이야기하고 지침을 세워 주고 징계를 할지라도, 부모가 또 다른 중요한 면을 무시한다면 그 모든 것이 비효과적이 될 수 있다.

      적절한 본이 절대 필요하다

      부모는 또한 좋은 본을 세울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자녀는 말보다 행동을 더 잘 따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과 행동에 모순이 있을 때에는 자녀가 그것을 빨리 알아차린다. 사실 그들이 성도덕을 공공연히 조롱하는 것은 위선에 대한 반항이라고 한다. 정신병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들이 아는 허다한 성인들이 간음을 행하면서도 경건한 말을 하고 있다.”

      성적 행실 외의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예를 들면, 자녀들은 또한 마약과 관련하여서도 부모들의 위선에 반항하고 있다. ‘뉴욕’ 시 ‘벨류’ 병원 정신과 과장 ‘로버트 이. 고울드’ 박사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젊은이들은 부모와 겨루고 있다. 부모가 술을 마시지 않고 흡연을 하지 않는 가정에서 잠을 자기 위하여 ‘바르비투르산’염을 사용하고 하루를 끝내기 위하여 진정제로 ‘아스피린’이 아니라 기분을 전환시키는 마약을 사용하는 예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의 자녀가 존귀하고 품위있는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면, 당신 자신이 그러한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의 본이 좋지 않다면 당신의 모든 좋은 말은 아무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당신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이라

      아마 자녀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신이 그들을 사랑함을 보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주된 방법은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징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참으로 서로를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하나님을 숭배하고, 함께 놀고, 밤에 잠잘 준비를 할 때에—이 모든 경우에 당신의 자녀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부모는 바로 이 점을 소홀히 하고 있다. 저명한 연예가 ‘앨런 킹’은 자녀가 어렸을 때에 여행을 많이 하였는데, 그는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보통 아버지들은 나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직장에 출퇴근하고 사무실에서 고된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 대하여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텔레비전’을 틀고 다음에 잠자리에 든다. 그들도 여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수백명의 사원이 있는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남자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매사를 처리할줄 알고 사업계에서 처벌하고 포상할줄 안다. 그러나, 그들이 경영하는 최대의 기업은 그들의 가족이며 이 기업에서 그들은 실패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은 이러하다.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니라.” (신명 6:6, 7) 이렇게 하기 위하여 부모는 자녀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또한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교훈의 “이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먼저 “이 말씀”을 배워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충고를 적용하는 것은 성공적인 가정 생활의 관건이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 생활을 세워나가는 데 대한 성서의 내용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권위자들은 확실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충고를 버렸으며 대다수의 인류가 그렇게 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끔직한 가정 파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의 마련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배우도록 돕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이러한 교훈을 베푼다. 여호와의 증인의 자격있는 전도인이 행복한 가정 생활을 세워가는 데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당신과 더 자세히 논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한 혜택을 받으려면 본 잡지의 발행자에게 편지하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접촉하면 된다.

  • 한 가족이 재연합하다
    깨어라!—1974 | 10월 8일
    • 한 가족이 재연합하다

      성서는 노르웨이의 한 여인이 경험한 바와 같이 사람들의 생활에 건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여자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토론을 한 결과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계속 동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여자가 도덕 문제에 대해 새로 배운 성서적 견해를 버리기를 거절하자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버리고 선원 생활을 떠났다. 수주 후에 그 여자의 전 남편이 아이들을 보러 왔다. 그 여자는 그를 집으로 초대하여 그동안 있었던 일과 지금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날 저녁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서 집회가 있었다. 그 여자는 자동차가 없었으므로 전 남편에게 자기와 자녀들을 그곳에 실어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태워다 주었다. 그는 회관에서 들은 연설에 너무도 감동하여 가족을 데리고 계속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또한 그의 전 아내가 성서와 일치하게 생활함으로써 훌륭히 변화한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 여자는 담배를 끊었고 보다 차분하고 균형잡힌 사람이 되었다. 그 여자와 아이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그는 그러한 것을 보고나서 전 아내와 다시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제 전 가족이 연합하여 성서 원칙에 따라 생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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